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왼쪽의 작품 이름을 선택하면 해당 작품 만을 보실 수 있습니다.
10개 이상의 글이 등록되면 독립 게시판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옳지, 천천히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고. 긴장할 것 없어. 그냥 침착하게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수염 난 늙은이가 음침한 표정으로 킬킬거리며 이것저것 만져댔다. 싫어도 저 늙은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내 사지는 지금 십자가에 단단히 결박당해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어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저 핏발선 눈으로 늙은이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첫 경험도 아니잖나. 그럼 시작하지."
저 늙은이의 사타구니를 강하게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저들은 내 생각이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늙은이는 내 가슴팍에 파란 보석을 달아놓고 뒤로 물러섰다. 내 몸 주변으로 푸르스름한 막이 생기는 걸 보며, 늙은이는 뒤에 서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손짓했다. 아까부터 바닥의 마법진에 이런저런 보석과 금속막대기를 배치하던 젊은 놈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제자 중 또 다른 하나가 이번에는 깃털을 한 움큼 쥐고 다가왔다. 마법진 바로 바깥에서 멈춘 그는 깃털을 나를 향해 들이부었다. 깃털 몇 개는 마법진 바깥으로 흩날렸지만, 대부분은 나를 향해 쏟아졌다. 그렇다, 쏟아진 것이다. 깃털은 나풀거리지도 않고 나를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그가 몇 번 더 깃털을 뿌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깃털은 더 빠른 속도로, 더 정확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내게 날아왔다. 그리고 내 근처에 도달하자마자 다시 나풀거리며 내 코를 간질였다. 재갈 때문에 크게 숨쉬기도 힘든데 재채기까지 연달아 나니 죽을 맛이다.
처음 실험대에 묶여 호되게 당하기 전까지는 이 작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었다. 그저 일당을 두둑하게 챙겨주겠다는 말에 잡일이 끝난 뒤에 실험실에 왔을 뿐이었다. 실험실에 도착하자 마법사의 제자들이 근사하게 생긴 갑옷을 가져다주기에, 나는 그저 어느 돈 많은 귀족이 주문한 신형 마법 갑옷이라도 테스트하는가 싶었다. 아직 번쩍거리는 갑옷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흔쾌히 그것을 껴입자, 저들은 다짜고짜 나를 십자가에다 묶어놓고 공기를 없애기 시작했다. 그래, '공기를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실험이 실패해서 내가 뻗어버린 뒤, 그제야 실험을 주도한 마법사가 나타나 내게 자신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설명했다. 내가 껴입은 갑옷은 바람계 보호마법을 새겨 넣은 철판 갑옷으로, 공기가 없는 상황에서도 착용자를 보호한다고 했다. 아니, 그럴 의도로 만들었지만 실패한 거다. 안 그러면 내가 정신을 잃었을 리는 없으니까. 보통 같으면 내게 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신체조건을, 특히 공기가 완전히 없어져서 보통사람이면 그대로 기절해버릴 만한 상황에서 도 입을 뻐끔거리며 1분 좀 넘게 욕설을 퍼부은 끈질김을 높이 산 모양이다. 그래서 마법사 늙은이는 내게 지속적으로 실험에 참가하라고 권했고, 나는 씩 웃으며 늙은이의 멱살을 잡아주었다.
그의 제자들이 달라붙어 나를 붙잡는 탓에 망할 늙은이를 바닥에 메다꽂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늙은이가 머리에 충격을 받고 정신이 나가기 전에 내게 혹할만한 제안을 할 수 있었다. 실험에 참가해서 실전에 투입되기까지만 하면 부와 명예를 안겨주겠다는 것이었다.
늙은이는 지금 국가주도의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데,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목적지를 탐사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곳에서 쓸 만한 자원을 채집해온다면 직접 투입되어 작업하는 내 인건비 역시 높게 쳐 줄 수 있으며, 거기에 더해 국가적으로 큰 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잘하면 명예기사 작위는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사라는 것에 꿈을 품고 가문이 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종자로서 수련을 해왔기에, 명예기사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유혹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정신 나간 짓거리에 동참하게 되었다. 지장을 찍었다고 해서 욕 나오는 짓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었지만.
하여튼 이제 다섯 번째 실험에 접어들어, 드디어 성과가 나기 시작한 것 같다. 깃털이 진공상태인 마법진 위에서 전혀 나풀거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도, 내가 숨 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가슴팍에 붙은 보석에서는 일정한 밝기의 빛이 끊이지 않았고, 손에는 갑옷 주변을 따라 천천히 대류하는 공기의 흐름이 만져졌다. 마법사들은 내가 몇 분이 지나고서도 그들에게 들리지 않을 욕설을 내뱉느라 끙끙거리거나 핏대를 세우며 팔다리를 퍼덕거리지 않는 것을 보며,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마법진 가동을 중단했다. 서서히 마법진 안에 공기가 돌아오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깃털이 뒹굴었다.
"드디어 성공이군. 어때,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거나 한 거 없나?"
늙은이가 가슴팍의 보석을 떼며 물었고, 나는 그를 노려보며 웁웁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그제야 내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없수다. 그럼 이제 이 짓거리도 끝인 거요?"
늙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몇 번 더 실험을 해봐야겠지만, 앞으론 어지간하면 제대로 작동할걸세."
"그럼 내가 명예기사가 되는 거요?"
늙은이가 사악한 표정을 보이며 웃었다.
"뭐, 몇 가지 훈련만 더 받으면 그렇게 될 걸세."
불안해진 내가 물었다.
"이것 보쇼, 확실히 해둡시다. 이 일이 끝나면 진짜 명예기사는 확실한 거요?"
"물론이라네. 그거로 끝이겠는가? 혹시라도 자원획득에 끝나지 않고 옛날에 신대륙 개척하듯이 땅이라도 얻으면 그날로 진짜 귀족이 될 수도 있을 테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고, 적어도 큰 보상이 있다는 건 약속함세. 내 목을 걸어도 좋지."
자기 목을 건다는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여태까지 봐왔던 것 중에서 가장 진중한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다음 훈련으로 넘어갑시다. 그런데 대체 내가 최종적으로 가는 데가 어디인 거요? 꽤 험한 곳 같은데."
늙은이의 얼굴에 다시 악마가 떠올랐다.
"야, 이! 뭐! 이! 뭐 같은! 미친! 노망난! 망할……."
30분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저 잡것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훈련단계는 다음으로 넘어왔는데 내 신세는 여전히 결박당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번에는 폭발하는 불더미 위에다 족쇄로 단단히 고정된 상태였다.
