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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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COM : Self Defense #026
1999년 4월 22일.
어렴풋이 흔들리는 헬기 동체의 움직임은 창 안쪽으로 스며드는 밤의 어둠과 함께 묘한 안정감을 선사해 주었다. 창 밖으로 붉게 타오르던 연구소는 점점 작은 한 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마도 다른 헬기들인 듯 주변을 맴돌던 낯선 불빛들도 함께 꺼져갔다.
얼마나 많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함께 저곳에 있었던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참 다양한 경험이었다. 하얀 가운, 검은 양복에다가 마지막으로 눈앞에 있는 유령같은 회색 군복까지. 머리 속에 뚜렷하게 각인된 색깔들만으로는 누가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할 수 없다. 하지만 상대가 지구를 딛고 살건 뜬금없이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이건 간에 만남 끝에 남은 것은 피로 얼룩진 바닥 뿐이다.
유일하게 알아낸 사실은 소녀를 빼앗으려는 존재는 단지 괴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실은 온통 괴물들 천지인지도 모르겠다. 외계인보다 더 끔찍한 자들이 있었으니까. 미치광이 박사와 조수, 배신자 그리고 잘 차려입은 살인자들. 괴물을 다루기 위해서 괴물이 되어버린 걸까. 아니면 본성이라고 마음 편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지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외계인의 추악한 생김새를 보고서 분명 치를 떨겠지만 입장을 바꿔보면 사실 인간도 별로 자랑할만한 모양새는 아닌 것을.
"이봐, 설마 대답 안 해준다고 삐진 건 아니겠지."
작아지는 불빛과는 달리 커져만 가는 암울한 생각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미하일이 말을 걸어왔다. 다시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줄 거면서. 어떤 일을 해 왔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오랜 피로에 찌든 듯한 그의 얼굴에 갑자기 장난기가 엿보였다.
"그나저나 가족 여행이라도 온 것 같구만. 부인께선 어디 불편하기라도 한 건가?"
미하일이 서란과 소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지저분하게 자란 턱수염을 긁적이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단순히 오랜 침묵이 참을 수 없었던 듯 하다.
가족이라. 하긴 서란에다가 소녀까지 더해 셋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 제법 오해할만한 풍경이 될 만도 하다.
"걱정해줘서 참 고맙군요."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이쪽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기도 하다. 침묵을 깬 서란의 유창한 말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다만 불편이라기보다는 불만이 가득찬 표정-주변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을 짓고 있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을 뿐.
"그런데 그렇게 심심하면 옆에 계신 숙녀분이랑 얘기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아, 손녀분이시던가?"
반대편에 나란히 앉은 미하일과 스베틀라냐를 바라보며 서란이 쏘아 붙였다. 할아버지와 손녀라, 뭐 그 정도로 늙어보이지는 않는데. 하지만 머릿속이 어떻든간에 이미 지어버린 입가의 웃음을 수습하기는 참 힘든 일이다.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미하일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스베틀라냐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눈을 감는 정도다. 아무래도 무슨 짓을 해도 꿈쩍도 안할 태세다.
여하튼 서란 덕분에 조용한 비행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도가 내려가는 감각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일깨워주었다. 졸린 눈으로 내다본 밖은 여전히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씩 지상에 수놓여진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십자 모양으로 점점이 박혀 있는 불빛은 분명 착륙을 위한 것이겠지만, 마치 천국의 문이라도 되는 양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하도 이상한 일을 많이 겪어서 머리가 이상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란은 아무 말 없이 팔 하나를 걸친 채 창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는 처음부터 계속 눈을 감은 채다.
...
..
.
고요했던 비행시와 마찬가지로 깃털처럼 조용히 내려앉는 헬기는 정말 신기술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나와 자네만 가자구."
제일 먼저 내릴 채비를 갖춘 미하일이 바깥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이 아저씨, 이 사람보다는 내가 전문가라는 거 딱 보면 몰라요? 저 남자는 말도 제대로 못 꺼낼 텐데."
