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에서 황량한 벌판을 올라가다 바위 뒤에서 즈바트(코볼트 수준의 저랩 몬스터)가 공격해 왔습니다. 당연히 대응, 언덕을 오르니 그들의 마을이 있더군요. 떼거지들 신나게 평정하고 있었을때 한녀석이 죽어가며

"너희는 나빠! 우린 아무짓도 안했는데 너희는 우릴 죽인다! 우르사가 너힐 혼낼꺼야, 우르사는 착하니까 우릴 도와!"
순간 머리가 띵~! 지금 내가 뭔짓을 하고 있지? 철렁했습니다. 곰탱이 녀석도 어쩔수 없이 죽였지만...

'짜샤! 입구에 들어설때 니들이 먼저 공격했자나!!!'
찜찜한 맘에 궁시렁 거리긴 했지만, 사실 인간들에게 공격받는 그들로선 중무장하고 마을 들어오는 인간파티를 선제공격하는거 외엔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 겁니다. 몽땅다 죽여버리고 시체가 즐비한, 변변히 건질것도 없는 움막 수준의 초라한 마을을 둘러보며 '이딴걸 지키려고 전멸을 택할수 밖에 없더냐...'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후 다시 플레이할때는 투명상태로 마을을 지나치거나 아니면 멀리서 파이어볼로 폭파시켰습니다.
(깨끗하게, 장렬히, 후회없이 죽게 해주마~  ㅡ_ㅡ;...)

그냥 내비둔다고 해도 옆의 인간 마을과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피해를 줄테고, 어차피 다른 파티가 전멸시켜 버릴테니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습니다. 인간사회에 섞여 살면 노리계나 노예가 될 가능성이 크고요. 죽어가며 절규하던 그녀석이 그 앙증맞은 몸집으로 '노예로 살바엔 죽음을!' 외치며 달려드는 장면 떠올려보니 꽤 웃겼는데 웃기지도 않더라구요.(???)

몬스터도 엄연히 하나의 '생명'이고 '존제'라는걸 인식하게 했던 최초의 대사였습니다. 감탄으로 시작했던 던전시즈도 화려한 그래픽이 눈에 익은뒤부턴 그저 평화로운(?) 던전에 쳐들어가(?) 사이좋게(?) 잘지내는(?) 몬스터들을 학살한다는 기분만 들더군요. 게임의 즐거움을 망치는 짓이긴 해도, 왠지 그냥 떨쳐버리기 힘든 뭔가가 있었습니다.

환타지나 게임상에선 몬스터가 살고 있는 영역을 인간이 침범해 충돌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간의 탐욕에 이용당하거나 마법사에 의해 만들어져 버림당해 떠돌아 다니는 경우도 적지않고... 상대가 인간전멸 목적이 아닌 이상은, 그들도 그들의 영역을 소유할 자격이 있고 영토를 위해 싸울 권리가 당연히 존제할 겁니다.
(그렇다고 안죽일수도 없죠. 쾌스트 완료하고 엔딩보려면 죽여야 될때 죽일수 밖에 없습니다. ㅡ_ㅡ;...)

오크가 죽어가며 내지르는 꿰우에엑~ 소리가 '어머니이이~'일 수도 있습니다. 아, 정말 그렇다면 기분 진짜 더러워 지겠죠. 비폭력 주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애 생명이란 의식도 없이 학살을 자행하며 정의네 뭐네 치장하고 우쭐대는 것에대해 한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비록 게임이라도 말이죠)

그저 적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감정을 몰살시키는 것이 서부의 인디언, 베트남의 베트콩에 대한 기나긴 선입관을 낳게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 가벼운 문제는 아닐겁니다. 지금의 이라크 테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데, 과거에 비해선 꽤나 성숙한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80년대만 되었더라도 '저 찟어죽일 빨갱이 녀석들, 미국만세!' 딴소리가 나올수 없었겠죠.

죽일때 죽이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가치와 존제를 인정하는것. 그냥 암생각 없이 죽여버리는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같은 생명으로서 상대를 인정할때 자신의 존제를 인정받을 자격이 생기는게 아닐까요, 혹은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존제를 자각할수 있는것은 아닐까요. 같은 편끼리 존중하는건 모든 짐승, 곤충, 세균도 하는 일입니다. 자신에게 이로운 존제를 인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세상의 가치와 의의를 생각하고 받아들일수 있는 능력, 자신에게 해롭건 이롭건 가리지 않고 모든 생명과 존제를 인정할수 있는건 인간만이 가능한 능력일 겁니다. 어쩔수 없이 처참하게 살육을 벌일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도 이것을 망각하지만 않는다면 인간이란 존제에게 희망은 있다 - 는 식으로 나가도 무리는 없을거라 봅니다.
(이상하게 막판이 거창하게 끝나는군요. ㅡ.ㅡa...)



마족 A : 지금까지 인간들이 지상을 지배하고 휘황찬란한 햇살을 마음껏 누리면서 호의호식 하는 동안에, 저 캄캄하고 추운 지하에서는 우리의 동포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똑같이 세상이 창조될 때 신으로부터 태어난 종족! 그러나 인간들은 가엾은 우리 마족을 전혀 돌보아주지 않은 채 오히려 철천지 원수 취급하며 캄캄하고 추운 지하에 내버려두기만 했었다! 이제 이런 불평등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내가 때려부수겠다! 지금까지 어둠과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살아왔던 우리 수많은 마족 동포들에게 지상의 따뜻함과 풍요함을 선물해 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증스러운 인간들을 몰아내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소드 : 꺄악꺄악~! 멋있어 오빠~!

마족 A : 그러나, 인간들과 대적하기에는 슬프게도 나의 힘이 너무 부족하다. 홀로 동포들을 위해 인간과 싸우다 이슬처럼 장렬하게 스러져간 수많은 선배들처럼 나도 홀로 싸우다 죽어가야만 하는가?
소드 : 그렇게는 못해~! 신이 용서해도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마족 A : 영광된 승리와 동포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전설의 무기 소드,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 나에게 힘을 빌려다오, 소드여. 그래서 함께 풍요로운 마족의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소드 : 그것을 원하신다면.... 네. 이 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때까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나의 마스터....

그 날 이후, 전설의 무기 '소드'를 가진 마족 A는 '대마왕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지상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  '판타지를 해체하라! - 마왕의 승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