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래를 듣고 있다.


  비가 내리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된 것일까. 메마른 대지의 살갗을 바람 한 줄기가 깊게 할퀸다. 각질처럼 벗겨진 모래먼지들이 허공중에 나부꼈다. 바람은 거세지는 않았지만 길고 지루했다. 그칠 듯 말 듯 꼬리를 물어가는 바람의 행렬을 따라 모래먼지들이 길게 피어오른다. 이윽고 먼지는 완연한 담이 되어 시야를 낮게 가로질렀다. 나는 가죽재킷의 지퍼를 끌어올려 목깃을 단단히 여몄다.

  바람이 불자, 들려오는 노래는 아득하게 사라져가기 시작한다.


  나는 걷고 있다.


  곧 모래먼지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그 순간 시계는 급격히 제한된다. 먼지의 입자는 하나하나가 작고 고운 편이었고, 농도 또한 짙었다. 잠시나마 안구는 쓸모가 없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먼지에 가려진 하늘은 온통 누런빛이다. 노래는 이제 들려오지 않는다.


  ‘귀를 기울였다.’


  안테나가 개방되기 무섭게 수천가닥의 펄스들이 회로를 거세게 후려친다. 방사선이 도처에서 발광하듯 들끓고 있었다. 이리저리 튀는 무수한 방사선의 타래 속에서 나는 어떤 씨실 하나를 건져 올려야만 한다.

  조용히,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아까의 그 바람 때문이다. 바람이 강해질수록 방사선 또한 그 기세가 매서워진다.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주의가 닿는 범위는 넓어진다. 땅 아래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한 반구형을 띠고 있었다. 내 의지에 따라 반구의 크기는 급속도로 커져간다. 이윽고 그 반구의 첨단은 대기권의 가장 높은 부분까지 다다른다. 수십 겹으로 겹쳐진 두터운 방사선의 장막을 헤치고 그 곳에 닿을 때마다, 내 ‘귀’에는 적막함이 감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잠깐의 정적 뒤에 나는 그곳에서 어떤 전자기적 호응을 발견한다. 나는 순식간에 그것을 낚아채서는 낚싯대의 릴을 감아 돌리듯 곧바로 지상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개방된 나의 안테나 속으로 우주에서 온 신호 하나가 스며들기에 이른다.


  인공위성에 접속했다.


  ‘귀를 기울인’ 후 0.017초만의 일이었다.


  인공위성은 나의 기계안구를 대신하여 잠시간 내 눈이 되어 줄 것이다.

  지상의 나를 중심으로 지형정보를 스캔한 뒤 그것을 면밀히 판독한다. 동쪽 전방 약 30km거리에서부터 도로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 도로를 따라 건축물의 잔재로 보이는 음영들이 드문드문 자리해 있었다. 방사선 때문에 신호감도가 좋지 않았다. 프레임의 곳곳이 문드러져 있었다. 선명도가 떨어진다. 버려진 차량이 있다면 이동이 용이해질 것이지만 대략적인 지형 이외에 그 이상의 영상판독은 무리였다. 바람만 불지 않았더라면 정찰중인 ‘청소부’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은 운이 좋지 않다. 다음 인공위성이 지나칠 때를 기약한다. 그리고 그 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있다.


  북서쪽으로 43km 거리. 그곳에서 너비가 족히 80km에 이르는 거대한 모래폭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계산된 속도로 미루어보건대 적어도 반시간 뒤 이곳을 지날 것이다. 나는 스캔된 지형정보를 상시 조회 가능한 데이터로 변환한 후, 임의의 클러스터에 저장한 뒤 카테고리를 부여했다. 모래폭풍은 두 시간 가량 지속될 것이다. 네 시간동안 주파할 수 있는 거리의 지형을 로드하여 동일축적거리를 부여하고, 현재의 나의 위치에 임의의 가상점을 설정했다. 선명도가 아쉽긴 했지만 모래폭풍 속에서 하나의 지침으로 삼기에는 충분했다. 행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가올 모래폭풍에 대비해야 했다. 가죽재킷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신체외부의 생체피막을 좀 더 꼼꼼히 마감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당장 작업에 착수했다.

  몸 안쪽 곳곳에서 새 피막이 돋아 오르기 시작한다. 재킷과 팬츠로 감싸여진 안쪽이 조금씩 우글거렸다. 한 톨의 먼지도 침투하지 못하게끔 관절의 마디마디부터 손발가락의 끝자락까지 생체피막을 충실히 감쌌다. 눈을 감았다. 돋아나는 피막이 눈두덩의 갈라진 이음새와 안면의 구멍이란 구멍을 모조리 꼼꼼하게 메워나갔다.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구마저 피막에 가려지자 영상 수신이 되지 않는다. 앞이 캄캄했다. 안구의 수신율을 최대로 설정하고 적외선장치를 가동시켰다. 안구에서 서서히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눈앞이 차츰 밝아온다.

