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62년 - 서기 2287년
미르 연작
묻어둔 기억



 침대에 누운 채, 리카드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출항을 기다리며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궁금해했다. 이민선이 순항상태에 들어가기 전까진 객실 안에서 기다려야 하니 선택지는 얼마 없을 것이다. 책? 설레는 마음에 글이 눈에 들어올 것 같지는 않다. 공상? 맥이 빠지는 일이다. 잡담이라면 나눠볼 만 하겠지만, 넓지도 않은 2인실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한 명이 더 타야 했다. 행성간 이민선에는 1인실이 없고, 따라서 동행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2인실을 같이 쓰곤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타지 않았다면 타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리카드는 일주일의 항해를 혼자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유감을 느끼진 않았다. 대신 인트라넷에 접속해 부유하고 있었으니까.
 딱히 찾는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리카드는 그저 네트워크에 접속해 있는 기분 자체를 즐겼다. 네트워크를 이루는 정보들은 두개 안에 이식된 뇌신경 기간망을 통해 접속자의 뇌로 직접 스며든다. 경계가 확장되고 정신이 해방된 것 같은,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까지가 자신인지 구분하기 힘든 기분.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선내 방송이 흘러들었다.
 
 -행성간 이민선 '하늘녘'에 탑승하신 승객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곧 출항할 예정이니 충격에 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객실 문은 순항상태에 들어가기 전까진 열리지 않을 예정입니다. 2분 후 출항하겠습니다.
 
 이제 출항한다면 순항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한 시간 쯤 뒤일 것이다. 정말 지루한 시간은 지금부터다. 하지만 리카드는 접속을 해제하고 의식을 향해 떠올랐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멀찍이 물러나 있던 현실이 밀려와 그의 피부에 와닿을 때도 그는 아직 멍한 상태였다.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그는 몸을 일으켰고, 객실 문을 보았고, 생경한 당혹에 휩싸였다.
 객실의 문은 우주선답게 육중하게 엇걸려 있었다. 비상시에 대비한 여압장치와 충격완화 역할도 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문엔 별로 당연하지 않은 무엇이 기대있었다. 여자였고, 터질 것 같은 숨을 애써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리카드를 바라보고, 몇 번인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스르르 미끄러져 기대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뭐라고 입을 열지도 못한 채, 리카드는 새삼 방이 덥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모양이다. 이민선의 엔진이 빛을 토하며 발진의 충격이 객실을 얕게 울렸다. 쿠르르르릉. 이제야 이민선이 달을 떠났단 말이지. 생뚱맞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아, 하아……. 미, 미안해요. 탑승수속이 늦어져서…벌써 발진한다길래."
 
 그녀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키가 크고 가느스름한 체형이었다. 가슴께까지는 뻗을 듯 한 흑청색의 머리칼은 목 뒤에서 내려묶였고, 윗가슴에 얹어둔 손가락은 희고 가냘팠다. 리카드는 그녀가 손을 들어 작고 갸름한 얼굴을 부치는 것을 보고 화들짝 눈을 돌렸다. 뭔가 대꾸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말을 꺼낸 것은 그녀였다.
 
 "여기, 20264실 아닌가요? 혹시 잘못 들어온 건지……."
 "아, 저, 맞아요."
 
 미처 대비하지 못한 그의 버벅거리는 대답에 그녀의 얼굴에 엷은 짜증이 스쳤다. 순간 리카드는 영문도 모른 채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고, 곧 그런 자신에 대해 한심함을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런 리카드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어쨌든 그녀는 밝지 못한 목소리로 또 행정착오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그녀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본 뒤에야, 리카드는 왜 그의 이름 모를 동행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인지 깨달았다. 그녀가 왜 숨이 턱에 닿은 채 그의 방으로 뛰어들어와야 했는지도. 하지만 그녀는 그가 충격을 다스릴 시간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일주일동안 잘 지내 봐야죠. 이세린인데, 그 쪽은?"
 "리…리카드. 리카드 워커요."
  
 
 연회장은 만원이었다. 아마 다른 일곱 개의 연회장도 만원일 것이다. 항해 첫 날 저녁이었고, 승객들에 대한 브리핑 겸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만 이천명의 승객 거의 전원이 연회에 참석했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항해의 설렘과 신세계에 대한 동경 등을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기둥 옆에 기대선 이세린은 배경과는 아무 상관 없는 듯 보였다. 모두들 정성스레 준비한 고급 연회복을 차려입은 분위기엔 별 관심 없다는 듯 차분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남몰래 그녀를 흘낏거리며 평상복 만큼도 주인을 빛내지 못하는 자신들의 옷을 탓했다. 옷의 입장에선 억울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그런 눈빛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화상전화를 끊은 그녀는 다가오는 리카드를 발견하고 생긋 웃었다. 이세린의 옷차림을 본 리카드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며 변명했다.
 
 "처음 입어보는 거라서 좀 늦었네요. 영 어색해서."
 "잘 어울리는데 왜 그래요. 가요, 어디 좀 앉아요."
 
 이세린은 리카드의 손을 이끌고 빈 탁자로 향했다. 그 스스럼없는 태도에 리카드는 조금 놀랐다. 그의 상식으로는 대한연방 사람이 미국인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탓이다. 화성은 용서할지언정 한국은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미국인의 일반적인 국민감정이었고, 한국인들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테니까.
  