역시 서란이 가만 있지 않았다. 아마 처음부터 도착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하일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위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전문가라는 것은 사실이니까. 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사건 끝에 받은 초대에 제대로 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저 아이만이라도 두고 가지. 걱정 마, 스베틀라냐가 잘 돌볼 테니."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반응이다. 아무래도 서란보다는 소녀를 의식하고 있었던 걸까. 미리 생각을 단단히 해 놓은 것인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것인지 서란은 대답도 없이 헬기 밖으로 펄쩍 뛰어 내렸다. 모르긴 몰라도 미하일도 상당히 소녀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떻든간에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암묵적인 합의라도 본 모양이다.
"이거야 원, 다들 도무지 일정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군요."
먼 길 날아온 손님을 맞이한 것은 따뜻한 환영 인사가 아니라 안내역을 맡은 젊은 대위의 볼멘 소리였다. 초대한 것은 그쪽이면서. 적반 하장이다.독일 연방 군복 차림의 안내 장교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는 기색도 하나 없이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상당히 넓은 착륙장에 줄지어 서 있는 헬기들은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직 페인트 칠을 하지 않은 것이라 믿고 싶은 우중충한 회색 벽 투성이의 허름한 건물 안에서 미리 온 손님들을 볼 수 있었다.
이리저리 대충 놓여진 탁자와 의자들, 그리고 앞쪽의 단상 빼고는 널찍한 창고를 연상시키는 그 곳은 한창 무슨 강연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졸지에 지각생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신경쓰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단상을 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곳은 시작일 뿐입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 울려 퍼지는 것은 기분나쁠 정도로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단상 위의 말끔하게 생긴 젊은이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전 세계에 걸쳐 지구적 규모의 새로운 방위 체제가 설립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유엔의 승인을 통한 정식 기관이 될 것이며...기존의 국가 단위 군사 시설을 최초의 기반으로 활용하여..."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젊은이의 뒤쪽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최첨단의 디스플레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슨 광고라도 틀어주는 듯 했지만 맨 뒤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상 마주친 가장 강력한 적에 맞서기 위한 조직으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조직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마치 약장수라도 되는 듯한 말투다. 머뭇거리는 듯한 정적 후에는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약장수라도 되는 듯한 말이군."
서란이 중얼거렸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잔뜩 찡그린 표정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미하일에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어서 이런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데려 온 이유나 설명해 주시죠."
"그리고 그 빌어먹을 연구소에 대해서도."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아내야 겠다는 데에선 모처럼 서란과 생각이 일치했다. 사실 묻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밤중에 벌어지고 있는 이 기묘한 집회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얘기는 천천히 하자고. 어차피 이제 모임도 거의 다 끝난 모양이니."
왠지 시간을 끄는 듯한 태도였지만 미하일의 말대로 단상 위의 젊은이는 할 말을 다 마친 모양이었다. 그가 자리를 뜨자 창고 안은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모여 있던 제각기 다른 제복을 갖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역시 다양한 언어로 지껄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 보니 이젠 눈에 익숙한 온통 검정 일색의 무리 몇몇도 끼어 있는 듯 했다. 아무래도 어두운 조명은 의도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일은 잘 마무리 된 건가?"
뭐라고 더 재촉하기도 전에 선수를 빼앗겼다. 미하일과 똑같은 회색 군복 차림의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 온 것이다.
"오랜만이군, 파벨. 나야 항상 그렇지 뭐.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준비가 끝나 가는 모양이군."
"아직 멀었어. 이 기지만 해도 공사가 한참 남았으니까.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질 걸세."
"공사보다 얼른 정식 제복이나 맞춰줬으면 좋겠군. 이 작업복같은 꼴이 뭔가."
"하하. 여전하구만. 아무튼 곧 레닌그라드에서도 연락이 올 테니 기다리고 있게나."
순식간에 말을 던진 남자는 뭐가 그리 바쁜지 금방 다른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미하일은 계속 입가에 미소를 띤 채다.
"아, 신경쓰지마. 너무 일에 빠져 살기는 해도 성실한 녀석이니까."
"말 안해도 신경 안 쓰니까 대답이나 해요."
"...흔한 일이지."
