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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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COM : Self Defense #023 -출장
1999년 4월 21일.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가뜩이나 어두운데 검은 옷까지 입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비밀 연구소의 분위기를 제대로 풍기고 있는 이 곳에 그렇게 쉽게 잠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기척으로 봐서 여기저기 솟아 올라있는 각종 기계류들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 몇인가 더 있는게 틀림없다.
그러나 얼굴을 드러낸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얼굴 역시 검은색 선글라스로 감춰져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명 탓에 녹색 빛을 발하는 검은 양복 사내의 모습은 확실히 낯이 익은 것이었다.
"여기서 또 마중이라도 나온 건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등장에 당황해서인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신하듯 서란이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낮에 먼저 마중을 나왔다가 그녀에게 험한 꼴을 당한 장본인이니까 말이다. 어느새 다시 말쑥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순순히 따라와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수확을 얻은 셈이지."
남자는 서란의 비꼬는 말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미소를 띄운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말하지. 본 연구소는 불법 시설로 간주되어 현 시각부터 미 국가안보국과 유럽연합 정보국의 공동 관리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일을 당해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지그문트 박사의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금방이라도 '누구 맘대로!'하고 기세좋게 외칠 것만 같은 분위기지만 압도적인 상대 앞에서는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 어떻게 이 궁지를 빠져나갈까 하고 궁리하느라 바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저 아이는 지금 당장 인계받아야 겠군."
남자의 시선이 소녀 쪽으로 향한다. 인기가 좋다고 해야 하나? 이거야 뭐 개나 소나 죄다 소녀를 데리고 가려고 난리를 치는 판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글쎄. 그녀는 이미 대한 연방 정보국 소속이다. 그쪽에서 함부로 데려갈 수 있는 게 아냐."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뜻밖에도 서란의 입에서 퉁명스런 반박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내가 기억이 맞다면 이건 결코 그녀가 할 소리가 아니다.
"이봐! 아까 박사한테는 아무 소리도 못하더니 이번엔 또 무슨 소리야?"
"저 녀석들한테 소녀를 넘기는 건 계획에 없는 일이니까."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한 차분한 대꾸. 순간 할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쪽이 한국어로 실랑이를 벌이는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 안보국 요원은 얼굴을 약간 찡그린다.
"웃기는군. 러시아로 빼돌리려다가 이제는 독일에다 바치려고 하는 주제에. 데려가면 어떻게 할 건데?"
신랄하게 비꼬는 말투에 서란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진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손에는 어느새 새까만 물건이 쥐어져 있다. 권총이다. 말로 안 되면 힘으로라도 빼앗아 갈 작정일 테지. 위협만 할 생각이겠지만 이쪽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겨눠진 총구에 마음이 심란해진 탓인지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작은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서란 씨. 우리는 저런 거 안 가지고 왔나요?"
부탁할 때만 존대말. 이것은 이번 출장에서 생긴 나쁜 버릇임에 틀림없다. 이번에는 서란도 눈 한번 깜빡 안하고 받아 준다.
"우리라니? 난 당연히 당신이 가지고 왔을 줄 알았는데. 총이라는 건 말야. 아무리 독일이라도 함부로 가지고 있기엔 부담스럽다고. 예산 문제도 그렇고..."
"상식적으로 총 들고 여객기에 타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지 않아?"
"뭐? 명색이 요원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이쯤 되면 총구 앞에 있거나 말거나 말다툼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서란이 아무리 똑똑하게 군다 하더라도 결국 그녀는 맨손으로 호랑이굴에 뛰어든 셈이다. 물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라 나선 나도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상황은 좋지 않다. 때깔나게 차려입은 검은 양복 사내가 겨눈 총구 앞의 남녀는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남은 건 이런 상황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 충직한 간호사. 그리고 그녀가 잡고 있는 휠체어의 주인공.
"그만! 남의 연구소에서 뭣들하는 짓인가!"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지그문트 박사의 호령이 연구실 안을 뒤흔든다. 한창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가려던 나와 서란은 물론, 뭔가 입을 열려던 미국 요원까지 동작을 멈췄다.