 "여행사에는 연락해 봤어요?"
 "네. 배상은 해주겠다는데, 어쩔 수 없죠. 벌써 객실 배치가 다 끝났다는데."
 "안됐네요. 크래킹도 아니고 행정착오라니, 요즘 세상에."
 "지나간 얘기는 이쯤 해요.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어차피 같이 지낼 거니까."
 
 리카드는 당황을 감추기 위해 컵을 들었다. 그저 그녀의 성격일 테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선 그렇게만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한국 여자가 처음 보는 미국 남자에게 호감을 느낄 리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제외하면.
 
 "뭐, 좋아요. 음, 아니, 좋아."
 "칫, 아직까지는 어색하네. 어떤 주제가 좋을까…화성엔 왜 가는 거야?"
 "조금 길어. 간단하게 말하면 이민인데."
 "이민? 리버티?"
 "응. 살기 편한 나라는 아닐 테지만, 아무래도 미국계니까."
 
 27년 전 화성전쟁 당시, 세계의회가 파병한 지구군의 주축을 이룬 국가는 미국이었다. 안 그래도 영세했던 리버티의 세력이 더 축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화성의회와 관련된 명분론을 제거하면 화성에서 한국을 몰아내려고 일으켰던 전쟁이었지만, 전쟁에서 지게 되자 결국 한국이 화성을 결정적으로 장악하는 데 도움만 주고 말게 된 것이다. 미국이 한국을 싫어하는 이유다.
 
 "우와, 다행이다. 방학동안 여행삼아 둘러볼 생각이었거든. 어디부터 시작할지 막막했는데, 리버티부터 시작하면 되겠네."
 
 그녀는 기쁜 듯 밝게 웃었고, 리카드는 성의껏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세계의회, 대한연방, 냉전. 그는 단어들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그것들은 지구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는 이미 지구를 떠났다.
 
 
 밤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암흑을 그렇게 불러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리카드는 그의 눈 앞에 떠오르는 것들을 꿈이라고 불러야 할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었다. 그것은 분명 꿈의 문법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가 아는 꿈이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꾸는 것이었다.
 어릴 적의 기억이었다. 당시에 대해선 추억할 것이 거의 없다고 믿었던 그로서는 조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곳은 극단적인 산업연구단지였고 미성년자의 비율은 극히 낮았다. 어쨌든 그에게도 추억할 만 한 과거라는 것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꿈은 거기에 풍부하지만 당혹스러운 감정을 덧입혀 내놓았다.
 열두 살 생일선물로 받았던 신발. 노을빛 붉은 색이 어쩐지 맛있어 보인다. 신발을 내미는 어머니의 뿌듯한 얼굴은 오렌지, 풍선, 아니…파랗게 빛나는 달. 달은 간지러웠어. 자지러질 듯 킬킬대는 달을 향해 우주선의 엔진이 불을 뿜었다.
 불, 불, 불…세상의 끝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신의 낫처럼 터져나온, 순식간에, 집어삼킨다. 사방에서 붉은 빛이 번쩍거리고, 리카드의 마음 속엔 끈적한 비명이 괸다. 귀청을 찢을 듯 울려대던 사이렌 소리는 곧 잠잠해졌다. 공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으니까. 쾅! 쾅! 그는 미친 듯이 손을 휘둘렀고, 아무도 잡지 못했다.
 친구는커녕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도시였다. 그의 삶이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는 그 날,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영원할 듯 한 동반자였으며 어떤 면에선 그의 추억이었던…그의 부모를 잃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리카드는 자신이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는 것, 아직까지도 그의 손이 미친 듯 떨리고 있다는 것, 그런 그의 침대 옆에서 이세린이 걱정스런 얼굴로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동안 리카드는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꾸…꿈이었어. 꿈."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놀라고 나서야, 그는 드디어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그렇다면 이세린의 말부터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말도 안 돼, 꿈을 그렇게 격하게 꾸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 악몽…이었으니까."
 "안되겠어. 검사좀 해 볼게. 잠깐만 기다려."
 
 맞은편의 자기 침대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카드는 이세린의 전공이 무엇일지 궁금해했다. 검사를 해 보겠다고 한 것을 보면 뇌신경학과나 신경공학과일 것이다. 그녀는 얇은 장갑을 끼고 그에게 다가섰다.
 뇌신경 기간망은 두개골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무선접속이 원칙이다. 이세린은 리카드의 머리에 손을 갖다대고 장갑의 손가락 끝에 달린 무선센서들을 이용해 그의 기간망에 접속했다. 그녀의 컨택트렌즈에 결과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세상에, 신경전달물질이……. 어때, 나아졌어?"
 "으, 응. 괜찮아."
 “다행이네. 이제 진정했으면 꿈 이야기 좀 해봐."
 
 이세린은 계속 리카드의 머리를 촉진하듯 만지며 말을 시켰다. 솔직히 리카드는 자신이 진정하게 된 것이 어두운 방 안에서 그녀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부드럽게 머리를 만져주는 탓인지 그녀의 처치로 뇌신경 기간망이 정상화된 탓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시키는 대로 한다고 손해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리카드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주선. 폭발.
 그 때는 화성전쟁으로부터 15년, 냉전의 끝자락이었다. 전쟁의 앙금과 분노를 먹고 살아가던 단체로서는 위기의식을 느낄 법 한 시기였다. 대한연방과 동아시아를 싸잡아 비난하고 신 백인우월주의를 주창하던 모 단체는 자포자기한 채 한국 선적의 우주선을 폭파시켰다. 지구궤도의 첨단산업도시 라그랑즈에서 달의 북극기지를 향하던 연락선이었고, 리카드와 그의 부모가 타고 있었다.
 
