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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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11일
뜨거운 열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정글은 불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의 점들이 속속 불을 밝히면서 퍼져 나가는 모습은 마치 불꽃놀이를 연상시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통 새하얀 빛이 어둠을 집어삼켰다. 차이라면 하늘 대신 대지를 불사르는 것이랄까.
"해상도가 생각보다 괜찮군요. 시야도 상당히 넓고."
그래. 그리고 저 넓은 공간 어딘가에 내가 있었지. 불장난은 언제나 구경하는 사람들만 재미있을 뿐이다.
"무인 항공기과 무인화된 포대의 결합이라... 이게 저래 보여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조종하고 있는 거란 말이죠. 이런거면 인명 피해나 지지율 하락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기술 발전이란 무섭네요."
그 잘난 기술의 피해자가 될 뻔한 사람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말을 하는 인간이 더 무서운 것 아닐까. 녹화된 화면을 바라보며 신이 나서 떠드는 민 중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억지로 입을 움직일 가치도 없다.
정신이 들고 보니 민 중위 취향의 인테리어로 꾸며진 트레일러 안이었다. 간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보니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는 각종 기계류와 깔끔한 평면 디스플레이의 은은한 불빛들이 반겨 주었다. 멍한 상태에서 들은 설명에 의하면 야밤의 기습을 당하자 마자 민 중위가 이곳 본부에 지원을 요청한 덕에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참 시기 적절하게 근방에 배치된 미군 포대에서 무인 항공기의 정찰을 앞세우고 사격을 가해 준 것이다. 공식적으로 약간의 경비 병력 외에는 완전히 철수했다고 하는 미군이었지만 철수한 것은 말 그대로 총을 든 인간 뿐, 최첨단의 무인항공기 및 거의 무인화가 완료된 포대로 구성된 전력이 그것을 대체하여 더이상 얻을 것 없는 이 전쟁에서 새로운 장난감을 실험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바로 그런 장난감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기분나쁜 일이었지만 야간에, 그것도 기습 이후에 그처럼 실시간으로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뭔가 일이 터질 것이라는 사실을 민 중위는 미리 알고 있었다. 녀석 말이 맞다고 해도 별로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란 씨는 멀쩡하고- 쳉 대령은 현재 구금되어 조사를 받는 중입니다. 아마도 정신 검진을 먼저 받는 편이 좋을 텐데. 나머지 생존자라면... 뱀 병장 정도 뿐이군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민 중위의 대답. 그에 따르면 멋모르고 우릴 따라왔던 병사들은 모두 한순간에 전사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병장은 무사한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은 분명 멀쩡한 상태와는 거리가 있었다. 섬광과 함께 쓰러지는 그림자가 아직도 생생하다.
"에... 지금 입원중이라고 나와 있네요."
"상태는?"
"대위님 보다는 심할 겁니다. 그대로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니까. 어차피 소속은 여기 부대니까 더 이상 신경쓸 필요는 없어요."
신경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누구 덕분에 살아 돌아왔는데, 저 중위 녀석은 기껏해야 무전기나 붙잡고 있던 주제에. 병장이 살아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상태를 모르니 쉽게 단정할 순 없다. 차라리 안 죽느니만 못한 상태로 후송된 병사들은 숱하게 많이 봤으니까.
"그보다 서란 씨가 참 큰일을 했습니다. 쓰러져 있는 대위님과 병장을 한 손에 하나씩 떠메고 달려 왔거든요. 그 포화 속에서 참 간도 크더만요."
"그렇군. 왠만한 남자래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텐데."
맞장구는 쳐줬지만 여전히 싱글벙글한 민 중위의 얼굴이 보기 싫어 눈을 돌렸다. 서란 녀석. 마을로 도망치랬더니 대령을 두고 다시 돌아 온 모양이다. 도무지 명령이라곤 통하지 않는 여자다. 가만, 이제 목숨 구해줬답시고 더 큰소리 치는 것은 아닐 지 걱정이다. 민 중위는 이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씨익 웃으며 목소리를 낮춘다.
"그리고 대위님 걱정 엄청 하던데요? 왜 병원으로 안 보내느냐고 큰소리 치더니만 지금은 일어나면 배고플 거라고 음식 구하러 나갔어요. 뭐 그래봤자 어디 취사병 협박해서 뺐어 오겠지만 말이죠. 사실 여기 휴대 식량도 있는데 성격도 급하긴... 좀 드실래요?"