  거울을 본다면 지금의 내 얼굴은 흡사 타조알과 같을 것이다. 이목구비는 온데간데없이, 다만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붉은 광점 두개만이 둥실 떠올라 있겠지. 흉물스러울 것이다.

  속으로 웃었다.

  재킷 목 뒷부분의 지퍼를 열어 후드를 펼쳤다. 후드는 깃이 무척 크고 길었다. 방풍을 위해 고안된 형태라지만 몸 전체에 피막을 둘러쓴 나에게는 굳이 필요치 않은 장비였다. 시야만 가린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다만, 내가 후드를 둘러쓰는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폭풍 속에서라도 갑자기 ‘음표’들을 조우하게 된다면…….


  이런 귀신같은 몰골이라면, 음표들이 내 정체를 알아챌지도 모른다.


  효과적인 사냥에 다소 방해가 있을 것이다.


  아니다. 이것은 기우임에 분명했다. 아까 전까지 들려오던 노래 속에는 20km 근방에 위치한 음표 따윈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흉물스러운 타조알 같은 얼굴을 가리려고 애쓴다. 혹여 있을지도 모를 – 아니, 없을 것이 분명한 음표와의 조우에 대비하고자.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기만이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수시로 나 자신을, 혹은 타자를 속이는 것으로써 단순한 사이보그가 아닌 한 명의 인격체로서의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인식했다. 따라서 기만은 나에겐 종일의 일상이었고, 동시에 살아온 삶에 대한 경건한 묵념이었으며, 앞으로 살아갈 나날에 대한 일종의 다짐이었다.

  나의 노래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나는 살아있어야 해.


  나는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폭풍은 거셌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모래먼지들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안구의 역할이 다시금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이다. 나는 스캔한 지형정보만을 토대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수시로 귀를 기울였지만 들려오는 것이라곤 방사선들이 자아내는 날카로운 귀곡성뿐이었다. 비록 폭풍속이라지만 나의 귀는 반경 1km 안에 있는 청소부들의 파장을 정확하게 분간해낼 수 있었다. 청소부는 없다. 물론, 그 안에는 음표 또한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을 나아갔을까. 이제 또 한 시간이 지나면 폭풍이 걷히리라 생각하던 그 때였다.


  신경도 쓰지 않던 영상정보에서 순간 몇 개의 미열이 감지되었다.

  전방으로 50m. 인간의 체형과 유사한 열 덩어리 세 개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방사선들의 찢어지는 비명뿐, 음표 따위는 없다.

  더는 생각할 것도 없다. 칩을 적출한 자들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개자식들, 죽여야겠구나.


  한 발자국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거센 모래폭풍 속이었다. 나와 같은 사이보그였더라면 저쪽에서도 당장에 나를 발견했을 것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무했다. 영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인간 특유의 미지근한 체온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오른편 허리 뒤쪽, 장검의 손잡이를 꾹 움켜쥐었다. 그리고 즉시 보호색을 발동시켰다.

  주변 사물의 모든 색상 정보를 받아들여 내 몸 전체가 이에 호응했다. 단순한 피복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가죽재킷과 바지는 기실 내 몸의 일부와 마찬가지였다. 미세한 황갈색상의 도트들이 옷과 안면 바깥으로 떠오르고, 폭풍 속의 먼지가 휘날리는 패턴을 분석해 실시간으로 배경의 영상과 싱크로를 맞추게 되는 순간, 나는 거대한 모래 폭풍 속의 작은 한 부분이 된다. 완벽히 풍경 속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한 발자국 앞에 서서 10초 이상 뚫어지게 관찰하지 않는 이상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결코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한가로운 관찰의 여유 따위는 주지 않을 생각이다.

  뒷짐을 진 한 손으로 대검을 쥐고 서서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40m, 35m, 30m.


  그들은 전방 12시에서 미묘하게 방향을 틀어 서서히 나의 오른쪽 3시로 빠지는 경로를 밟아 나아가고 있었다. 현재 위치는 1시에서 2시 사이. 나는 그들이 나로부터 완벽한 3시 방향에 위치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노리기로 했다.


  정 우측으로 10m, 마침내 때가 왔다.