서란의 재촉을 견디지 못해서일까, 미하일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배신자 색출 따위는 말야. 베링하임 연구소는 분명 우리측의 지원 업체-위탁 업체라고 하던가-중 하나였는데, 최근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더군. 하라는 연구는 안하고 엉뚱한 짓을 벌이고 있다고... 아마 지그문트 박사가 욕심이 과했던 게지."
"밑도 끝도 없이 대체 무슨 소리예요?"
"외계인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두 가지로 나뉘지. 먼저 그들에 맞서 싸우려는 쪽. 그리고 그들을 이용하려는 쪽. 뭐 전자와 후자가 꼭 다른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은 후자를 처리하는 일이었다는 말일세."
서란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의지는 감탄을 부를 만 했다. 하지만 너무 단순한 이분법 아닌가. 갑자기 출처를 알 수 없는 반발심이 치솟아 올랐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어. 공식 발표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지. 그리고 그 전에..."
"하지만 우리는 연구소에서 망할 외계인이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것까지 봤다고!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리고 실험관 속에 있는 외계인 행세 중인 인간도 봤지. 서란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지기 시작했다. 신경쓰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다.
"그 전에 인류는 단결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 사전 준비 작업을 하는 중이고. 연구소에서 어떤 연구가 벌어지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몰라. 난 싸우는 쪽에 속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외계인에게 조종당하는 인간 이야기라면 자주 들어본 적이 있지."
계속되는 서란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미하일은 자신이 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외계인이 인간을 조종한다니. 놈들은 그저 죽일 줄만 아는 게 아니었나? 처음 듣는 소리라고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저 잔뜩 기분나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결국 당신도 말단이라 이거군. 흥, 그럼 이 곳은 그 잘난 싸움꾼들이 만든 비밀 기지라도 되는 건가?"
"인류의 미래가 달린 곳이야.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말라구. 완공은 아직이지만 이곳은 좋은 샘플이 되고 있어. 뭐니뭐니해도 미 본토를 빼자면 해외의 첫 기지나 다름없으니까. 이 밤중에 여기 모인 이유는 런던 테러의 여파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세계 각국에 제2, 제3의 기지를 유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네."
"아니면 최소한 지원 약속이라도 받아 내야겠지."
어디선가 들어 본 억양이 대화를 방해했다. 쏘아붙이는 서란과 느긋하게 답하는 미하일의 전투가 막 달아오를 무렵 제3의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감도는 기분나쁜 정적.
"즐거운 대화를 방해했다면 미안하네. 워낙 심심해서 말야."
단체로 맞추기라도 한 듯한 검정 양복, 어두운 조명을 의식해서인지 다행히 선글라스는 끼지 않았다. 은은한 조명에 살짝 보이는 갈색 턱수염에 푸른 눈의 남자는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세계 각국의 정보원들끼리 축제라도 벌이면 모를까, 이런 장례식장 같은 모임은 따분할 뿐이지. 하긴, 축제를 해도 마찬가지겠군."
기념으로 한 잔 하기라도 한 건지 듣는 사람은 생각도 않고 계속 말을 해댄다. 중년 사내의 이름은 제럴드. 벌써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엉겁결에 처음 정보국에 왔을 때 신 대위의 브리핑을 함께 받은 적이 있었다.
"음, 그러고보니 이쪽 분들은 동양에서 오셨나? 참 멀리서도 왔구만."
"난 원래부터 독일에 있었는데. 그나저나 아저씨는 뭔데 남 이야기에 끼어들고..."
"그쪽도 멀리서 오긴 마찬가진 거 같습니다만, 제럴드 씨."
벌써 잊어버린 걸까. 하긴, 그때는 일개 증인에 불과했으니까. 서란의 날카로운 신경이 엉뚱한 희생양을 찾을까봐 먼저 아는 척을 해 버렸다. 그러고보니 미 국가안보국에서도 극동 전문가라고 했던가. 별로 관심은 없지만 그 정도 직책의 사람까지 모인 것을 보면 오늘의 집회는 꽤나 거창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이름을 알다니 이거 정말 영광이군요. 동양이라면...조만간에 또 볼 일이 있겠군. 누가뭐래도 이건 세계적인 프로젝트가 될 테니까."
"별로 또 보고 싶은 생각은 안 생기는데요."
