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라는 것은 역사를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가는 ‘지적 유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랬으면 좋겠네.”라는 기대를 담고 있기도 한 대체 역사는 조금만 어긋나도 스스로를 만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자위(自慰)적 작품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체 역사를 쓰는 이들이 ‘기대’ 만 넘쳐서, 대체 역사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건, 그리고 제약 조건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지요.

잘 만들어진 대체역사는 ‘왠지 가능하다’는 느낌을 주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 그럴 수도 있구나.’라고 느낄수록 그 작품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렇게 ‘가능성 있는’ 대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인을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역사(연대)적인 문제

  우리나라의 고전 소설 중에서 이른바 대체 역사 같은 느낌을 완성된 것 중에 “임진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 쓰여진 이 작품은, 임진왜란 시기에 있었던 여러 전투들을 우리들이 이긴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지요.
  사실적인 면은 존재하지 않고, 도술이 등장하는 것은 보통, 어떤 점에서 자위적 소설의 극치라고 할만한 이 작품에서 정말 인상적인 것은 “관우”가 등장하여 왜군을 물리친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민간 신앙에서도 받아들이긴 했지만, 명백하게 중국의 인물인 그가 등장해서 돕는다는 점에서 ‘사대주의적인 양반들의 사고 방식’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관우는 이미 죽었잖아? 아무리 신이래도 너무 한 거 아냐?”라는 딴지를 걸고 싶게 합니다.
(물론 임진록은 이른바 ‘딴지’를 걸만큼 완성도가 높은 소설 작품은 아닙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간혹 대체 역사라고 하는 작품에서는 연대적인 문제로(혹은 지리적인 문제로) 절대로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이 서로 만나거나, 도움을 주는 이야기가 나오곤 합니다. 그 중에는 역사책을 조금만 뒤져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을 틀리는 경우도 있지요.
  대체 역사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는 50세에 죽은 사람이 사실은 150살까지 살았다는 말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요. 혹은, 원래 미국에서만 살았던 사람이 일본에도 여행을 갔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고...
  하지만, 이 경우에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정도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기술적인 문제

  역시 ‘대체 역사’일지도 모르는 작품 중에, 마트 트웨인의 “아더왕과 코네티컷 양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양키 한 명이 아더왕 시대로 가 버리는 바람에 상황이 바뀐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기술적인 문제에서 이의를 제기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 속에서 양키는 기관총을 만들고 전선을 만들어 전신 기술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작품을 보다 보면, –아더왕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제쳐두고- 둔탁한 망치로 한참을 두들여 검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시대에, 기관총을 작동시키는데 필요한 정밀한 부품을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전선을 뽑을 수 있으며, 전기를 쓸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정치적 풍자 소설로서 대체 역사 작품도 시간 여행 작품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지나친 딴지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른바 ‘대체 역사(또는 역사 판타지)’를 주장하는 많은 작품 속에서도 이토록 기술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상황을 전개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전국 시대 일본에서 철포라는 물건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만들기에 충분한 기술적인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모든 기술 문명 역시 그러하지요.
(가령 진공관을 만들고자 한다면, 진공 상태를 유지하도록 유리를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진공 상태를 만드는 펌프를 제작할 수 있어야 하고, 여기에 코일 등을 만들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러한 기술적인 가능성을 무시하고 무작정 중세 시대에서 기관총을 만들고 비행기를 날리게 하는 건 대체 역사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또 하나, 설사 기술적으로 탁월하다고 해도 그것이 실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시대 전지가 만들어졌지만 사라졌고, 그리스 시대 계산기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것은, 그것이 실용적인 물건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단순히 물건 하나 만든다고 역사가 바뀐다는 생각은 상당히 순진한 이야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셋째, 사회적인 문제

  “히미코전”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은 그 세계에서 ‘신의 사도’라고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세계의 사람들은 주인공의 예상치 못한 언동에 당황하면서도 받아들이게 되고, 도움을 받게 되지요.
  그 중에서 그들이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신의 사도’임에 분명한 주인공이, 신분이나 계급을 가리지 않고 편하게 대하고 의견을 묻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히미코전의 무대는 –비록 평행 세계이긴 하지만- 3세기 정도의 일본. 신분과 계급이 매우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던 시대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사회적인 관습이나 풍습은 –흔히 무시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제약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탁월한 역량을 가진 소녀가 임진왜란 시대에 등장합니다. 그녀는 전략적 식견이 뛰어나서 사령관을 맡아 왜군을 물리치고 심지어는 일본 원정까지...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는 남존여비의 시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여성이라도 사람들 앞에 나서서 사령관 같은 자리를 맡는다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지요.(아니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는 몇 사람이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잔다르크를 따랐던 일부 귀족들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여성이 활동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튀는 여성이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은 당연한 법. 그렇게 사회적인 역류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넷째, 대체와 유일의 가능성
  이른바 대체 역사라는 것을 쓰는 이들 중에는 한 사람의 발명가, 발견자를 증발시키는 방법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전화기를 만든 그레이엄 벨이 사라져서 전화가 발명되지 않은 역사...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큰 실수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전화기를 만든 것은 벨 하나 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전화기의 경우, 그레이라는 사람이 불과 한, 두 시간 뒤에 특허를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벨은 전화의 실용화에까지 노력을 기울여서 전화의 가능성을 극대화시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벨이 없었다고 전화 자체가 발명되지 않았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겠지요.(물론, 벨이 아니었다면, 전화의 실용화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을지는 모릅니다. 테슬러가 아니었다면 교류 전기가 널리 사용되지 않고 전기의 실용화가 조금 뒤졌을 지도 모르는 것처럼... 이런 것은 충분히 ‘대체 역사의 가능성’을 주게 되지요.)