"대체 무슨 오해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베링하임 제1연구소의 소장은 누가 뭐래도 나란 말이다! 그런데 누구 마음대로 이곳을 빼앗아 가겠다는 건가? 지금 이곳에서는 인류를 위한 연구가 진행중이라고! 그건 너희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자기 자신을 위한 연구겠지. 말은 똑바로 하라고. 우리야 말로 전 세계를 구하기 위해 지금 여기까지 온 거다. 외계인에 대한 기술을 일개 기업이 가지고 놀게 놔둘 순 없지."
슬슬 찾아온 목적을 밝히는군. 조소를 담아 내뱉는 남자의 말에 지그문트 박사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헛소리! 이미 우리는 지난 세계대전 때에 국가를 위해 일한 역사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인류를 위해 일하고 있는 중인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건가?"
세계대전 때의 당신들은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많이 저지른 걸로 아는데. 박사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계속 떠들어댄다.
"외계인들에게서 추출한 세포들, 그리고 각종 장기부터 유전자까지!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지닌 의미를 너희가 알고 있기나 한가? 이건 인류에게 있어서 무한한 기술의 보고나 다름없어! 앞으로 의학계에는 엄청난 발전이...!"
숨도 안 쉬고 고함쳐 대는 박사의 서슬에 연구실 전체가 울릴 정도다. 이 정도면 완전히 자아 도취라 말해도 손색이 없다. 박사가 말했던 '기적의 열쇠'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대충 알 것도 같지만, 그의 방식에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
"당신 다리도 고칠 수 있다 그건가?"
박사의 외침을 무시하는 듯 남자는 한껏 냉소적으로 말한다. 박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떨리는 손이 조금씩 손잡이에서 떨어진다.
박사가 짓는 일그러짐의 정체는 분노가 아닌 미소였다.
"그거라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 저들의 세포가 가진 놀라운 재생력을 응용한다면 말야. 자, 이제 알겠나? 저들이 가져올 기적을..."
이제는 완전히 똑바로 선 박사의 시선이 실험관을 향한다. 실험관 속의 섹토이드는 아무런 표정도 없지만 마치 그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다.
일그러진 미소를 띤 박사가 한발짝 앞으로 걸어나가려는 순간, 총성이 울려 퍼진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몇 발인가 더.
박사는 다시 휠체어에 기대어 앉는다. 아니,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눈깜짝할 순간이다.
"잘 알았네, 박사.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접수할 것은 연구소와 연구원 뿐이라네. 미치광이 소장은 필요 없지."
이미 여러 발의 총탄이 꿰뚫은 탓에 지그문트 박사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휠체어로부터 뚝뚝 떨어지는 피의 색깔은 조명 탓에 검게만 보였다. 붉지 않은 피는 현실감이 없다. 그것과는 별개의 이유로 서란과 나는 입을 다물고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녀석을 말이 통하는 상대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만히 있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일은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벌어졌다. 박사가 쓰러지자마자 여간호사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핸드백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역시 단순한 간호사가 아니었던 건가.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비명인지 고함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총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검은 양복 사내의 팔로부터 핏방울이 튀는가 싶더니 뒤쪽에서 또다른 총구가 불을 뿜었다. 이어지는 총성과 함께 귀가 멍해지면서 이제는 낯설지 않은 느낌이 온 몸을 스쳐갔다. 시간이 왠지 천천히 흐르는 그런 느낌.
뭔가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목표는 실험관 앞쪽에 멍하니 서 있는 소녀. 나도 모르게 그녀를 감싸며 쓰러진다. 그 다음부터는 서란의 몫이었다. 소녀를 안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나를 냅다 걷어 찬 것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죽고 싶어? 뭐 하고 있는 거야!
감정이 실렸을지도 모르는 발에 차인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가장 커 보이는 기계 장치 뒤로 기어들게 만든 것은 아마도 삶에 대한 본능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계기판으로 가득찬 기계 장치를 방패삼아 소녀를 기대게 한 뒤에야 가까스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동안 바로 건너편에서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격렬한 총성. 누군지 알수없는 외침과 비명.
그 모든 소란이 가라앉고난 후 슬쩍 엿본 바깥 풍경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청을 높이던 여러 사람들이 서 있었다고는 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바닥은 지그문트 박사가 흘린 피 뿐만 아니라 간호원 차림의 여성과 검은 양복 차림의 인간 몇으로 메워져 있었다. 신나게 박사를 몰아붙이던 검은 양복의 주인은 운좋게도 살아남은 모양이다.
