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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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무리 황제 폐하의 친위대라 하더라도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오, 디터!”
사령실로 부름을 받고 찾아온 디터를 향한 경포 대령의 첫마디였다.
친위대는 PGB 소속이었지만 계급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와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기에 군의 누구라 하더라도 감히 막말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경포 대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네차크 기지 소속의 기체를 아직 정식 입대하지도 않은 콜로니언에게 마음대로 내준 것도 모자라서 전장에 나가게 한 디터에게 지울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권력에 굴복해 허가를 내린 자신도 결코 잘한 것이 없었기에 마냥 큰소리만 칠 수는 없었다.
비록 전투는 승리로 끝이 났지만 피해가 컸고, 멋대로 자리에서 이탈한 루크 때문에 기지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올카 소대가 모두 벗어나자 테인티드 솔져 몇 마리와 적의 브론테스에 휘감겨 조종을 하던 정체 모를 패러사이트가 침입하는 것을 허용한 일마저 있었다.
놈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병사 몇 명이 실종되고, 격납고에 비치되어 있던 APM05D1 한 기를 도난 당했다.
만일 디터가 나서서 기지 내에 침입한 벌레들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하기도 싫은 그였다.
“나는 오늘 일어난 교전에 대해서 낙원에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오. 나와 당신은 아마도 징계를 받게 되겠지만 적어도 그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오.”
“그것은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조금 있으면 도착할 낙원행 수송기를 타고 갈 것이니 이곳의 수비를 부탁하지.”
“그것은 걱정 마시오. 이번 같은 돌발 상황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벌레들 따위는 넘보지도 못하는 기지니까. 잊었소이까? 오늘 전투에서 기지가 발휘한 전력은 전체 전력의 1/3도 되지 않소.”
“적은 우리의 무기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방심해서는 안돼.”
경포 대령은 디터의 말에 손을 모아 깍지를 쥐고 턱을 괴었다. 당당하고 품위 있는 그의 얼굴에 근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나도 동감이오.”
오전에 일어났던 전투는 정확히 07:24분에 끝이 났다. 꽤나 치열했는데 알고 보니 겨우 2시간 반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치열했던 전투의 뒤처리가 이루어지는 동안 간부들은 긴급 회의를 열었고, 사상 최초로 일어난 패러사이트들과의 대규모 교전과 실종된 병사들, 도난 당한 기체에 대한 대책을 논하고 책임 공방을 벌였다.
작은 기지 내에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서로 헐뜯고 책임을 넘기기에 급급한 썩은 간부들과의 회의 같지 않은 회의 때문에 심신이 피로했던 경포 대령은 디터와의 대화 때문에 더 심란해졌다.
꽤 대규모의 교전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변방의 방어를 위한 병력 증강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낙원의 다른 정적들이 분명 어떤 방법으로든 꼬투리를 잡아서 몰아붙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위험이 코 앞에 다가와 있는데도 자신들의 이득 챙기기에 급급한 낙원의 정적들과 그들이 심어놓은 네차크 기지의 첩자들은 같은 귀족이지만 정말 역겹기 짝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들의 정당한 권익을 되찾기 위해 되도 않는 저항을 해대는 콜로니의 레지스탕스들이 더 순수했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생각하며 그들 이외의 존재들은 벌레들만도 못한 존재로 깔보고 짓밟는 극단적인 파시스트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경포 대령은 낙원과 연결된 원거리 단말기를 통해 누군가와 통신을 했다. OMG단말기에 해킹과 청취 차단 조치를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전 9시 정각이 되자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째깍거리는 태엽 시계만큼이나 정확하게 CF35-Prince 수송기가 기지에 착륙했다.
AU타입이 크게 손상되면서 장기에 약소한 피해를 입은 루크를 전동 베드에 실은 디터 일행은 그리 편치 않은 마음으로 낙원을 향해 이륙했다.
객실에서 라일라의 지극한 간호를 받는 루크를 보며 질투에 온몸을 불사르는 수송기의 승무원들이 있었음을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리라.
루크는 가끔 그가 누워있는 전동 베드 근처를 지나면서 툭툭 치거나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승무원들을 비웃으면서 생각했다. 왠지 디터 일행을 만나면서 꼭 다쳐서 군림자들의 더 크고 더 웅장한 자랑거리로 실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팔자가 사납다면 사나운 것이겠지만 그것하고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그를 이끄는 것 같았다.
처음에 네차크 기지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두근거림. 흥분. 단순한 컬쳐 쇼크라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그런 충격. 그리고 적의 브론테스에 달라붙어 있던 패러사이트와의 만남에서 느꼈던 구역질 나는 동질감.