"좋든싫든 다음에 보세. 어차피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처지니 말일세."
서란의 비아냥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제럴드는 제 할 말만 다하고 사라졌다. 오랜만이었지만 반갑지 않은 사람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뭐야, 저 아저씨는. 괜히 끼어들어서는. 아는 사람이야?"
결국 만남의 소득은 서란의 화풀이 상대를 전환시킨 것밖엔 없는 듯 하다. 서란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나도모르게 입이 열렸다.
"미하일, 그렇다면 연구소로 먼저 쳐들어 온 미국 요원들은 뭐죠? 그 자들이 몰래 잠입해서 박사를 살해했는데 그들도 한패인가."
하고싶은 질문은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이 점차 창고, 아니 강연장 겸 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곳곳에 널린 테이블에는 빈 병들과 담배꽁초가 그득한 재떨이가 대신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젊은 친구.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곤 이정도 뿐이야. 아무리 이 구질구질한 분야에서 잔뼈가 굵더라도.. 그래, 저 아가씨 말처럼 말단은 아는 게 없지."
미하일의 표정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넘겨도 역시 서란의 공격에 타격이라도 입은 모양이다.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 맞겠군.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네. 외계인은 인간의 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이쪽에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한다. 내가 아는 건 그 뿐. 아니, 더이상 알아서 무엇 하겠나. 자네들도 외계인에 의한 참상을 봤을 텐데? 이건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중대한 전쟁이라네. 일일이 물어가면서 싸울 순 없어."
그렇다고 정말 어떤 수단이라도 가능한 걸까. 아니 그보다도 이유를 모른 채 싸우는 게 가능이나 할까? 글쎄,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인간들끼리 벌인 전쟁들을 보면 말이다.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외계인을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괴물로만 정의내리고 있을 테니까. 갑자기 연구소에서 소녀가 했던 불길한 말들이 생각났다. 서란이 연구소의 실험에 대해 재차 질문 공세를 펴기 시작하고 미하일은 계속 영양가 없는 답변을 해댔지만 더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놈의 전쟁은 인간 상대만으로도 너무나 복잡한 것인데, 망할 외계인까지 생각하는 건 역시 무리다.
어쨋든 소녀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물론 바보가 아닌 이상 미하일도 소녀의 존재에 대해 어느정도 의구심은 품고 있겠지만, 자세한 내막은 이쪽과 마찬가지로 그쪽도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 상태라면 최소한 비길 수는 있다.
아마도 다시 기지로 복귀하면 더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연구소에서 그 아이가 보인 일련의 이상한 행동들을 믿을지가 문제겠지만. 그 다음 일은 연구진들에게 맡길 뿐이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소녀와 함께 무사히 복귀하는 것이다.
기분탓이겠지만 더욱 짙어진 어둠 속에 타고 온 헬기는 그대로 있었다.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헬기 벽에 기대 앉은 채로 그대로 잠들어 있는 소녀는 회색 점퍼를 이불삼아 덮고 있었다. 스베틀라냐도 그 바로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벗어준 걸까. 아까와 전혀 다름없는 무뚝뚝한 자세이기에 알아채기 힘들다.
아무려면 어떤가. 별빛조차 드문 밤하늘에는 하나 둘 인공의 불빛들이 수를 놓는 중이었다. 돌아가는 손님들이리라. 우리도 이제 또 하나의 별이 될 시간이다.
모처럼의 외국 출장이 단 하루만에 끝장난 셈이지만 남은 미련이 한톨이라도 있을 턱이 없다. 오히려 짧아진 것을 감사할 지경이다. 항상 그렇듯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면 남는 것은 피로뿐이다. 헬기는 착륙시와 같이 조용한 진동음과 함께 조금씩 떠올랐다. 여전히 어둠만이 가득한 창 너머로 오면서 보았던 착륙 지시등이 다시금 반짝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지상에 뜬 저 아름다운 별빛은 결국 앞으로 시작될-미하일에 따르면 벌써 시작해버린-전쟁의 신호일 뿐이겠지. 다들 똑같이 착잡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몰라도 헬기 안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씁쓸한 고요로 가득 차 버렸다.
