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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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성과 비명이 어우러져 공포를 자아냈다. 검붉은 하늘 아래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연석삼아 만들어진 피웅덩이에 파문이 일었다. 죽음에서 태어난 그것은 산 자들의 죽음을 갈망하며 조용히, 그러나 탐욕을 담아 중앙에 앉아있는 이를 재촉했다.
힘없이 늘어진 손은 더 이상 검을 쥐지 못했다. 어깨가 뜯기고 다리가 난도질당한 그 처참한 모습에는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얼굴에는 깊은 절망만이 남아있었다.
남자는 주름진 눈가를 파르르 떨며 지평선 너머에 솟아오른 한줄기의 찬란한 빛을 바라봤다.
“난, 아직…….”
괴물의 손에 들린 무딘 낫이 남자의 피를 머금으며 목을 찢어놓았다. 끝맺음을 내지 못하고 목소리가 멎자 주변에 있던 수많은 괴물들이 달려들었다. 목이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몸뚱이는 육편이 되어 뜯겨졌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자의 영혼이 비명과 함께 육신에서 끌려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을 떠돌던 기괴한 몰골의 사신이 영혼을 낚아채 반투명한 사슬에 옭아맸다.
가지각색의 영혼들이 사슬에 묶여 공포에 물든 절규를 쏟아냈다. 거죽만 남은 사신의 메마른 손이 사슬을 한 차례 출렁이자 그것은 곧 악의 섞인 저주가 되어 산 자에 대한 증오로 차올랐다. 그리고 사신의 텅 빈 눈구멍이 마지막 남은 이를 향했다.
시선을 느낀 남자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들어 그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양손에 든 검과 해머를 휘둘러 괴물들을 도륙했고 동료를 집어삼킨 지옥도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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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함께해온 동료의 죽음은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 동료가 곁에 남아있던 마지막 동료임에도 그것은 변함없었다.
햇수를 따지기조차 힘든 여정은 남자에게서 수십 명의 동료를 빼앗고 남아있는 기억과 감정마저 갉아먹어 티끌조차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고난은 남자에게 힘을 건네줬으니까. 비록, 그 대가가 육신을 제외한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수십, 어쩌면 수백 년에 달할지도 모를 기나긴 여정의 목적만큼은 잊지 않았다. 살아남은 모든 이들이 바라 마지않는, 모든 것을 내던지더라도 얻길 원하는 단 하나의 단어.
‘구원.’
죽음의 통로를 거쳐야만 갈 수 있다고 믿었던 지옥이 은밀히 다가와 세상과 섞이던 그 순간부터 세상은 변했다. 검게 죽은 땅은 시체들을 양분삼아 곡식 대신 죽음을 싹틔웠고 하늘은 태양을 잃은 채 검붉은 어둠만을 드리웠다. 문명은 몰락했고 과거 인간의 발길이 머물던 터전에는 괴물과 시체들이 자리 잡았다.
죽음은 더 이상 안식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천국으로의 문은 닫혔고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 채 끝없는 삶을 강요받았다.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그저 극소수의 인간만이 어딘가에 쓰레기처럼 살아남아 다가오는 최후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그는 구원받기를 원했다. 죽어서도 지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살아남아 닫힌 천국으로의 문을 두들길 것이다. 열리지 않는다면 그 문을 잡아 뜯어서라도 천국으로의 길을 열리라.
천국에서라면 산 자의 지옥을 거닐던 이 비천한 몸뚱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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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구름은 여전히 하늘을 뒤덮었고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대지는 발을 디딜 때마다 핏물만이 베어 나왔다. 산은 악령이 쓰인 고목들이 뿌리를 내렸고 바다는 검게 죽어 파도조차 일지 않았다.
고목들을 불태우며 산을 넘었고 끈적이는 물길을 헤치며 바다를 건넜음에도 여정은 계속됐다.