  대항해시대 3라는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콜롬부스나 바스코 다가마 같은 수많은 발견자들과 경쟁하게 됩니다. 그들은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 희망봉이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데, 플레이어가 그들보다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들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술집에서 싸움을 붙여서 부상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발견 그 자체가 늦어집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다른 사람이 희망봉을 발견하고 아메리카를 발견해 버립니다.
  대항해시대라는 상황에서 최초의 발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비단 역사 속의 그 사람들만은 아니라는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또 다른 대체 역사를 낳을 수 있습니다. “C&C :적색경보”에서 히틀러가 사라져 스탈린이 대두되지만, 히틀러를 대신하여 다른 이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고 행동한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C&C:적색경보”와는 또 다른 대체 역사 이야기가 되겠지요.


  대체 역사를 ‘사실적으로’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실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역사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역사의 가능성에 대해 좀 더 많은 상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대체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는 부족합니다.
물론, ‘역사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다 재미있게 그리고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소재 그 자체로 만족하지 않고 더욱 더 갈고 닦아서 가공해야 하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대체 역사는 ‘역사가 바뀌어서 이렇게 되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 바뀌어 이렇게 되었는데, 이 세계에서 이러이러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이지요.

  대체 역사는 대체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대체 역사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대체 역사를 이야기하면 흔히 역사가 바뀌는 과정 만을 기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가령,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고, 가인이 누굴 낳고... 같은 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아무리 길어봐야 ‘이야기’가 되지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배경 설정에 불과하고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인은 되지 않지요.

  모든 이야기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여야 하듯, 대체 역사 이야기는 ‘역사가 바뀐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며,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여야 합니다.

  그리고 ‘대체 역사 이야기’란 바로 우리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역사의 가능성’이기 때문에(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재미가 있는 것이지요.


  흔히 인터넷을 보면 '이런 일이 있었으면 어떤 역사가 펼쳐졌을까?'라는 무한 발상 스타일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역사가 바뀌는 과정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도 어떤 점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요. 중요한 것은 그 '바뀐 세계'에서 어떤 이들이 어떻게 활약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좋은 배경 설정은 좋은 이야기의 가능성은 될 수 있지만, 결국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좋은 배경이 아니라, 좋은 이야기인 것이지요.

  그리고, 좋은 이야기를 위해서는 앞서 말한 여러가지 제약을 다소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가능한 어느 정도 맞추어 피해가는 정도로 그치는게 더 낫겠지만)

  왜냐하면, SF에서, 과학보다는 상상이 더 중요하듯, 대체 역사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대체 역사 그 자체보다는 이야기이니까요.


  모 소설가의 말처럼 대체 역사는 역사책 한 권만 있으면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체 역사에 이야기의 살을 입히는 것은 뛰어난 이야기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P.S) 하지만, 아래에서도 이야기했듯, 대체 역사 설정을 만들어보는 것은 상상력을 키우는 지적 유희로서 도움이 됩니다. 잘 만 쓴다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끄는 글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점에서, 창작 마당에서 자신만의 대체 역사 설정을 써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설정을 쓸 때는 항상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에 대해 염두를 두고 생각하는게 좋겠지요.

  빌 게이츠가 윈도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대체 역사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세계에서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대체 역사 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될때, 여러분은 이야기꾼으로서의 가능성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P.S) 대체역사물(代替歷史物)이라고 보통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物은 物語의 약자라고 보는게 더 맞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대체역사물이라는 말이 보다는 '대체 역사 이야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체 역사 이야기"라는 말이 좀 더 근본에 가까운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앞서 말했듯, 여기서 중요한 건 상상... 즉 '이야기'니까요.

p.s) 대체 역사를 쓸 때 검토해야 할 다른 제약 요인이 있을까요? 일단 제가 알고 있는-그리고 생각한- 것은 이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이라면 또 다른 가능성, 또 다른 생각을 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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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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