1999년 4월 22일.
어렴풋이 흔들리는 헬기 동체의 움직임은 창 안쪽으로 스며드는 밤의 어둠과 함께 묘한 안정감을 선사해 주었다. 창 밖으로 붉게 타오르던 연구소는 점점 작은 한 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마도 다른 헬기들인 듯 주변을 맴돌던 낯선 불빛들도 함께 꺼져갔다.
얼마나 많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함께 저곳에 있었던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참 다양한 경험이었다. 하얀 가운, 검은 양복에다가 마지막으로 눈앞에 있는 유령같은 회색 군복까지. 머리 속에 뚜렷하게 각인된 색깔들만으로는 누가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할 수 없다. 하지만 상대가 지구를 딛고 살건 뜬금없이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이건 간에 만남 끝에 남은 것은 피로 얼룩진 바닥 뿐이다.
유일하게 알아낸 사실은 소녀를 빼앗으려는 존재는 단지 괴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실은 온통 괴물들 천지인지도 모르겠다. 외계인보다 더 끔찍한 자들이 있었으니까. 미치광이 박사와 조수, 배신자 그리고 잘 차려입은 살인자들. 괴물을 다루기 위해서 괴물이 되어버린 걸까. 아니면 본성이라고 마음 편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지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외계인의 추악한 생김새를 보고서 분명 치를 떨겠지만 입장을 바꿔보면 사실 인간도 별로 자랑할만한 모양새는 아닌 것을.
"이봐, 설마 대답 안 해준다고 삐진 건 아니겠지."
작아지는 불빛과는 달리 커져만 가는 암울한 생각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미하일이 말을 걸어왔다. 다시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줄 거면서. 어떤 일을 해 왔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오랜 피로에 찌든 듯한 그의 얼굴에 갑자기 장난기가 엿보였다.
"그나저나 가족 여행이라도 온 것 같구만. 부인께선 어디 불편하기라도 한 건가?"
미하일이 서란과 소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지저분하게 자란 턱수염을 긁적이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단순히 오랜 침묵이 참을 수 없었던 듯 하다.
가족이라. 하긴 서란에다가 소녀까지 더해 셋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 제법 오해할만한 풍경이 될 만도 하다.
"걱정해줘서 참 고맙군요."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이쪽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기도 하다. 침묵을 깬 서란의 유창한 말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다만 불편이라기보다는 불만이 가득찬 표정-주변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을 짓고 있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을 뿐.
"그런데 그렇게 심심하면 옆에 계신 숙녀분이랑 얘기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아, 손녀분이시던가?"
반대편에 나란히 앉은 미하일과 스베틀라냐를 바라보며 서란이 쏘아 붙였다. 할아버지와 손녀라, 뭐 그 정도로 늙어보이지는 않는데. 하지만 머릿속이 어떻든간에 이미 지어버린 입가의 웃음을 수습하기는 참 힘든 일이다.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미하일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스베틀라냐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눈을 감는 정도다. 아무래도 무슨 짓을 해도 꿈쩍도 안할 태세다.
여하튼 서란 덕분에 조용한 비행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도가 내려가는 감각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일깨워주었다. 졸린 눈으로 내다본 밖은 여전히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씩 지상에 수놓여진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십자 모양으로 점점이 박혀 있는 불빛은 분명 착륙을 위한 것이겠지만, 마치 천국의 문이라도 되는 양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하도 이상한 일을 많이 겪어서 머리가 이상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란은 아무 말 없이 팔 하나를 걸친 채 창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는 처음부터 계속 눈을 감은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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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했던 비행시와 마찬가지로 깃털처럼 조용히 내려앉는 헬기는 정말 신기술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나와 자네만 가자구."
제일 먼저 내릴 채비를 갖춘 미하일이 바깥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이 아저씨, 이 사람보다는 내가 전문가라는 거 딱 보면 몰라요? 저 남자는 말도 제대로 못 꺼낼 텐데."