갑옷시험에 성공한 뒤, 나는 몇 번 더 비슷한 상황에 처해야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결박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좁은 마법진 안에서 별짓을 다 해야 했다. 갑옷이 움직이면서 표면의 마법진이 손상되지는 않는지도 검사하고, 내가 갑옷을 입고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지도 검사한다고 했다. 거기에서는 별문제가 없었고, 망할 늙은이가 한번 내 가슴팍에 보석을 붙이는 걸 까먹었을 때 빼곤 훌륭하게 훈련을 소화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를 소개한다면서 늙은이가 나를 끌고 간 곳이 수도 성벽 바깥의 근위대 연병장이었다.
수도 인근에서 넓고 평평하게 정돈된 빈 땅이 거기밖에 없었기에, 근위대원들은 몇 달째 자기네 연병장에서 쫓겨나 산과 들에서 굴러다닌다고 했다. 지금 연병장에는 집주인을 대신하여 로브를 입고 있는 수많은 마법사와 그들의 지휘를 받아 자재를 나르는 짐꾼들이 모여 북적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내가 찾아갔을 때는 무슨 실험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잘 보게. 저게 잘하면 앞으로 실전에 투입될 수도 있는 강력한 무기일세."
나 따위가 저런 걸 기억해둬 봐야 무슨 쓸모가 있을지 싶었지만, 확실히 인상 깊기는 했다. 바닥에 수직으로 세워져 단단하게 고정된 커다란 철판 중심 쪽에 붉은 보석, 그 주변에는 푸른 보석이 무수히 박혀있는 거대한 마법진이었는데, 마법진 뒤에는 또 금속으로 만들어진 판에 번쩍거리는 보석이 수십 개씩 박혀 있었다.
"저게 죄다 보석입니까?"
경외심에 목소리가 떨려왔다. 저기에 박혀있는 보석 중에서 하나라도 팔면 수도 성벽 안에 꽤 멋진 저택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당연하지. 실제 기능에 필요한 건 마법진에 있는 보석들이고, 뒤편의 보석들은 마력을 공급하는 용도라네. 마침 시작하려고 하니,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직접 보게나."
그의 말대로 마법사들은 곧 철판 뒤로 물러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요란한 종소리가 들린 뒤, 회로를 따라 뒤편의 보석들에서 마력이 밝은 빛을 내며 흘러 철판 위의 마법진에 공급되었고, 마법진에 박힌 보석들도 서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폭풍이 불더니 요란하게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귀를 틀어막았다. 보아하니 파란색 보석들은 내 갑옷 가슴팍에 붙은 것처럼 바람계 마법을 쓰는데 필요한 것 같았고, 그게 폭풍의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요란한 폭음은 그 가운데에 배치된 붉은 보석에서 나는 것이겠지. 지금 철판은 수십 미터에 달하는 뜨거운 불기둥을 쏟아내고 있다.
"저, 저게 뭐하는 물건입니까?"
철판이 작동을 멈춘 뒤에도 몸이 덜덜 떨렸다. 천둥번개가 코앞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늙은이가 킥킥거리며 설명했다.
"원리적으로는 간단한 물건이지. 저 가운데에는 폭발마법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마법진이 새겨져있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바람계열 마법진이 새겨져 중앙의 마법진에 공기를 불어넣고 불꽃을 한 방향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네. 저 뒤편에 있는 보석들은 앞편의 마법진에 박힌 보석에 공급할 마력을 저장하고 있지."
"거참, 무시무시하네. 그럼 저거로 적들을 죄다 불태워버리는 겁니까?"
"그래도 되겠지만, 자네도 조금만 있으면 저걸 어디에 쓰는지 직접 느끼게 될 걸세."
늙은이는 그대로 나를 연병장 한군데에 내버려두고 다른 마법사들을 찾아가 뭔가 떠들어댔다.
나는 괜히 심심해서 쭈그려 앉은 채, 입고 있는 갑옷 가슴팍에 있는, 보석이 들어가는 소켓을 만지작거리며 사람들이 하는 양을 구경했다. 마법사들은 골렘을 움직여 조금 전의 그 철판을 들어 올려 쇠기둥으로 만든 지지대 위에 올려놓았다. 철판은 높이 5m 정도 되는 곳에 불을 뿜어내는 마법진을 아래로 한 채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 마력을 저장하는 보석판들이 올라갔고, 그보다 더 위에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커다란 통이 올라갔다. 통에도 겉에 보석이 몇 개씩 달라붙어있고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데, 아무래도 마력공급용 철판을 크게 만들어놓은 듯, 비슷한 종류의 보석들이 빼곡히 박혀있었다.
일꾼들이 마법사들의 지휘를 받아 그것들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그 위에 추가로 잡다한 것들을 얹고 있을 때, 늙은이가 내게 돌아왔다.
"자, 이제 준비하게. 자네가 활약할 차례야."
그의 말에 내가 일어서며 물었다.
"거참, 오래도 걸리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저길세."
늙은이가 또다시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손끝을 따라가자, 조금 전까지 내가 보고 있던 물체가 있었다. 순간 불길한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이미 건장한 일꾼들이 다가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일꾼들에게 포박당해 질질 끌려가, 5m 높이의 지지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철판 위에 마련된 자리에 올라앉게 되었다.
철판 위에는 여러 가지 올라간 부품들을 덮는 금속 덮개가 씌워졌고, 그 위엔 의자 하나가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사형수가 도망치거나 몸부림칠 수 없도록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놓을 수 있는 것 같은…….
"맞아, 저거 사형대에 붙어있던 의자네. 잘 봤어."
늙은이는 내 욕설을 들으면서도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킥킥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재갈을 챙기지 않아 입을 틀어막을 수 없는 게 아쉬운 것 같았지만.
"걱정 말라고. 자네를 사형에 처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앉은 사람을 단단히 고정하기에 저게 딱 좋아서 가져왔을 뿐이야. 떨어지면 위험하거든. 물론 잘못하면 저 자리에 앉아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꽤 실험을 많이 해봤으니 걱정 말게. 개나 원숭이, 사람 무게 인형으로는 성공했어."
그리고 그는 내려가 버렸다. 나는 욕설을 계속하며 발버둥 쳤지만, 네 명의 건장한 남자가 내 사지를 붙들고 의자에 고정시키는데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진저리를 치며 내려가 버렸고, 마지막으로 젊은 마법사 하나가 내 가슴팍에 보석을 붙인 뒤에 내려갔다.
