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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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COM : Self defense #017-출장 (2)
1999년 4월 21일
다 쓰러져가는 프랑크푸르트 교외의 허름한 주택가. 가구도 별로 없었다. 구석에 낡은 티브이 한 대만이 눈에 띌 뿐. 모르긴 몰라도 집세가 저렴할 것임은 틀림없는 이 곳이 바로 여행 기분을 망쳐버린 장본인의 거주지인 듯 했다. 거리 식당 점원치고는 상당히 멋진 발차기를 선보인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골목 이곳저곳을 가로지른 끝에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공항 근처를 오가는 인파 속에 묻힌 덕에 검은색 일당들도 쉽사리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여전히 여자는 점원 복장 그대로이고 끌려오다시피 달려온 소녀는 소파에 앉아 숨을 헐떡인다. 나는 그저 우뚝 서서 점원의 해명이나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일단 뭔가 마실거라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점원이, 아니 정체불명의 그녀가 입을 연다. 마치 아까 보여 준 돌려차기를 벌써 다 잊은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쪽 입장에서는 그리 쉽게 잊혀질 만한 기억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소녀를 보자면 그냥 받아들여도 크게 나쁜 친절은 아니었다.
"주문 안 했는데."
무의식중에 튀어나와 버리는 말.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까지도 점원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가 아닌가? 게다가 돈이라도 받는다면 이쪽은 대책이 없으니까. 자칫 또 한번 발차기가 날아들지는 않을까 하는 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기껏 마중나온 사람한테 너무하네."
짐짓 얼굴을 찌푸리며 뾰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였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표정을 수긍하기에는 아직도 발차기에 맞아 아스팔트 바닥과 입맞춤을 한 남자의 모습이 선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한 설명뿐인 것이다.
"마중이라면 검은 양복들이 먼저였는데,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
"그쪽을 따라갔으면 지금쯤 햇빛을 못 보고 있을 텐데."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슬쩍 웃으며 피하는 그녀. 하지만 대답해줄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흔들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설마 미 국가안보국 요원과 동료 요원을 구분도 못할 줄이야...이래서야 어린애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는 거나 다름없잖아. 아니, 요즘은 애들도 그렇게 쉽게 남을 따라가지는 않는다구."
그러면서 슬쩍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는 소녀를 쳐다보는 그녀였다. 차라리 대답해주지 않는 게 나을 뻔 했다. 초면에 이어지는 반말이나 비아냥거림이야 이미 익숙해질만큼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그녀 말이 사실이라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위험에 처한 것이다. 미국 안보국이 타국에서 일을 벌일 정도로 꼬인 것이 틀림없는. 하지만 그런 상황은 애당초 상상조차 못했다.
"이건 단순한 출장이었다고! 무슨 대단한 음모라도 있다는건가? 그렇다면 당신 정체는 도대체 뭔데?"
이렇게 된 바에는 그 누구도 함부로 믿을 수 없다.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질문이란 이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소개가 늦었군. 일단 연방정보국 대외부 소속의 서란이다. 신분증이 빠르겠지? 하지만 한국 요원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바로 이 집이라고 할 수 있지."
'일단'이라는 말이 걸리긴 했지만-일단-그녀가 꺼내들은 신분증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뒤에 덧붙여진 엉뚱한 소리에 고개가 절로 갸우뚱했지만.
"이 다 쓰러져가는 집을 보라구! 정보국 예산은 도대체 어디다 떼어먹은 거지? 해외 파견만 시켜 놓으면 다냐고!"
순식간에 흥분하는 그녀였다. 그녀의 점원 복장은 역시 단순한 위장이 아닌 깊은 사연이 담겨 있을 듯 했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튼 어디서나 예산 문제란 국내외를 초월하는 동질감을 맛보데 해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 진짜 알고 싶은 것들은 단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마음 속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튼, 원래대로라면 즐거운 여행이 되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된 건 이쪽도 마찬가지로 유감이야. 관광 가이드라면 확실히 재미있었겠지. 뭐, 처음부터 미끼였으니까 예상은 했겠지만 말야."
술술 풀어 나가는 서란의 말을 기어코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귀에 거슬리는 한 단어 때문이었다.
"미끼라고?"
"...몰랐군. 하지만 상관 없다구. 계획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쪽과는 달리 서란은 어깨만 한 번 으쓱할 뿐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계획에 따르면 이번 전장환경분석과의-이름한번 거창하군-독일 출장은 본 작전을 위한 미끼였어. 쉽게 말하자면 적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는 것이라고나 할까. 미끼란 표현보다는 역시 양동 작전이 낫겠지? 본 작전이란 바로.."