역시 서란이 가만 있지 않았다. 아마 처음부터 도착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하일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위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전문가라는 것은 사실이니까. 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사건 끝에 받은 초대에 제대로 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저 아이만이라도 두고 가지. 걱정 마, 스베틀라냐가 잘 돌볼 테니."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반응이다. 아무래도 서란보다는 소녀를 의식하고 있었던 걸까. 미리 생각을 단단히 해 놓은 것인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것인지 서란은 대답도 없이 헬기 밖으로 펄쩍 뛰어 내렸다. 모르긴 몰라도 미하일도 상당히 소녀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떻든간에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암묵적인 합의라도 본 모양이다.
"이거야 원, 다들 도무지 일정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군요."
먼 길 날아온 손님을 맞이한 것은 따뜻한 환영 인사가 아니라 안내역을 맡은 젊은 대위의 볼멘 소리였다. 초대한 것은 그쪽이면서. 적반 하장이다.독일 연방 군복 차림의 안내 장교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는 기색도 하나 없이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상당히 넓은 착륙장에 줄지어 서 있는 헬기들은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직 페인트 칠을 하지 않은 것이라 믿고 싶은 우중충한 회색 벽 투성이의 허름한 건물 안에서 미리 온 손님들을 볼 수 있었다.
이리저리 대충 놓여진 탁자와 의자들, 그리고 앞쪽의 단상 빼고는 널찍한 창고를 연상시키는 그 곳은 한창 무슨 강연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졸지에 지각생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신경쓰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단상을 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곳은 시작일 뿐입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 울려 퍼지는 것은 기분나쁠 정도로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단상 위의 말끔하게 생긴 젊은이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전 세계에 걸쳐 지구적 규모의 새로운 방위 체제가 설립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유엔의 승인을 통한 정식 기관이 될 것이며...기존의 국가 단위 군사 시설을 최초의 기반으로 활용하여..."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젊은이의 뒤쪽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최첨단의 디스플레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슨 광고라도 틀어주는 듯 했지만 맨 뒤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상 마주친 가장 강력한 적에 맞서기 위한 조직으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조직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마치 약장수라도 되는 듯한 말투다. 머뭇거리는 듯한 정적 후에는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약장수라도 되는 듯한 말이군."
서란이 중얼거렸다.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잔뜩 찡그린 표정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미하일에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어서 이런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데려 온 이유나 설명해 주시죠."
"그리고 그 빌어먹을 연구소에 대해서도."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아내야 겠다는 데에선 모처럼 서란과 생각이 일치했다. 사실 묻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밤중에 벌어지고 있는 이 기묘한 집회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얘기는 천천히 하자고. 어차피 이제 모임도 거의 다 끝난 모양이니."
왠지 시간을 끄는 듯한 태도였지만 미하일의 말대로 단상 위의 젊은이는 할 말을 다 마친 모양이었다. 그가 자리를 뜨자 창고 안은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모여 있던 제각기 다른 제복을 갖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역시 다양한 언어로 지껄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 보니 이젠 눈에 익숙한 온통 검정 일색의 무리 몇몇도 끼어 있는 듯 했다. 아무래도 어두운 조명은 의도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일은 잘 마무리 된 건가?"
뭐라고 더 재촉하기도 전에 선수를 빼앗겼다. 미하일과 똑같은 회색 군복 차림의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 온 것이다.
"오랜만이군, 파벨. 나야 항상 그렇지 뭐.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준비가 끝나 가는 모양이군."
"아직 멀었어. 이 기지만 해도 공사가 한참 남았으니까.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질 걸세."
"공사보다 얼른 정식 제복이나 맞춰줬으면 좋겠군. 이 작업복같은 꼴이 뭔가."
"하하. 여전하구만. 아무튼 곧 레닌그라드에서도 연락이 올 테니 기다리고 있게나."
순식간에 말을 던진 남자는 뭐가 그리 바쁜지 금방 다른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미하일은 계속 입가에 미소를 띤 채다.
"아, 신경쓰지마. 너무 일에 빠져 살기는 해도 성실한 녀석이니까."
"말 안해도 신경 안 쓰니까 대답이나 해요."
"...흔한 일이지."