 "라그랑즈? 거긴 연구원들만 살지 않아?"
 "거의 그래. 거기에 있던 꼬마는 거의 나 하나뿐이었어."
 "그래서였구나. 왜 혼자 떠나나 했는데."
 "응…….“ 리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디로 이해하는구나."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자, 정리 끝! 기분이 어때?"
 "고마워, 말끔해졌어. 꿈 하나 때문에 괜히……."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리카드는 이세린의 얼굴에 담긴 걱정에 잠시 멈칫했다.
 
 "그거, 단순한 꿈은 아닌 거 같아. 뇌신경 기간망 간섭수준이 너무 높았어."
 "하, 하하. 그래서, 누가 내 머리에 장난이라도 쳤다는 거야?"
 "가능성 있어."
 "이세린. 그냥 별 거 아닌 습관이야. 닫고 있으면 답답하잖아. 이젠 이게 편해."
 
 잠시 리카드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세린은 한숨을 쉬며 장갑을 벗었다.
 
 "그래, 상관없겠지."
 
 
 출항 이레째, 행성간 이민선 '하늘녘'의 항해가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다. 화성의 우주항구에 도킹하기를 앞두고, 승객들은 감속의 충격에 대비해 다시 객실 안에 유폐되었다. 그동안 방 안에서 세린과 단둘이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던 리카드는 마침내 다른 승객들이 객실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객실 벽의 대형 디스플레이는 이민선의 외부 카메라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저거 봐, 보여? 올림포스 우주공항이야!"
 
 세린은 리카드를 돌아보며 외쳤다. 화면엔 원반 형태의 거대한 우주구조물이 나타나 있었다. 서기 24세기를 한 세대 앞둔 지금, 아직까지도 인류가 건설한 가장 거대한 우주구조물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올림포스 외항이었다. 2225년 화성 지구화 개조계힉이 완료된 이후 전성기엔 한 달 팔십만에 육박하는 이민객들을 받아들인, 화성의 역사나 다름없는 항구였다.
 그 아래, 올림포스 외항의 압도적인 크기때문에 낚싯줄처럼 가늘어 보이는 올림포스 우주엘리베이터 시스템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우주엘리베이터는 달의 남북극에서 적도를 향해서도 뻗어 있지만, 물자 운송과 승객 수송 등 전문적으로 분화된 대규모의 시스템을 갖춘 것은 올림포스 우주엘리베이터 뿐이다. 그 아래엔 태양게에서 가장 거대한 사화산인 올림포스 정상에 올림포스 내항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고도 25km에 위치한 올림포스 내항에서부터 화성의 지표를 향해선 공항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어, 응…멋있네. 대단해."
 
 세린은 리카드의 맥빠진 대답에 실망한 듯 했다. 물론 리카드는 세린과의 시간을 망친 디스플레이 때문에 풀죽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무슨 대답이 그래?"
 "뭐가? 아, 그냥 그렇잖아. 신기할 것도 없는데."
 
 당연히, 세린의 정신을 뺏어간 올림포스 외항을 질투하는 것도 아니었다. 세린은 몸을 돌려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고, 리카드는 시선을 돌렸다. 눈은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의 머릿속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어디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거야? 그 악몽, 계속 꾸는 거지?"
 "아, 아냐! 계속 꾸기는 무슨."
 "거짓말 하지 마. 그 정도는 검사 안 해봐도 알아."
 
 리카드는 그녀가 그저 넘겨짚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확신을 가진 것인지 궁금했다. 어느 쪽이든 그로서는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며칠 간격으로 반복되면서 그 꿈은 점점 명확하고 선명해졌다. 리카드가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은 것은 꿈이 선명해지는 만큼 거기에 실린 감정은 점점 약해졌기 때문이다.
 
 "…괜찮아, 별 거 아냐. 견딜 만 해."
 "위험하다니까. 기간망 간섭수준 좀 낮추라고 그랬잖아. 누가 일부러 접촉하는 게 아니라도, 간섭수준이 너무 높으면 그것만으로도 부담이 심해."
 "고마운데, 걱정할 필요 없어."
 