역시 사무적인 말투의 설명은 역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섞어가며 떠들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이쪽의 반응을 살피는 모습을 보자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지도.
"런던에서 있을 대 외계인 정책 수립을 위한 국제회의."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반응이란 고작 눈을 지그시 감아주는 것 뿐이다. 사실 드문 일도 아니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내가 알 수 있는 권한 밖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서란은 계속 몇 마디 이어나갔지만 더이상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내용들이었다. 외계인을 주제로 한, 그것도 국제 규모의 회의라면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인물들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만큼 위에 있거나 혹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관심가질 능력도, 이유도 없는 그런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굉장한 회의라면 비밀 유지건 경호건 간에 거대한 작전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없을 테니 이런 미끼 한 둘쯤 만들어 놓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미끼는 말 그대로 미끼일 뿐. 단순히 시선만을 끌 예정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계획대로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관광만 즐기면 되었을 우리가 왜 납치나 감금 따위를 걱정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 질문 없이 멀뚱히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그녀는 금방 말을 이었다.
"문제는 회의는 열리기도 전에 무산되었다는 거지."
"왜지?"
"정보국 소속 주제에 뉴스를 별로 안 좋아하나 보군."
어느새 서란의 손은 리모컨을 들고 있었다. 말로 해 봤자 먹힐 것 같지 않은지 요청하지도 않은 텔레비젼 시청을 시켜줄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해하기에는 훨씬 빨랐다.
낡아빠진 티브이 속의 화면은 '테러'라는 알기 쉬운 글자를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불길에 휩싸인 거리와 공포에 질린 시민들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언제나 양념처럼 비추어 주는 런던 각지의 명소들이 아니었다면 어디인지를 알아차리기는 힘들었겠지만.
"잠깐...저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단순한 테러일 뿐이잖아. 하루 걸러 하루 꼴로 일어나는...!"
올 초부터 중동 사태의 여파로 테러가 미국과 영국 전역에 끊이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화면을 자세히 살펴봐도 최근 있었던 폭탄 테러들과 별반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무감각하다고 욕해도 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일상처럼 되어버린 일들이니까. 인간이 인간인 이상 끊임없이 되풀이 될 일이다. 증오는 또다른 증오를 낳는다는 이야기는 너무 고리타분한 소리일까? 살인도, 죽음도 저마다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 방법이 최선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만약 지구 밖의 존재를 인식하고도 과연 인간은 이런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것인가.
"오늘 낮에 일어난 건 달라. 덕분에 회의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온건파 인사 대부분이 사망했어. 단순한 테러라고 보기는 힘들지."
이쪽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간에 귀로 들려오는 서란의 말은 분명 귀중한 정보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 중요도에 비례해서 혼란스러움은 커져만 갔다. 테러를 가장한 살해라. 아니, 어쩌면 테러는 진짜고 단지 장소만 조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무슨 짓을 했던 간에 충격적인 결과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온건파라. 그런게 진짜 있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건데?"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지하 기지에 틀어박혀 다른 건 몰라도 자료 열람은 실컷 한 덕분에 서란이 언급한 '온건파'와 같은 다분히 정치적인 단어의 의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는 외계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현재 국가 단위로 벌어지고 있는 대 외계인 정책을 세계 규모로 통합한다는 계획은 이미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더구나 외계인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인식하고 있는 국가들은 모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방법에 대한 견해차였다.
외계인이 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는 위협을 가해 온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여러가지 대응책에 대한 찬반 논란은 오래지않아 사람들을 크게 두 파벌로 나눠 버렸는데, 한시라도 빨리 세계 규모의 전투 부대를 창설하여 지구 밖으로부터의 침입을 격퇴하자는 것이 통칭 강경파의 주장이었고 그와는 달리 외계인들과의 의사 소통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자는 것이 이른바 온건파였던 것이다. 양측 모두 지구를 지키겠다는 목적을 보자면 옳은 이야기들이었으나 인간들은 역사에서 반복해 왔듯이 타협 대신 대립을 선택했다.
물론 그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주장 이면에는 이 미증유의 사태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각 국가간의 치열한 이권 다툼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크게 한 몫 하고 있었다. 일단 문제는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시기가 점점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계의 침략을 지구의 군사력으로 과연 막을 수 있을지, 혹은 과연 잔인무도한 외계인들에게 대화가 통할지의 여부는 모두 불확실했기에 결론은 결국 어정쩡하게 내려질 것이 뻔했다.
