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COM : Self Defense #015-Mission accomplished (2)



1999년 4월 18일. (2)


  
  병실로 돌아오는 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지 내부는 복잡하게 얽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광활한 규모까지는 아니다. 그저 빽빽하게 들어찼다는 느낌이 강할 뿐.

  이 곳, 원산시 근교에 자리잡은 연방정보국 제2지부는 애초에 구 북한군 지휘부가 사용하던 시설을 약간 손 본 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방어 목적으로 통로나 방은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었지만 노후화된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 대 외계인 작전을 총괄하게 되면서 확장을 거듭한 끝에 기존에 갖추고 있던 각종 지휘 시설들 뿐만 아니라 대 외계인 작전에 필수적인 첨단 장비를 갖춘 실험실에서부터 병원까지 각종 잡다한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다. 물론 병원의 경우 작전에서의 생존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인 분석이나 외계인 사체 분석을 주 업무로 삼고 있지만 말이다.

  애당초 치료를 위해서 굳이 외부와 폐쇄된 기지 안에 입원한다는 것은 곧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위독한 경우이거나 아니면 외부로 누출되어서는 안 되는, 특별한 환자라는 소리다.

  지금 이 몸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옆 병실만은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병실이 가까워지자 문 옆에 앉아 있던 병사가 일어나 미소를 띤 경례를 붙인다. 입원한 이후부터 계속 마주치는 사이다. 항상 반갑게 맞아주지만 이쪽을 위해서 배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가 지키는 병실 문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안에다 기밀 문서라도 잔뜩 쌓아놓은 것만 같은 차가운 경고문이 바로 옆 병실 문에 떡하니 붙어 있는 것이다.'관계자'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지난 며칠동안 최소한 의사로 보이지는 않는 사람들이 뻔질나게 들락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병실을 지나 내 자리로 돌아왔다. 딱딱한 병원 침대는 여전히 답답하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삭막한 방 안에 차가운 백색 전등만이 쓸쓸히 빛을 발한다. 이런 곳에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치료라기보다는 고문에 가깝다. 살아 남았기에 여기에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다른 수많은 죽음의 대가로 받은 것 치고는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문득 옆 병실 환자가 생각난다. 이런 답답한 곳에 일주일 넘게 가둬 놓는다면 멀쩡한 사람도 앓아 누울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왠지 모르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머리를 식힐 겸 고개를 돌려 바라본 탁자 위에는 일주일치의 신문이 그대로 쌓여 있다.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는 데 꽤나 유용했지만 동시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했다.

  '러시아 전투기, 중국 영공 침입. 국경 분쟁 가능성...'

  '시베리아 횡단 열차 사고-사상자 다수...원인은 아직 파악 안됨'

  하나같이 불명확한 어투로 끄적여대긴 했지만 신문 한켠을 채운 기사는 분명히 내가 겪은 일에 대한 것이었다. 비록 처참한 전투가 열차 사고로 둔갑하긴 했지만 뭐, 사고라고 친다면 사고일 수도 있으니까 별로 상관없다. 단지 정보국에서도 월급 값은 하는 모양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생각해보면 놀랄 만한 일이다. 병실에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각종 방송과 신문에서는 불과 하루 전의 일을 전혀 다른 일로 만들어버리고 있었으니. 한순간 내가 꿈이라도 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바로 끌려간 작전 결과 회의는 지난 경험이 꿈 따위가 아님을 확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가 보는 진실은 아직 모두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까. 하지만 일상에서조차도 진실과 거짓들이 뒤바뀌는 일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게다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골치 아픈 진실을 보려고 하기 보다는 보기 좋은 거짓 쪽을 택하는 법이다.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벌어지는 외계인과 관련된 정보 공작은 전부 쓸데없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진실은 평화로운-적어도 인간끼리 싸우는-세상이니까. 외계인 따위는 영화 속에서만 보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사람들은 보고 싶은 진실만 보지 않을까. 문제는 얼마 안 있으면 보기 싫은 진실도 받아들여야만 할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이겠지만.

  이야기가 약간 빗나갔지만 소위 정보 공작이라는 것은 외부보다도 군 내부에서 오히려 더 높은 수준으로 벌어지는 듯 하다. 아까 있었던 브리핑은 -외부 인사들을 위해- 상당히 공들여 준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의 핵심과, 가장 큰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히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에 도착한 화물칸에 짐짝처럼 쌓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다. 그저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는 말만 있었을 뿐.

  이렇게 되면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중간의 특별칸에서 발견한 소녀 역시 마찬가지다. 김 중사와 장 하사는 무사히 복귀했지만 소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러시아 측에 넘겼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다.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얻은 것을 신 대위가 순순히 포기했을 리는 없으니까.


  방 안을 가득 채운 하얀 전등 불빛이 당시의 상황을 다시 떠오르게 해 준다. 그 때도 그랬다. 흰 빛이 비추는 온통 피로 물든 객실. 그리고 그와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 하얀 코트를 입고 잠든 소녀.
  
  분명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지금쯤 깨어 났을까? 어쩌면 지금 그녀는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바로 옆 병실이랄까.