  청소부들의 두터운 장갑을 파괴하기 위해 고안된 고밀도 고중량의 장검이었다. 질기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게는 보통의 인간은 들지도 못할 초중량이다. 인간의 나약한 몸 따위가 견딜 수 있을 바가 아니었다. 나는 10m의 거리를 수평으로 도약했다.

  찰나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첫 번째 놈의 목이 즉시 날아갔고, 미처 피가 흩날리기도 전에 다음 놈의 가슴팍을 가로로 베어 넘겼다. 가슴 아래를 잃은 몸뚱이가 다리를 우쭐거리며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덮친 놈은 죽이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내질러 허리 정 중앙에 구멍을 내놨다. 놈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저 멀리 구석으로 튕겨져 날아가 버렸다.


  시체 둘과 예비시체 하나가 모래폭풍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지는 순간이었다.


  “끄으윽.” 폭풍 너머에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보호색 속에 잠겨있던 몸이 천천히 모래폭풍 바깥으로 떠올랐다. 바닥에 쓰러져 꿈지럭거리는 열 덩어리가 영상에 선명했다. 저 자는 내가 보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먼지바람이 짙다.

  나는 너부러진 두 구의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장전된 자동소총 한 정과 40발들이 탄창 네 개, 알루미늄 수류탄 다섯 개와 나노로봇 앰플 한 세트, 주사기 몇 개, 그리고 필터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손에 넣었다.

  탄창에서 탄환 하나를 뽑아 살펴보았다. 하다못해 메탈재킷이 입혀진 납탄이라도 만족스러웠을 것 같았지만, 무려 열화우라늄 철갑탄이 아닌가. 청소부들을 제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그리고 입 주변의 피막을 조금 열어 구강을 개방한 뒤, 그것을 입에 물었다,


개작



  “으으아악!”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신음이 끊어지지 않는 비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갑작스런 습격으로 채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것일까. 저 친구와는 나중에 따로 볼 일을 볼 것이다. 지금은 그저 담배를 피우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싶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연기 한 모금을 가득 빨아들인다.

  소용없는 짓이다. 기계로 이루어진 내 몸에는 니코틴이 제 몸을 맡길만한 순환계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표면의식의 사고 한 가운데에다 즉석에서 프로그래밍한 조잡한 바이러스 하나를 띄워 올렸다. 순환하던 사고의 알고리즘이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일순 멈추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복구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실행되자 바이러스 파일은 퇴치되고, 내 의식은 차츰 명료함을 되찾아 갔다. 담배연기 한 모금을 빨아들일 때마다 나는 바이러스를 띄우는데 열을 올렸다. 매 번 몸 전체가 붕 뜨는 감각적인 화이트노이즈를 즐기며, 나는 니코틴이 진짜로 나의 뇌신경계를 뒤흔드는 듯한 착각에 빠져갔다.

  착각. 이것 또한 스스로 나를 속이는 기만행위의 일종이리라.

  나는 다 피운 담배를 내다버리고는 쓰러져 있는 그 자를 향해 걸어갔다.


  “개새끼.”


  그 자가 욕설을 했다. 몹시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지면에 팔을 짚고 자세를 다잡으려 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 뿐이다. 하반신이 땅 위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평생을 반신불수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평생이 얼마나 남았는지가 문제이긴 하겠지만.

  그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손으로 그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놈은 흠칫거리며 내 손을 피하려 했지만 허리가 그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다. 수술자국이 이마 위를 좌우로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솜씨가 형편없었다. 제멋대로 꿰맨 봉합자국이 얼기설기 엮여 있었다.

  가시면류관이라도 뒤집어썼던 거야, 뭐야.

  피식 웃으며 그 자리에서 성호를 그려 보였다. 놈의 눈이 당혹감에 휩싸였다. 나는 본격적인 심문에 착수했다.


  “잘도 칩을 적출했군 그래.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시티(The City)는 어디에 있나?”


  그 놈은 엉뚱한 소리만 했다.


  “넌……사이보그로군. ‘프리랜서’가 아닌가? 어떻게 아직도 기계들의 충견노릇을…… 이 개만도 못한 새끼!”


  한숨만 나왔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하던 답은 그게 아닌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에 가래침 한 덩어리를 맞았다. 빌어먹을, 침을 뱉다니. 이것 또한 내가 원하던 답은 아니었다. 나는 손으로 얼굴에 맞은 침을 훌쳐냈다. 한숨만 나왔다. 화를 내기조차 귀찮았다.


  “젠장. 정 그렇다면 알아서 불게 만들어주지.”