 리카드는 자신이 왜 이렇게 완강하게 거부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세린은 리카드가 자기 말을 너무 안 듣는다고 투덜거렸을 뿐,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다. 때마침 이민선이 우주공항에 도킹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만 이천명 승객이 한 번에 하선할 수는 없었다. 우주엘리베이터는 정지궤도까지 연직방향으로 수만 킬로미터를 솟아오른다. 최대한 경량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수송인원에는 한계가 있다.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려서 다시 엘리베이터에 열 시간 가까이 몸을 실은 승객들은 거의 녹초가 되어 올림포스 내항에 발을 딛었다. 하지만 내항도 그들에게 친절한 곳은 아니었다.
 올림포스 우주공항의 설계자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철부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로 결심한 듯 했다. 완전히 압도당한 지구인들은 정보화에 있어선 지구가 화성을 따라갈 수 없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정보 인프라가 지구의 반밖에 되지 않는 중력과 결합하자 지구인들은 마치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듯 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전통적인 의미의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컴퓨터가 편재하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가구와 의복, 식품을 포함해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물건에 초소형 칩이나 전자 꼬리표를 붙여서 모든 상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화성의 유비쿼터스는 조금 다른 형태였다. 뇌신경 기간망을 통해 인간의 인식체계를 뛰어넘어 직접 정보를 제공한다. 단말기가 필요없어진 것이다. 정보가 현실에 스며들어,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다. 컴퓨터가 아닌 정보 그 자체가 편재하는Uniquitous 세상.
 지구에선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실현될 수 없는 세상이다. 윤리와 보안 등의 이유로 세계의회는 중추신경계 보형물의 사용범위를 극단적으로 제한했고, 일부 국가는 이식 허가를 내주기조차 꺼렸다. 신세계의 꿈에 도취된 화성에서나 가능한 세상이었다. 리카드는 이런 화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어지러워."
 
 입을 꾹 다물고 걸음을 옮기던 세린이 내린 평가였다. 발을 옮길 때마다 근처에서 솟아나는 형형색색의 물풀 사이로 열대어가 헤엄치는 환상을 보며 복도를 걷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내뱉을 수 있는 불평이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나 봐, 멀쩡하잖아."
 "멀쩡한 게 정상은 아닌 거 같아."
 
 세린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리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그 역시도 자기 입에서 튀어나온 웃음소리가 날개를 달고 주위를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살짝 질린 상태였다.
 물론,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환호작약할 듯 한 환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보화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이다. 세린과 잠시 쉴 만 한 곳이 어디 있을까 생각한 리카드의 눈 앞에 그들이 걷고 있는 상점가의 지도가 떠올랐다. 까페를 선택한 그는 곧 상세한 추가정보와 함께 바닥에 빛의 길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리카드는 어느새 세린이 걸음을 멈춘 것을 발견했다.
 
 "왜? 그렇게 불편해? 어디 쉬었다 갈래?"
 "아니…기간망 접속을 끊어봐."
 
 리카드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세린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에 약간 불만이 섞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비도 없이 여기서 어떻게 끊어? 공인받은 정품이야, 너무 그렇게……."
 
 다음 순간, 리카드는 숨을 들이켰다.
 허공을 상대로 미끄러지듯 몸을 피한 세린은 그대로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렸고, 순식간에 뻗어나간 오른발이 커다란 호를 그렸다. 깨끗한 뒤축차기였다. 다음 순간, 귀가 찢어질 듯 한 금속음이 울렸다. 카앙!
 모든 상황이 너무 빨랐다. 리카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세린의 앞에서 지직거리며 튀어나간 사람의 형체뿐이었다. 그래픽 오류인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그 형체 때문에 리카드는 세린의 손이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물론, 그 손에 권총이 쥐어져 있는 것도.
 파앙!
 허공을 겨눈 총구에서 창백한 빛의 다발이 튀어나가자 사라졌던 형체는 머리가 터진 채 몇 미터를 날아갔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세린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총구를 돌렸다. 파앙! 다시 허공에서 형체가 튀어나갔다.
 모든 일이 벌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 남짓이었다. 리카드는 놀라지도 못한 채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시체? 상점가의 포석이 붉게 물든다. '피가 흐르지는 않았는데.' 더 이상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기 힘들다. 당연한 일이다. 환상이 편재하는Ubiquitous 세상. 이 곳에 현실은 없다.
 
 "뛰어!"
 
 누군가 리카드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세린이었다. 넘어질 듯 손목에 끌려가며, 리카드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세린의 물결치는 머리칼에서 떼지 못했다. 가녀린 몸. 지금으로선 현실보다 굳건한, 유일한.
 
 -긴급상황. 기간망 간섭을 중지합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지지직. 공항의 대처는 숨이 막히도록 빨랐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 매혹적인 환상이 모두 사라진 자리엔 미니멀리즘 양식의 금속 내장재 뿐이었다. 꿈에서 현실로 집어던져진 사람들은 도로 한복판에서 술이 깬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시야 닿는 모든 곳에 상황을 알리는 공지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공항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그들에겐 너무 먼 이야기였다. 복잡한 인파를 헤치며 달리는 그들도.
 
 "자, 잠깐! 뭐야 이거!"
 "겁먹지 마, 아까 그거 사람 아니었어!"
 "무, 무슨 소리야, 그게?! 총은 왜 갖고 있는 건데?"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리카드는 그에 대해 불평할 기력도 없었다. 이렇게 낯선 중력에선 넘어지지 않고 달려가는 것만도 힘든 일이다. 통통 튀면서도 우아하게 달려나가는 세린의 뒷모습에 끌려가며, 리카드는 계속해서 엇박자로 헛디디는 자기 다리를 저주했다. 덕분에 한참만에 세린이 그를 놓아준 뒤에도 리카드는 떨리는 무릎에 손을 짚고 숨부터 골라야 했다.
 어디로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르는 리카드로서는 그들이 어디에 와 있는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높은 천장에 널찍하게 트여 약간 조명이 부족한 듯 한 실내엔 테이블이 가득했고, 한 쪽엔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라운지인 것 같지만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 라운지에 올라올 사람은 없다.
 