무수히 많은 괴물들을 베어 넘겼고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끝은 없었고 오직 괴물, 괴물, 끝없는 괴물 무리와 시체더미만이 지상에 남아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한계를 넘어선 여정은 강철과도 같던 몸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세상은 그의 적이었고 그는 세상의 적이었다. 그럼에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을 잃은 공허한 눈동자에도 그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시야의 저편. 검붉은 하늘을 반으로 가르며 솟은 하나의 빛줄기. 여정의 이정표이자 종착지.
천국의 문.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마지막 구원의 빛줄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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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이 길어질수록 빛줄기는 뚜렷해졌다. 그 찬란한 빛줄기는 지옥으로 변한 이 세상을 비추는 단 하나의 서광이었고 유일한 구원이었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어느덧 한 자락의 산줄기만 남겨놓았을 무렵, 그는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과거 마을이었을 그곳은 다 허물어져가는 폐허였다. 반쯤 무너진 가옥들과 얕은 돌담을 방책삼아 열 명 남짓한 이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살아가는 광경이 아니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저 공허한 눈길로 하늘을 가르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그저 죽지 못해서 살아있을 뿐이었다.
지체 없이 그곳을 지나치려던 그를 붙잡은 것은 한 노인이었다.
“천국의 문을 찾아서 온 것인가?”
그가 무감정한 눈길로 바라보자 노인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의 모습에 실망했나보군. 하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우리는 지금껏 천국의 문을 열려는 이들을 수없이 보았고, 그것이 앞으로도 영원히 열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절망했을 뿐이니까.”
“무, 슨……, 뜻이지?”
남자의 입을 비집고 어눌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오랜 세월동안 말을 하지 않은 탓에 생긴 문제임을 눈치 챈 노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앞장섰다.
“이야기가 좀 기니까 내 집으로 가지. 다 스러져가는 집이지만 나쁘진 않을 거야.”
마을 내에서 유일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노인의 집은 세월의 풍화를 비껴가고 있었다. 비좁은 집안에는 과거의 유물들, 그리고 책과 종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 남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벽 한쪽에 걸린, 여러 문양으로 치장된 문의 그림이었다.
“처음 볼 테지? 짐작하는 대로야.”
“천국의 문…….”
“맞아. 자네가 찾던 천국의 문일세.”
노인은 그림으로 다가갔다.
“자넨 기억하나? 세상이 지옥으로 변모하기 이전의 세상을 말이야.”
남자가 고개를 흔들자 노인이 과거를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 나를 제외하면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은 더 이상 세상에 남아있지 않겠지. 그만큼 아득한 과거의 이야기야. 저 물건이 보이나?”
노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곳엔 하나의 장치가 있었다.
천장까지 닿는 세로로 놓인 투명한 원통형 관 안쪽에 주먹보다 작은 쇠구슬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손가락 길이의 검은색 침이 관에 그려진 여러 눈금들 중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와 달이 뜨지 않는 세상에서 저것만이 유일하게 시간을 알려주지. 구슬이 한 번 오르내리면 하루가 지났다는 뜻이고 옆에 놓인 바늘이 위로 한 눈금 움직이지. 눈금이 맨 위까지 올라가면 1년이 지났다는 소리야. 그리고…….”
노인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이자 남자의 시선이 쫓았다.
“저기에 쓰인 숫자는 천국의 문이 처음으로 열린 날부터 지금까지 눈금이 맨 위에 오른 횟수를 적은 것이지.”
그곳엔 842 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난 아직도 기억한다네. 천국의 문이 완성되어 세상을 향해 열리던 그 순간을 말이야. 황제와 각국에서 모인 열한명의 왕들,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그보다 몇 배는 많은 인파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문 안으로 들어갔지. 그 뒤로 매년마다 열린 문은 작위를 가지거나 명망 있고 돈이 많은 이들만을 안으로 들였다네. 그래도 많은 이들은 기다렸어. 언젠가 자신들도 천국으로 향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었으니까.”
노인은 침음과 함께 창밖으로 보이는 빛줄기를 응시했다.