지금까지의 자료 분석에 따르면 강경파의 입지가 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쪽에 미국이라는 압도적인 강국이 버티고 있는 데다가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이란 것 자체가 아직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인간이 파악하고 있는 외계인의 존재란 사실 외계'인'이라기보다 '괴물'따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그 기술이라는 것을 미국이 독점하고 있다시피 한 상황이라 신빙성 여부는 매우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으로 온건파가 타격을 입었다면 그것의 배후는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일부러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건지 말하기 곤란해서인지 상당히 뜸을 들인 끝에 서란의 입이 열렸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강경파겠지."
당연한 결론 아닌가? 그녀의 행동 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대답이다.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누군지는 몰라도 끔찍이도 지구를 생각하는군. 차라리 잘 된 거 아냐? 이제 전 세계가 똘똘 뭉쳐 놈들과 한판 붙으면 되잖아. 안 그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 줄 알아!"
이렇게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면 누구라도 흠칫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씁쓸한 농담에 대한 서란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였다.
"놈들은 지구 전체를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거야! 오직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해서. 게다가..."
금새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곧이어 무서운 말을 꺼냈다.
"문제는, 그들이 이젠 우리를 노린다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아까 만난 이들이 그녀 말대로 미국 요원들이라면 우리가 노려진다는 말은 맞았지만, 온건파를 제거했다면 그들의 목적인 이미 달성된 터. 이제와서 굳이 미끼를 쫓아올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이번 작전 일체가 그들 손바닥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은 기분나쁜 일이지만 기분 나쁜 것으로만 끝난다면 이쪽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정부의 방침 역시 처음부터 미국쪽에 기울어 있었던 것이 뻔하니까 우리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서란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 아이를."
손가락질까지 곁들인 구체적인 지적. 소파 위의 소녀는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난데없는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다.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불안감이 점점 현실이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소녀와 재회하던 날 밤에 신 대위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내가 아는 한 소녀가 적의 목표가 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물론, 그 이야기가 진실일 때의 경우에만 해당되겠지만.
서란은 나의 반응이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다.
모든 것이 불명확하지만, 이번에 마주한 적은 외계인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1999년 4월 21일
다 쓰러져가는 프랑크푸르트 교외의 허름한 주택가. 가구도 별로 없었다. 구석에 낡은 티브이 한 대만이 눈에 띌 뿐. 모르긴 몰라도 집세가 저렴할 것임은 틀림없는 이 곳이 바로 여행 기분을 망쳐버린 장본인의 거주지인 듯 했다. 거리 식당 점원치고는 상당히 멋진 발차기를 선보인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골목 이곳저곳을 가로지른 끝에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공항 근처를 오가는 인파 속에 묻힌 덕에 검은색 일당들도 쉽사리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여전히 여자는 점원 복장 그대로이고 끌려오다시피 달려온 소녀는 소파에 앉아 숨을 헐떡인다. 나는 그저 우뚝 서서 점원의 해명이나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일단 뭔가 마실거라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점원이, 아니 정체불명의 그녀가 입을 연다. 마치 아까 보여 준 돌려차기를 벌써 다 잊은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쪽 입장에서는 그리 쉽게 잊혀질 만한 기억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소녀를 보자면 그냥 받아들여도 크게 나쁜 친절은 아니었다.
"주문 안 했는데."
무의식중에 튀어나와 버리는 말.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까지도 점원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가 아닌가? 게다가 돈이라도 받는다면 이쪽은 대책이 없으니까. 자칫 또 한번 발차기가 날아들지는 않을까 하는 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기껏 마중나온 사람한테 너무하네."
짐짓 얼굴을 찌푸리며 뾰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였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표정을 수긍하기에는 아직도 발차기에 맞아 아스팔트 바닥과 입맞춤을 한 남자의 모습이 선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한 설명뿐인 것이다.
"마중이라면 검은 양복들이 먼저였는데,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
"그쪽을 따라갔으면 지금쯤 햇빛을 못 보고 있을 텐데."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슬쩍 웃으며 피하는 그녀. 하지만 대답해줄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흔들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설마 미 국가안보국 요원과 동료 요원을 구분도 못할 줄이야...이래서야 어린애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는 거나 다름없잖아. 아니, 요즘은 애들도 그렇게 쉽게 남을 따라가지는 않는다구."