하지만 오른팔을 부여잡고 같은 차림의 동료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폼은 꽤나 당황한 기색이다. 그저 보고만 있던 이쪽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튀어오른 핏자국이 선명한 유리벽 안쪽의 섹토이드만이 아무런 동요 없이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서.
하지만 시시한 감상에 빠질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어두운 연구실 저편에서 문이 박살나며 불길한 빛이 새어들어오는 순간, 더 큰 충격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새롭게 등장한 손님은 말이 없었다. 말 대신 기분나쁜 괴성을 지르며 곧장 실험관을 향해 달려올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 아까 전에 울려 퍼지던 방송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식을 되찾았다는'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알 만 했다. 섹토이드와는 확실히 다른 종의 외계인.
원래 녹색인 몸은 같은 녹색 조명이 비추어서 그런지 별로 감흥이 없었으나 번쩍이는 놈의 두 눈은 싫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뮤톤이라고 했던가. 그 끔찍한 초록 괴물의 이름을 알고는 있는지 검은 양복들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권총을 쏴 대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잽싸게 왔던 길로 달아나는 부류도 있다. 아마도 본능에 충실한 것이겠지만 후자가 현명한 판단임은 분명했다. 권총탄 따위로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었다.
그나마 놈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손이었지만 검은 양복들이 나가 떨어지도록 하는 데에는 억센 근육질의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흡사 바위와 같은 놈의 주먹에 맞고 버틸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 놈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비명 소리와 함께 바닥을 적시고 마는 핏줄기는 현실같지가 않다. 그런 식으로 뮤톤은 싸움을 한다기보다는 귀찮은 파리떼들을 잡는 듯이 앞을 가로막는 인간 하나하나를 천천히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젠 몸의 떨림을 막을 수가 없다.
"젠장. 저따위 괴물까지 키우고 있었다니...얼른 여길 뜨자구!"
공포라는 감정 따위는 안 키우는 듯한 서란의 목소리는 약간 거슬리긴 했지만 몸의 떨림을 멈추게 하는 데에는 효과가 탁월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려는 순간, 익숙한 총성이 귀를 뒤흔든다.
"꼼짝 마!"
귀에 익숙한 말이다. 기계 장치의 계기판 하나를 작살낸 총탄의 주인은 연구소까지 안내해주었던 경비였다. 사람좋은 인상을 하고 있었던 그가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심하게 떨고 있다. 양손으로 꼭 감아 쥔 권총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아무래도 한바탕 벌어지고 있는 유혈극 탓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당신이 안내한 건 우리뿐만이 아닌 것 같군."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서란이 똑바로 경비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배신자인가. 하긴 아무리 미 국가안보국 요원이라고 해도 내부 도움 없이 이런 곳에 소리없이 잠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괴물... 이런 괴물들을 기르는 곳에 내 딸을 맡길 수는 없어... 미국인들이 모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당신들이 와서..."
"그 약속에는 치료비도 포함된 건가?"
서란은 간단히 경비의 말을 잘라버린다.
"뭐...? 그런게 무슨 문제야! 난 그 애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결국 그렇고 그런 문제였나. 총소리가 나자 마자 나도 모르게 소녀를 감쌌다는 사실을 깨닫자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 이상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란 이딴 위협 없이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듣고 보니 우리와는 별로 상관 없는 문제 같은데. 그리고 안됐지만 당신 딸은 이미 박사가 실험 재료로 잘 써먹었을 걸?"
총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서란은 참 잘도 상대의 화를 돋우는 말을 꺼내는 재주가 있다. 경비의 심경이 전달된 듯 총구가 훨씬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가 당겨질 것만 같은데 서란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외계인을 가지고 노는 박사가 설마 인간 따위를 재료로 못 쓸 것 같나?"
끝까지 상대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발언이다.
"이 괴물같은...!"
결국 경비의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것인가. 총구가 번쩍이려는 순간 눈이 저절로 질끈 감겼다.