“일곱 번째로 문이 열리던 그날, 세상은 암흑에 잠겼지. 하늘에 지옥문이 열렸고 수많은 악마들이 지상에 내려왔어. 결국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순서를 기다리던 이들은 악마들에게 몰살을 당했네. 그리고 요새를 지어 문 앞을 지키기 시작했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이후에 벌어진 일은 명료했다. 악마들은 세상을 집어삼켰다. 인세에 지옥이 도래했고, 모든 이에게 평등하던 죽음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인세의 지옥에서 인간은 영생을 부여받았다.
“천년에 달하는 시간동안 많은 이들이 천국의 문을 열기 위해서 찾아왔네. 2천명 이후로는 세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문을 지키는 악마들에 의해서 모두 실패했지.”
“난 실패하지 않는다.”
문 앞을 악마들이 지키고 있으리라는 것은 남자도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러나 잃어버린 감정은 두려움을 몰랐고 지금 와서는 오직 천국의 문을 향한 목적만이 남아있었다.
남자의 흔들림 없는 마음가짐을 읽은 노인은 침음을 내뱉었다.
“그래.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더 이상 늙지도, 죽지도 않는 세상이니 지금껏 살아남아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라장을 헤쳐 왔겠지. 그거 아나? 자네는 3백년 만에 찾아온 이방인이야.”
노인의 입가에 주름진 미소가 걸렸다.
“장담하건데, 자네는 지금껏 찾아온 이방인들 중에서 가장 강할 거야. 난 믿네.”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작별의 인사는 오가지 않았고, 노인의 애잔한 시선만이 남자의 뒷모습을 배웅할 뿐이었다.
남자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마을과 천국의 문 사이를 가로막은 산맥은 지금까지의 여정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산맥의 꼭대기에 올라선 순간, 남자는 드디어 염원하던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빛줄기가 시작되는 장소. 찬란하다 못해서 눈부신 그곳에 백여 미터에 달하는 드높고 거대한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국의 문…….”
문 주변에 지어진 요새와 악마의 군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단하나. 천국의 문만이 시선을 가득 매우며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사라졌다고 여겼던 감정이 되살아남을 느끼며 남자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양손에 들린 무기를 휘두르자 감정이라는 이름의 메마른 대지가 적셔졌다. 악마의 피가 몸을 물들임과 동시에 천국을 향한, 구원을 위한 갈망이 고개를 짓쳐들었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의 머리를 오른손의 해머로 내리찍었다. 왼손의 검으로 여러 개의 팔과 다리가 달린 괴물의 상반신을 갈랐다. 하늘을 나는 악마의 날갯죽지를 잡아 뜯었고 소의 형상을 한 괴물의 외눈을 맨손으로 후벼서 그 비명과 함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악마였다. 오직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뭉친 인간이라는 이름의 악마는 자신을 방해하는 악마들을 도륙하며 전진했다.
수십, 수백, 수천…….
그리고 마침내 그 숫자가 만단위에 달했을 때, 남자는 앞을 가로막던 최후의 악마를 둘로 쪼개고 기어코 천국의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더 이상 접근하는 악마는 없었다. 그가 거쳐 온 여정을 대변해주듯 지나온 길을 따라 붉게 깔린 피와 시체, 그리고 피칠갑을 한 채 문 앞에 선 남자의 모습이 악마들의 접근을 가로막았다.
이제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단 하나. 백여 미터에 달하는 문의 정중앙에 떠있는 거대한 검은 구슬뿐이었다.
