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양산형 판타지가 만들어낸 잘못된 기사상을 바로잡기 위해 나타난(응?)
rjwl1003입니다.
보통 판타지에서 기사라 하면 검을 무지하게 잘쓰며 등등
지나치게 미화되어있는데,
지금부터 기사의 사용용도와 기사의 일반적인 무장
그리고 기사를 막기위해 개발된 얼마전에 논란이 있엇던 노(석궁)와 파이크에 대해서
짤막한 의견하나 올려볼까 합니다.

중세유럽에서의 전투의 시작은 보통 기사들의 돌격으로 시작되다시피하였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장창을 세워 기사들의 돌격을 저지하는 전략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마갑과 플레이트메일의 출현에 장창을 세워논 것 정도로는 기사들의 돌격을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노와 파이크가 개발되었는데 그이야기는 나중에 가서 계속하도록 하고
기사들의 돌격은 주로 란스를 들고 무게를 이용하여 적군의 장창밭으로 향하여 적진 한가운데로 그대로 뚫고 들어가 란스는 일단 제껴두고 각자소지한 무기로 적군들을 쓰러트리는 동안 기사들을 뒤따라온 병사들이 전장을 정리하는 방식이 그 당시의 기본적인 전술이었습니다.
기사들의 무장에 대해 살펴보자면 기사들이 쓰는 대표적인 무기로 란스가 있는데 란스라 함은 쐐기꼴형태의 창으로서 이런 형태를 갖춘이유로는 충돌시 창을 떨어트리지 않게 되고 기사가 달려온 그 무게를 가장 효과적으로 한점에 실을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주로 적진으로 돌격해들어가는 기사들이 자주 쓰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사들의 또 다른 무기는 바로 검입니다.
기사들이 선호하는 검은 주로 바스타드소드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바스타드소드는 베기(베기라고 해봤자 둔기로 내려치는 것보다 약간 위력적인 정도입니다.)에 적합한 롱소드와 찌르기에 적합한 숏소드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스타드소드의 주사용법은 검으로 상대의 갑옷으로 내려쳐서 부스러뜨린뒤 파손된 갑옷틈으로 검을 찔러넣어 죽이는 방법으로 썼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도 철퇴류와 도끼류가 쓰였다고합니다.
기사들의 방어구쪽도 살펴보면 기사계급의 발달에는 확실히 플레이트메일과 마갑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고 할 수있습니다.
하지만 기사하면 떠올리는 풀플레이트메일은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않았고, 주로 몸통과 검을 휘두르는데 쓰는 관절부위
(주로 어깨나 무릎 정강이등등)만을 플레이트메일로 보호하고 그 이외의 부위는 링메일이나 체인메일로 방어했다고 합니다.(참고로 말하자면 풀플레이트메일은 전쟁에서 큰공을 세운 지휘관이나 기사들에게 왕이나 영주가 하사했으며 명문기사가문의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이 갑옷을 입고 싸우는 방법,즉 몸에 익도록 배웠다고 합니다. 다른 면으로 보자면 웬만한 기사들은 갖출 엄두도 못낼만큼 고가의 물건이었다는 사실!)
플레이트메일의 가장 큰 특징은 착용자의 체격보다 약간 큰 사이즈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만약에 전투중에 화살이 뚫고 들어오거나 기사들끼리 충돌해서 찌그러져도 착용자와 갑옷의 사이에 공간이 있어서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플레이트메일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 엄청난 무게(통짜 철이니...)에 있었는데, 이는 돌격시에는 무게를 더해주어 결과적으로 충돌에너지를 크게해주어 돌파력을 높이는데 한몫 했으나 단점이라 함은 바로 말에서 떨어졌을 때입니다.
낙마한 기사는 왜이리도 초라할까요?
낙마시에는 그 무게로 갈비뼈나 팔다리가 부러져나가는 것이 예사였으며(공간의 중요성!), 무엇보다도 혼자 일어나기가 무척!힘들기 때문에 낙마시에는 반 죽음 목숨이라는게 플레이트메일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오죽하면 혼자서 말에 타지 못해 시종을 데리고 다니겠습니까?
기사가 가진 방어구중에서 방패를제외하고 또다른 중요한 방어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갑!