  나는 일어서서 놈의 옷깃을 붙잡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즉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끊어진 허리에서 무서운 고통이 엄습하는 듯했다. 개의치 않고 근처의 바윗덩어리까지 끌고 가서는 등을 기대어 똑바로 앉혔다.


  “자, 지금부터 1차 심문에 들어간다. 아프지는 않을 거야. 아니,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가 없는 거겠지. 하여간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두는 것이 좋을 거다.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니까.”


  나는 일어서서 놈의 발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섰다. 그리고는 질린 듯 상반신만 벌벌 떨고 있는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어주었다. 안심해, 아프지는 않을 거라니까.

  신발을 벗겼다. 자기가 곧 당하게 될 일을 알아차린 것일까. 핏발이 선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그 자의 양 맨발을 발끝부터 짓밟아 터뜨려 나가기 시작했다.


  “……으, 그그, 그그그……?!”


  “끄아아아악!” 곧이어 터져 나온 놈의 비명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처절했다.


  뽀드득, 뽀드득.


  비명은 길고 지루했다. 나는 그 비명을 철저히 무시하고 그저 놈의 몸이 부서지는 소리에만 주의를 집중했다.


  뽀드득, 뽀드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좀 더 꼼꼼히, 건더기가 더욱 잘게 부수어지도록 좀 더 꼼꼼히 그의 몸을 밟아나갔다.

  잘 익은 토마토를 밟아 터뜨리면 이와 비슷한 광경이 연출될는지.


  순간 피식 웃었다. 토마토라. 토마토 맛을 못 본 지가 얼마나 됐더라. 나는 오랜 옛날 즐겨 먹었던 토마토의 그 탱글탱글하고 촉촉했던 과육을, 입 안에서 터져 흐르던 그 새콤한 속살들을 추억했다. 침이 고일 것만 같다. 입 안에 물리는 군침을 상상했다. 끊어지지 않는 비명 속에서 게거품이 부글부글 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흘겨본 놈의 눈이 서서히 뒤집혀 들어가고 있었다.


  “앞서 가지 마. 어차피 감각도 없는 주제에.”


  나는 한마디를 툭 내뱉어 주고 차근차근 놈의 하반신을 다져나가는 데 열을 올렸다. 그리곤 끊임없이 토마토의 맛을 추억하며 상념에 잠겼다.


  아련하기만 한 해체의 순간이었다.


  무릎 즈음까지 밟아나간 때였을까. 토마토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나는 어느새 비명이 멈췄음을 깨달았다. 침착하기로 한 것일까, 아니면 자포자기한 것일까. 


  뽀드득. 뽀드득.


  나는 놈의 얼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한마디를 던졌다.


  “말해 봐. 시티가 어디 있는지.”


  대답은 없었다.


  조용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죽었나? 설마.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만 아직 죽기에는 모자라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자 곧바로 눈이 돌아갔다.


  그 자는 입가에서 가슴께에 이르기까지 온통 시뻘건 핏물을 적신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기댄 바위 옆으로 피가 잔뜩 묻은 고깃덩이 같은 것이 나뒹굴고 있었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혀를 깨물어 잘랐던 것이다. 젠장, 좀 지나쳤다. 적당히 수위를 조절했어야 했다. 토마토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괜한 실수를 했다. 재갈이라도 물릴 걸 그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소득 없이 자리를 떠야만 했다. 삶을 놓아버린 그의 눈이 반쯤 뜨인 채로 허공에 못 박혀 있었다. 빌어먹을. 끌끌 혀를 몇 번 차고는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나는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티의 위치를 손쉽게 알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몇 군데의 유력한 후보지를 미리 짚어두었다. 하나하나 탐색해 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티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나는 거기서 감히 나의 허락도 없이 칩을 적출해서 파괴하는 그 괘씸한 자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아있는 모든 인간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 놈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나의 보물들을, 모든 칩들을 내 손으로 회수할 것이다.


  모든 음표를 나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폭풍이 차츰 누그러지고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가 조금씩 넓어졌다. 나는 둘러쓴 후드를 걷어버렸다.


  몇 걸음을 나아간 후 뒤를 돌아보았다. 신발 바닥에 묻은 피 덕분에 내가 밟아 온 발자국들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떨군 시체의 실루엣이 잦아드는 먼지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폭풍의 기세가 점점 가라앉자 들릴 듯 말 듯, 다시금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귀에 감겨드는 멜로디와 반주소리를 따라서 휘파람을 불어보았다. 음표 하나가, 금속성의 타악기 소리가 동쪽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그 음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