"아니, 아무래도 서란 씨가 맛난 걸 가져온 듯 한데."
어느새 트레일러 측면의 자그만한 문 틈으로 서란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사실 민 중위가 목소리를 낮출 무렵 반쯤 열린 문 틈으로 그림자가 보였는데 당황스럽기도 하고 중위가 괘씸한 생각도 들어서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한 손에 들린 반합 속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것으로 보아 뭔가 뜨거운 음식 같은데 저걸 뒤집어 쓰면 민 중위의 뺀질한 얼굴이 터프해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게다. 서란의 눈이 한순간 빤히 쳐다보는 내 눈과 마주치는가 하는 순간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트레일러 안에 울려 퍼졌다.
"누가 이거 준대!!?? 늦잠이나 자는 주제에! 그렇게 먹고 싶으면 나가서 드시지~!"
예상과는 달리 칼날은 민 중위가 아닌 이쪽을 향해 버렸다. 잔뜩 피곤한 얼굴로 화를 내니까 더 무서워 보인다. 씩씩대더니 무서운 눈으로 민 중위를 한번 째려본 서란은 그대로 몸을 홱 돌려서 나가 버린다. 아무튼 서란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성격도 멀쩡한 것 같고.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이 가시지 않는 민 중위의 얼굴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갑자기 목소리가 진지해진다.
"아무튼 희생은 컸지만 결론적으로 작전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놈의 부대에서는 매번 성공만 하는군. 죽은 사람이 말이 없는 덕분에 남은 사람은 성공했다는 뻔뻔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걸 테지.
"이것 참, 목숨 건진데다 성공이라니. 우쭐해지는데."
"일단 이걸로 새로운 외계인 종의 발견이 확정되었거든요."
비꼬는 소리를 단칼에 무시하는 솜씨는 신 대위한테 배운 걸까 아니면 타고난 걸까. 하지만 적어도 민 중위의 얼굴에 웃음기는 가셨다.
"그래, 사람 덩치만한 팔 달린 뱀들은 잘 구경했지."
구경하다가 죽을 뻔하기도 했고. 그러고보니 그런 괴물들이 야밤에 정글 특유의 빽빽한 수풀 속에 모습을 감추고 기어다니다가 덮쳤는데 살아남은 게 용하다. 더구나 광선총까지 쏴대지 않는가, 사격 솜씨가 형편없는 것이 위안이 되지만서도.
"잠정적인 코드명은 스네이크맨. 이곳을 비롯해 주로 정글 지역에서 출몰하고 있으며 조금씩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정밀 분석이 끝나봐야 알겠습니다만 원래 정글 속에 사는 뱀 종류가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해 변이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이번에 전멸한 미군들도 사실 반군과의 전투가 아닌 새로운 외계 종족에 대한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결국 조사는 커녕 놈들 뱃속만 채워 준 꼴이군. 그레이, 뮤톤, 그리고 스네이크맨이라... 네이밍 센스는 엉망이지만 괴물들 종류는 늘어만 간다.
"영 맘에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밤에 우릴 맨 처음 습격한 것은 뱀 괴물들이 아니었어. 병사들이 천막 속에서 동반 자살할 까닭이 뭔지 혹시 아나?"
"봤군요."
머리를 굴리느라 바쁜 듯 민 중위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전에 쳉 대령이 자넬 쏜 것도. 미리 방탄복까지 차려입은 자네가 더 대단하지만 말야."
"뭐 그건 개인적인 원한으로 머리가 돌았다는 정도로 봐도 좋습니다만, 그러기엔 너무 미심쩍죠? 이건 아직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만, 이번 작전에서 실마리는 잡혔습니다."
어느새 자기 페이스를 찾은 민 중위의 손이 키보드를 스치더니 대형 화면을 가득 채우는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보름달로 보아 지난 밤인가 보다. 밤하늘을 볼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 보니 어둠 속에 휘영청 떠 있는 달의 모습은 여유롭기만 하다. 정말 저 달빛 아래서 붉은, 혹은 초록의 피가 땅을 적셨던가.
"미군 정찰용 UAV가 상승기동을 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쪽을 자세히 보시죠."
