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푸르다. 아니, 초록에 가까운 색이었다. 초록색의 무엇인가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부서진다. 부서지고 흐르고, 부서지고 흐르는 흐름이 계속되고 있었다.

 루크는 생각했다. 무엇이 흐르는가.

 루크는 주시했다. 무엇이 부서지는가.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는 주먹을 뻗었다. 흐름을 부쉈다. 부서짐을 부쉈다. 부수고 부수는 행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부수어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차가운 심장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을까.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느낌에 놓쳤던 정신이 돌아왔으나 살아있는지 죽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던 루크는 중얼거렸다.


 
“난... 죽은 건가?

 “당신은 살아있어요.


 
루크의 말에 산뜻 발랄한 여성의 목소리가 응답을 했다. 그는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왼쪽 팔에서 지독한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손목은 무엇인가에 묶여있는 듯 자유롭지 못했다.

 눈을 들어 살펴보니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부러진 팔에는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그의 앞에는 SEDS 때문에 턱과 입만 보이는, 새카만 전투복 차림의 픽커와 상아색의 전투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앉아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루크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가 험비의 천장에 머리를 부딪고는 다시 앉았다.


 
“크윽.

 “움직이지 말아요. SEB 무단사용자 씨. 나노 닥터가 부러진 뼈를 수복하는 동안 팔에 임시로 부목을 대어 놓았으니까 좀 불편하더라도 참도록 해요.

 [무단 사용 혐의로 감옥에 쳐 넣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걱정하지 말아요. 수갑으로 구속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당신을 체포한 것이 아니고, 퍼핏티어로서 입대를 시킬 예정이니까요. 외려 좋은 일 아닌가요?]


 
감옥 따위는 두렵지 않은 듯한 루크의 텔레파시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여성은 의외라는 듯이 얼굴을 굳혔다가 다시 방긋 웃으면서 응답했고,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명백한 의미였기에 루크는 수갑에 묶인 손을 마주 내밀어서 화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여성은 루크의 의사가 어떻든 상관없었던 듯이 다른 손도 내밀어서 마주잡고 흔들었다.

 여성 치고는 꽤나 악력이 세다고 느끼면서 루크는 신음을 흘렸다. 부러진 팔을 같이 흔들었으니 아프지 않다면 사이보그나 통각 신경이 마비된 가공 인간일 것이다.

 루크가 신음을 흘리자 놀란 여성은 급히 손을 거두고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PGB CR 사령부 소속, 라일라 소령이라고 합니다. 올해로 29살이고 아직 미스죠. 잘 부탁해요, 예비 퍼핏티어 씨. 그나 저나, 얼굴도 멋지고 목소리도 근사하다. 애인 있어요?


 
겉보기와 달리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릴 만한 나이를 먹은 라일라가 여우처럼 웃으며 루크에게 달라 붙자, 운전병이 투덜댔다.


 
“쳇! 소령님은 좀 생긴 남자들만 보면 저 소리더라.

 “한신 일등병! 자네는 운전이나 똑바로 해!


 
아무리 정신 나간 푼수 같이 굴어도 상관은 상관. 한신이란 이름의 일등병은 곧바로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어디인가 나사가 빠진 군인들 같다고 생각하던 루크는 픽커를 바라봤으나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에 뒤집어 쓴 SEDS때문에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고, 드러난 입술도 굳게 다물고 있었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이쪽은 무려 황제 폐하를 지척에서 모시고 있는 픽커, 디터 씨에요. 서로 인사하세요.


 
라일라가 디터를 소개했다. 서로 악수를 하며 친근하게 인사를 나눌 것이라 기대는 하지 않았던 라일라였지만 정작 고개만 살짝 까닥이는 두 사람을 보니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퍼핏티어라니. 군인이 되란 말인가.]


 
아무래도 루크는 디터를 배려할 생각이 모래 한 톨만큼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사이보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텔레파시를, 있는 정보 없는 정보 죄다 뱉어 놓을 것 같은 라일라에게 계속 전했다.


 
[자세한 것은 알려드릴 수 없어요. 다만 당신은 불법을 저지른 것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만 알려드리죠.]


 
허술해보이던 태도와 달리 라일라는 정색하고 말을 아꼈다. 부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서 수갑까지 채워진 상태라 꼼짝할 수 없었던 루크는 라일라의 말에 혀를 차고 팔짱을 끼려다가 다시 신음을 흘려야 했다.
 

 ‘빌어먹을. 의뢰비 받아야 하는데 어디까지 끌려가야 하는 거야, 도대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루크의 애마인 레비저가 기타 케이스와 함께 험비의 뒤쪽에 실려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해가 져버린 지 꽤 시간이 지난 상황이어서 일행은 노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화이트 홀 덕분에 밤이라 하더라도 그리 어둡지는 않았지만 생체 시계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기생충들과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부상까지 입은 루크였기에 그것은 더욱 더 절실했다.

 밤이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사막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아 침낭 펴고 눕는 것은 사치였고, 그나마 장비를 많이 싫지 않아서 다리 펴고 차 벽에 기대어 앉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운전을 하던 한신도 하루 종일 앉아있던 운전석에서 그대로 잠에 빠져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루크는 문득 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그냥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런 것인가 의심해봤지만 분명히 이전에도 느꼈던 진동이었기에 정신을 집중해보자 확신이 들었다.