기사들이 장창밭사이를 뚫고 들어갈수있는 것도 다 마갑덕분이었습니다.
기사의 방어구가 아무리 좋다 한들 말이 죽어서 낙마하면 반죽은 목숨이거늘...
마갑의 중요성은 말만을 보호하자고 한것이 아니라 등에 올라탄 기사와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해서도 마깁이 개발되기도 했답니다.
이처럼 중무장한기사가 적진 한가운데로 뚫고 들어가 헤집어 놓으면 전쟁에서 거의 승리하던 시절이 바로 중세시대였습니다.
자연히 기사들을 막는게 수비측에서는 중요한 전술이 되었죠.
이 때쯤 등장한 것이 바로 파이크!
파이크는 기존창보다 두세배(5~8미터)정도 긴 창으로서 이 창을 들고 밀집대형을 이루면 제아무리 중무장한 기사라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무기이며 기사들에게 공포의 상징이 됨과 동시에 기사계급을 몰락을 불러올뻔했으나...
아쉽게도 파이크란 병기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제대로 운용가능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기사들이 바보도 아니고 언제나 정면으로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니 이에 대한 신속한 대응을 하기 위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5~8미터나 되는 창을 적게는 수백명에서 수천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쉬운일만은 아닙니다.
고로 많은 훈련이 필요하고 그리하여 상비군이 필요한데,오호 애재라!
이 상비군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고 이 문제점은 파이크의 장점을 가리기에 충분했기에 그 실용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운용한 나라가 스위스(맞나요?)정도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기사들이 돌격하는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한것은 바로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전쟁 때부터였습니다.
여기서 잠시 100년전쟁이라 함은 당시 왕과 왕비문제때문에 골치를 썩던 영국이 왕족혈통과 왕비감을 찾아 프랑스등 각나라에서 왕족의 피가 섞인 사람들을 모셔갓고, 이사람들이 자기가 살던 나라의 땅을 그대로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특히 프랑스에 가지고 있던 땅들이 많았는데 노르망디지방과 남부프랑스등을 합하여 당시 영국왕실에서 보유하고 있던 땅은 프랑스본토보다도 넓은 기현상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프랑스가 영구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이것이 기나긴 100년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예나 지금이나 땅가지고..쯔쯧)
프랑스의 주전력은 주로 기사들을 앞세운 돌격이었는데, 영국은 육군이 그리 발달하지 못한 나라여서(섬나라니까) 기사들을 이용한 돌격전력을 쓰기에는 기사의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 초기에 프랑스는 영국에 굉장히 많이 밀렸었는데, 그이뉴는 바로 영국이 보유하고있던 석궁때문이었습니다.
지난 글들 중에서 보면 석궁은 오랜훈련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의 쓰이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달랐습니다.
영국이 자신있게 석궁을 꺼내들고 온 이유는, 석구이 처음 발명되었을 당시 대부분의 카톨릭국가들은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석궁의 사용을 금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 인구의 대부분이 성공회교도인 영국은 오히려 석궁의 사용을 장려하였고, 다른 문화생활들은 견제하는대신 집집마다 비치해두고 틈날때마다 연습을 하라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려했다고 합니다.
오랜훈련시간의 문제는 당시 영국으로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거지요...헐헐헐
게다가 카톨릭국가였던 프랑스는 석궁의 사용을 금했기 때문에 석궁의 강함과 약점조차 모르고 있었기에 돌격했다 석궁에 놀라 후퇴했다 하는 사이에 기사들은 죽어나갔습니다.
결국 기사계급의 몰락은 가져온건 석궁과 뒤이어 개발된 총포에 의해서였습니다.(마치 조총과 여러 화약무기들이 널리 전파된뒤에 부시계급이 몰락한 일본과도 비슷하군요.)
여담으로 프랑스의 멸망의 위기에 처해있다가 잔다르크의 활약으로 대부분의 영토를 찾아 다시 재기하게됩니다.
여기 까지 쓰느라 힘들었습니다.
지금 석궁을 이용한 전투의 가상시나리오도 쓰고 있는데 수정이 끝나자마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악플은 사절하고 지적의 리플은 환영합니다.

중세전쟁을 좋아하는 rjwl1003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