그러고 난지 30분째, 점점 밑에서 작업하던 사람들은 멀어졌고, 아까도 울렸던 불길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밑에서 뭔가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진동은 점점 커져서 몸이 얼얼할 지경이 되었고, 곧이어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래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내 엉덩이 아래에서 아까 봤던 폭풍과 폭발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서서히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지대는 밑으로 떨어지는 것만 막아놓은 것 같았다. 내가 올라탄 철판은 점점 속도를 내면서 솟구쳐 올라갔다. 아래를 내려 보자 손을 흔드는 망할 늙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목이 터져라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지만 굉음 때문에 내 귀에도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저 망할 것들이 귀마개는 끼워주었지만, 그렇게 큰 효과는 없었다. 진동 때문에 계속 머리가 흔들려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웠다. 그대로 어디론가 처박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겨우 눈만 뜨고 주변을 살펴봤지만, 철판은 계속해서 위로 똑바로 솟구쳐 올랐다.
날아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갑옷의 바람계 보호마법 덕분에 완화되기는 했지만 바람도 계속 몸을 때려댔다. 저 아래로 수도가 점점 조그맣게 보였고, 사람 따위는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어느새 구름을 뚫고 새도 날아오르지 못할 정도로 높은 곳까지 도달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고, 저 멀리 지평선이 둥글게 휘어지기 시작했다. 희한하게도 엉덩이 아래에 붙은 것에서 들리는 굉음은 점점 줄어들었다. 직접 연결된 부분이 떨리면서 나는 소리는 들렸지만, 귀를 아프게 하던 소리가 없어지니 그나마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는 느낌이다. 나를 때리던 바람도 어느새 없어졌다.
하늘 위에서 내려 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빌어먹을 마법사 놈 때문에 억지로 올라온 것만 아니었더라도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겠지. 하지만 마냥 그런 감상에 빠질 만큼 내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엉덩이로 전해지는 진동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아래로 뻗어있는 연기로 된 꼬리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화력이 다된 모양이었다. 나는 이제야 끝나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마음을 놓을 뻔했지만, 이내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말하길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지만, 나는 날개는 고사하고 무거운 쇳덩어리에 꽁꽁 묶여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점점 몸을 누르는 듯한 감각이 사라지고, 마침내 아무런 압박도 없어졌다. 그리고 이내 붕 뜨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흠, 실수야 실수. 사람이 타본 적은 없어서 깜빡해버렸다네. 그러니까 우선 해결할 문제가 소음과 바람 정도인가……."
"아니 애초에 당신네들이 사람을 저 위로 날려 보내는 게 문제라고! 듣고 있는 거야?"
탁자를 내리치며 고함을 지르자,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이 또다시 내 어깨를 붙잡으며 온몸으로 내리눌렀다. 나는 씩씩거리며 몸에서 힘을 풀어야 했다.
나를 싣고 하늘 위로 날아갔던 쇳덩어리는 정점을 찍은 뒤에 그대로 자유낙하했다. 이제 땅바닥에 부딪혀 작살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정신을 놓고 고함을 질러댔다. 온몸의 괄약근에 힘이 빠지는 것도 깨닫지 못했는데, 만약 그걸 깨달았다고 해도 곧 죽을 거란 생각에 신경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회수하러 온 사람들은 코를 싸매며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점을 찍었을 때 마력이 완전히 바닥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바닥에 가까이 다가가 수도의 건물들을 눈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갑자기 쇳덩어리의 속도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고요하게 아래를 향해 내려앉아, 처음에 있었던 연병장에서 조금 떨어진 밀밭에 내려앉았다. 마법사는 일정 시간 뒤에 작동하도록 공중부양 마법을 걸어놓았다고 설명해주었다.
"애초에 저런 망할 불기둥을 쏘아 올릴 필요는 없잖습니까. 공중부양 마법으로 저걸 사뿐히 내려앉힐 수 있다면 반대로 올려보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느냐 이거요, 내 말은."
화를 억누르며 물었지만, 마법사는 마치 대단히 당연한 사실을 모르느냐는 듯이 나를 깔보는 태도로 말했다.
"공중부양 마법은 바람계 마법이지. 그리고 바람계 마법이라면 공기가 있는 곳에서만 작용할 수 있고. 하지만 자네가 저 위로 올라갔던 곳이 어떻던가? 공기가 있던가?"
나는 당연히 그렇다며 대꾸하려고 했지만, 문득 하늘 위에서 무척이나 고요한 상태가 찾아왔던 것을 떠올렸다. 귀가 이상해진 것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밑으로 내려왔을 때는 소리가 제대로 들렸으니까. 그리고 그 상태는 이미 상당히 익숙했다. 빌어먹을 마법 갑옷 시험에서 공기를 다 빼버렸을 때 바깥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었지.
"공기는 하늘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희박해져서 숨도 쉬기 어려워지지.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면 아예 공기가 사라져버린다네. 애초에 공중부양 마법으로 하늘 저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면 저런 장치는 필요하지도 않았어. 마법사들이 혼자서 마법으로 날아가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옛날에 믿었던 것과는 달리 하늘 위에는 공기가 전혀 없었다네. 그래서 공중부양 마법이 아니라 다른 게 필요했던 거네."
"그러면 적어도 착륙은 제대로 시켜준다고 말은 하지 않아야 된 거 아닙니까? 난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고! 뭘 하려면 설명이나 제대로 해줘야 될 거 아냐!"
내 고함소리에 병사들이 재갈을 만지작거리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를 회수하러 온 사람들이 내 아랫도리를 보며 지었던 경멸스러운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단 말이야!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자네가 입고 있던 갑옷만 해도 값어치가 얼만데 그냥 버려뒀겠는가? 뭐, 하여튼 다음부터는 자네 수준에 맞춰서 상세히 설명해주도록 하지."
마법사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병사들도 그를 따라 자리를 비웠고, 나도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방에서 나섰다. 지나가면서 마주친 하녀들조차 나를 보며 피식거리며 얼굴을 돌리는걸 보면 아무래도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모양이었다. 제길, 네놈들이 같은 상황에 처해보라고. 겁먹어서 심장마비로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그 다음부터는 그나마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망할 늙은이는 내가 똥오줌을 지릴 정도로 겁먹은 상황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온갖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며, 내 정신력과 끈기를 확실하게 신뢰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듣기로는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쪽에서는 실험참가자들이 하나같이 정신을 잃거나 겁에 질려 심장이 멈추기 일쑤라서 이젠 지나가던 부랑자를 붙잡아 하늘로 쏘아 올리는 실정이라고 한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실험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굳이 사람을 쏘아 올리면서도 개선해야 될게 뭔지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자네가 이 일에서 상당히 중요한 걸세. 비록 자네를 보는 시선이 겁쟁이 오줌싸개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해도 기죽을 거 없어. 실험이 더 진행된 뒤에는 자네 말고도 더 많은 사람이 하늘로 갈 테고, 그러면 자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강한 담력이 필요한 것인지도 다들 알게 되겠지."
늙은이는 나름대로 위로를 하려는 것인지 이렇게 말하며 어깨를 두들겨 주었지만, 내 심정은 점점 참담해졌다. 제길, 이대로 그만두면 내 명예 따위 박살이 나버릴 테니 떠날 수도 없고.