남자는 주저 없이 왼손에 든 검을 구슬을 향해 내던졌다. 머리 위를 향해 쏘아진 검은 순식간에 검은 구슬을 꿰어 깨부수더니 이내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구슬의 파편이 흩뿌려지며 여정을 마무리 짓자 그는 양손을 들어 문을 밀었다. 문이 밀리며 안쪽의 빛이 밖으로 뿜어지자 수많은 악마들의 괴성과 비명이 세상에 메아리쳤다. 남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손에 힘을 더했고,
마침내,
천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 누구의 발걸음도 허락하지 않던 천국의 문을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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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 소리가 문 안쪽의 적막을 깨며 울려 퍼졌다. 남자를 맞이한 것은 먼저 떠났던 인간도, 천국을 지키던 천사도 아니었다. 각종 석상과 문양으로 치장된, 마치 대리석으로 지어진 교회와도 같은 거대한 건물 내부가 가장 먼저 그를 반겼다.
남자의 발걸음을 따라 피로 물든 발자국이 이어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는 천국의 문과 마주한 또 다른 문으로 향했다.
삼백여 걸음 끝에 문 앞에 도착한 그는 다시금 양손을 뻗어 문을 짚었다. 손에 묻은 악마의 피가 마치 붉은 낙인처럼 문에 찍혔으나 그에 괘념치 않고 힘을 가했다.
천국의 문과는 다르게 좀처럼 열리지 않던 문이 점차 밀리기 시작하자 남자의 눈앞에 천국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천국이 분명했다.
그러나 더 이상 천국이 아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를 죽이면 가능할까? 피칠갑을 한 남자의 전신보다 더욱 붉은 하늘은 마치 용암이 흐르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과거에는 분명 성스럽고 아름다움을 드러냈을 고풍스러운 건축물들과 거대한 도시는……, 피로 얼룩진 채 천사와 악마, 인간의 시체와 살점들로 치장되어 괴기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문 앞에는 시체의 산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시체더미들이 미라가 되어 절망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자는 깨달았다.
이곳은 천국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또 다른 지옥일 뿐이다. 이곳이 천국이 아니라면, 구원받을 수 없다면……, 지금까지의 여정은 도대체?
무너지려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핏발선 눈을 들어 마치 악마를 향하듯 도시를 노려봤다.
알아야한다. 기필코 알아내야한다. 구원을 바란 채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설령 그것이 악마라 할지라도 그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분노를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시체들의 산 위를 거닐며 주변을 둘러봤다. 분노로 인해 무겁게 가라앉은 이성이 상황을 파악했다. 치장된 것을 제외한, 주변의 시체 대부분이 이 문을 열어 천국의 문을 향하려 했음을.
마지막으로 시선이 향한 곳은 도시 내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궁전. 이 모든 상황이 그곳에서 시작되었음을 깨달은 그는 궁전을 향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발길에 차이는 시체뿐이었다. 적이라 불릴만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인기척도 없이 적막감만 감돌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천국의 멸망이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악마들이 지상에 내려와 천국의 문을 지켰던 것일까?
남자의 의문이 잠시 걸음을 늦췄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궁전에 들어서면 모든 해답이 나오리라.
천국의 문보다도 더욱 화려하게 치장된 문이 남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더 이상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른손에 든 해머를 들어 분노의 한 자락을 담아 휘둘렀다. 해머의 머리가 꽂히자 거대한 굉음과 함께 문이 박살나며 내부의 모습을 드러냈다.
기괴하고 이질적인 내부의 광경. 바닥은 인간의 얼굴가죽들로 카펫이 깔려있었고 양쪽 벽에는 뼈와 가죽을 이용해 악마의 날개를 형상화한 것들이 작품처럼 걸려있다. 그 앞에는 금은보화들이 쏟아져있고 위에는 여신들이 나신으로 박제가 되어 세워졌다.
그리고 거대한 천사의 석상들로 치장된 왕궁의 중앙. 천사와 악마, 인간들로 구성된 미라들이 중앙에 열을 맞춘 채 왕좌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궁전 안에 존재하는, 왕좌에 앉아있는 해답을 향했다.
- 인간……, 인간이야!
- 인, 간?
- 으으-.
왕좌에 앉아있는 그 존재는 천사도, 악마도, 인간도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인간들 수백을 뭉쳐서 기워낸 비대한 몸뚱이와 그 사이에 묻힌 열두 개의 얼굴, 수십 장에 달하는 천사의 날개를 억지로 꽂은 그 모습은 세상의 틀을 벗어나 있었다.