그러면서 슬쩍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는 소녀를 쳐다보는 그녀였다. 차라리 대답해주지 않는 게 나을 뻔 했다. 초면에 이어지는 반말이나 비아냥거림이야 이미 익숙해질만큼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그녀 말이 사실이라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위험에 처한 것이다. 미국 안보국이 타국에서 일을 벌일 정도로 꼬인 것이 틀림없는. 하지만 그런 상황은 애당초 상상조차 못했다.
"이건 단순한 출장이었다고! 무슨 대단한 음모라도 있다는건가? 그렇다면 당신 정체는 도대체 뭔데?"
이렇게 된 바에는 그 누구도 함부로 믿을 수 없다.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질문이란 이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소개가 늦었군. 일단 연방정보국 대외부 소속의 서란이다. 신분증이 빠르겠지? 하지만 한국 요원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바로 이 집이라고 할 수 있지."
'일단'이라는 말이 걸리긴 했지만-일단-그녀가 꺼내들은 신분증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뒤에 덧붙여진 엉뚱한 소리에 고개가 절로 갸우뚱했지만.
"이 다 쓰러져가는 집을 보라구! 정보국 예산은 도대체 어디다 떼어먹은 거지? 해외 파견만 시켜 놓으면 다냐고!"
순식간에 흥분하는 그녀였다. 그녀의 점원 복장은 역시 단순한 위장이 아닌 깊은 사연이 담겨 있을 듯 했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튼 어디서나 예산 문제란 국내외를 초월하는 동질감을 맛보데 해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 진짜 알고 싶은 것들은 단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마음 속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튼, 원래대로라면 즐거운 여행이 되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된 건 이쪽도 마찬가지로 유감이야. 관광 가이드라면 확실히 재미있었겠지. 뭐, 처음부터 미끼였으니까 예상은 했겠지만 말야."
술술 풀어 나가는 서란의 말을 기어코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귀에 거슬리는 한 단어 때문이었다.
"미끼라고?"
"...몰랐군. 하지만 상관 없다구. 계획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쪽과는 달리 서란은 어깨만 한 번 으쓱할 뿐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계획에 따르면 이번 전장환경분석과의-이름한번 거창하군-독일 출장은 본 작전을 위한 미끼였어. 쉽게 말하자면 적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는 것이라고나 할까. 미끼란 표현보다는 역시 양동 작전이 낫겠지? 본 작전이란 바로.."
역시 사무적인 말투의 설명은 역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섞어가며 떠들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이쪽의 반응을 살피는 모습을 보자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지도.
"런던에서 있을 대 외계인 정책 수립을 위한 국제회의."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반응이란 고작 눈을 지그시 감아주는 것 뿐이다. 사실 드문 일도 아니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내가 알 수 있는 권한 밖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서란은 계속 몇 마디 이어나갔지만 더이상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내용들이었다. 외계인을 주제로 한, 그것도 국제 규모의 회의라면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인물들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만큼 위에 있거나 혹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관심가질 능력도, 이유도 없는 그런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굉장한 회의라면 비밀 유지건 경호건 간에 거대한 작전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없을 테니 이런 미끼 한 둘쯤 만들어 놓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미끼는 말 그대로 미끼일 뿐. 단순히 시선만을 끌 예정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계획대로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관광만 즐기면 되었을 우리가 왜 납치나 감금 따위를 걱정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 질문 없이 멀뚱히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그녀는 금방 말을 이었다.
"문제는 회의는 열리기도 전에 무산되었다는 거지."
"왜지?"
"정보국 소속 주제에 뉴스를 별로 안 좋아하나 보군."
어느새 서란의 손은 리모컨을 들고 있었다. 말로 해 봤자 먹힐 것 같지 않은지 요청하지도 않은 텔레비젼 시청을 시켜줄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해하기에는 훨씬 빨랐다.
낡아빠진 티브이 속의 화면은 '테러'라는 알기 쉬운 글자를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불길에 휩싸인 거리와 공포에 질린 시민들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언제나 양념처럼 비추어 주는 런던 각지의 명소들이 아니었다면 어디인지를 알아차리기는 힘들었겠지만.
"잠깐...저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단순한 테러일 뿐이잖아. 하루 걸러 하루 꼴로 일어나는...!"
