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COM : Self Defense #021




1999년 4월 21일


  

  "그쪽 소감은 어떤가?"


  담담한 서란의 반응이 재미없었나 보다. 마치 손자에게 깜짝 선물을 선사하는 할아버지라도 된 듯한 표정으로 박사는 말을 걸어온다. 약간 흥분한 듯한 목소리에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별로 입을 열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  



  "놀랐을 테지. 살아있는 샘플을 구한다는 건 그쪽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잖나?"
  
  박사는 소감을 묻기만 했을 뿐 기다려 주지는 않았다. 덕분에 몸 속에서 튀어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짤막한 질문을 간신히 토해놓을 수 있었다.


  "어떻게..."

  "물론 쉽진 않았지. 확실한 것은 저들이 우리들에게 가지는 호기심 이상으로 우리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라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인간의 욕망이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고나 할까."

  철학자라도 되는 듯한 말투.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이런 게 아니다.
  


  휠체어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간다. 나머지 일행도 뭔가에 홀린 듯 걸음을 내딛는다. 예전에 소녀가 있던 병실에서 봤던 것과 흡사한 기계 장치들을 헤치고 나아가니 실험관 속의 형체가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현재까지 가장 많은 출현이 감지된 외계인. 그만큼 많은 인간의 생명과 맞바꾸어야 했던 놈. 실험관 속에 둥둥 떠 있는 섹토이드는 오래 전부터 삼류 잡지에 꼬박꼬박 실리던 사진에 대한 비웃음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친숙해 보이는 형체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놈의 눈을 실제로 본다면 친숙함 따위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공포와 증오만이 자리잡게 될 테지만.

  물론 예외도 있다.

  박사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띄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기적을 불러 올 열쇠라네."


  헛소리. 재앙을 가져다 줄 괴물일 뿐이다. 하지만 생각은 쉽사리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지그문트 박사는 고개를 젖히고 머리를 휠체어에 기대는 한껏 편안한 자세로 '열쇠'를 올려다 본다. 편안한 기분은 아니지만 이쪽도 실험관 속의 놈을 노려볼 수밖에.

  아직도 눈앞의 것이 정말 진짜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아니, 살아 있기나 한 걸까? 당장이라도 눈을 반짝이며 실험관을 박살낼 것만 같은 느낌과는 달리 놈은 미동도 없이 잠잠하다. 눈을 뜨고 있는건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



  "이제 슬슬 자네들이 가져 온 샘플을 시험해 볼 시간이군. 멩겔 군! 준비는 다 됐나?"

  실험관 속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을 뿐이지만 명백한 '괴물'을 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명령을 내리는 박사. 하긴, 박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전장에서 놈들과 마주칠 일 따위는 없었을 테지. 샘플이라는 단어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실험관에서 소녀쪽으로 돌아간다. 그렇다. 잠시 소녀를 잊고 있었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소녀는 처음과 같이 실험관에 시선을 향한 채 서 있을 뿐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미묘한 변화가 보인다.
  
  소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보기 싫다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피곤한 건가. 하지만 공포에 떠는 모습은 결코 아니다. 소녀도 예전에 놈을 본 적이 있으리라.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을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커다란 전자 장비로 보이는 물건 뒤에서 조수라도 되는 듯한 깡마른 체구의 젊은이가 튀어 나왔다.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했을 텐데?"

  "실험 장비는 이미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미세 조정이..."

  "그만 둬! 당장 시작하라고! 지금 하려는 건 단지 확인일 뿐이잖나!"

  박사와 젊은이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천천히 젊은이를 살펴보았다.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에 이곳의 표준 복장이나 다름없는 흰 가운을 걸친 깡마른 체구.
  한눈에 약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한편으로 그 눈빛에서 전형적인 독일인다운 냉철함이 느껴진다.
  

  이름이 멩겔이라고 했던가. 박사의 눈치를 살피는 째진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분나쁜 눈빛이다.

  물론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한 무미건조한 눈 따위는 견학 중에 연구원들에게서 수없이 봐 왔다. 하지만 이 느낌은 연구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그런 눈과는 분명 달랐다. 좀 더 차갑고, 잔인하다. 단순히 녹색 조명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외계인이 가진 그것에 가깝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연신 흐르는 땀을 닦아대며 지그문트 박사의 질책에 쩔쩔 매는 모습을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박사의 호통에 멩겔은 전자 장비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왔다.


  그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장치는 분명히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그래, 병실에 누워 있던 소녀가 쓰고 있던 전극과 닮았다. 저걸 다시 씌울 생각일 테지.

  그렇다면 박사가 하려는 '실험'이란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결국 저 자들도 기지의 의사 가운 걸친 늙은이와 똑같다. 그들 눈에 보이는 소녀란 그저 흥미로운 연구 재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고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란 여기까지 생각하는 것이 한계다.

  멩겔이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온다. 장치를 든 손은 떨리고 있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엿보인다. 지그문트 박사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기계장치 너머의 다른 누군가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지시를 내리느라 분주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곁에 있는 서란을 슬쩍 곁눈질해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린 소녀를 연구에 미친 늙은이에게 연구 재료로 넘겨준다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행동만 거칠 뿐 그렇게 나쁜 사람같지는 않으니까.

  다만 나쁜 사람과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이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시도도 안 해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조용히 말을 걸어 본다.


  "이봐, 저걸 그냥 보고만 있을 참인가?"

  "응."

  망설임없이 나오는 대답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하는 서란의 모습은 침착하기 그지 없었으나 왠지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인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도 편치 않은 걸까. 실험 준비에 박사가 정신없는 틈을 타서 그녀가 속삭인다.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요원의 로망 아니겠어?"


  장난기 어린 서란의 목소리. 편치 않은 것 같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로망이라. 아마도 반어법인 것 같은데 시기가 적절하지 않은 농담인 것은 확실하다.



  실험 준비는 금방 끝났다. 왜소한 편인 멩겔이 우뚝 서 있는 소녀의 머리 위에다 전극을 씌우려는 광경은 왠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막지 않으면 불길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멩겔의 손에 쥐어진 전극이 제법 자란 소녀의 머리에 닿으려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처음엔 그저 소녀가 눈을 뜬 것 뿐이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서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는데 그건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눈을 뜬 것은 소녀만이 아니었다.

  실험관 속에 얌전히 있던 섹토이드의 눈이 번쩍였다. 조명 탓에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전에 섹토이드는 가녀린 팔을 뻗어 실험관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용액 속에서 그 약해보이는 팔로 허우적댄다고 강화 유리로 만든 듯한 실험관을 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비명을 지른다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다만 갑작스러운 변화에 순간적으로 행동을 멈췄을 뿐.



  그리고 소녀의 입이 열렸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