서란의 재촉을 견디지 못해서일까, 미하일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배신자 색출 따위는 말야. 베링하임 연구소는 분명 우리측의 지원 업체-위탁 업체라고 하던가-중 하나였는데, 최근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더군. 하라는 연구는 안하고 엉뚱한 짓을 벌이고 있다고... 아마 지그문트 박사가 욕심이 과했던 게지."
"밑도 끝도 없이 대체 무슨 소리예요?"
"외계인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두 가지로 나뉘지. 먼저 그들에 맞서 싸우려는 쪽. 그리고 그들을 이용하려는 쪽. 뭐 전자와 후자가 꼭 다른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은 후자를 처리하는 일이었다는 말일세."
서란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의지는 감탄을 부를 만 했다. 하지만 너무 단순한 이분법 아닌가. 갑자기 출처를 알 수 없는 반발심이 치솟아 올랐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어. 공식 발표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지. 그리고 그 전에..."
"하지만 우리는 연구소에서 망할 외계인이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것까지 봤다고!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리고 실험관 속에 있는 외계인 행세 중인 인간도 봤지. 서란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지기 시작했다. 신경쓰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다.
"그 전에 인류는 단결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 사전 준비 작업을 하는 중이고. 연구소에서 어떤 연구가 벌어지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몰라. 난 싸우는 쪽에 속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외계인에게 조종당하는 인간 이야기라면 자주 들어본 적이 있지."
계속되는 서란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미하일은 자신이 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외계인이 인간을 조종한다니. 놈들은 그저 죽일 줄만 아는 게 아니었나? 처음 듣는 소리라고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저 잔뜩 기분나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결국 당신도 말단이라 이거군. 흥, 그럼 이 곳은 그 잘난 싸움꾼들이 만든 비밀 기지라도 되는 건가?"
"인류의 미래가 달린 곳이야.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말라구. 완공은 아직이지만 이곳은 좋은 샘플이 되고 있어. 뭐니뭐니해도 미 본토를 빼자면 해외의 첫 기지나 다름없으니까. 이 밤중에 여기 모인 이유는 런던 테러의 여파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세계 각국에 제2, 제3의 기지를 유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네."
"아니면 최소한 지원 약속이라도 받아 내야겠지."
어디선가 들어 본 억양이 대화를 방해했다. 쏘아붙이는 서란과 느긋하게 답하는 미하일의 전투가 막 달아오를 무렵 제3의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감도는 기분나쁜 정적.
"즐거운 대화를 방해했다면 미안하네. 워낙 심심해서 말야."
단체로 맞추기라도 한 듯한 검정 양복, 어두운 조명을 의식해서인지 다행히 선글라스는 끼지 않았다. 은은한 조명에 살짝 보이는 갈색 턱수염에 푸른 눈의 남자는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세계 각국의 정보원들끼리 축제라도 벌이면 모를까, 이런 장례식장 같은 모임은 따분할 뿐이지. 하긴, 축제를 해도 마찬가지겠군."
기념으로 한 잔 하기라도 한 건지 듣는 사람은 생각도 않고 계속 말을 해댄다. 중년 사내의 이름은 제럴드. 벌써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엉겁결에 처음 정보국에 왔을 때 신 대위의 브리핑을 함께 받은 적이 있었다.
"음, 그러고보니 이쪽 분들은 동양에서 오셨나? 참 멀리서도 왔구만."
"난 원래부터 독일에 있었는데. 그나저나 아저씨는 뭔데 남 이야기에 끼어들고..."
"그쪽도 멀리서 오긴 마찬가진 거 같습니다만, 제럴드 씨."
벌써 잊어버린 걸까. 하긴, 그때는 일개 증인에 불과했으니까. 서란의 날카로운 신경이 엉뚱한 희생양을 찾을까봐 먼저 아는 척을 해 버렸다. 그러고보니 미 국가안보국에서도 극동 전문가라고 했던가. 별로 관심은 없지만 그 정도 직책의 사람까지 모인 것을 보면 오늘의 집회는 꽤나 거창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이름을 알다니 이거 정말 영광이군요. 동양이라면...조만간에 또 볼 일이 있겠군. 누가뭐래도 이건 세계적인 프로젝트가 될 테니까."
"별로 또 보고 싶은 생각은 안 생기는데요."