- 짐의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몸뚱이에 반쯤 묻힌 다른 얼굴들과는 다르게 꼭대기에 화려한 왕관을 쓴 거대한 머리가 기괴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 짐은 세상의 지배자이자 천사들의 제왕, 아르눅스이다.
아르눅스는 왕좌에 앉아있던 비대한 몸뚱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 미천한 것들이 걸어 잠근 자물쇠를 부수다니, 칭찬할만하구나. 짐이 친히 상을 내려주마. 무엇을 원하느냐?
“넌 나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나?”
남자가 차가운 어조로 되묻자 아르눅스가 웃었다.
- 하하하-, 어리석은 존재야. 너도 구원을 찾고자 왔느냐? 대견하구나. 짐 또한 구원을 바라기에 천국의 문을 만들었지. 그리고 만물의 왕이 되어 모두를 구원했다. 짐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었으니 이 어찌 구원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너의 소원은 헛된 것이다.
남자는 알 수 있었다. 모든 원인은 인간에게 있었다.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탐욕과 욕망.
그렇다. 진실은 멀리 있지 않았다.
“천사라고 했던가?”
남자는 손에 든 해머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피로 물든 양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악마가 되어주마.”
- 어리석은 것. 지옥의 군주들조차 범접하지 못했던 짐에게 정녕 대항할 셈이냐?
아르눅스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이 들려있었다. 곧이어 등에 달린 스물여섯 쌍의 엇나간 날개들이 빛을 발하자 그에 동조하듯 도시 전체가 괴성에 휩싸이며 진동했다.
고개를 조아린 채 굳어있던 미라들이 날개를 펼치며 일어섰다. 박제된 여신들이 비명과 함께 깨어나 악의를 내뿜었고 석상들이 움직이며 검을 겨눴다.
수백만에 달하는 군세가 깨어나 왕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 짐이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짐이다.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난 지옥을 거닐었고 다시 지옥으로 돌아갈 것이다.”
붉게 물든 눈과 이가 드러나며 아르눅스를 향했다.
“네놈을 죽이고, 희망을 되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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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을 이루지 못한 채 광기에 물든 붉은 날개가 펼쳐졌다. 한 남자의 비탄 섞인 절규가 소리 없이 울려 퍼지자 그에 응하듯 천상을 뒤덮는 광명과 함께 스물여섯 쌍의 찬란한 백색 날개가 하늘로 뻗어나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수많은 군세가 깨어나 악의에 찬 괴성을 내질렀음에도 붉은 날개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쫓았다.
한 때 인간이었던 악마의 붉게 물든 양손이 인간의 틀마저 벗어던진 대천사의 빛의 창과 서로 맞부딪쳤다.
천상에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전주곡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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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기 빛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희망을 건네주던 천국의 문은 다시금 그 문을 닫았다.
지상을 먹어치웠던 악마들은 참화의 상처와 수많은 괴물들을 남겨놓은 채 그 모습을 감췄다.
되돌아온 죽음은 영원한 생명마저 죽음으로 내몰고 인간에게 평등한 안식을 선사했다.
인간에 의해 허물어졌던 세상의 경계가 다시 단절되며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세상은 더 이상 천국과 지옥의 구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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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그와 그녀의 시간' 이라는 제목으로 단편을 하나 투척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올려봅니다.
...
사실 심심풀이로 쓰는 글이라 딱히 올릴만한 곳도 없습니다;;
그저 '누군가는 재미있게 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글을 등록할 뿐이죠.
재미있게 보셨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고, 재미가 없으셨다면... 좀 더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__)
아, 글에 대한 사족은 한 줄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디아블로3의 스토리에 배신당한 플레이어의 애증이 담긴 글.
안녕하세요?
그저 눈팅하면서 간혹 글이나 남기는 엑셀리온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