"그런데 대체 제가 가는 데가 어디인 겁니까? 전에도 물었는데 이제 좀 명확히 해주십쇼."
"하늘로 날아오르고도 모르겠는가? 당연히 하늘 저 너머지. 정확하게는 저 위에 떠 있는 달이라네."
"장난치지 마십쇼. 달에 사람이 어떻게 간다는 겁니까? 제대로 좀 털어놔 봐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 내가 뭘 할지도 모르고 날아다녀서야……."
"달이라고."
"……불안해서 어디 쓰겠습니까? 그러니까……."
"달이라니까?"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달이라고 하지 않았나."
미치겠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뭐냐, 갈릴뭐시기라는 마법사가 자신이 말년에 만들어낸 망원경이라는 관측기구를 이용해서 달을 살펴보았다고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달은 음기의 집약체라고 알려졌었다. 태양은 양기를 뿜어내고 달은 음기를 뿜어낸다는 것이다. 다만 태양처럼 기운을 미친 듯이 뿜어내는 건 아니고, 얼음덩어리처럼 한데 응축된 상태에서 음기가 서서히 새어 나오는 거라고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 달은 마치 얼음 덩어리처럼 매끈할 거라고 여겨졌다고 한다. 달에 있는 얼룩 같은 거야 안에 담긴 무언가가 비쳐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서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했었지만, 매끈하다는 것 자체는 모두가 동의했었다. 천상에 있는 것이니 완벽한 원일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고.
하지만 갈릴뭐시기는 그 믿음을 철저하게 깨부숴버렸다. 그가 직접 관측하니 달 표면은 완벽한 원은커녕 곰보처럼 울퉁불퉁하기 짝이 없는 돌덩어리일 뿐이더라는 것이다. 그는 그 발견을 학회에서 발표했고, 이내 사람들은 두 파벌로 나뉘어 말싸움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달이 울퉁불퉁하다는 주장을, 다른 하나는 여전히 달이 매끈한 원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거다. 하지만 망원경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면서 달이 울퉁불퉁하다는 주장이 점점 우세해졌다.
그러는 와중에 나온 것이 '달은 겉으로 보기에는 울퉁불퉁해 보이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물질이 바다처럼 달 표면을 덮고 있어서 매끈하다.'라는 주장이었다. 갈릴뭐시기는 코웃음을 치며 '그 보이지 않는 물질은 죄다 달의 높은 곳에 있어서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울퉁불퉁하던데?'라며 일축했지만, 희한하게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덮여서 달이 매끈하다는 주장을 믿는 사람이 꽤 많아서 논쟁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갈릴뭐시기라는 양반이 저세상으로 떠나면서 논쟁은 더 심해졌고, 계속되는 논쟁에 열 받은 갈릴뭐시기의 제자가 공중부양 마법으로 달을 향해 날아갔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나를 공중에 날려 보내게 된 계기였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까?"
내가 묻자 늙은이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로부터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고 태양과 달은 거기에서 움직인다고 여겨졌지. 그리고 천체들이 돌아다니는 원동력은 하늘 위에 가득한 에테르라는 것이 오랜 믿음이었네. 한 번도 실제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천체의 움직임을 그나마 잘 설명하는 가설이라 그런 믿음은 상당히 굳건하다네. 게다가 하늘 위에 있는 것들은 지상의 것보다 우월하니 당연히 완벽한 형상을 한다는 믿음도 있었고. 요즘에야 그런 생각들이 점점 구시대적인 것이라 취급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기존의 믿음을 대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 그래서 직접 달에 가서 확인해보고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야."
"잠깐, 그러면 나한테 약속한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희귀한 자원이 필요하니 그걸 가져다주면 큰 상을 준다면서요?"
"그건 아직도 유효하다네. 겨우 달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자고 국가에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건 아니라네. 보석이라는 것이 땅 속에서 만들어진 에너지의 결정체인 만큼, 음기의 결정체인 달에 막대한 보석이 잠들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가설이 나왔다네. 그리고 달에 도달할 수단으로 고안된 발사체는 조금만 개량해도 강력한 무기가 될 테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보석이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데다, 저런 걸 무기로 써서 얼마나 효과를 본다고요? 제가 기사훈련을 받아서 머리가 완전히 돌은 아니란 말입니다. 저런 거 위력이야 끝내주겠지만, 보석이 저렇게 많이 들어가는 주제에 전쟁에서 써먹지도 못하는 거 아닙니까? 힘이 워낙 세니 고정시켜놓고 써야 될 텐데 그런 거에 비해서 태워버리는 범위는 그렇게 넓지도 않고, 설령 마주쳐도 피해버리면 그만일 텐데요."
"완전히 돌은 아니라도 돌에 가까운 건 마찬가지군. 생각을 좀 해보게. 지금 만들어놓은 발사체야 아주 높은 곳에 사람을 보내야하니 저렇게 크고 많은 보석이 필요한 거지만, 지상의 다른 곳으로 날리려면 저 정도로 규모가 클 필요가 없어. 그리고 발사체에다 대량살상이 가능한 강력한 마법을 담은 마법진을 실어서 다른 나라 수도에다가 날리면 어떻게 되겠나? 지금까지야 그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쓰려면 사정거리 제한 때문에 시전자까지 날아가 버리는 걸 각오하고 미친 척하고 적의 공격을 뚫고 마법사가 돌진하거나, 마법진을 공격하려는 적진에다 직접 설치해야 된다는 문제 때문에 사용되는 일이 없었지만, 저 발사체를 쓴다면 아주 멀리서 간단하게 대량살상이 가능한 무기가 된다네."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라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달에서 쓸 만한 걸 얻을 수 없더라도 확실히 나라에 큰 공을 세우기는 할 테지. 적어도 달에 먼저 깃발을 꽂은 공신으로 대우를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얼마 전에 국왕께서 친히 이곳을 시찰하러 오셔서도 성공할 경우 참가자 전원에게 제대로 포상하겠다고 하셨고. 자, 이제 일어날까? 이제 슬슬 다음 시험을 시작할 때일세."
"이번에는 뭘 하면 됩니까?"
"뭐긴 뭐야, 자네가 저번에 달아달라고 했던 장치 시험이지. 금속구조물로 발사 초기의 공기저항을 줄이고 탑승자를 보호하며 방음기능도 추가했다네."
"거 참 빠르군요."
"대신에 무게중심이 높아져서 잘못하면 착지할 때 거꾸로 처박힐 우려가……."
망할…….
[이제 뭐가 보이는가?]