한참동안 보여줘도 말이 없자 답답한지 민 중위가 손가락을 내밀어 사진 한 구석을 가리켰다. 보름달 구석을 덮고 있는 구름 뭉치...이게 뭔 상관이라는 거지. 중위의 재촉에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구름이 있고... 보름달이 뜨면 사람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말인가?"
"그럼 확대해 보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간단한 조작으로 확대된 사진 속에는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것은 달이나 구름 뿐만이 아니었다. 망토같은 것을 걸친 사람의 실루엣. 하지만 사람은 하늘을 날지 못한다.
"물론 단순한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주변 마을에서 밤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악마들을 봤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그래, 악마라면 날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지.
"그럼 악마들이 사람 정신을 홀려 놓았다는 건가? 거 참 말세군. 차라리 저건 우연히 만들어진 구름 조각일 뿐이고 대령이나 병사들은 과중한 스트레스로 미쳐버렸다는 소리가 더 낫겠군."
하지만 악마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말세라도.
예전같으면 이렇게 속 편한 생각으로 끝을 맺었겠지만, 뱀 괴물까지 본 마당에 무얼 더 못 믿겠는가.
"아무튼 조사는 진행중입니다. 현재까지 연구된 외계인의 두뇌 구조를 볼 때, 어떤 정신적인 힘을 발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만큼 속단은 금물이겠죠. 아, 어젯밤에 두른 머리띠도 외계인 출몰 지점에서 발생되던 주파수 대역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이젠 생물학 분야까지 건드리고 있는지 민 중위는 장황한 설명을 이어나가려는 낌새다. 두껍기만 해 보였던 머리띠에 그런 심오한 기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안 쓴 뱀 병장은 멀쩡하지 않았는가. 하긴, 병장은 원래 머리가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니 또 모를 일이다. 기억나는 건 머리띠를 해도 지독한 두통과 구역질나는 느낌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놈들이 사람 정신을 가지고 놀 수 있다면 그건 광선총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 될 것이다.
계속되는 민 중위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진행된 망상에 슬쩍 몸서리가 쳐졌다. 일단 또 한번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점점 늘어만 가는 놈들의 활동이 본격화된다면 인간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은 우리가 놈들을 분석하며 신기해 하는 중이지만 놈들은 이미 우리를 가지고 노는 중일지도 모른다.
.
..
...
한국으로 돌아오는 군용 수송기 안에 탄 일행의 숫자는 올 때보다 늘어 있었다. 나와 서란에 더해 민 중위, 그리고 뱀 병장. 정부군과 반군 양쪽에 대한 무기 수출 건이 잘 풀렸는지 민 중위는 흡족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 있다.
그 많던 스프를 혼자 다 먹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째려보던 서란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다. 취사 담당 장교한테 한 소리라도 들었나. 강화복 덕을 톡톡히 봐서 그런지 그녀는 지난 며칠동안 강화복 조종 연습에 전념했다. 저러다 전속 강화복 운용 요원으로 정해지면 고생길이 훤하다. 하지만 뭔가에 집중하며 땀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은 낯설 뿐만 아니라 왠지 대견하기도 했다. 하긴, 돈 주고도 볼 수 없을 테니.
제일 구석 자리에 앉은 붕대 투성이의 뱀 병장은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퇴원한 병장은 얼핏 봐선 멀쩡해 보였다. 얼굴에 몇 개 더 생긴 흉터는 박력을 조금 더해줬을 뿐이고.
마지막에 맞은 광선은 그저 스쳤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듬직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짧아진 오른쪽 팔뚝은 왠지 신경쓰인다.
그날 밤, 뱀들과의 싸움에서 그는 팔목 뿐만 아니라 또 무언가를 잃은 것이 틀림없다. 돌연 한국 행과 동시에 우리 과로의 전입을 희망한 것을 보면... 질리도록 괴물과 상대할 수 있다는 서란의 농담에 끌린 걸까. 결정은 상부에서 할 일이지만 인도차이나 파병부대에서의 전설은 금방 잊혀질 가능성이 높다.
대신 앞으로 정보국 말단과의 또 다른 괴짜로서 이름을 날리겠지. 불길한 생각과 함께 바라보는 창 밖의 풍경은 머리 속과는 달리 한없이 맑고 푸른 하늘 뿐이다.