 "라운지 아냐? 여긴, 켁, 뭐 하러?"
 "공항철도가 폐쇄됐잖아. 일단 숨부터 가라앉혀."
 "아니, 설명부터 해. 대체 무슨 상황이야? 총은 또 뭐야?"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면, 그기 짚어낼 수 없는 종류였을 것이다. 상기된 리카드의 눈빛을 받는 세린의 얼굴엔 흐릿한 미소만이 서려 있었다.
 
 "뭐였던 거 같은데?"
 "뭐였던 거 같냐고? 몰라, 하나도 이해가 안 돼! 공항 한복판에서 습격을 하는 사람들이나, 거기서 바로 총을 뽑아드는 너나! 사람이 아니었다고? 그럼 뭐였어?"
 "안드로이드였어. 근처 상점 소속이었겠지."
 "말도 안 돼. 전쟁이라도 하겠단 거야? 누가, 왜 그런 짓을 해!"
 
 기간망 인프라를 조작해 그 많은 사람들의 눈을 막아버린 데 이어 안드로이드 네트워크까지 해킹할 정도라면, 이미 올림포스 우주공항을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화성인들에겐 그들 경제의 탯줄이기에 앞서 역사적인 성지에 가까운 곳이다. 화성의회는 수사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어쩌면 화성의 국가들이 직접 움직일지도 모른다.
 터질 것처럼 쾅쾅대는 가슴은 아까 전의 달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리카드는 떨리는 주먹을 늘어트린 채 세린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엔 아직도 별다른 감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높아진 심박수를 걱정해 주는 듯 한 눈빛을 빼면. 그녀의 말대로 숨부터 가라앉혔으면 더 친절하게 대답해줬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꼭 알아야겠어? 상관 없는 일이잖아."
 "……상관 없는 일이라고?"
 
 한참만에 리카드의 목에 탁한 문장이 걸렸다.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다.
 
 "말려들게 한 건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 못했어. 지금이라고 딱히 짐작 가는 것도 없고."
 "거짓 말 하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정상적인 외교채널을 가진 단체라기엔 수법이 너무 투박해. 영향력이 없는 단체라기엔 너무 대담하고. 정체를 모르니 목적도 짐작이 안 가. 어떻게, 왜 나를 목표로 삼은 건지도. 너만 불안한 줄 알아?"
 "그럼,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상관 없는 일이라도, 힘이 들면……."
 
 목소리가 젖어드는 것을 깨달은 리카드는 말을 멈추고 어금니를 씹었다. 생떼를 부린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 리카드를 바라보며, 온갖 표정을 시도하던 세린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싱긋 웃었다.
 
 "리카드, 우린 7일 전에 만났어."
 
 어금니가 내려앉을 것 같다. 미소 짓는 세린은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7일짜리 만남으로 끝내고 싶지 않을 뿐인데.
 얼얼해진 턱을 열어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너무 먼 곳에 있다.
 
 "대답해 줘. 넌, 누구야?"
 "이세린. 좋았던 기억만 가져가."
 
 
 올림포스 우주공항이 위치한 고도 25km는, 사실상 우주나 다름없는 곳이다. 시스템 전체가 작동을 멈춘 이상 우주공항은 조난당한 우주선에 비해 나을 것이 별로 없었다. 해커가 공항 내부에서 접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공항측은 시민들을 쫓아내듯 대피시켰고, 때문에 리카드는 물론 이세린도 별다른 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조사를 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정보화 시스템이 작동을 멈춘데다 제대로 된 목격자도 없었으니 신원도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구인들을 가득 태운 공항철도는 화성 최초의 도시를 향했다.
 테라 루브라. 올림포스 산이 위치한 타르시스 순상고원의 기슭에 깊이 파인 계곡, 발레스 마리네리스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 굴곡이 깊었던 도시. 식민지 개척 지원본부가 위치한 세계연합정부 화성개척부의 직할령으로 건설되었던 이곳은, 화성전쟁을 거치며 초토화된 뒤에도 영세중립지로서 외교의 중심지이자 화성의 관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한달 평균 십만에 가까운 유동인구 사이에서 외교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엘리트들의 도시. 역사상 가장 화려한 거짓의 성.
 행선지가 명확한 이민객이라도 며칠은 묵게 마련인 곳이다. 우주공항은 예상치 못한 사고 때문에 발이 묶였던 승객들을 위해 수천 개의 객실을 일괄예약했다. 이민선의 객실을 따라 예약한 탓에 난감해 진 것은 리카드와 이세린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더 큰 문제도 있었다. 쿵. 리카드는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내가 소파에서 잘게. 침대가 하나야."
 "그래야겠어? 피곤해 보이는데."
 
 라운지 이후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리카드는 감정이 받치는 듯 세린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했고, 세린은 그런 리카드에게 굳이 말을 걸 정도로 잔인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리카드는 아직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여자를 어떻게 소파에서 재워. 별로 피곤하지도 않아."
 "치, 헤어질 사람이야. 여자 취급 하지 마."
 
 어쩌면 잔인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잿빛 미소를 짓는 세린에게 리카드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무, 무슨 말이 그래! 여자 취급이라니!"
 "잠깐 나갔다 올게. 안 들어오면 먼저 자, 침대 비워두지 말고."
 "그게 무슨…잠깐만! 이세린!"
 