"좋든싫든 다음에 보세. 어차피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처지니 말일세."
서란의 비아냥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제럴드는 제 할 말만 다하고 사라졌다. 오랜만이었지만 반갑지 않은 사람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뭐야, 저 아저씨는. 괜히 끼어들어서는. 아는 사람이야?"
결국 만남의 소득은 서란의 화풀이 상대를 전환시킨 것밖엔 없는 듯 하다. 서란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나도모르게 입이 열렸다.
"미하일, 그렇다면 연구소로 먼저 쳐들어 온 미국 요원들은 뭐죠? 그 자들이 몰래 잠입해서 박사를 살해했는데 그들도 한패인가."
하고싶은 질문은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이 점차 창고, 아니 강연장 겸 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곳곳에 널린 테이블에는 빈 병들과 담배꽁초가 그득한 재떨이가 대신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젊은 친구.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곤 이정도 뿐이야. 아무리 이 구질구질한 분야에서 잔뼈가 굵더라도.. 그래, 저 아가씨 말처럼 말단은 아는 게 없지."
미하일의 표정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넘겨도 역시 서란의 공격에 타격이라도 입은 모양이다.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 맞겠군.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네. 외계인은 인간의 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이쪽에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한다. 내가 아는 건 그 뿐. 아니, 더이상 알아서 무엇 하겠나. 자네들도 외계인에 의한 참상을 봤을 텐데? 이건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중대한 전쟁이라네. 일일이 물어가면서 싸울 순 없어."
그렇다고 정말 어떤 수단이라도 가능한 걸까. 아니 그보다도 이유를 모른 채 싸우는 게 가능이나 할까? 글쎄,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인간들끼리 벌인 전쟁들을 보면 말이다.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외계인을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괴물로만 정의내리고 있을 테니까. 갑자기 연구소에서 소녀가 했던 불길한 말들이 생각났다. 서란이 연구소의 실험에 대해 재차 질문 공세를 펴기 시작하고 미하일은 계속 영양가 없는 답변을 해댔지만 더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놈의 전쟁은 인간 상대만으로도 너무나 복잡한 것인데, 망할 외계인까지 생각하는 건 역시 무리다.
어쨋든 소녀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물론 바보가 아닌 이상 미하일도 소녀의 존재에 대해 어느정도 의구심은 품고 있겠지만, 자세한 내막은 이쪽과 마찬가지로 그쪽도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 상태라면 최소한 비길 수는 있다.
아마도 다시 기지로 복귀하면 더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연구소에서 그 아이가 보인 일련의 이상한 행동들을 믿을지가 문제겠지만. 그 다음 일은 연구진들에게 맡길 뿐이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소녀와 함께 무사히 복귀하는 것이다.
기분탓이겠지만 더욱 짙어진 어둠 속에 타고 온 헬기는 그대로 있었다.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헬기 벽에 기대 앉은 채로 그대로 잠들어 있는 소녀는 회색 점퍼를 이불삼아 덮고 있었다. 스베틀라냐도 그 바로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벗어준 걸까. 아까와 전혀 다름없는 무뚝뚝한 자세이기에 알아채기 힘들다.
아무려면 어떤가. 별빛조차 드문 밤하늘에는 하나 둘 인공의 불빛들이 수를 놓는 중이었다. 돌아가는 손님들이리라. 우리도 이제 또 하나의 별이 될 시간이다.
모처럼의 외국 출장이 단 하루만에 끝장난 셈이지만 남은 미련이 한톨이라도 있을 턱이 없다. 오히려 짧아진 것을 감사할 지경이다. 항상 그렇듯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면 남는 것은 피로뿐이다. 헬기는 착륙시와 같이 조용한 진동음과 함께 조금씩 떠올랐다. 여전히 어둠만이 가득한 창 너머로 오면서 보았던 착륙 지시등이 다시금 반짝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지상에 뜬 저 아름다운 별빛은 결국 앞으로 시작될-미하일에 따르면 벌써 시작해버린-전쟁의 신호일 뿐이겠지. 다들 똑같이 착잡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몰라도 헬기 안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씁쓸한 고요로 가득 차 버렸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