뜨거운 열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정글은 불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의 점들이 속속 불을 밝히면서 퍼져 나가는 모습은 마치 불꽃놀이를 연상시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통 새하얀 빛이 어둠을 집어삼켰다. 차이라면 하늘 대신 대지를 불사르는 것이랄까.
"해상도가 생각보다 괜찮군요. 시야도 상당히 넓고."
그래. 그리고 저 넓은 공간 어딘가에 내가 있었지. 불장난은 언제나 구경하는 사람들만 재미있을 뿐이다.
"무인 항공기과 무인화된 포대의 결합이라... 이게 저래 보여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조종하고 있는 거란 말이죠. 이런거면 인명 피해나 지지율 하락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기술 발전이란 무섭네요."
그 잘난 기술의 피해자가 될 뻔한 사람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말을 하는 인간이 더 무서운 것 아닐까. 녹화된 화면을 바라보며 신이 나서 떠드는 민 중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억지로 입을 움직일 가치도 없다.
정신이 들고 보니 민 중위 취향의 인테리어로 꾸며진 트레일러 안이었다. 간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보니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는 각종 기계류와 깔끔한 평면 디스플레이의 은은한 불빛들이 반겨 주었다. 멍한 상태에서 들은 설명에 의하면 야밤의 기습을 당하자 마자 민 중위가 이곳 본부에 지원을 요청한 덕에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참 시기 적절하게 근방에 배치된 미군 포대에서 무인 항공기의 정찰을 앞세우고 사격을 가해 준 것이다. 공식적으로 약간의 경비 병력 외에는 완전히 철수했다고 하는 미군이었지만 철수한 것은 말 그대로 총을 든 인간 뿐, 최첨단의 무인항공기 및 거의 무인화가 완료된 포대로 구성된 전력이 그것을 대체하여 더이상 얻을 것 없는 이 전쟁에서 새로운 장난감을 실험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바로 그런 장난감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기분나쁜 일이었지만 야간에, 그것도 기습 이후에 그처럼 실시간으로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뭔가 일이 터질 것이라는 사실을 민 중위는 미리 알고 있었다. 녀석 말이 맞다고 해도 별로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란 씨는 멀쩡하고- 쳉 대령은 현재 구금되어 조사를 받는 중입니다. 아마도 정신 검진을 먼저 받는 편이 좋을 텐데. 나머지 생존자라면... 뱀 병장 정도 뿐이군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민 중위의 대답. 그에 따르면 멋모르고 우릴 따라왔던 병사들은 모두 한순간에 전사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병장은 무사한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은 분명 멀쩡한 상태와는 거리가 있었다. 섬광과 함께 쓰러지는 그림자가 아직도 생생하다.
"에... 지금 입원중이라고 나와 있네요."
"상태는?"
"대위님 보다는 심할 겁니다. 그대로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니까. 어차피 소속은 여기 부대니까 더 이상 신경쓸 필요는 없어요."
신경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누구 덕분에 살아 돌아왔는데, 저 중위 녀석은 기껏해야 무전기나 붙잡고 있던 주제에. 병장이 살아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상태를 모르니 쉽게 단정할 순 없다. 차라리 안 죽느니만 못한 상태로 후송된 병사들은 숱하게 많이 봤으니까.
"그보다 서란 씨가 참 큰일을 했습니다. 쓰러져 있는 대위님과 병장을 한 손에 하나씩 떠메고 달려 왔거든요. 그 포화 속에서 참 간도 크더만요."
"그렇군. 왠만한 남자래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텐데."
맞장구는 쳐줬지만 여전히 싱글벙글한 민 중위의 얼굴이 보기 싫어 눈을 돌렸다. 서란 녀석. 마을로 도망치랬더니 대령을 두고 다시 돌아 온 모양이다. 도무지 명령이라곤 통하지 않는 여자다. 가만, 이제 목숨 구해줬답시고 더 큰소리 치는 것은 아닐 지 걱정이다. 민 중위는 이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씨익 웃으며 목소리를 낮춘다.
"그리고 대위님 걱정 엄청 하던데요? 왜 병원으로 안 보내느냐고 큰소리 치더니만 지금은 일어나면 배고플 거라고 음식 구하러 나갔어요. 뭐 그래봤자 어디 취사병 협박해서 뺐어 오겠지만 말이죠. 사실 여기 휴대 식량도 있는데 성격도 급하긴... 좀 드실래요?"