 표백된 그녀의 미소 앞에서 문이 닫혔다. 문을 향해 발을 떼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리카드는, 곧 거친 동작으로 객실을 가로질렀다. 객실 한 면 전체를 차지하는 창을 짚은 그의 손 아래로 발레스 마리네리스가 펼쳐졌다. 그랜드 캐니언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장대한 협곡. 밝은 낮이었더라도 반대편을 보기가 쉽지 않았을 협곡은 깊은 밤의 어둠에 묻혀 끝없는 심연을 토해내고 있었다. 리카드는 한 팔을 마저 올렸다가,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창에 기대고, 머리를 묻었다.
 '좋았던 기억만 가져가.' 그 부드러운 말에, 리카드는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 말은 절대적인 이별 선언이었다. 기억은 과거의 속성이다. 세린은, 그의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대신, 과거에 묻힌 미화된 기억으로 남겠다고 말했다. 차마 그 벽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그에게, 세린은 지금, 남자와 여자라는 보편적인 관계마저도 거부했다.
 그는, 이렇게 원하는데도.
 그녀가 옳을지도 모른다. 고작 일주일 남짓한 만남과 거의 초현실적한 사고가 그와 그녀가 나눈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설익은 사랑 따위는 그녀에게는 그저 성가신 짐일 뿐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 마음이란 설명 불가능한 것 아니던가?
 
 "무슨, 상황이……."
 
 국적이나 인종 문제라면, 차라리 화를 낼지언정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는 지구의 국제관계에서 자유로운 화성인이니까. 하지만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리카드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수만 명을 수용하는 첨단산업단지라고는 하지만, 라그랑즈는 제대로 된 도시가 아닌 연구설비를 갖춘 주거시설일 뿐이었다. 그 규모의 대부분이 전 세대에 퇴역한 이민선과 군함을 개조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벽과 벽으로 가득한 네모난 세상. 오 년만에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었던 열두살 꼬마는, 달을 향하는 우주선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리카드는 그 시절을 낱낱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세월이 짓이겨 꿈처럼 흐릿해진 부분들이나 두텁게 엉겨붙은 감정들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출항 첫날같은 기억의 왜곡이나 감정의 격류는 겪지 않을 수 있다. 일주일 밤을 이어진 꿈은 그의 기억을 잘 정리된 기록영화처럼 만들어놓았다.
 방금 전의 일일텐데도, 언제 잠에 든 것인지, 어디에 누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리카드는 기억의 흐름에서 몸을 빗긴 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객관화된 기억이랄까, 이 꿈은 여전히 기묘한 데가 있었다.
 요구사항도 협상도 없이 우주선이 폭파된 이후, 리카드의 삶이란 그저 무미건조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부모와 함께 유년기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그는 세상과 겉돌며 천천히 시간을 죽여나갔다. 발 붙일 곳도, 발 붙이고 싶은 곳도 없었다. 15년 만에,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달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기 전까진.
 15년을 쌓아온 기억이 화성으로 향하던 일주일의 기억만큼도 안 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세린의 얼굴과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것이 가장 최근의 기억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뭍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새로운 등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리카드는 이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잃고 싶지 않다. 그는 의식 없이 그녀의 기억에 파묻혔다.
 그 순간, 소름끼치는 당혹이 살갗을 타고 번졌다. 그 기억들은 그의 과거가 아니었다.
 낯선 기억들이, 광포하게, 밀려들었다.
 무너져 내리듯 밀려드는 기억. 떠내려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 하다. 마치 누군가 부어 넣기라도 하는 듯, 기억들은 리카드를 곁눈질조차 하지 않은 채 쏟아져 쌓였다. 순간마다 발 딛고 선 땅이 재조립되는 듯 하다. 완전히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그는 가까스로 몇 단어를 알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지적설계론. 합목적적 설계를 통한 초월적 생명체의 창조. 완전성의 실현.
 이세린.
 
 
 횡격막이 터질 것 같다. 물에서 막 건져올린 사람처럼 그는 숨을 격하게 들이쉬었다. 머릿속 뇌막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은 느낌. 미친 듯 질주하는 기억의 잔상에 휩쓸리며, 그는 필사적으로 현실에 매달렸다. 강제로 차단당한 그의 뇌는 엄청난 충격에 맞닥트렸다. 끊어질 철길 밖으로 던져진 열차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한 초보적인 추리도 할 수 없었다. 울컥거리는 뇌는 아직도 전면 파업중이었다. 시트를 움켜쥔 손이 으스러질 듯 하다. 그는 살갗이 무한히 확장된 동물처럼 예민해진 촉각을 껴안고 헐떡였다. 그런 그의 이마에 아린 살기가 맞닿았다.
 
 "정신차려. 말해. 뭐야?"
 
