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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COM : Self Defense #016-출장
1999년 4월 21일
화창한 날이다. 푸른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전형적인 그런 날.
이런 날엔 아무 생각없이 밖에 나와 거리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특히 낯선 나라의 풍경이라면 더욱 더.
생전 처음 와 본 프랑크푸르트의 거리 모습은 딱히 감격할 만한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전망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공항 근처 길거리 식당 앞의 한 구석 테이블에 앉아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어쩌면 답답한 지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운 건지도 모르겠다.
'난데없이 외국 출장이라. 아무래도 수상하지만...'
살짝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앉아있는 단 하나뿐인 일행을 바라본다. 관광객이라 하기에는 소박한 옷차림의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없는 그녀는 아직 충격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래서는 아무래도 즐거운 여행이라기보다는 적막한 여행이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가끔은 이런것도 괜찮겠지.'
다시 고개를 돌려 거리를 바라본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에 열중한 채 활보한다. 빌딩 위의 대형 전광판에서는 요즘 불고 있는 우주 붐에 대한 프로그램이 끊이지 않는다. 기아나와 케네디 우주센터 등지에서 며칠 간격으로 쏘아대고 있는 로켓이 내뿜는 화염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자의든 타의든 사람들의 무지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보기 싫은 진실을 보아야 할 때가 언젠가 온다 하더라도 그 직전까지는 즐기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몇 주 전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듯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은 여전히 쉽게 적응이 안 된다. 마중나오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며 애써 긴장을 풀어 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정도면 직업병이랄까.
어찌되었건 간에 그 한밤의 만남 이후로 출장 준비는 너무나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말이 좋아 출장이지 '미래 전장환경 분석' 따위의 시시한 제목이 붙은 학술 심포지엄 참관, 각종 군사 연구소 견학 등으로 짜인 허술한 일정만 전달받았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마치 출장을 빙자한 여행이나 마찬가지인 임무. 이런 꺼림칙한 임무는 상부의 고위 관료들 정도라면 흔한 일겠지만 말단에 불과한 내가 겪을만한 경우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란 뻔한 것 아니겠는가.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나는 해야 마땅한 반응을 했을 뿐이다.
...
..
.
"그러니까 지금 공짜 독일 여행을 보내주겠다 그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출장입니다."
왜, 평소에 안 그러다가 갑자기 잘해주면 상대방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 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명령을 받자 마자 신 대위에게 던진 말은 분명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정말로...
"혹시 외계인 때문에 머리에 이상이라도?"
순간적으로 신 대위의 얼굴이 찌푸려졌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라 믿고 싶다. 민 중위가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하얀 가운의 노인은 눈치없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에...지금까지의 사례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신 대위가 무서운 눈길을 보내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젊은이도 견디기 힘든 건데 아무렴. 하지만 노인을 동정할 틈도 없이 그녀의 눈길은 곧장 이쪽을 향했다.
"임무일 뿐입니다, 중위. 외계인과 노닥거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군요. 그리고 걱정은 고맙지만 듣고보니 그쪽 뇌가 심히 염려되는데 이번에 가는김에 검사라도 받아보는게 어떨까요? 독일의 의료 시설은 상당한 수준이라는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반격. 뭐, 검사건 치료건 무료라면 한번 받아볼 용의는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지난번 무단 침입 건에 대해 징계는 커녕 뜬금없이 독일 출장을 가라는 명령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전 작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으니 위로 차원이라고 마음편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뜩이나 예산이 모자르다고 난리치는 부서에서 해외 출장을 보내준다는 건 애시당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출발 직전에 밝혀졌지만.
공항까지 전송나온 신 대위가 내린 명령은 늘 그렇듯 진지했고, 갑작스러웠다.
"모처럼이니까, 여행삼아 즐겁게 다녀오길."
다정한 말이야 고맙지만 그럴수록 이쪽은 점점 불안해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기 어린 얼굴이다. 이젠 더 이상 불안을 참고 견뎌내는 인내심이 내게 사라지고 만 것 같다. 기어코 입을 열고 마니까.
"출장이라고 그렇게 야단이더니 이번엔 또 무슨 속셈입니까?"
무례한 말에도 착한 신 대위는 화내지 않았다. 그 대신 더 충격적인 말을 꺼냈을 뿐.
"아무튼 동행도 있으니까 잘 부탁해요."
"잠깐. 동행이라니, 그런 이야기는..."