그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에는 취미가 없었기에 곧바로 골치 아픈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운데 일일이 자잘한 것에 신경 쓰는 것은 무의미한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걸걸한 목소리의 수송기 오퍼레이터가 약 30분 뒤면 군림자들의 수도, 낙원에 도착할 것임을 통보해왔다.
전동 베드에 묶여 있지만 않았다면 그 잘난 낙원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을 아쉽게 여기고 있던 루크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보고 싶어요?]
아무리 몸이 다쳐서 감각이 둔해졌다고 하지만 걸어오는 발 소리도 못 들었는데 바로 눈 앞에 라일라 소령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짐짓 놀라지 않은 척 하며 헛기침을 했지만 라일라는 눈치를 챘는지 쿡쿡 웃으며 심겼다.
[당신, 보고 싶은 거죠? 우리가 낙원이라고 부르는 곳을. 군림자들마다 충성을 맹세하는 황제께서 기거하시는 곳을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죠?]
[별로. 이렇게 묶여 있는 것이 답답할 뿐이야.]
[가끔은 솔직해 져도 괜찮아요.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도 있는 거에요. 군인이 되기 싫다면서 어쩌면 그렇게 군인 같이 굴어요?]
군인 같이 군다는 말에 루크는 기분이 상해서 얼굴을 굳혔다.
[낙원의 군인들도 많이 나태해졌군. 나 같은 놈에게 군인 같다고 하다니.]
퉁명스레 심기는 그였지만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라일라 소령이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다가 친친 감아놓은 케블라 벨트를 풀어주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루크가 그녀를 올려다보자 화사하게 웃으며 그녀가 심겼다.
[기내 군의관이 당신 상처는 벌써 다 나았다고 하네요. 그러니 낙원에 도착할 때 안심하고 구경해요.]
가끔 보이는 히스테리와 멍한 모습만 아니라면 라일라 소령은 확실히 아름답고 청순했다.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인지 알 수 없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믿을 수 없는 자라고 여긴 루크는 마냥 그녀를 좋게 볼 수 없었지만 일단 도주를 우려해서 묶어놓았다는 케블라 벨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환영할만한 것이었다.
“크윽!”
오랫동안 한 자리에 묶여 있던 탓에 뻐근한 몸을 틀어 기지개를 켜자 온몸의 관절과 뼈마디가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특히 내장이 상했던 왼쪽 옆구리가 지독한 통증을 호소해오자 그는 신음을 흘리며 반사적으로 손을 댔다.
[아직 무리하지는 말아요. 아직 낙원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내가 여기서 난동이라도 부리면 어쩔 거지?]
어쩐지 자신이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든 루크가 투정 부리듯이 심기자, 라일라는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풀어준 거에요. 어차피 여기서 난동 부려도 이득이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는 강자와 돈을 찾아 떠도는 외로운 하이에나일 뿐이었다.
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개인 따위는 발톱에 낀 때 만큼으로도 여기지 않는 군림자들에게 있어 그의 난동은 별다른 흥미 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에게 무기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에는…
‘뭐야, 그 멍한 얼굴로 잘난 듯이…’
PGB의 군인들이 우상으로 떠받드는 라일라 소령이 점점 마음이 들지 않았던 그는 특유의 나태해보이는 표정으로 턱에 손을 괸 채 병실 바깥의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끊임 없이 펼쳐질 것 같았던 구름의 향연 위로 하얀 하늘이 떠올라 있었다.
항상 빛을 쏟아내는 화이트 홀에 묻혀버린 태양빛이 애처롭게 그의 눈을 어지럽혀 보려고 했지만 생물에게 유해한 온갖 우주선(線)으로부터 차단해주는 대기 덕분에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세계는 빛에 자리를 내주었을까. 저 고고한 태양조차도 묻혀 버릴 빛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것이란 것은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싶었던 것일까.
루크는 주제에도 맞지 않는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여기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잠시 식사가 들어있는 캔을 가지러 나갔던 라일라가 돌아와서 던져주는 캔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밑바닥에서 반응제가 열을 발하여 속의 내용물을 데운다.
사실 식감은 형편없지만 한 끼에 필요한 영양소와 열량이 충분한 스프가 따뜻한 김을 피워올리며 풍부한 향을 피워올렸다.
거의 3일 동안 계속 먹은 스프였건만 루크는 질리지도 않는지 조심스레 불어가면서 남은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입으로 털어넣었다.
그제야 라일라 소령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는 괜히 머쓱해져서 빈 캔을 재활용 통에 던져버리고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보지도 않고 던진 캔이 정확하게 통 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라일라가 어린 아이처럼 환호했다.
[와아! 대단해요. 내 것도 해볼래요? 응?]