  이건 지난 며칠동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정보 은폐를 전문으로 하는 이곳에서 소녀 한 사람 정도 숨기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경호까지 붙인다는 것은 생각 외로 눈에 띄는 행동이지만 그만큼 그녀의 보호가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에 옆 병실의 정체를 밝혀 볼 생각이다. 이미 보초의 교대 시간은 잘 알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작전에서 얻은 유일한 성과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분대원들의 생명과 맞바꾼 소녀. 그녀는 과연 지금도 그때처럼 편히 잠들어 있을까.


.
..
...
....
  

  정상적인 환자라면 한창 잠들어 있을 시각.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별로 정상이 아닌 상태이기에 나는 당당하게 옆 병실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당직실에서 교대가 끝난 보초는 금방 돌아올 것이다. 아니, 돌아오지 않아도 곳곳에 설치된 센서는 곧바로 이상을 감지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망설임 없이 '전장환경분석과 연구용'이라고 씌어져 있는 기밀 열람 인가증을 문 옆의 잠금장치에 그었다.

  거짓말처럼 스르륵 열리는 문. 전장환경분석과가 이름값을 하긴 하는 것 같다. 진짜 기밀 문서라도 쌓아놓은 건가. 사실 왠만한 기밀 자료는 모두 접근이 가능한 허가증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에서까지 통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운이 좋다는 거겠지. 조금 있으면 닥칠 위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흥분이 온 몸을 감싼다.

  
  방금 문을 열었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병실 안에는 어둠만 가득할 뿐. 지금 필요한 것은 진실을 밝히는 빛이다. 얼른 본능적으로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거기까지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오직 원하던 것을 보게 되었다는 설레임 뿐.


  반짝이는 불빛이 순식간에 어둠을 몰아낸다. 갑작스러운 빛의 난입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전등 불빛은 이곳도 역시 눈부신 하얀 색이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상상하던 병실과는 사뭇 달랐다. 아니, 그건 병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실험실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일 듯하다. 방 가운데에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일반 병실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주위를 감싼 것들은... 과연 인간이 인간을 치료하기 위해 설치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만약 있다면-의사들이 지나다닐 부분을 제외한 병실의 나머지 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다양한 굵기의 전선과 튜브들이 마치 둥지라도 틀 듯 침대에 누운 환자를 중심으로 여기저기로 뻗어 있었다. 튜브 끝에는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액체들이 담긴 투명한 병이 당연한 듯이 서 있었고, 전선에 연결된 장비들은 희미한 빛을 발하며 자신이 동작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머리 부분에 씌어진 전극 탓에 환자의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선들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금새 알 수 있었다. 전에 본 적 있는 소녀였다.
한번 봤을 뿐이지만 잊혀지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좀 더 창백하고 야윈 것 같기도 하다. 무의식적으로 손길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도 그녀는 잠들어 있는 걸까?

    
  그 때였다.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는 눈을 떴다. 누워 있었지만 소녀의 평온한 눈은 이쪽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눈의 마주침. 솔직히 약간 놀랐지만 두려움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반가울 뿐.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부하들의 죽음에 대하여 원망도 많이 했지만 막상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적의같은 것은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분노 역시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지난 일에 대해 화낼 이유가 없어진 것은 좋지만 그저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말았다. 아마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소녀도 놀랐을 텐데 눈만 깜빡일 뿐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함부로 남의 머리를 만지는 건 역시 실례였나?'

  뭐라고 엉뚱한 소리라도 튀어나오려던 찰나, 병실 문이 열리면서 구원군이 나타났다.

  아니, 이쪽을 잡으러 온 적이라고 해야 할까나.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 셋이 한데 모여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 외로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지 자기들끼리 먼저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드디어 깨어났군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 '접촉' 때문인가요?"

  "원래 처음부터 수면 가스따위에 당한 흔적은 없었고 정신적인 충격에 따른 쇼크상태였어. 이미 며칠 안에 의식이 돌아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잖나. 단지 그 시간에 우연히 저 자가 들어온 거라구."

  민동화 중위가 신이라도 난 듯한 표정으로 하얀 가운을 걸친 흰 머리의 노인에게 묻자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 할아버지는 이 병실에 들락거리던 사람들 중 그나마 의사에 가깝게 생겼던 사람이다. 듣기로는 생물 연구 담당이라고 했는데... 화라도 난 것 같다.

  "토론은 거기까지. 강 중위, 귀관은 방금 불법 침입을 저질렀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카랑카랑한 신 대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묘하게 밝은 빛이다. 이러면 그냥 당할 수는 없지.

  "불법이라뇨? 그냥 카드 한 번 그어 보니까 들어올 수 있던데요. 문 앞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써 있잖습니까. 이쪽도 관계자인줄만 알았는데-."

  "...설마 그게 이 야밤에 경비가 없는 틈을 타서 침입한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죠."

  전혀 당황하는 빛 없는 대답. 사실 따지고 들자면 할 말은 없다. 이렇게 된 거 그동안 쌓였던 질문이나 해야 겠다.

  "그건 그렇다치고 저 소녀는 도대체 뭡니까! 지난번에 그 난리를 쳐서 구출해 왔는데 또 가둬 놓는 건 뭐하자는 거죠?"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을 여기로 불렀답니다. 강 중위. 이제 퇴원할 때가 다 된 것 같군요."

  살짝이지만, 분명히 전에 본 적 있던 미소다. 가만 있자... 불렀다고-? 내가 여기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오도록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당황스런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침대 위의 소녀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차가워 보이는 눈이다.

  일이...꼬여버린 걸까나.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