당황하기도 전에 문제의 동행이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민 중위의 손에 이끌려 오는 사람은 분명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문제의 소녀였다. 불길한 예감이 저절로 솟아 오르는 순간, 참지 못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동행이란 게 설마...?"
"좋은 파트너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진지한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설득력은 없다.
"잠깐만...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저런 꼬맹이랑..."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소녀를 보고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꼬맹이란 말은 취소. 꽤 크잖아? 최소한 내 어깨까지는 올 듯 하다. 아무튼,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안심하세요. 현지에서 우리측 요원이 마중나올 테니까, 단둘이 간다고 너무 기대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분명히 신 대위의 안경 너머의 눈은 웃고 있었다.
.
..
...
생각같아서는 임무고 뭐고 제대로 따지고 싶었지만 비행기 시간은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고, 그만 여기까지 오고 만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기에 어쩔 수 없이 신 대위가 장담한 현지 요원의 마중이란 것을 기다리는 중이고.
"왜 이리 안 오는거지? 누군지는 몰라도 참 매너 없군. 그렇지?"
갑작스럽게 침묵을 깨는 통에 소녀는 흘끗 돌아다 보고 만다. 말을 걸어봤자 대답할 턱이 없는데. 나도 참 못말릴 노릇이다. 다행히도 그 순간 드디어 마중나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눈에 띄는 검정색 고급 승용차가 길 저편에 멈춰 서더니 역시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의 사내가 내린 것이다. 분명히 맞춰 입은 비싼 옷차림이겠지만 내 머리속에서 울리는 외침은 달랐다.
'저건 너무 촌스럽잖아!!! 도대체 우리나라 센스 하고는...무슨 영화라도 찍자는 건가?!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말야..!'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이쪽을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온다. 가까이서 보니 외국인이다. 현지 요원이라더니 고용이라도 한 건가.
"실례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유창한 영어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겉으로 표시낼 필요는 없다.
"네. 그렇습니다만."
"이야기는 가서 하도록 하죠. 일단 같이 갑시다."
꽤나 단도직입적인 말투다. 늦게 왔으면 사과부터 할 것이지.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뭘 어쩌랴. 안내와 지시는 물론 가장 중요한 재정 지원까지 모두 현지 요원에게서 받도록 되어 있으니까 따라나서는 수밖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는데도 소녀는 가기 싫은지 움직이지 않는다.
"어이, 그만 가자고. 관광은 나중에 실컷 할 테니까..."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걸까? 소녀는 묵묵 부답이다. 그러자 뭐가 그렇게 급한지 검은 선글라스의 남자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고 한다.
"잠깐, 그렇다고..."
뭔가 잘못 되어가는 느낌이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난데없이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손님, 주문하신 것 나왔습니다."
난 시킨 적 없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국가 예산으로 온 출장이니까 아쉽게도 함부로 돈을 쓸 수가 없다고. 그러고보니 식비는 얼마나 나왔더라.
속으로 무슨 망상을 하든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가까워지는 동그란 쟁반과 그 위에 음료수 두 개.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점원이 다가온다. 염색한 티가 역력한 노릇노릇한 머리에 푸른 빛 선글라스. 역시 촌스럽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왠지모를 불안감이 스쳐 지나간다. 저 정도의 센스라면 경험상 위험 인물일 확률이 높다.
"저...시킨 적 없는데요?"
왠지 조심스럽게 사양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런가요? 그러면 곤란한데..."
장난기 서린 어투의 대답이 흘러 나온다. 그리고 이후의 시간은 눈깜짝할만한 사이에 지나갔다. 발이라도 헛딛은걸까, 비틀거리는 점원으로부터 쟁반 위의 음료수들이 검은 양복에게 쏟아진다. 저런, 비싼 옷일텐데. 같은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검은 선글라스에 당황한 빛이 어린다.
순간, 여점원의 발차기가 사내에게 작열했다.
둔탁한 소리가 한낮의 거리 위로 울려퍼지고- 볼썽사납게 날아가는 남자와 함께 즐거운 출장이라는 계획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은 점원은 소녀의 손을 부여잡고 재빨리 뛰어가려는 폼이다. 멍하게 쳐다보는 내 시선을 무시하고 귀에 익숙한 한국말이 귀를 두들긴다.
"뭐해! 얼른 가자구!"
귀를 관통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 손에 잡힌 소녀의 표정을 보면 왠지 따라가도 괜찮을 듯 싶다.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는 날아갈 듯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쨋건, 멋진 돌려차기였다.
