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생존자

[ 쏴아아 ]
' 뭐지? '
[ 쏴아아 ]
' 차가워... '
[ 쏴아 ]
" 차갑다니까! "

무언가 온몸을 감싸는 차가운 느낌... 아무 생각 없이, 그야 말로 무(無)의 공간에서 방황하던 유리아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감각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그러나 눈을 떴다고 해서 달라 진 것 없었다. 아니 심지어는 자신이 눈을 떴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눈을 뜬 그녀에게 보인 것은 어디가 아래고, 어디가 위인지 조차 구별할 수 없는 지독한 어둠뿐이었다.

" 싫어, 이런 것. "

그녀는 신음하듯 소릴 질렀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아무 것도 느낄 수도 없는 어둠... 그러나 그것은 여느 때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무어라 설명할 길은 없었지만 이 어둠에는 어둠이상의 무엇인가가 분명히 느껴졌다.

" 그...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어! "

외치고 또 외쳐보았지만 그녀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음습한 기운을... 오래 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송두리 체 빼앗아 가버린 그 참혹한 것들의 존재를! 유리아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주위를 더듬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녀의 손에는 잡혀지지 않았다.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둠과 그리고 이 증오스러운 기운 뿐... 그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유리아는 느낄 수 없었다.

" 정신차려! 넌 네피시스야. 네피시스란 말이다! "

네피시스... 그렇다. 유리아는 아르케비니아 연방 최고의 특수부대이자 최고의 명예인 '네피시스' 의 일원인 것이다. 비록 운명에 떠밀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얻어 버린 명예였지만 말이다.

" 그래... 침착하자. "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양손을 단전으로 모은 뒤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하라. 이것이 유리아가 5년 동안 귀가 따갑게 듣고 또 훈련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어둠에 대한 공포는 아무리 극복하려 해도 그때마다 그녀에게 절망만을 안겨주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찮게 배운 것이 바로 이 '단전호흡'이란 것이었다.

" 들이쉬고, 내쉬고... 그리고 한번의 호흡 멈춤... 후후 왜 잊었을까? 명천류(明天類)의 기본 호흡법. "

이 단전호흡이라는 것을 배우면서도 기억치 못한 일이 떠오르자 유리아는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명천류 유도 암살술' 그것은 고향과 함께 버렸던 다크엘프 비전의 암살 술의 기본 초식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잠시... 단전호흡은 그녀의 불규칙한 호흡을 정상적인 패턴으로 바꾸면서 붕괴 직전인 자아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그 안정된 호흡은 혼란스러운 유리아의 사고력을 패닉 상태에서 천천히 정상상태로 회복시켰다.

" 자아... 우선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

잠시 혼란이 있긴 했지만 기억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주선... 그것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녀는 지난 5년간의 지루한 훈련 마치고 첫 근무지로 파견을 나가는 중이었다.
유리아가 배속된 곳은 아르케비니아 연방의 수도에서 약 480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땅을 향한 마음’이라는 변방의 행성이었다.
명실공히 연방최고의 엘리트인 그녀가 이런 변방의 행성에 발령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리아는 한동안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변방의 행성이란 다름 아닌, 그녀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 그래. 고향으로 가는 셔틀을 탔었지. 크흑. 머리가 아파...”

갑작스런 두통에 유리아는 생각하는 것을 잠시 보류해야만 했다. 마치 누군가가 머리를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두통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두통이 사라지자, 잊혀졌던 기억이 하나 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 잠결에 일어나 화장실을 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

고심한 끝에 겨우 떠오른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우주선 안에서 수세식 화장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조금은 놀라긴 했지만 그것과 지금의 상황을 유추하기는 불가능했다.

"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지? 가만 그러고 보니 비상경보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리고 그 뒤에... 충격! 제길 그렇다면 비상사태잖아! "

그때서야 조각조각난 기억들이 모조리 되살아났다. 유리아가 볼일을 끝낸 직후에 있었던 일이었다. 갑작스런 경보, 그리고 이어 닥친 지진. 그것은 고향을 떠난 뒤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우주선 안에서의 지진이라... 조금은 황당한 일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일도 아니었다. 아마도 우주선에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진 따위가 우주선 안에서 일어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크흑 이 아픔... 알 것 같군.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설마 스페이스 하이잭(space hijick)? "

어느 사이에 돌아온 그녀의 감각들이 비명을 질러 되고 있었다. 하긴 이 좁은 공간에서 그토록 강력한 지진(?)을 만났으니 몸이 설할 리 없었다.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유리아는 벽을 더듬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여기저기 타박상은 입은 듯 하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 동력이 완전히 나갔나? 아냐. 아직 중력이 있는 것을 보면 그건 아니고, 그렇다면 역시 항공 테러겠군, 하이 잭을 수반한..."

아르케비니아 연방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만큼 분쟁이 잦았다.  특히 초공간 도약의 실용화 이후 발생하기 시작한 '스페이스 하이 잭'은 가장 큰 문제로 부상했다.
처음에는 단순 테러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조직적인 우주해적들 까지 설쳐될 정도로 그 문제가 여간 심각하지 않았다. 연방정부의 강력한 단속덕에 많이 수그러 들었다 하지만, 한해에 한 두건 이상은 꼭 이런 일이 불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