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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순간부터 빛의 속도로 공간 속을 끝없이 여행하는 운명을 지닌 존재들이 있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소위 불가능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으나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절대로 교차할 수 없는 평행 우주에서 살고 있다거나 완전히 다른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또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니었다.
편의상 이들을 비아토인이라고 부르자. 어쩌면 이미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비아토인들에겐 공간의 한 지점을 점유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그자리에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도 비아토인들은 자신들의 속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비아토인들에게 혹시 광속으로 움직이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물어본다면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아토인들에게 광속으로 지나쳐 가는 것은 그들이 발 딛고 있는 공간이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아토인들에게 공간은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정한 속도로 흘러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비아토인들은 한 번 지나간 곳을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아니면 같은 장소를 두 번 지나간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비아토인들은 공간 자체를 볼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비아토인들은 인간과 같이 우주의 어떤 다른 존재들은 공간에서 3개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공간은 오직 지나온 장소와 지나갈 장소를 이어 주는 일차원의 긴 직선형태에 불과했다. 비아토인들은 직선 위의 모든 점을 빠짐없이 거쳐가지만 그 여행의 의미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아토인들은 그 여행을 “인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비아토인들은 시간의 모든 차원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잘 알았고 어떤 순간에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이 가능했으며 시간의 일정 영역을 점유할 수도 있었다. 사실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건과 사건 사이를 규정하는 계량법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무엇인가가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똑같은 모습이라면 시간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아토인들이 아무런 변화없이 한결같은 모습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비아토인들에게도 삶과 죽음이 있었다. 비아토인들도 성장하고 직업을 바꾸기도 하고 이사를 하기도 한다. 비아토인들도 우주의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라이프 싸이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시간축에서의 변화를 꾀하는 동안에도 공간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으며 시간에 대한 변화는 의도할 수 있으나 공간에 대한 변화는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는 일들은 특정 위치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며 비아토인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멈추거나 막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비아토인들이 시간에 대하여 그렇게 풍부한 어휘를 갖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공간에 관련된 단어는 매우 드물었다. 그 부족한 단어도 대부분 시간에 대한 표현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과거”는 시간의 특정 방향을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예전에 지나온 장소를 의미하기도 했다. “미래”는 “과거”와 같은 시간 평면에 속하면서 180도의 위상각을 갖는 방향을 의미하지만 아직 닿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들의 언어가 이런식으로 발달한 이유는 비아토인들이 공간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아토인들은 질량이 전혀 없는 순수 에너지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우주 탄생의 초기에, 시공이 막 형성된 직후 아직 물질이 탄생하기 전 엄청난 혼돈 속에서 처음 생겨났다. 아무도 그들이 왜 어떻게 현재의 지성을 가진 생명체로 진화했는지는 모른다. 비아토인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아득한 과거의 시간 영역으로 되돌아가서 필름을 되돌려 보는 것 처럼 매 순간의 사건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시간 간격을 로그 스케일로 인지하는 비아토인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거의 영원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간격을 감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인간이 공간 속을 자유롭게 움직인다고는 하나 그 범위가 몹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비아토인들의 시간에 대한 통제력은 매우 뛰어났다. 비아토인들은 진정한 시간의 지배자들이었다. 비아토인들의 속도는 일정한 시간을 이동하는 데에 걸리는 거리로 정의되었고 그 값은 인간의 상상을 벗어나는 범위에 있다. 비아토인들은 그들의 위대한 문명을 모든 시간의 단계마다 건설했다. 비아토인들이 지나간 곳에는 어디나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비아토인들도 질량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비아토인들은 오래 전부터 질량을 가진 존재들은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질량의 존재는 시간 영역의 왜곡을 함께 동반하는데 이런 현상을 그들은 “중력”이라고 불렀다. 비아토인들이 질량과 조우하면 공간상에서도 회절이나 굴절을 일으키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왜냐하면 공간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어차피 그들의 이해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 영역에서 - 어떤 질량은 아주 오랜 시간을 점유하기도 하고 또 다른 질량들은 찰나만을 점유하지만 - 질량이 크면 클 수록 중력도 커서 비아토인들을 끌어당기는 효과도 크다. 비아토인들의 물리학에 의하면 어떤 시간과 공간의 좌표에서는 특이점이 존재해서 공간을 멈추게 하고 비아토인들을 영원히 중력속에 묶어두는 무시무시한 질량의 존재를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을 뿐 아직까지 누구도 그러한 질량을 마주친 적은 없다. 비아토인들이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어디선가 그런 질량과 마주칠 지도 모른다.
만약 누군가가 비아토인들을 관측하는 것이 가능해서 그 모습을 본다면 그건 100년 전의 모습일 수도 있고 10억년 전의 모습일 수도 있으며 400억년 후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건 10만년전에 폭발한 초신성이 이제서야 겨우 지구에서 관측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아토인들은 빛이 아니고 10억년 후의 모습으로 당신 앞을 통과해갈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당신은 실제로 비아토인들을 볼 수 없다. 비아토인들이 설사 물리적인 형체를 가졌다고 해도 광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 그 크기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당신이 비아토인들처럼 일정한 양의 시간 영역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무엇인가 반사하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비아토인들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아토인들은 시간의 한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알고 있다. 우주의 탄생과 끝이 궁금하다면 그들에게 물어보라. 비아토인들은 빅뱅 직후 그들이 최초로 이 세계에 존재하기 시작했던 시점부터 우주가 끝나는 시점까지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것은 비아토인들의 시간 지도에 정밀하게 표시되어 있다. 우주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비아토인들에게 비극이 아니다. 시간의 지배자이며 시간 속에 거주하는 비아토인들에게 시간의 끝은 그들 삶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종말이란 공간의 끝을 의미한다. 더 이상 여행할 곳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즉 우주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이르고 나면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종말이 온다. 우주가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가정은 비아토 문명의 지속을 보장하는 몹시 다행한 일이지만 아직까지 비아토인들은 우주의 크기에 대해 밝혀내지 못했다.
비아토인들은 지금도 그들의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일차원의 무한한 직선으로 뻗어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시간속에서 태어나고 시간속에서 시간을 점유하며 살다가 시간속에서 잠든다. 그러는 사이에도 공간은 끊임없이 흐르며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끊임 없이 비아토인들을 데려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인간의 문명을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고 나중에 되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아토인들도 인간들도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는 영원히 모른 채 남아있을 것이다.
호오, 1차원인간이군요..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