"아니, 아무래도 서란 씨가 맛난 걸 가져온 듯 한데."
어느새 트레일러 측면의 자그만한 문 틈으로 서란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사실 민 중위가 목소리를 낮출 무렵 반쯤 열린 문 틈으로 그림자가 보였는데 당황스럽기도 하고 중위가 괘씸한 생각도 들어서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한 손에 들린 반합 속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것으로 보아 뭔가 뜨거운 음식 같은데 저걸 뒤집어 쓰면 민 중위의 뺀질한 얼굴이 터프해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게다. 서란의 눈이 한순간 빤히 쳐다보는 내 눈과 마주치는가 하는 순간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트레일러 안에 울려 퍼졌다.
"누가 이거 준대!!?? 늦잠이나 자는 주제에! 그렇게 먹고 싶으면 나가서 드시지~!"
예상과는 달리 칼날은 민 중위가 아닌 이쪽을 향해 버렸다. 잔뜩 피곤한 얼굴로 화를 내니까 더 무서워 보인다. 씩씩대더니 무서운 눈으로 민 중위를 한번 째려본 서란은 그대로 몸을 홱 돌려서 나가 버린다. 아무튼 서란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성격도 멀쩡한 것 같고.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이 가시지 않는 민 중위의 얼굴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갑자기 목소리가 진지해진다.
"아무튼 희생은 컸지만 결론적으로 작전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놈의 부대에서는 매번 성공만 하는군. 죽은 사람이 말이 없는 덕분에 남은 사람은 성공했다는 뻔뻔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걸 테지.
"이것 참, 목숨 건진데다 성공이라니. 우쭐해지는데."
"일단 이걸로 새로운 외계인 종의 발견이 확정되었거든요."
비꼬는 소리를 단칼에 무시하는 솜씨는 신 대위한테 배운 걸까 아니면 타고난 걸까. 하지만 적어도 민 중위의 얼굴에 웃음기는 가셨다.
"그래, 사람 덩치만한 팔 달린 뱀들은 잘 구경했지."
구경하다가 죽을 뻔하기도 했고. 그러고보니 그런 괴물들이 야밤에 정글 특유의 빽빽한 수풀 속에 모습을 감추고 기어다니다가 덮쳤는데 살아남은 게 용하다. 더구나 광선총까지 쏴대지 않는가, 사격 솜씨가 형편없는 것이 위안이 되지만서도.
"잠정적인 코드명은 스네이크맨. 이곳을 비롯해 주로 정글 지역에서 출몰하고 있으며 조금씩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정밀 분석이 끝나봐야 알겠습니다만 원래 정글 속에 사는 뱀 종류가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해 변이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이번에 전멸한 미군들도 사실 반군과의 전투가 아닌 새로운 외계 종족에 대한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결국 조사는 커녕 놈들 뱃속만 채워 준 꼴이군. 그레이, 뮤톤, 그리고 스네이크맨이라... 네이밍 센스는 엉망이지만 괴물들 종류는 늘어만 간다.
"영 맘에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밤에 우릴 맨 처음 습격한 것은 뱀 괴물들이 아니었어. 병사들이 천막 속에서 동반 자살할 까닭이 뭔지 혹시 아나?"
"봤군요."
머리를 굴리느라 바쁜 듯 민 중위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전에 쳉 대령이 자넬 쏜 것도. 미리 방탄복까지 차려입은 자네가 더 대단하지만 말야."
"뭐 그건 개인적인 원한으로 머리가 돌았다는 정도로 봐도 좋습니다만, 그러기엔 너무 미심쩍죠? 이건 아직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만, 이번 작전에서 실마리는 잡혔습니다."
어느새 자기 페이스를 찾은 민 중위의 손이 키보드를 스치더니 대형 화면을 가득 채우는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보름달로 보아 지난 밤인가 보다. 밤하늘을 볼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 보니 어둠 속에 휘영청 떠 있는 달의 모습은 여유롭기만 하다. 정말 저 달빛 아래서 붉은, 혹은 초록의 피가 땅을 적셨던가.
"미군 정찰용 UAV가 상승기동을 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쪽을 자세히 보시죠."
