어느 롤플레잉 게임에 나온 슬링

슬링을 설명할 때 첫머리에 나오는 문구는 주로 '최초의 발사 무기'라는 수식어입니다. 물론 슬링은 발사한다기보다 던지는 행위입니다만, 도구를 사용해 투척을 한다는 개념 때문에 최초의 원거리 무기라는 평가를 받지요. 고대에는 전장에서도 큰 피해를 입힐 정도로 위력이 뛰어났으며 중세 이후에도 슬링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갑주와 활 등의 무기가 발달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여기에서 갈라져 나온 새총(슬링샷)이 있어서 그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여하튼 인지도는 없어도 이리저리 흥미로운 물건입죠.

하지만 '최초'라는 단어를 붙이고 다니는 물건답게 너무 조잡하고 원시적으로 보이는 게 문제인가 봅니다. 판타지에서 활은 용사의 무기로도 널리 등장하고 그 밖의 다양한 병사들에게도 지급을 하지만, 슬링이 그런 대접을 받는 건 못 봤습니다. 성서에서 다윗은 슬링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다고 하지만, 판타지에서 슬링이 멋지게 나온 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네요. 하긴 잘생긴 영웅이 등장해 악마를 향해 '정의의 일격을 받아라!' 하면서 슬링을 빙빙 돌리는 건… 음, 좀 우습게 보이기도 하겠습니다. <반지전쟁>에서 레골라스가 활이 아닌 슬링을 썼다면 그렇게 멋있게 보이지는 않았을 거예요.

물론 온갖 갑주가 발달한 판타지 세계에서 슬링 따위는 우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멋이 있다면 성능이야 용서가 되는 법. 만약 슬링이 원시적이기는 해도 뭔가 로망이 있고 폼이 나는 무기였다면 판타지의 주역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마법을 부여한다든가 전설의 물건이라든가 방법은 많습니다. 투창 같은 건 그런 식으로 쓰이는 일도 가끔 있잖아요. 던지면 무조건 명중한다거나 주인에게 되돌아온다거나…. 하지만 투석구에는 그런 게 없지요.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순전히 롤플레잉 게임에서 좋아하는 클래스가 잘 사용하는 무기가 슬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슬링은 원시적인 무기라며 쳐다보지도 않았을지 몰라요. 예전에는 나름대로 중요하게 쓰였는데 판타지에서는 멋이 안 난다고 활에 밀리다니 슬링 입장에서는 참 섭섭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