1999년 4월 21일
화창한 날이다. 푸른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전형적인 그런 날.
이런 날엔 아무 생각없이 밖에 나와 거리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특히 낯선 나라의 풍경이라면 더욱 더.
생전 처음 와 본 프랑크푸르트의 거리 모습은 딱히 감격할 만한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전망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공항 근처 길거리 식당 앞의 한 구석 테이블에 앉아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어쩌면 답답한 지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운 건지도 모르겠다.
'난데없이 외국 출장이라. 아무래도 수상하지만...'
살짝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앉아있는 단 하나뿐인 일행을 바라본다. 관광객이라 하기에는 소박한 옷차림의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없는 그녀는 아직 충격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래서는 아무래도 즐거운 여행이라기보다는 적막한 여행이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가끔은 이런것도 괜찮겠지.'
다시 고개를 돌려 거리를 바라본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에 열중한 채 활보한다. 빌딩 위의 대형 전광판에서는 요즘 불고 있는 우주 붐에 대한 프로그램이 끊이지 않는다. 기아나와 케네디 우주센터 등지에서 며칠 간격으로 쏘아대고 있는 로켓이 내뿜는 화염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자의든 타의든 사람들의 무지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보기 싫은 진실을 보아야 할 때가 언젠가 온다 하더라도 그 직전까지는 즐기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몇 주 전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듯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은 여전히 쉽게 적응이 안 된다. 마중나오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며 애써 긴장을 풀어 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정도면 직업병이랄까.
어찌되었건 간에 그 한밤의 만남 이후로 출장 준비는 너무나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말이 좋아 출장이지 '미래 전장환경 분석' 따위의 시시한 제목이 붙은 학술 심포지엄 참관, 각종 군사 연구소 견학 등으로 짜인 허술한 일정만 전달받았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마치 출장을 빙자한 여행이나 마찬가지인 임무. 이런 꺼림칙한 임무는 상부의 고위 관료들 정도라면 흔한 일겠지만 말단에 불과한 내가 겪을만한 경우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란 뻔한 것 아니겠는가.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나는 해야 마땅한 반응을 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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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 공짜 독일 여행을 보내주겠다 그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출장입니다."
왜, 평소에 안 그러다가 갑자기 잘해주면 상대방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 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명령을 받자 마자 신 대위에게 던진 말은 분명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정말로...
"혹시 외계인 때문에 머리에 이상이라도?"
순간적으로 신 대위의 얼굴이 찌푸려졌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라 믿고 싶다. 민 중위가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하얀 가운의 노인은 눈치없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에...지금까지의 사례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신 대위가 무서운 눈길을 보내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젊은이도 견디기 힘든 건데 아무렴. 하지만 노인을 동정할 틈도 없이 그녀의 눈길은 곧장 이쪽을 향했다.
"임무일 뿐입니다, 중위. 외계인과 노닥거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군요. 그리고 걱정은 고맙지만 듣고보니 그쪽 뇌가 심히 염려되는데 이번에 가는김에 검사라도 받아보는게 어떨까요? 독일의 의료 시설은 상당한 수준이라는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반격. 뭐, 검사건 치료건 무료라면 한번 받아볼 용의는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지난번 무단 침입 건에 대해 징계는 커녕 뜬금없이 독일 출장을 가라는 명령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전 작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으니 위로 차원이라고 마음편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뜩이나 예산이 모자르다고 난리치는 부서에서 해외 출장을 보내준다는 건 애시당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출발 직전에 밝혀졌지만.
공항까지 전송나온 신 대위가 내린 명령은 늘 그렇듯 진지했고, 갑작스러웠다.
"모처럼이니까, 여행삼아 즐겁게 다녀오길."
다정한 말이야 고맙지만 그럴수록 이쪽은 점점 불안해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기 어린 얼굴이다. 이젠 더 이상 불안을 참고 견뎌내는 인내심이 내게 사라지고 만 것 같다. 기어코 입을 열고 마니까.
"출장이라고 그렇게 야단이더니 이번엔 또 무슨 속셈입니까?"
무례한 말에도 착한 신 대위는 화내지 않았다. 그 대신 더 충격적인 말을 꺼냈을 뿐.
"아무튼 동행도 있으니까 잘 부탁해요."
"잠깐. 동행이라니, 그런 이야기는..."