 소스라친 그의 머릿속으로 단어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의 정신을 끌기에는 너무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그토록이나 그리던 낯익은 목소리였다. 리카드는 흐린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아득한 어둠 저 편에 가냘프게 떠오른 표정.
 세린은 총을 치우고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사무적인 태도였다. 그녀의 고동이 리카드의 텅 빈 머리를 채웠다. 멍하니 눈가를 적시며, 그는 위성이 두개나 되는 화성의 밤이 이렇게 어두워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화성의 달 포보스와 데이모스를 합쳐도 지구의 달에 비하면 10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리카드는 손을 들어 세린의 팔에 얹었다. 세린은 그 손을 꼭 쥐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
 
 "진실이 언제나 즐거운 건 아니지. 소감이 어때?"
 "지…진짜야? 내, 내가 본 게, 전부?"
 "출처는 모르겠어. 처음 보는 자료들도 조금 있고. 그래도 틀린 내용은 없어."
 "사람이, 아니라고? 인공생명체? 네가?"
 
 세린은 허공에 손을 저었다. 객실이 천천히 밝아지며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리카드는 그의 머릿속에 쌓인 지식과 그녀를 결합시켜보려 노력했다. 인간의 여섯 배 이상의 사고속도, 여덟 배 이상의 시청각……. 다만 한 가지, 인간이라기엔 너무 아름답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일찍 자서 모를테지만, 화성의회에서 긴급조치를 결의했어. 테라 루브라에선 뇌신경 기간망 네트워크가 해체됐지."
 "대체 그 이야기를 왜……."
 "너한테 침입한 녀석은 네트워크를 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야. 언제라도 재침입 할 수 있어. 특히 침입이 실패로 끝난 지금은."
 "……뭐?"
 "재침입당하기 전에 조치를 취하려면 시간이 없어. 질문은 해도 되는데 대답 기대하진 마."
 
 객실 반대편에서, 세린은 신경공학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
 
 "조, 조치라니? 무슨 뜻이야?"
 "…가장 좋은 방법은 기억을 없애는 거겠지."
 "아, 안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머리가 어질거린다. 리카드의 앞에 선 세린은 허리에 손을 얹고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필요는 없으니까 들어. 화성전쟁 이후 대한연방은 미국을 중심으로 결집한 세계의회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고 있지. 대한연방이 생명공학에 관한 세계법을 심각하게 위반했다는 게 밝혀지면, 미국은 28년 전 패배로 끝났던 전쟁을 다시 일으킬 수 있어. 화성이 아닌 지구에서."
 "집어치워! 세계법을 심각하게 위반했다고? 무슨 화법이 그래! 네 이야기잖아. 넌, 넌 자신마저 객관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리카드는 가쁜 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이 하얗게 세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득하다.
 
 
 이민선에서 겪었던 이상한 꿈들은, 결국 오늘을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낯선 기억을 옮겨 심고, 그의 정신을 훼손 불가능한 기억장치로 바꾸기 위해, 그의 머릿속을 조각모음하듯 깨끗이 정리해 버린 것이다. 7일간의 주의 깊은 작업. 기술에 의한 인간의 도구화는, 이처럼 당혹스러운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다시 한 번 환상으로 끌어내려진 그의 정신은 잔혹하게 난도질당했다. 장기기억과 연상 회로를 가혹하게 혹사시키며, 새로운 기억들은 장대비처럼 그의 정신 가장 깊은 곳, 무겁게 가라앉은 고요한 기억들을 찾아 얽혔다. 잊어버릴 수도, 섣불리 지울 수도 없도록.
 라그랑즈에서 5년을 보냈던 10평 남짓한 방에 실험장비들이 가득 들어찼다. 본 적도 없고 볼 일도 없었던 물건들이지만, 이제 그는 그것들의 조작방법은 물론 실험결과들도 다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동료 연구원들과 나누었던 철없는 대화는 실험내용과 결과물에 대한 브리핑이 되었다.
 그는, 아마도 이 계획의 총책임자일 듯 한 사람의 얼굴로 바뀐 부모님을 떠올리며,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이 끈끈하게 달라붙은 기억들이 회오리에 말려 올라가듯 뒤섞이면서, 그의 정신은 식별 불가능한 범벅처럼 변했다. 그는 이 손대기 힘든 혼란의 어디에 자신을 놓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기준을 찾을 수 없다. 그가 발을 딛어야 할 과거는……. 세계라는 거대한 텍스트 안에서 방위를 상실한 그는 철저하게 해체되어 방황하고 표류할 뿐이다. 주체 상실. 그는, 자신의 실존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기억들이 질주를 멈추고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도, 그에게는 단순한 객관 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혼곤히 정신을 잃었다.
 
 
 2065년부터 지금까지 222년간의 화성 지구화 개조계획에도 불구하고, 화성의 기압은 지구의 고산지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화성의 중력을 생각할 때 앞으로도 그 이상 증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빛을 산란시킬 대기도 부족한데다 빛을 반사해 줄 위성도 없는 화성의 밤은 상상하기 힘든 암흑이다.
 창밖을 내다보던 세린은 시선을 옆으로 당겼다. 그런 암흑 속에서도 리카드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던 모양이다.
 
 "정신이 들어? 일어나지 마, 누워."
 
 한 팔을 받치고 일어선 리카드는 이내 손을 이마에 갖다댔다.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일단은 막아냈어. 호텔의 무선통신망을 다운시켰으니까, 당분간은 접촉하지 못할거야. 기억을 돌려놓고 통신망 관찰하는 중이었어."
 "다 기억나. 이세린, 40년 4월 12일생. 22살이었어?"
 "아직 지우진 않았으니까.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지 마. 지금은 자는 게 제일 나아."
 