총성과 둔탁한 굉음은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간신히 살짝 열린 눈에 들어온 것은 서란의 발에 맞고 공중에 떠 있는 권총 한 자루. 그리고 순식간에 이어지는 옆차기를 복부로 받아내는 경비의 모습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가 떨어진 경비는 기계 모서리에 부딪치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당신. 일부러..."
전광석화같은 그녀의 움직임에 감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뭐 영화에도 많이 나오지 않나? 흥분한 상대는 상대가 안 된다지?"
놀란 이쪽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는 서란의 모습에서는 방금 전에 보여 준 눈빛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여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서란의 오른팔이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찢어진 옷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다.
"스쳤을 뿐이야. 어때, 난 괴물은 아니라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틀면서 말을 돌리는 서란이었다. 그녀의 손에 묻은 피는 분명 붉은 색이다. 그녀라고 불사신은 아닌 것이다. 각자 지닌 용기의 문제가 남아 있을 뿐. 그녀나 나나 모두 그저 한 인간일 뿐이다.
"시간이 없어. 얼른 나가자고. 이봐! 네가 안내해!"
그녀 말대로 상처가 깊지는 않은지 서란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녀의 일갈에 움찔하며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다름아닌 멩겔이었다. 처음의 광기에 번득이던 눈빛은 어디로 가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다.
저런 곳에 용케 숨어 있었군. 마음엔 안 들지만 각종 기계 설비로 가득한 미로와도 같은 이 곳을 빠져나가려면 저 녀석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맨몸의 뮤톤 한 마리가 날뛰는 유혈극도 이제 종막에 다다르고 있었다. 비명 소리 뿐 아니라 신음 소리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놈의 목표는 인간뿐이 아닌 듯, 뭔가 기계 장치가 박살나는 듯한 굉음만이 점점 커지고 있다. 놈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놈의 눈에 띈다면 이쪽도 시체로서 무대에 올라갈 신세다. 부들부들 떨고 앉은 멩겔도 그것을 아는지 따라오라는 듯한 말을 서란에게 건네고, 그녀의 손짓이 이끄는 데로 나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샌가 소녀의 손을 꼭 잡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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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긴 회가 된 듯...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리플은 더욱 감사드리고요-_-;
1999년 4월 21일.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가뜩이나 어두운데 검은 옷까지 입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비밀 연구소의 분위기를 제대로 풍기고 있는 이 곳에 그렇게 쉽게 잠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기척으로 봐서 여기저기 솟아 올라있는 각종 기계류들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 몇인가 더 있는게 틀림없다.
그러나 얼굴을 드러낸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얼굴 역시 검은색 선글라스로 감춰져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명 탓에 녹색 빛을 발하는 검은 양복 사내의 모습은 확실히 낯이 익은 것이었다.
"여기서 또 마중이라도 나온 건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등장에 당황해서인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신하듯 서란이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낮에 먼저 마중을 나왔다가 그녀에게 험한 꼴을 당한 장본인이니까 말이다. 어느새 다시 말쑥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순순히 따라와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수확을 얻은 셈이지."
남자는 서란의 비꼬는 말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미소를 띄운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말하지. 본 연구소는 불법 시설로 간주되어 현 시각부터 미 국가안보국과 유럽연합 정보국의 공동 관리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일을 당해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지그문트 박사의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금방이라도 '누구 맘대로!'하고 기세좋게 외칠 것만 같은 분위기지만 압도적인 상대 앞에서는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 어떻게 이 궁지를 빠져나갈까 하고 궁리하느라 바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저 아이는 지금 당장 인계받아야 겠군."
남자의 시선이 소녀 쪽으로 향한다. 인기가 좋다고 해야 하나? 이거야 뭐 개나 소나 죄다 소녀를 데리고 가려고 난리를 치는 판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글쎄. 그녀는 이미 대한 연방 정보국 소속이다. 그쪽에서 함부로 데려갈 수 있는 게 아냐."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뜻밖에도 서란의 입에서 퉁명스런 반박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내가 기억이 맞다면 이건 결코 그녀가 할 소리가 아니다.
"이봐! 아까 박사한테는 아무 소리도 못하더니 이번엔 또 무슨 소리야?"