자신이 먹은 캔을 들이대며 던져보라고 졸랐지만 루크는 더 이상 이 정체 모를 여자와 관계되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병실에 있는 승무원들이 증오와 의문과 질투가 담긴 시선으로 아무 텔레파시 없이 바라보고만 있는데, 마음에 들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전에 그녀가 CR사령부 소속이라고 했던 것이 심히 마음에 걸리는 그였다.
그는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꾸 감겨 드는 라일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의 캔을 받아 들어 던졌다.
때마침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디터에게 캔이 날아가 적중한 것은 분명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루크와는 달리 거의 매일 먹다시피 하는 스프가 지겨워서 라일라가 남긴 내용물 때문에 디터의 옷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분명 의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게 눌러쓴 스코프 때문에 디터가 화가 났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SHT타입 티타늄 합금 몸체에 부딪혀 떨어진 캔을 주워 재활용 통에 집어넣은 뒤, 옷을 툭툭 털며 평소와 다름 없는 차가운 어투로 말을 던졌다.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방해해서 미안하군.”
단 한마디만 남긴 채 병실을 벗어나는 그의 등 뒤를 주시하던 라일라와 루크가 계면쩍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 것도 별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누렇게 모래 사막만 펼쳐져 있을 줄 알았던 이 별에도 강이 흐르고 초목 지대가 있다는 것을, 루크는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데저트웜과 싸우고, 심비오네이션의 괴한들과 싸우고, 네차크 기지에서 중규모의 패러사이트 부대와 싸우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낙원.
왜 군림자들이 그곳을 낙원이라 부르는지 쉽사리 깨닫지 못했던 그는 직접 목격을 한 뒤에야 이해가 갔다.
네차크 기지처럼 돔에 갇혀 있지도 않았다. 그곳에는 살아 숨쉬는 생명 그 자체가 있었다.
바깥으로 개방된 끝을 알 수 없는 대지에 나무와 울창한 숲과 높은 산과 넓게 굽이쳐 흐르는 강과 산들산들 흔들리는 너울과 조각상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계곡과 봉긋하게 솟아있는 언덕과 드넓은 벌판과 기름진 평야와 축축할 것 같은 늪지와 금방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호수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활기에 가득찬 사람들이 뛰어나와 일구어야 할 것 같은 농지가 있었고 네차크 기지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규모의 발전 단지와 공장 부지, 하늘을 향해 치켜든 도전적인 창 끝처럼 뻗어있는 마천루로 가득한 주거 단지, 그리고 또한 그 모든 것을 능가하고 압박할 것 같은 웅장하고도 장대하고도 보는 것만으로 위축되는 거대한 전함이 있었다.
[저, 전함?]
[정확하게는 시바(Shiva) 급의 항공 모함이지요. 동시에 패러다이스입니다. 함선 위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탑 같은 것이 보이나요? 그곳이 바로 제르 황제께서 기거하시는 오벨리스크랍니다.]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직경 5km는 족히 넘어보이는 면적을 독차지 하고 있는 구릿빛 동체 한 가운데에서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듯 오만하게 솟아있는 금빛의 뾰족한 탑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언덕처럼 땅 위로 드러난 전함의 표면을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빼곡히 채운 방공 포탑이나 레이돔, 레일건과 미사일 포드들이 무색할 정도로 그것은 압도적이었다.
과연 군림자들의 우두머리가 기거할만한 곳이라고 생각한 루크는 그 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슴을 옥죄어 오는 듯한 이 기분. 네차크 기지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했으나 이번에는 더욱 격렬했다. 저 뾰족한 탑. 거대한 함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오아시스. 멀어져 가는 낙원. 데자뷰! 속이 뒤집히고 현기증이 일었다.
[어때요? 멋지죠?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일러요. 기지에 도착해서 임무 보고와 차후 일정 등에 대한 브리핑과 당신에 대한 신원 인증 처리가 끝나면 명예 귀족으로서 우리와 동류가 되니까 훨씬 많은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거에요. 좋죠?]
라일라는 루크가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자신이 할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루크는 심장 부근을 움켜 쥐면서 짐짓 태연한 척 냉소를 지으며 심겼다.
[기대도 하지 않으니 내버려둬.]
[후훗!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아무리 쌀쌀 맞게 굴어도 나무를 휘감은 구렁이 마냥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라일라 소령을 떼어내는 것은 이제 포기였다. 그것 때문에 승무원들이 그를 더 씹어 먹을 듯이 대했지만 그것에 대해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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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너무 바빠서 이제서야 뒤이어 올립니다. 너무 원망하지 말아주세요;;;(R군: 뒷내용이 궁금해야 원망을 하건 말건 하지. M군: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