한참동안 보여줘도 말이 없자 답답한지 민 중위가 손가락을 내밀어 사진 한 구석을 가리켰다. 보름달 구석을 덮고 있는 구름 뭉치...이게 뭔 상관이라는 거지. 중위의 재촉에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구름이 있고... 보름달이 뜨면 사람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말인가?"
"그럼 확대해 보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간단한 조작으로 확대된 사진 속에는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것은 달이나 구름 뿐만이 아니었다. 망토같은 것을 걸친 사람의 실루엣. 하지만 사람은 하늘을 날지 못한다.
"물론 단순한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주변 마을에서 밤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악마들을 봤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그래, 악마라면 날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지.
"그럼 악마들이 사람 정신을 홀려 놓았다는 건가? 거 참 말세군. 차라리 저건 우연히 만들어진 구름 조각일 뿐이고 대령이나 병사들은 과중한 스트레스로 미쳐버렸다는 소리가 더 낫겠군."
하지만 악마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말세라도.
예전같으면 이렇게 속 편한 생각으로 끝을 맺었겠지만, 뱀 괴물까지 본 마당에 무얼 더 못 믿겠는가.
"아무튼 조사는 진행중입니다. 현재까지 연구된 외계인의 두뇌 구조를 볼 때, 어떤 정신적인 힘을 발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만큼 속단은 금물이겠죠. 아, 어젯밤에 두른 머리띠도 외계인 출몰 지점에서 발생되던 주파수 대역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이젠 생물학 분야까지 건드리고 있는지 민 중위는 장황한 설명을 이어나가려는 낌새다. 두껍기만 해 보였던 머리띠에 그런 심오한 기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안 쓴 뱀 병장은 멀쩡하지 않았는가. 하긴, 병장은 원래 머리가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니 또 모를 일이다. 기억나는 건 머리띠를 해도 지독한 두통과 구역질나는 느낌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놈들이 사람 정신을 가지고 놀 수 있다면 그건 광선총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 될 것이다.
계속되는 민 중위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진행된 망상에 슬쩍 몸서리가 쳐졌다. 일단 또 한번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점점 늘어만 가는 놈들의 활동이 본격화된다면 인간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은 우리가 놈들을 분석하며 신기해 하는 중이지만 놈들은 이미 우리를 가지고 노는 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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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오는 군용 수송기 안에 탄 일행의 숫자는 올 때보다 늘어 있었다. 나와 서란에 더해 민 중위, 그리고 뱀 병장. 정부군과 반군 양쪽에 대한 무기 수출 건이 잘 풀렸는지 민 중위는 흡족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 있다.
그 많던 스프를 혼자 다 먹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째려보던 서란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다. 취사 담당 장교한테 한 소리라도 들었나. 강화복 덕을 톡톡히 봐서 그런지 그녀는 지난 며칠동안 강화복 조종 연습에 전념했다. 저러다 전속 강화복 운용 요원으로 정해지면 고생길이 훤하다. 하지만 뭔가에 집중하며 땀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은 낯설 뿐만 아니라 왠지 대견하기도 했다. 하긴, 돈 주고도 볼 수 없을 테니.
제일 구석 자리에 앉은 붕대 투성이의 뱀 병장은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퇴원한 병장은 얼핏 봐선 멀쩡해 보였다. 얼굴에 몇 개 더 생긴 흉터는 박력을 조금 더해줬을 뿐이고.
마지막에 맞은 광선은 그저 스쳤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듬직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짧아진 오른쪽 팔뚝은 왠지 신경쓰인다.
그날 밤, 뱀들과의 싸움에서 그는 팔목 뿐만 아니라 또 무언가를 잃은 것이 틀림없다. 돌연 한국 행과 동시에 우리 과로의 전입을 희망한 것을 보면... 질리도록 괴물과 상대할 수 있다는 서란의 농담에 끌린 걸까. 결정은 상부에서 할 일이지만 인도차이나 파병부대에서의 전설은 금방 잊혀질 가능성이 높다.
대신 앞으로 정보국 말단과의 또 다른 괴짜로서 이름을 날리겠지. 불길한 생각과 함께 바라보는 창 밖의 풍경은 머리 속과는 달리 한없이 맑고 푸른 하늘 뿐이다.
안녕하세요?
다음화가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