"저 녀석들한테 소녀를 넘기는 건 계획에 없는 일이니까."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한 차분한 대꾸. 순간 할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쪽이 한국어로 실랑이를 벌이는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 안보국 요원은 얼굴을 약간 찡그린다.
"웃기는군. 러시아로 빼돌리려다가 이제는 독일에다 바치려고 하는 주제에. 데려가면 어떻게 할 건데?"
신랄하게 비꼬는 말투에 서란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진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손에는 어느새 새까만 물건이 쥐어져 있다. 권총이다. 말로 안 되면 힘으로라도 빼앗아 갈 작정일 테지. 위협만 할 생각이겠지만 이쪽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겨눠진 총구에 마음이 심란해진 탓인지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작은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서란 씨. 우리는 저런 거 안 가지고 왔나요?"
부탁할 때만 존대말. 이것은 이번 출장에서 생긴 나쁜 버릇임에 틀림없다. 이번에는 서란도 눈 한번 깜빡 안하고 받아 준다.
"우리라니? 난 당연히 당신이 가지고 왔을 줄 알았는데. 총이라는 건 말야. 아무리 독일이라도 함부로 가지고 있기엔 부담스럽다고. 예산 문제도 그렇고..."
"상식적으로 총 들고 여객기에 타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지 않아?"
"뭐? 명색이 요원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이쯤 되면 총구 앞에 있거나 말거나 말다툼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서란이 아무리 똑똑하게 군다 하더라도 결국 그녀는 맨손으로 호랑이굴에 뛰어든 셈이다. 물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라 나선 나도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상황은 좋지 않다. 때깔나게 차려입은 검은 양복 사내가 겨눈 총구 앞의 남녀는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남은 건 이런 상황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 충직한 간호사. 그리고 그녀가 잡고 있는 휠체어의 주인공.
"그만! 남의 연구소에서 뭣들하는 짓인가!"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지그문트 박사의 호령이 연구실 안을 뒤흔든다. 한창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가려던 나와 서란은 물론, 뭔가 입을 열려던 미국 요원까지 동작을 멈췄다.
"대체 무슨 오해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베링하임 제1연구소의 소장은 누가 뭐래도 나란 말이다! 그런데 누구 마음대로 이곳을 빼앗아 가겠다는 건가? 지금 이곳에서는 인류를 위한 연구가 진행중이라고! 그건 너희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자기 자신을 위한 연구겠지. 말은 똑바로 하라고. 우리야 말로 전 세계를 구하기 위해 지금 여기까지 온 거다. 외계인에 대한 기술을 일개 기업이 가지고 놀게 놔둘 순 없지."
슬슬 찾아온 목적을 밝히는군. 조소를 담아 내뱉는 남자의 말에 지그문트 박사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헛소리! 이미 우리는 지난 세계대전 때에 국가를 위해 일한 역사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인류를 위해 일하고 있는 중인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건가?"
세계대전 때의 당신들은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많이 저지른 걸로 아는데. 박사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계속 떠들어댄다.
"외계인들에게서 추출한 세포들, 그리고 각종 장기부터 유전자까지!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지닌 의미를 너희가 알고 있기나 한가? 이건 인류에게 있어서 무한한 기술의 보고나 다름없어! 앞으로 의학계에는 엄청난 발전이...!"
숨도 안 쉬고 고함쳐 대는 박사의 서슬에 연구실 전체가 울릴 정도다. 이 정도면 완전히 자아 도취라 말해도 손색이 없다. 박사가 말했던 '기적의 열쇠'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대충 알 것도 같지만, 그의 방식에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
"당신 다리도 고칠 수 있다 그건가?"
박사의 외침을 무시하는 듯 남자는 한껏 냉소적으로 말한다. 박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떨리는 손이 조금씩 손잡이에서 떨어진다.
박사가 짓는 일그러짐의 정체는 분노가 아닌 미소였다.
"그거라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 저들의 세포가 가진 놀라운 재생력을 응용한다면 말야. 자, 이제 알겠나? 저들이 가져올 기적을..."
이제는 완전히 똑바로 선 박사의 시선이 실험관을 향한다. 실험관 속의 섹토이드는 아무런 표정도 없지만 마치 그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다.
일그러진 미소를 띤 박사가 한발짝 앞으로 걸어나가려는 순간, 총성이 울려 퍼진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몇 발인가 더.