 이것은 분명 그 지렁이처럼 생긴 거대 패러사이트였다. 루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던 라일라 소령이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아우, 5분만 더 잘게요. 냠냠.


 
어느 사이에 이렇게 달라붙었는지 어처구니가 없던 루크는,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고 침착하다고 생각되는 디터를 깨웠다.

 그놈의 스코프를 계속 쓰고 있는 덕분에 자는지, 깼는지 분간이 불가능한 디터가 고개를 들자, 루크가 말했다.


 
“이봐, 진동 같은 거 안 느껴져?


 
몸의 모든 센서를 동원해서 감지를 한 디터는 확실히 익숙하지 않은 진동이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둘을 깨웠지만, 아무리 군인이라도 한참 단잠을 자고 있는 중간에, 그것도 새벽에 제정신 차리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는 무리다.

 그나마 다행히도 아직도 해롱거리는 라일라 소령과 달리, 한신 일등병은 험비의 시동을 걸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막 떠오른 태양의 따뜻함을 받은 모래가 구름을 형성하며 험비의 뒤쪽으로 맹렬히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 루크에게 호되게 당했던 데저트웜도 맹렬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아직 재생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았는지, 머리 끝부분에 흉하게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몸집에 어울릴 만큼 거대한 입과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키를 웃돌 것 같은 이빨은 건재했다.


 
사방이 진동을 하고 모래 먼지가 피어 오르는 것이, 인간 한 명에게 당했다고 해도 여전히 위압적인 것은 틀림없었다. 잠이 덜 깨서 여전히 비몽사몽하던 라일라도 완전히 잠이 달아나버렸으니 말이다.

 라일라는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면서 더 빨리 가라며 한신을 닦달했고, 한신은 한신대로 원래 호위로 붙었는데 운전병 취급당한다며 투덜댔다. 그러나 제식화 된 지 10년도 넘어버린 고물 험비는 루크의 레비저와는 달라서 페달을 아무리 밟아도 웜을 따돌릴 수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라일라가 지붕을 열고, 장착된 묠니르 중기관총으로 12.7mmCSP탄을 갈겨대었지만 웜의 껍질에 흠집만 줄 뿐이었다.


 
총탄 안에 순수한 사트라 에너지의 입자를 응축시켜서 착탄 시에 폭발하도록 만든 CSP탄은 대구경 탄환인 경우, CR(Colossal Android의 합성어인 Colossaloid의 약자)을 상대로도 그 저지력이 발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도 무용지물이나 다름 없다면 포기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라일라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잠자코 기관총에서 내려와 뚜껑을 덮었다. 이제 잡아 먹힐 시간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는지, 히스테리도 부리지 않고 정신 나가버린 사람처럼 중얼댔다.


 
다행히도 그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있었으니, 바로 기관총 뒤에서 얌전히 험비를 붙잡고 있는 RB12-Face 대 패러사이트 지뢰였다.

 이제야 이 지뢰가 생각난 한신은 자신이 의견을 내어서 장착한 것도 아닌 주제에, 이때를 위한 지뢰라고 큰 소리를 치며 버튼을 조작했고, 험비의 지붕에 어울리지 않게 매달려있던 RB12-Face가 눈을 빛내며 뛰어내렸다.

 Face지뢰는 장착되어 있는 간단한 AI로 험비를 추격하는 웜을 탐지했고, 자폭을 위해서 몸체에 달린 6족을 이용해 열심히 달렸다.

 데저트웜은, 개발된 지 8년이 넘어가서 거의 퇴역을 바라보고 있는 이 구형 지뢰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 괴성을 울리며 촉수에서 브레인 서커를 4마리 가량 연달아 내보냈다.


 
직접적인 피격에서 벗어나보겠다는 생각이었던 모양이지만 지뢰의 AI는 생각보다 수준이 높았는지 미끼로 던져진 브레인 서커는 무시해버리고, 붙어있는 얼굴처럼 담담한 표정을 한 채 장렬히 폭발해서 사트라 에너지로 이루어진 폭풍을 일으켰다. 이것에 휘말린 데저트웜의 머리는 태어나서 두 번째로 본체와 분리가 되어야 했다.

 루크의 초능력에 당했을 때보다 피해가 훨씬 컸기 때문에 한동안은 활동을 못하겠지만 안쪽에서 수많은 브레인 서커를 컨트롤하고 있을 리더가 파괴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웜이 완전히 와해되지 않고 형태를 유지한 채로 다시 땅속으로 숨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동안은 몸채를 재생하느라 활동 재개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 생각한 디터는 네차크 기지에 웜과의 교전이 있었던 장소와 시간을 보고했고, 험비는 열심히 사막을 횡단했다. 네비게이션에 의하면 도로를 따라 대략 1시간 정도 후에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계속 달려서 네차크 기지에 도착하면 낙원까지 가는 수송기에 오를 수 있었기에 루크를 제외한 3명은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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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넵. 그동안 기다리고 계셨던(누가?) 분들을 위해서(꿋꿋) 연재는 계속되어야겠지요. 부족한 구성, 지루한 문체, 흥미없는 이야깃거리인데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