압력이 서서히 줄어들 때쯤 늙은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번의 시험발사의 결과로, 지상의 마법사들과 통신할 수 있는 장치가 투구에 추가되었다. 덕분에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을 바로 요구할 수가 있고, 반대로 마법사들의 요구를 내가 바로 들을 수도 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 빌어먹을 슬라임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가 여건 어려워야지."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냥 슬라임이 아니라 슬라임 유탁콜로이드라네. 자넨 최신 연금술 성과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네네, 잘나셨습니다."
그리고 이젠 미친 마법사들이 몬스터까지 써먹기 시작했다. 몇 번의 개량을 거쳐도 조종석의 안정성을 높이기가 어려워지자, 아예 조종석을 밀폐하고 그 안에다 슬라임을 갈아서 뭐 복잡무쌍한 과정을 거쳐 만든 끈적끈적한 액체를 채워버린 것이다. 하여튼 슬라임 덕분에 확실에 몸에 오는 충격과 진동은 줄어들었다. 액체로 된 벽이 있으니 밖에서 오는 소음도 줄어들었고. 끈적끈적하기는 하지만 갑옷에 적용된 마법 덕분에 몸에 닿지도 않는다. 그래도 몬스터의 시체 갈아 만든 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떠올리자니 영 꺼림칙할 뿐이다.
나는 몸을 의자에 고정하는 벨트를 풀어버렸다. 이제 당분간 발사체는 수평에 가깝게 비행할 것이고, 꽤 아래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헤엄치듯이 슬라임 액체 속에서 움직여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은 유리가 계속 깨지는 바람에 뻥 뚫린 채로 바람계 방어마법을 고정하여 만들어놓았다.
"희한하군요. 땅이 공 모양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긴가민가했는데, 여기에서 보니 진짜로 둥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바깥으로 수집 장치를 내밀게. 최소한 30분가량은 바깥에 둬야하네. 스위치 누르는 거 잊지 말고, 밖으로 내보내기 전에 스위치 누르는 멍청한 짓 하지 말고.]
"걱정도 팔자요. 다 알아서 할 테니 조용히 계십쇼."
나는 지시에 따라 가지고 올라온 수집 장치를 집어 들었다. 이게 이번 발사에서 가장 중요한 놈이다.
하늘 위의 상태에 따라서 계획이 크게 바뀐다. 옛날 학설은 하늘 위에 에테르라는 물질이 가득 차있고, 천체들은 거기에서 동력을 얻어 하늘을 떠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학계가 몇 번 엎어지면서 지구가 둥글고 천체는 그 주변을 빙빙 돈다는 학설이 주류가 되었지만, 이놈의 에테르라는 건 해결이 되지 않았다. 진보적인 학자들은 어차피 빙빙 주위를 돌기만 할 뿐이면 동력은 필요가 없고, 오히려 에테르가 가득하면 배가 파도에 부딪히듯 힘을 잃고 멈추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보수적인 학자들은 오히려 에테르가 힘을 잃지 않고 천체가 돌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며, 중력이라는 것도 에테르의 압력 때문에 발생한다는 주장을 지지했다. 게다가 갈릴뭐시기라는 양반 이후로는 에테르라는 것이 천체 표면을 덮고 있는 물질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면서 에테르가 뭔지에 대한 논란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가 밖으로 내밀고 있는 수집 장치는 그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으로, 중앙에 보석을 박아 넣어 마력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하늘 위에 공기만 없을 뿐 에테르가 있다면 에테르에 있는 마력이 보석에 수집될 것이고, 그야말로 텅텅 비었다면 보석도 텅텅 빈 채일 것이다. 조종석 안에서 마력을 흡수할지도 모르니 반드시 창문 밖에서만 수집 장치를 켜고 꺼야하는 것이고.
30분쯤 지나자 마법사들이 수집 장치를 수거하라고 연락했다. 나는 스위치를 끈 뒤 수집 장치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제 서서히 밑으로 떨어질 차례다. 다시 헤엄쳐가서 자리에 몸을 고정시켜야한다. 이번에 떨어질 곳은 동쪽 앞바다의 어느 섬 주변으로, 발사체를 회수하기 위해 함대가 대기하고 있다. 이번 시험발사는 원하는 위치에 정확히 발사체를 떨어뜨릴 수 있을지를 알아보는, 군사적인 목적도 있는 셈이다.
내가 다뤄야할 장비는 점점 늘어났다. 이후 여러 개의 수집 장치는 당연하다는 듯이 가지고 다녔고, 그밖에도 다양한 물건들을 싣고 하늘 위로 올라가 잡다한 짓을 다 해야 했다. 심지어는 조종석 밖으로 나가서 진공상태에 몸을 노출시키며 발사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살피고 가능하면 수리까지 하는 연습도 했다. 이 실험을 했을 때는 지구 주변을 도는 궤도를 그리고 있었기에, 나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잡아당기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처음에는 물에 빠진 것 마냥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묶은 밧줄을 잡고 발사체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발사체 바깥에 붙은 사다리를 잡고 오가며 상태를 살피고 스페어 보석으로 갈아 끼우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렇게 몇 시간동안 둥둥 떠다니며 움직이다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복잡무쌍한 작업을 나 같은 머리로 그냥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태까지 포물선을 그리며 비행한 것도 전부 마법사들이 미리 정해놓은 대로 알아서 발사체가 움직인 것이었고, 나는 그저 타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바깥에서 궤도를 그리며 도는 것은 얘기가 달랐다. 때문에 마법사들은 내게 계산기 하나를 안겨주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수집 장치를 사용하고 나서 며칠이 지난 뒤, 다시 근위대 연병장에 찾아가자, 늙은 마법사가 기뻐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손자가 걸음마라도 했답니까?"
"그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지. 학회에서 내게 반대했던 놈들 코를 완전히 눌러버렸거든. 미친놈들, 에테르 같은 엉터리 물질이 있다고 주장할거면 근거부터 내놓을 것이지. 일단 하늘 위에 가득하다는 에테르 따위는 망상의 산물이라는 결론이 나왔네. 중력 따위 없다는 정신 나간 주장도 바닥에 메다 꽂아버렸고. 달에 있다는 에테르도 그 꼴이 날 테지. 뭐, 확실하게 하자면 몇 번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역시 마법사들은 고명해질수록 성질이 더러워진다는 통설이 맞는 것 같다.
마법사는 그 뒤로도 한참 다른 마법사들 욕을 하며 즐거워한 뒤, 나를 끌고 커다란 막사 안으로 향했다. 막사 안에서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골머리를 싸매며 뭔가 계산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앙의 커다란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뭔가를 표시하고 돌아가곤 했다.
"이제 자네의 앞길이 확실히 정해졌네. 자넨 이제 달에 갈 거야."
"그러면 이제 기사가 되는 겁니까?"
"아, 그건 아냐. 아직 거기까지 가긴 멀었지. 자네는 달 위를 한 바퀴 돌고 와야 하네."