박사는 다시 휠체어에 기대어 앉는다. 아니,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눈깜짝할 순간이다.
"잘 알았네, 박사.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접수할 것은 연구소와 연구원 뿐이라네. 미치광이 소장은 필요 없지."
이미 여러 발의 총탄이 꿰뚫은 탓에 지그문트 박사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휠체어로부터 뚝뚝 떨어지는 피의 색깔은 조명 탓에 검게만 보였다. 붉지 않은 피는 현실감이 없다. 그것과는 별개의 이유로 서란과 나는 입을 다물고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녀석을 말이 통하는 상대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만히 있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일은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벌어졌다. 박사가 쓰러지자마자 여간호사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핸드백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역시 단순한 간호사가 아니었던 건가.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비명인지 고함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총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검은 양복 사내의 팔로부터 핏방울이 튀는가 싶더니 뒤쪽에서 또다른 총구가 불을 뿜었다. 이어지는 총성과 함께 귀가 멍해지면서 이제는 낯설지 않은 느낌이 온 몸을 스쳐갔다. 시간이 왠지 천천히 흐르는 그런 느낌.
뭔가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목표는 실험관 앞쪽에 멍하니 서 있는 소녀. 나도 모르게 그녀를 감싸며 쓰러진다. 그 다음부터는 서란의 몫이었다. 소녀를 안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나를 냅다 걷어 찬 것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죽고 싶어? 뭐 하고 있는 거야!
감정이 실렸을지도 모르는 발에 차인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가장 커 보이는 기계 장치 뒤로 기어들게 만든 것은 아마도 삶에 대한 본능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계기판으로 가득찬 기계 장치를 방패삼아 소녀를 기대게 한 뒤에야 가까스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동안 바로 건너편에서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격렬한 총성. 누군지 알수없는 외침과 비명.
그 모든 소란이 가라앉고난 후 슬쩍 엿본 바깥 풍경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청을 높이던 여러 사람들이 서 있었다고는 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바닥은 지그문트 박사가 흘린 피 뿐만 아니라 간호원 차림의 여성과 검은 양복 차림의 인간 몇으로 메워져 있었다. 신나게 박사를 몰아붙이던 검은 양복의 주인은 운좋게도 살아남은 모양이다.
하지만 오른팔을 부여잡고 같은 차림의 동료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폼은 꽤나 당황한 기색이다. 그저 보고만 있던 이쪽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튀어오른 핏자국이 선명한 유리벽 안쪽의 섹토이드만이 아무런 동요 없이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서.
하지만 시시한 감상에 빠질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어두운 연구실 저편에서 문이 박살나며 불길한 빛이 새어들어오는 순간, 더 큰 충격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새롭게 등장한 손님은 말이 없었다. 말 대신 기분나쁜 괴성을 지르며 곧장 실험관을 향해 달려올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 아까 전에 울려 퍼지던 방송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식을 되찾았다는'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알 만 했다. 섹토이드와는 확실히 다른 종의 외계인.
원래 녹색인 몸은 같은 녹색 조명이 비추어서 그런지 별로 감흥이 없었으나 번쩍이는 놈의 두 눈은 싫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뮤톤이라고 했던가. 그 끔찍한 초록 괴물의 이름을 알고는 있는지 검은 양복들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권총을 쏴 대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잽싸게 왔던 길로 달아나는 부류도 있다. 아마도 본능에 충실한 것이겠지만 후자가 현명한 판단임은 분명했다. 권총탄 따위로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었다.
그나마 놈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손이었지만 검은 양복들이 나가 떨어지도록 하는 데에는 억센 근육질의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흡사 바위와 같은 놈의 주먹에 맞고 버틸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 놈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비명 소리와 함께 바닥을 적시고 마는 핏줄기는 현실같지가 않다. 그런 식으로 뮤톤은 싸움을 한다기보다는 귀찮은 파리떼들을 잡는 듯이 앞을 가로막는 인간 하나하나를 천천히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젠 몸의 떨림을 막을 수가 없다.
"젠장. 저따위 괴물까지 키우고 있었다니...얼른 여길 뜨자구!"