 세린은 리카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리카드는 순간 어깨를 움칫할 뿐이었지만, 손이 닿은 그 부분부터 안으로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그녀의 손이 떨어지면, 먼지처럼 풀썩 내려앉을지도 모른다.
 
 "모르겠어.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어. 너만은, 내 편이라고 믿고 싶은데,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도……."
 "정 믿지 못할 과거라면 그렇게 흘려보내. 현재를 다시 쌓아나가면 돼."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 마. 어디에 쌓으라는 거야?"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뿐이야. 기억의 조작, 훼손은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문제니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발끈해서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리카드는 단어를 곱씹으며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기억이라는 건 보존 처리된 기록사진이 아냐. 색이 바래거나 거칠게 덧칠되지. 뇌신경학적으로 회상은 단순히 기억을 인출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감정에 맞춰 강화하는 작업이야. 모든 기억은 현재의 기억이야. 기억은 원래 변해."
 "아무렇게나 말하지 마! 기억은 원래 변하는 거라고? 자신의 과거가 낯설어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영원한 의심이야! 자아라는 토대가 해체됐으니까. 나를 믿을 수 없는데 대체 뭘 믿으란 말이야!"
 "실존철학적인 명제 끌어들이지 마. 고르기아스의 명제로 대답해 줄 테니까. 네가 상정하는 그런 통일적인 자아는 오만 년 짜리 언어와 오천 년짜리 문명을 통해 진화될 수 있는 게 아냐. 정신이라는 건 결국 심리적 환상이지. 실체라기보다는."
 "무슨…소리야. '나'는 실존하는데. 인식과 사유의 주체는…최소한 실존하는데."
 "사유가 정신의 전부는 아니지. 인간의 머릿속엔, 하드웨어 안에 설치된 소프트웨어처럼 통일된 논리구조를 가진 실존적 개체가 들어 있는 게 아니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작업모듈들이 들어 있을 뿐이지. 거기서 어떤 통일성을 찾기는 어려워. 너희들은 스스로와도 갈등하는 존재니까."
 
 유물론의 세기에 들어선 지 사백 년이 지나도록 인간이 신을 버리지 못한 까닭은, 단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의 주검에 묘석을 세운 그녀에게 빈 젖꼭지를 문 인간의 옹알이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한 수치심과, 뭐라 말하기 힘든 뜨거운 감정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 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모든 것을 가져가겠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보호할 수 없어."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떠나는 그녀를 전송하기라도 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까. 상황이 급하다는 핑계로 이세린은 리카드가 눈을 뜨기 전 떠날 것을 고집했다. 반대하더라도 떠나고 말 거라는 것을 아는 리카드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묶인 채 눈을 뜬 리카드에게 남은 것은 지독한 공허와 실낱같은 어스레 뿐이었다. 깊은 푸른색 자락이 방 안에 얕게 내려앉았다.
 전문적인 수사인력을 갖춘 화성의회조차도 해커에 대해 이세린보다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날밤의 공격을 목격한 것이 그녀뿐이기 때문이다. 대한연방에서 특기밀 자료를 얻어내고, 이민선에서 사람을 해킹하고, 화성에서 우주공항을 초토화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녀는 무소불위하고 무소부재한 적과 맞서면서도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얼굴에 표정을 띄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정보채널을 틀어놓은 리카드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화성의회에 도움을 청하라고 말했다. 증거 하나가 아쉬운 그들은 공격목표였던 그를 보호할 것이다. 불필요한 기억들은 접근할 수 없도록 묶어놓을테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천천히 객실을 가로지른 리카드는 객실 창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스며든 여명이 얕게 떨린다.
 온통 우주공항과 산발적인 네트워크 테러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정보채널의 목소리는 무너진 그들의 현실을 걱정했다. 환상에 기대어 건설된 화성은 지독한 시련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환상을 긍정하는 그들에게는 새로운 현실을 쌓아올릴 힘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쌓아서라도 그들은 궤도에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화성의 아침은 새벽보다 먼저 밀려왔다. 지평선을 벗어난 태양이 부어넣는 광선이 새파란 여명을 불사른다. 지평선을 확장하며 밀려온 아침은 발레스 마리네리스의 협곡 안으로 쏟아졌다. 황금빛 빛의 조각들이 계곡을 타고 흐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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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는 제가 창작하는 자작 연대기의 이름입니다.

연대기인 만큼 주로 거시적인 문제를 다룹니다만, 실제 그 연대기 위에서 쓰여지는 소설 중에는 미시적인 생활세계 이야기도 많을 겁니다. 이 부분은 아직 써놓은 소설이 몇 개 없어서 단언하기 힘드네요.

readingfantasy.pe.kr이라던지 drwk.com같은 데서는 평균적인 분량이라 한 번에 올렸습니다만, 여기서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너무 긴 분량에 지쳐 떨어지시면 안되는 데 말입니다.

미르연작은 이세린이나 그녀와 관련된 사건을 중심으로 쓰여지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녀를 탄생시킨 연구계획 이름이 '미르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종 이름이기도 하지요.


ps.
http://blog.naver.com/24shark/90020889277
이 괴작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올려봅니다. 5월 초에, 마침내 공각기동대를 보게 된 뒤 썼던 글입니다.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해 첨언하는 것 만큼 꼴불견인 일이 어디있겠습니까마는 굉장히 전위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글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