"그냥 가는 김에 내렸다가 오면 안 됩니까?"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정신 나간 작자들의 주장이 박살난 지금, 중력이라는 건 흙속성 에너지에 의해 유발되는 힘이라는 것이 정설이네. 그러니까 커다란 땅덩어리가 있으면 그 땅덩어리가 다른 물체들을 끌어당긴다는 소리지. 그건 달도 마찬가지일거야. 그러니 달을 향한 여행은 이런 중력을 이용해서 간단하고 우아한 여행이 될 걸세.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간단한 계산들이 필요하거든."
간단하고 우아하다는 그의 말에 주변 마법사들이 탄식을 내뱉었지만, 그는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여기 그림을 보게. 가운데 있는 커다란 원이 지구, 그 주변의 작은 원이 달일세. 일단 자네는 이렇게 지구 위를 빙빙 도는 궤도를 그리면서 날게 될 거야. 그러다가 한 지점에서 가속하는 거지. 그러면 예상경로가 이렇게 타원형으로 길어지면서 달에 닿게 되네. 그리고 달은 가까이 다가온 자네를 끌어당길 테고, 자네는 그 힘에 추진력을 더해서 속도를 줄여 달을 도는 궤도를 그려야하지. 그 다음엔 내려갔다가 올라와서 지구로 돌아오는 거야. 그런데 내려갔다 올라오는 게 좀 힘들 거든. 그러니 일단 그 전단계까지는 가능한지 시험을 해봐야하네."
그의 설명과 함께 탁자 위의 그림에 기다란 8자 모양이 그려졌다.
"그런데 이렇게 날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만큼 가속했다가 다시 적절한 시점에 적절하게 감속해야하거든. 만약 실패하면 자네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겠지."
슬슬 불안감이 올라왔다.
"그거 혹시 저 마법사들이 머리 싸매면서 하는 그 계산이 필요한 겁니까?"
마법사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법사님, 여태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저는 이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테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 젠장, 이거 놓으십쇼. 말이 되는 걸 요구해야지. 어지간한 마법사도 어려워하는 걸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누굴 미아로 만들려고."
마법사가 킬킬거렸다.
"내가 자네에게 그런 걸 기대할거라고 생각했나? 자네처럼 머리가 안 돌아가는 작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해놨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러면서 그가 탁자 밑을 가리켰다. 들어 올리지 않고 뭐하냐며 옆구리를 찔려가며 그 묵직한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자, 그가 뚜껑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둥그스름한 쇳덩어리가 들어있었다.
"마력식 계산기라네. 이것 역시 최첨단 기술의 산물이지."
"하……. 저는 계산기 쓸 줄 모릅니다만."
"걱정하지 말라니까. 여기엔 인텔리전트 오브젝트 마법이 걸려있네. 내가 통신기로 지시하거나 자네가 직접 말을 걸면 필요한 계산을 다 해줄 걸세. 그러면 자네는 이 녀석이 보여주는 글씨대로 발사체를 조종하면 돼."
늙은이의 행동은 하나같이 밉상이었지만, 그래도 계산기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계산기는 내가 말만 하면 현재위치와 속도를 바탕으로 앞으로 언제 어디를 향해 얼마나 가속해야되는지를 글씨를 띄워 알려주었고, 나는 그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종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땅 위에서 공중부양 마법으로 대롱대롱 들어 올려진 채 난리법석을 피우거나, 공기에서 얻는 에너지가 줄어드는 양으로 고도를 계산하는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기 위해 높은 산에 그걸 들고 오르내리거나, 속도를 계산하는 기계를 시험한답시고 이리저리 핑핑 날려가는 등의 개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저런 기계에서 나오는 값을 읽고 머리 써서 계산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제 예전 같으면 거꾸로 발사체를 돌려 땅으로 내려갈 차례지만, 이번은 다르다. 드디어 달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미친 마법사의 강요로 억지로 갖게 된 목표였지만, 아무래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인류 최초로 달에 가다니. 남들이 들으면 아직도 동화 속에 빠져 사냐고 핀잔을 줬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른 나라에서 먼저 달에 도착하는 게 아닌가 싶어 초조할 지경이었다. 부와 명예가 걸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다행히 다른 나라에서는 이제야 발사체를 완성해서 시험비행을 시작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나는 계산기의 지시에 따라 조종기를 움직였다. 방금 보석을 갈아 끼운, 사방에 붙은 작은 추진마법진이 작동하며 발사체 머리를 달을 향해 돌렸다. 조종석 바닥에 누운 꼴로 몸을 고정한 채 앞을 보니, 창문을 통해 노르스름한 달의 모습이 보였다. 보름이었다.
"연병장, 목소리 들리는가. 여기는 달 하늘이다. 응답하라."
[폼 잡지 말고 집중해라. 지금 자칫하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
마법사의 말에 내가 구시렁거리자, 계산기는 그걸 듣고는 문자를 띄웠다.
[상태는 순조로움. 긴장할 필요 없음.]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계산기가 긴장할 필요 없다잖습니까. 하여튼 이제 내려갈 준비 끝났습니다."
첫 번째 달 비행에서 달 착륙까지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달 착륙을 위한 장비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작부터 만들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오작동하는 바람에 실전투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2주일 전에야 실제로 하늘 위에서 시험운행을 해볼 수 있었다.
착륙장치는 발사체를 작게 축소한 모양새로, 발사체 전체가 달에 내려갔다 오면 마력소모가 커지기 때문에 분리하여 작은 부분만 내려갔다 올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그렇기에 착륙장치는 여러모로 간소화되었고, 아마도 공기가 없는 상황에서 사용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별도의 보호장치 같은 것도 없었다. 조종석, 마력저장용기, 추진 장치만으로 간략하게 이루어져, 모든 조종은 오로지 내가 수동으로 해야만 한다. 물론 여전히 계산기의 도움을 받을 수야 있지만.
나는 발사체의 궤도를 달 주변을 돌도록 설정한 뒤, 고도를 점점 낮춰갔다. 착륙장치의 마력은 빠듯한 수준이다. 최대한 낮은 곳에서 내려가기 시작해야 돌아올 때의 마력을 확보할 수 있다. 계산기의 지시에 따라 발사체의 속도를 점점 줄이고는, 달의 반대편으로 돌아갈 때까지 추진 장치를 멈췄다. 아래를 내려보니 달의 표면이 천천히 지나갔다. 물론 실제 속도는 화살보다도 빠르겠지만, 상당한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울퉁불퉁한 달의 표면은 고요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나는 어둑한 달의 반대편에 도달했을 때 발사체의 머리를 제대로 맞추고 다시 추진 장치를 조작해 발사체의 속도를 줄여갔다. 추진 장치를 멈출 때쯤이면 아마 달 주변을 원모양에 가깝게 돌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달 표면으로부터의 높이를 측정해야 한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달은 거의 원형에 가까우니, 달 주변을 돌면서 높이를 측정하면 어디에서 측정하든 일정한 높이가 나와야 할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발사체를 조작해야 한다. 다행히 세 바퀴 정도 달을 돌면서 측정해보니 별도의 궤도수정은 필요 없었다.