공포라는 감정 따위는 안 키우는 듯한 서란의 목소리는 약간 거슬리긴 했지만 몸의 떨림을 멈추게 하는 데에는 효과가 탁월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려는 순간, 익숙한 총성이 귀를 뒤흔든다.
"꼼짝 마!"
귀에 익숙한 말이다. 기계 장치의 계기판 하나를 작살낸 총탄의 주인은 연구소까지 안내해주었던 경비였다. 사람좋은 인상을 하고 있었던 그가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심하게 떨고 있다. 양손으로 꼭 감아 쥔 권총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아무래도 한바탕 벌어지고 있는 유혈극 탓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당신이 안내한 건 우리뿐만이 아닌 것 같군."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서란이 똑바로 경비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배신자인가. 하긴 아무리 미 국가안보국 요원이라고 해도 내부 도움 없이 이런 곳에 소리없이 잠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괴물... 이런 괴물들을 기르는 곳에 내 딸을 맡길 수는 없어... 미국인들이 모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당신들이 와서..."
"그 약속에는 치료비도 포함된 건가?"
서란은 간단히 경비의 말을 잘라버린다.
"뭐...? 그런게 무슨 문제야! 난 그 애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결국 그렇고 그런 문제였나. 총소리가 나자 마자 나도 모르게 소녀를 감쌌다는 사실을 깨닫자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 이상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란 이딴 위협 없이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듣고 보니 우리와는 별로 상관 없는 문제 같은데. 그리고 안됐지만 당신 딸은 이미 박사가 실험 재료로 잘 써먹었을 걸?"
총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서란은 참 잘도 상대의 화를 돋우는 말을 꺼내는 재주가 있다. 경비의 심경이 전달된 듯 총구가 훨씬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가 당겨질 것만 같은데 서란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외계인을 가지고 노는 박사가 설마 인간 따위를 재료로 못 쓸 것 같나?"
끝까지 상대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발언이다.
"이 괴물같은...!"
결국 경비의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것인가. 총구가 번쩍이려는 순간 눈이 저절로 질끈 감겼다.
총성과 둔탁한 굉음은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간신히 살짝 열린 눈에 들어온 것은 서란의 발에 맞고 공중에 떠 있는 권총 한 자루. 그리고 순식간에 이어지는 옆차기를 복부로 받아내는 경비의 모습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가 떨어진 경비는 기계 모서리에 부딪치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당신. 일부러..."
전광석화같은 그녀의 움직임에 감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뭐 영화에도 많이 나오지 않나? 흥분한 상대는 상대가 안 된다지?"
놀란 이쪽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는 서란의 모습에서는 방금 전에 보여 준 눈빛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여자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서란의 오른팔이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찢어진 옷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다.
"스쳤을 뿐이야. 어때, 난 괴물은 아니라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틀면서 말을 돌리는 서란이었다. 그녀의 손에 묻은 피는 분명 붉은 색이다. 그녀라고 불사신은 아닌 것이다. 각자 지닌 용기의 문제가 남아 있을 뿐. 그녀나 나나 모두 그저 한 인간일 뿐이다.
"시간이 없어. 얼른 나가자고. 이봐! 네가 안내해!"
그녀 말대로 상처가 깊지는 않은지 서란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녀의 일갈에 움찔하며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다름아닌 멩겔이었다. 처음의 광기에 번득이던 눈빛은 어디로 가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다.
저런 곳에 용케 숨어 있었군. 마음엔 안 들지만 각종 기계 설비로 가득한 미로와도 같은 이 곳을 빠져나가려면 저 녀석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맨몸의 뮤톤 한 마리가 날뛰는 유혈극도 이제 종막에 다다르고 있었다. 비명 소리 뿐 아니라 신음 소리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놈의 목표는 인간뿐이 아닌 듯, 뭔가 기계 장치가 박살나는 듯한 굉음만이 점점 커지고 있다. 놈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놈의 눈에 띈다면 이쪽도 시체로서 무대에 올라갈 신세다. 부들부들 떨고 앉은 멩겔도 그것을 아는지 따라오라는 듯한 말을 서란에게 건네고, 그녀의 손짓이 이끄는 데로 나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샌가 소녀의 손을 꼭 잡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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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긴 회가 된 듯...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리플은 더욱 감사드리고요-_-;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