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그 베어가 쓴 장편소설 <블러드 뮤직> 앞부분을 보면 주인공 버질이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지적 능력을 갖춘 미생물을 배양하는 실험인데, 원심 분리기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다는 이야기가 줄줄 나오죠. 그런데 읽다가 보니까 문득 드는 생각이 제가 책을 이해하면서 읽는 게 아니라 그냥 글자만 들여다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실험하는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블러드 뮤직>은 고등학생 기초과학 수준만 되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하던데, 학교 다닐 때 과학 공부를 잘 안 한 탓인지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가 않더군요.

이런 장애에 부딪힌 건 비단 <블러드 뮤직>만이 아닙니다. 하드 SF라고 하는 몇몇 소설들과 그 밖에 하드에 가까운 소설들을 볼 때마다 대충 겉핥기로만 파악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가령, <중력의 임무>를 읽을 때는 도대체 행성이 우째 생겨먹어서 어디가 어떻게 중력이 작용하는지 머리를 싸매야 했죠. 그럴 때 이해가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흥미를 잃고는 했습니다. 그래도 이왕 읽기 시작한 거 끝까지 읽자는 마음으로 본 책들도 있지만, 중도에 그만 읽고 싶었던 적도 몇 번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다행히도 설정이 어려워서 책을 접은 적은 없습니다만)

물론 SF 작품에 나오는 설정은 아무리 복잡하고 딱딱해도 결국 상상력을 발휘한 것들입니다. 한마디로 ‘뻥’이란 뜻이죠. 미래에 실현할 가능성이 높고,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한 번쯤 생각해볼 설정이긴 하지만, 이것들은 하나같이 ‘뻥’입니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뻥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거죠. <블러드 뮤직>에서 버질이 한 실험이 어디까지가 뻥인지 전 모릅니다. 지적 미생물을 키운다는 설정만큼은 뻥이라는 걸 알지만, 세세한 과정은 모릅니다. 정보 이론을 대입하는 것도 어디서부터가 과장인지 모르고요. 알지도 못하는 걸 들여다봐야 하니까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게 이상하죠.

만약 이런 것들이 오로지 인간의 상상력에서만 나왔다고 하면 그나마 좀 나을 겁니다. 판타지 게임 중에 <플레인스케이프 : 토먼트>라는 작품이 있는데, 설정이 방대하고 복잡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른바 ‘플레인’이라고 하는 세계(차원)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을 하면서 얽히고 설킨 설정에 입을 다물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복잡하기는 해도 이해를 못할 건 없었습니다. 무슨 플레인이 어디로 통하고 어디가 어디라는 건 당장 파악하기 힘들지만, 어차피 모두 상상력일 뿐이니까요. 이 세상에 진짜 천상계나 물질계로 통하는 통로가 있거나 아우터 플레인이 이너 플레인과 이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이런 예시를 든 이유는 판타지가 쉽고 SF는 어렵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SF가 뻥이기는 하지만, 사실을 포함한 뻥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100% 뻥에 가까운 판타지보다는 몇 %가 뻥인지 헛갈리는 SF를 볼 때 흥미가 줄어든다는 거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SF에 우주 모험물 등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는 애초에 SF를 접한 게 공룡이나 괴물을 통해서였는데, 그래서 하드 SF에는 적응을 잘 못하나 봅니다. 취미 영역을 넓히려다가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혔다고 할까요. (에, 공부 게을리 한 탓이라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뭐, SF 소설도 소설이고, 소설은 주제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긴 합니다. 그렉 베어도 <블러드 뮤직>을 쓰면서 독자가 미생물 실험을 보며 헤매는 걸 원치는 않았을 겁니다. 그보다는 후반부에서 인류가 종말하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경이로움을 전하고 싶었겠죠. 저도 그 경이로움을 충분히 맛보았기 때문에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어느 분 말씀마따나 상상 과학에 도전하는 것도 SF의 참 재미 중 하나일 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