당황하기도 전에 문제의 동행이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민 중위의 손에 이끌려 오는 사람은 분명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문제의 소녀였다. 불길한 예감이 저절로 솟아 오르는 순간, 참지 못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동행이란 게 설마...?"
"좋은 파트너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진지한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설득력은 없다.
"잠깐만...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저런 꼬맹이랑..."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소녀를 보고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꼬맹이란 말은 취소. 꽤 크잖아? 최소한 내 어깨까지는 올 듯 하다. 아무튼,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안심하세요. 현지에서 우리측 요원이 마중나올 테니까, 단둘이 간다고 너무 기대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분명히 신 대위의 안경 너머의 눈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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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같아서는 임무고 뭐고 제대로 따지고 싶었지만 비행기 시간은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고, 그만 여기까지 오고 만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기에 어쩔 수 없이 신 대위가 장담한 현지 요원의 마중이란 것을 기다리는 중이고.
"왜 이리 안 오는거지? 누군지는 몰라도 참 매너 없군. 그렇지?"
갑작스럽게 침묵을 깨는 통에 소녀는 흘끗 돌아다 보고 만다. 말을 걸어봤자 대답할 턱이 없는데. 나도 참 못말릴 노릇이다. 다행히도 그 순간 드디어 마중나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눈에 띄는 검정색 고급 승용차가 길 저편에 멈춰 서더니 역시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의 사내가 내린 것이다. 분명히 맞춰 입은 비싼 옷차림이겠지만 내 머리속에서 울리는 외침은 달랐다.
'저건 너무 촌스럽잖아!!! 도대체 우리나라 센스 하고는...무슨 영화라도 찍자는 건가?!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말야..!'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이쪽을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온다. 가까이서 보니 외국인이다. 현지 요원이라더니 고용이라도 한 건가.
"실례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유창한 영어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겉으로 표시낼 필요는 없다.
"네. 그렇습니다만."
"이야기는 가서 하도록 하죠. 일단 같이 갑시다."
꽤나 단도직입적인 말투다. 늦게 왔으면 사과부터 할 것이지.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뭘 어쩌랴. 안내와 지시는 물론 가장 중요한 재정 지원까지 모두 현지 요원에게서 받도록 되어 있으니까 따라나서는 수밖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는데도 소녀는 가기 싫은지 움직이지 않는다.
"어이, 그만 가자고. 관광은 나중에 실컷 할 테니까..."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걸까? 소녀는 묵묵 부답이다. 그러자 뭐가 그렇게 급한지 검은 선글라스의 남자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고 한다.
"잠깐, 그렇다고..."
뭔가 잘못 되어가는 느낌이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난데없이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손님, 주문하신 것 나왔습니다."
난 시킨 적 없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국가 예산으로 온 출장이니까 아쉽게도 함부로 돈을 쓸 수가 없다고. 그러고보니 식비는 얼마나 나왔더라.
속으로 무슨 망상을 하든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가까워지는 동그란 쟁반과 그 위에 음료수 두 개.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점원이 다가온다. 염색한 티가 역력한 노릇노릇한 머리에 푸른 빛 선글라스. 역시 촌스럽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왠지모를 불안감이 스쳐 지나간다. 저 정도의 센스라면 경험상 위험 인물일 확률이 높다.
"저...시킨 적 없는데요?"
왠지 조심스럽게 사양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런가요? 그러면 곤란한데..."
장난기 서린 어투의 대답이 흘러 나온다. 그리고 이후의 시간은 눈깜짝할만한 사이에 지나갔다. 발이라도 헛딛은걸까, 비틀거리는 점원으로부터 쟁반 위의 음료수들이 검은 양복에게 쏟아진다. 저런, 비싼 옷일텐데. 같은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검은 선글라스에 당황한 빛이 어린다.
순간, 여점원의 발차기가 사내에게 작열했다.
둔탁한 소리가 한낮의 거리 위로 울려퍼지고- 볼썽사납게 날아가는 남자와 함께 즐거운 출장이라는 계획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은 점원은 소녀의 손을 부여잡고 재빨리 뛰어가려는 폼이다. 멍하게 쳐다보는 내 시선을 무시하고 귀에 익숙한 한국말이 귀를 두들긴다.
"뭐해! 얼른 가자구!"
귀를 관통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 손에 잡힌 소녀의 표정을 보면 왠지 따라가도 괜찮을 듯 싶다.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는 날아갈 듯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쨋건, 멋진 돌려차기였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