나는 계산기를 겨드랑이에 끼고 조종실 바깥으로 헤엄쳐나갔다. 착륙장치는 조종실의 꼭대기에 붙어있기에, 밖으로 나가서 발사체와 분리한 뒤에 올라타 조종해야했다. 달을 향해 날아오면서 몇 번 확인했을 때는 착륙장치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한차례 더 눈으로 살펴 부서지거나 떨어진 부분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나는 마법으로 잠겨있는 장치의 보석을 제거하여 잠금을 해제하고, 착륙장치를 손에 잡은 채 발사체를 발로 살짝 밀었다. 이정도면 둘이 충분히 분리되면서도 궤도에는 큰 이상이 없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착륙장치에 붙은 손잡이들을 붙잡고 기어올라 착륙장치의 조종석으로 향했다. 조종석에는 계산기를 부착할 받침대와 내가 앉을 의자, 간단한 추진 장치 조작기가 있다. 계산기를 받침대에 단단하게 연결한 뒤, 조종석에 몸을 묶었다. 육안으로 발사체가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나는 계산기에게 경로계산을 지시했다. 그리고 계산기의 답에 따라 착륙장치의 머리를 돌리고 서서히 가속하기 시작했다.
착륙장치의 조작은 발사체 조작과 달랐다. 발사체는 궤도의 한 지점에서 단번에 가속하여 궤도를 바꾸었지만, 착륙장치는 착륙하는 전 과정에서 서서히 가속하여야했다. 그래야만 최대한 마력을 적게 소모하면서도 사뿐하게 달에 내려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내 신경은 발사체를 조종할 때보다 더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긴장 풀라고, 친구. 자네가 이번에 실패하지만 않으면 모든 걸 얻을 수 있어.]
"그런 말은 아까 했어야죠, 이 양반아! 지금 집중하고 있으니 말 시키지 마십쇼."
늙은 마법사가 쓸데없이 말을 걸어왔지만, 그것 때문에 조종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다. 착륙하기 직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완만하게 착륙장치의 방향을 돌리면서 꾸준히 속도를 줄여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착륙에 실패할 것 같으면 그대로 다시 복귀하게. 착륙 예정지에 커다란 돌무더기나 구덩이가 있어서 뒤집어질 것 같거나, 속도를 충분하게 줄이지 못해서 충돌할 것 같으면 위로 날아올라서 돌아오라 이 말이야. 귀환하면 재도전 할 수 있지만 거기에 고립되면 그대로 끝이니 말일세.]
얼핏 나를 걱정하는 듯한 말이 전송되어왔지만,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이미 저 말은 연병장에서 출발하기 전 회의 때도 나왔던 말이다. 내가 착륙을 포기하고 돌아오면 내 목만 날아가고 발사체와 착륙장치는 남지만, 내가 무리하게 시도하면 전부 다 날아가니 하는 말이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작업이 계속되면서, 점점 달 표면이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당히 많이 내려왔으니 이제 추진력을 더 높일 차례였다. 마침 계산기의 가속지시가 화면에 떠올랐기에 주저하지 않고 추진력을 높였다. 착륙지점은 땅에서 올려다봤을 때 보이는 달의 한복판, 가장 커다란 구덩이 한복판에 있는 넓은 평지였다. 이제 착륙지점의 표면상태가 눈으로 확실히 보일 때였다. 다행히 바위덩어리가 있거나 요철이 있지는 않았다.
목적지가 코앞에 다가왔다. 나는 착륙장치를 거의 똑바로 세웠다. 달 표면에서 몇 m 상공에서는 거의 제자리에 멈춘 정도로 속도가 줄어들었다. 나는 추진력을 조금씩 줄여 착륙장치가 사뿐히 내려앉도록 했다. 추진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스와 마력에 달 표면의 흙이 날려 멀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진공에서처럼 흩날리지는 않았다. 그저 굵은 모래알이 날리듯이 포물선으로 날아가 후두둑 떨어져내릴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달에 완전히 내려앉았다. 착륙장치의 다리가 달 표면에 닿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추진 장치를 꺼버렸고, 착륙장치는 아래로 살짝 꺼지면서 땅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붙박힌 것처럼 앉아,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추진 장치에서 발생한 진동이 사라지자 찾아온 것은 완벽한 적막이었다. 지구 상공에서 느꼈던 것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 새까만 허공에서의 느낌과 일견 밤하늘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빛나는 사막에서의 느낌은 달랐다. 이곳은 완전히 이계였다.
"연병장, 이곳은 달이다. 성공적으로 도착했다."
길게 말을 잇기 힘들었다. 긴장이 한 번에 풀어지자 그대로 자리에 드러눕고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곳에 오래 머물러봐야 좋을 것은 없다.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식량까지 포기했기 때문이다. 통신장치 너머의 환성을 들으며 나는 몸을 고정하던 벨트를 풀어버렸다. 이제부터 할 일은 노동이었다.
[명심하게. 달에서 가져올 수 있는 샘플은 50kg 이하로 한정되네. 너무 많이 가져오면 자네가 돌아오기 어려우니 주의해야돼.]
어깨에 삽과 곡괭이를 둘러매고 내려왔다. 늙은이와 다른 마법사들이 원하는 건 달에 있는 광석의 샘플이다. 보석이라도 발견된다면 대박이겠지만 깊숙한 곳에 있는 광물은 나 혼자서 캐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생긴 구덩이 밑바닥으로 굳이 내려앉아 돌덩어리를 가져와야하는 것이다. 달의 구덩이가 어둑한 이유가 뭔가에 의해 달 표면이 깊히 패여 안쪽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되니 일견 타당한 이유였다.
곡괭이나 삽은 부러질 일이 없도록 전체가 철로 만들어졌지만,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구에서였다면 짊어지고 나르기도 불편했겠지만, 지금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곡괭이 같은것 뿐만이 아니었다. 갑옷도 마치 입지 않은 것처럼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나 자신의 무게도 엄청나게 줄어든 느낌이었다. 사다리로 땅에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나는 가벼워진 몸을 체감하며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닿는 충격은 거의 없었다.
"으아악!"
[뭐야, 무슨 일인가?]
내 갑작스러운 비명에 마법사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한참동안 욕설을 퍼부은 뒤,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여긴 악마의 프라이팬 위인 것 같습니다. 모래가 미칠 듯이 뜨거워요!"