올 초부터 중동 사태의 여파로 테러가 미국과 영국 전역에 끊이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화면을 자세히 살펴봐도 최근 있었던 폭탄 테러들과 별반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무감각하다고 욕해도 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일상처럼 되어버린 일들이니까. 인간이 인간인 이상 끊임없이 되풀이 될 일이다. 증오는 또다른 증오를 낳는다는 이야기는 너무 고리타분한 소리일까? 살인도, 죽음도 저마다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 방법이 최선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만약 지구 밖의 존재를 인식하고도 과연 인간은 이런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것인가.
"오늘 낮에 일어난 건 달라. 덕분에 회의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온건파 인사 대부분이 사망했어. 단순한 테러라고 보기는 힘들지."
이쪽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간에 귀로 들려오는 서란의 말은 분명 귀중한 정보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 중요도에 비례해서 혼란스러움은 커져만 갔다. 테러를 가장한 살해라. 아니, 어쩌면 테러는 진짜고 단지 장소만 조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무슨 짓을 했던 간에 충격적인 결과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온건파라. 그런게 진짜 있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건데?"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지하 기지에 틀어박혀 다른 건 몰라도 자료 열람은 실컷 한 덕분에 서란이 언급한 '온건파'와 같은 다분히 정치적인 단어의 의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는 외계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현재 국가 단위로 벌어지고 있는 대 외계인 정책을 세계 규모로 통합한다는 계획은 이미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더구나 외계인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인식하고 있는 국가들은 모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방법에 대한 견해차였다.
외계인이 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는 위협을 가해 온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여러가지 대응책에 대한 찬반 논란은 오래지않아 사람들을 크게 두 파벌로 나눠 버렸는데, 한시라도 빨리 세계 규모의 전투 부대를 창설하여 지구 밖으로부터의 침입을 격퇴하자는 것이 통칭 강경파의 주장이었고 그와는 달리 외계인들과의 의사 소통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자는 것이 이른바 온건파였던 것이다. 양측 모두 지구를 지키겠다는 목적을 보자면 옳은 이야기들이었으나 인간들은 역사에서 반복해 왔듯이 타협 대신 대립을 선택했다.
물론 그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주장 이면에는 이 미증유의 사태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각 국가간의 치열한 이권 다툼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크게 한 몫 하고 있었다. 일단 문제는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시기가 점점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계의 침략을 지구의 군사력으로 과연 막을 수 있을지, 혹은 과연 잔인무도한 외계인들에게 대화가 통할지의 여부는 모두 불확실했기에 결론은 결국 어정쩡하게 내려질 것이 뻔했다.
지금까지의 자료 분석에 따르면 강경파의 입지가 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쪽에 미국이라는 압도적인 강국이 버티고 있는 데다가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이란 것 자체가 아직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인간이 파악하고 있는 외계인의 존재란 사실 외계'인'이라기보다 '괴물'따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그 기술이라는 것을 미국이 독점하고 있다시피 한 상황이라 신빙성 여부는 매우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으로 온건파가 타격을 입었다면 그것의 배후는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일부러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건지 말하기 곤란해서인지 상당히 뜸을 들인 끝에 서란의 입이 열렸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강경파겠지."
당연한 결론 아닌가? 그녀의 행동 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대답이다.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누군지는 몰라도 끔찍이도 지구를 생각하는군. 차라리 잘 된 거 아냐? 이제 전 세계가 똘똘 뭉쳐 놈들과 한판 붙으면 되잖아. 안 그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 줄 알아!"
이렇게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면 누구라도 흠칫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씁쓸한 농담에 대한 서란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였다.
"놈들은 지구 전체를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거야! 오직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해서. 게다가..."
금새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곧이어 무서운 말을 꺼냈다.
"문제는, 그들이 이젠 우리를 노린다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아까 만난 이들이 그녀 말대로 미국 요원들이라면 우리가 노려진다는 말은 맞았지만, 온건파를 제거했다면 그들의 목적인 이미 달성된 터. 이제와서 굳이 미끼를 쫓아올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이번 작전 일체가 그들 손바닥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은 기분나쁜 일이지만 기분 나쁜 것으로만 끝난다면 이쪽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정부의 방침 역시 처음부터 미국쪽에 기울어 있었던 것이 뻔하니까 우리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서란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 아이를."
손가락질까지 곁들인 구체적인 지적. 소파 위의 소녀는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난데없는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다.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불안감이 점점 현실이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소녀와 재회하던 날 밤에 신 대위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내가 아는 한 소녀가 적의 목표가 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물론, 그 이야기가 진실일 때의 경우에만 해당되겠지만.
서란은 나의 반응이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다.
모든 것이 불명확하지만, 이번에 마주한 적은 외계인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