온갖 발작을 다 하며 겨우 작은 바위 위로 올라서 몸을 털어댔다. 하지만 부츠 안에 들어간 모래는 밖으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나마 다행히 모래의 양은 적었기에, 순간적으로 화끈한 느낌을 주고는 빠르게 식어갔다.
"이래서는 작업하기 어렵겠는데요. 땅을 파헤치려다간 제가 통구이가 될 것 같습니다. 이봐요, 듣고 있습니까?"
마법사들은 한참동안 웅성거리다가 회신했다.
[그거 곤란하군. 예상치 못한 사태인데. 자네 혹시 땅바닥을 파헤쳐볼 수 있겠나?]
"미쳤습니까? 차라리 손으로 튀김을 건져올리라고 하지요?"
[많이 파낼 필요는 없어. 삽으로 몇 삽만 퍼내고 밑바닥을 한 번 만져보게.]
"젠장, 잠깐 기다려보십쇼."
나는 모래가 튀어오르지 않도록 천천히 바위에서 내려갔다. 삽은 착륙장치 바로 옆에 떨어져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걸어가 삽을 집어 들고, 모래가 날리지 않도록 천천히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섯 삽을 퍼내 작은 구덩이를 만든 뒤, 삽을 내려놓고 왼쪽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을 살짝 바닥에 대어보았다.
"예, 바닥을 만져봤습니다. 여긴 그렇게 뜨겁지는 않군요."
[역시 그렇구만. 자네는 말하자면 한낮의 뜨거운 사막 위에 있는 셈이야. 그것도 며칠째 해가 지지 않고 있는 사막이지. 그러니 표면이 엄청나게 뜨겁게 가열되어있는 걸세. 하지만 하얀 모래들이 빛을 반사하고 있으니 직접 빛을 받지 않은 땅 밑은 뜨겁지 않을 걸세.]
"그걸 진작에 말해줬어야 될 거 아닙니까!"
[나도 이럴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열 받아서 한바탕 고함을 지르며 말싸움을 했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는 이미 이계에 와있는 상태다. 남은 것은 최대한 빠르게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혹시 날더러 계속 땅을 파라는 건 아니겠죠? 땅 파다가 모래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익어버릴 겁니다."
[할 수 없지. 일단 땅을 조금만 더 퍼서 안쪽에 있는 흙을 몇 병 가져와보게. 그리고 주변에서 돌덩어리도 몇 개 주워오고. 가급적이면 특이한 것으로 주워오게.]
나는 착륙장치 위로 기어 올라갔다. 착륙장치는 대부분 금속으로 되어있어서 뜨거운 빛을 잘 튕겨내고 있었다. 나는 얼굴만한 유리병들이 담긴 가죽주머니를 들고는, 이번에는 얌전하게 사다리를 이용해 다시 내려갔다. 젠장, 내가 뭘 어쩌는지 저 작자들이 알 수는 없겠지. 나는 이미 파헤쳐놓은 구덩이 바닥의 흙을 그대로 떠서 유리병에 담았다. 그리고 모래를 피해 올라섰던 작은 바위를 곡괭이로 두들겨 부수어 다른 가죽주머니에 담았다. 마법사는 특이한 것을 찾아보라고 했지만, 온통 회색뿐인 이 사막에서 특이한 돌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내가 연금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구분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조심조심 움직였지만 아무래도 움직일 때마다 모래가 조금씩은 날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 주변에는 보호마법 덕분에 여전히 공기가 있으니, 멀리에서는 곧바로 떨어져내리던 가느다란 모래먼지가 내 몸 주변에서는 쉽게 가라앉지도 않아 연신 기침이 터져 나왔다. 바위를 깨부수면서는 아무래도 동작이 커지고 파편이 튀다보니 더더욱 모래가 심하게 날렸다. 눈부신 사막을 보고 있느라 눈은 쉽게 피로해졌고, 처음에 모래를 뒤집어쓰면서 입은 화상 때문에 피부가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쓸 만한 건 모두 모았습니다.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더는 필요 없어진 삽이나 곡괭이 같은 것은 달에 내버리고, 나는 출발준비를 하며 마법사들에게 보고했다. 온갖 고생을 하며 비싼 발사체를 타고 날아온 달에서, 챙겨가는 것이라곤 돌덩이 몇 개와 회색 흙 몇 병뿐이로군. 실질적으로는 마법사가 시키는 대로 주변에서 조금 높은 곳에다 꽂아놓은 깃발이 이번 탐사에서 가장 큰 소득이 아닌가 싶었다.
계산기는 내가 온갖 삽질을 다 하는 동안에도 달 주변을 도는 발사체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가 작업을 마치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계산기는 이륙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미련 없이 착륙장치를 조작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나. 나라의 입장에서는 탐사니 자원이니 하는 건 핑계고 강력한 발사체라는 새로운 무기 개발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이야. 그건 이미 완벽하게 달성했네. 자네 공도 인정되었어."
늙은 마법사의 말에 나는 기침을 내뱉으며 물었다.
"그러면 내 명예기사 작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가 잘 되지도 않는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가까운 시일 내에 자네 가문의 명예도 복구될 테고, 자네 가족들은 다시 귀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걸세. 단순히 명예기사가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뭐……. 자네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뿐이지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연신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한참 동안 쿨럭거리다가 핏덩어리를 토해낸 뒤에야 기침이 잦아들었다.
달에서 돌아온 뒤, 나는 그곳에서 입은 화상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상은 가벼워서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치료되었지만, 눈은 이미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눈에 입은 화상 때문인 줄 알았지만, 화상치료가 끝난 뒤에도 눈앞이 희뿌옇게 보이는 것이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잘 안 보이는 것 따위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달에서 작업하면서부터 시작된 기침은 지구로 돌아온 뒤로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심각해져, 얼마 전부터는 피까지 내뱉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손을 써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늘 늙은 마법사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달 표면의 유해한 모래 먼지가 폐 속에 깊숙이 박혀 폐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내가 가져온 모래 샘플로 동물실험을 해보니 이미 몇 마리가 폐에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자네 다음부터 달에 가는 사람들은 일단 모래 먼지가 들어올 수 없는 보호복을 입고 가기는 하지만, 완벽한지는 알 수 없네.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그래, 달에서 보석은 찾았답니까? 이 개고생을 하고서 얻은 게 없으면 아쉬운 데요."
내가 말을 돌리자 마법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계속 찾고 있네. 며칠 전에 보낸 발사체로 골렘의 부품은 다 보낸 셈이거든. 이제 착륙장치 조종석에 앉아서 골렘을 조종해 땅을 파기만 하면 돼."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다시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더 긴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늙은 마법사는 작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