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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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2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불꽃은 흉악한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세상을 침식해갔다. 처음에는 비명소리가 메아리 쳤다. 공명하듯 울리던 목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규칙적이고 선명해졌다. 목소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울부짖고 있었다. 진은 불꽃 속으로 미친 듯이 헤집고 들어갔다. 몸에 불이 옮겨 붙지만 개의치 않았다. 불꽃 한 가운데에는 파란 잠옷 차림의 어린아이가 주저 앉은 채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고 훌쩍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검게 타 들어가고 있는 곰 인형이. 그리고 뒤에는 이미 숯 덩어리가 되어버린 아이의 부모가 다정히 손을 잡은 채 나란히 누워있었다.
-형!
눈물로 얼룩진 어린아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꽃피우며 달려와 품에 안겼다. 진은 온 힘을 다해 어린 동생을 품에 안았다. 더 이상 놓치지 않기 위해서.
동생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너무 세게 끌어 안았기 때문일까? 진은 팔에 준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래도 동생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때 진은 깨달았다. 동생의 작은 몸이 끝부터 점점 타 들어가고 있었다.
-형!
어찌할 세도 없이. 동생은 품 속에서 시뻘건 숯 덩어리로 변해 천천히 으스러져갔다.
-진.
-진아.
메아리 치는 듯한 목소리. 불꽃 속에는 서로 손을 꽉 쥔 부부가 다 타 들어간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애타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퀭한 눈 구멍은 어디로 향 한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젠 작은 체구의 숯덩이가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형.
“테오 야!”
고통이 느껴졌다. 이번엔 진의 몸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세 사람은 왠지 슬픈 표정이었다.
불타는 광경을 봤기 때문일까.
한달 만에 꾸는 악몽이었다. 진은 몸을 일으켜 곧장 세면대로 향했다. 거울을 보자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의 사내가 생기 없는 검은 눈빛으로 마주보고 있는 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그런 꿈이나 꾸다니.”
중얼거리며 진은 땀에 절은 불쾌한 육체를 샤워실 벽에 기댄 체 레버를 돌렸다. 온도 설정을 하지 않은 탓에 시린 찬물이 피부를 때렸지만 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샤워를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진은 머리에 하얀 수건만을 얹은 채 젖은 몸을 방안으로 옮겼다. 침대 맞은 편에 마련된 양철 책상 위에는 서류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책상과 세트인 의자의 등받이에는 어제 아무렇게나 벗어둔 군복이 얹어져 있었다.
진은 물기를 닦아내고 옷을 입었다. 다시 거울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제법 말쑥해 보이는 군인이 서 있었다. 비록 눈 밑이 시커멓고 표정이 좋진 못했지만. 진은 시선을 돌리다 한 켠에 꽂아놓은 사진에 눈을 고정시켰다. 사진 속에는 단란한 가족이 서로를 껴안은 채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인상 좋은 아버지.
아름다운 어머니.
불과 몇 년 전의 자신.
말괄량이 민아.
늦둥이 태오.
진의 표정에 다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복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린 곳에는 학창 시절에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마지못해 웃고 있는 표정으로 찍힌 두 남자. 그 중 하나는 자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짧게 자른 금발과 비취 빛 눈동자에 단정한 이목구비의 소유자는 냉랭한 분위기를 풍겨대고 있었다.
“케니스.”
진은 음산한 목소리로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켰던 상대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그에 반해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어깨동무를 한 붉은 머리 소녀의 얼굴에는 장난끼 가득한 미소가 가득 했다.
호출 음이 회상을 정지 시켰다. 침대 머리맡에 붙어있는 작은 액정 모니터에서 린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일어나셨군요. 브리핑 룸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아. 그러지.”
진은 곧장 방을 나섰다. 모니터 속의 린스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브리핑 룸은 미데아 수송선의 조종실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조종실로 향하는 좁은 복도를 따라가서 오른쪽에 보이는 가장 마지막 문이 바로 브리핑 룸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어제 소동 속에서 기숙사 건물이 파괴되는 바람에 기지에서는 새로운 방을 내어줄 만한 형편이 못되었다. 그런고로 늘 그랬듯이 수송기가 숙소이자 사령부가 되었다.
문을 열었다.
브리핑 실이라고 해 봤자 대합실을 목적에 맞게 개조한 것뿐이기에 중앙에 놓인 전술탁자와 벽을 따라 놓인 의자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 좌측으로 보이는 벽면에 걸려있는 다목적 디스플레이가 전부였다. 디스플레이가 걸려있는 벽면 오른쪽으로는 검은 케이스 두 개가 쌓여있었는데 움직이지 않도록 케이블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책상으로 대신 하듯. 그 위에는 화면에 자료가 가득한 노트북이 놓여있다. 그리고 마침 그 화면에서 눈을 돌리던 린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서 오세요.”
“좋은 아침이야.”
마크가 팔짱을 낀 채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인사말을 던졌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태규는 경직된 표정으로 물었다.
“좋은 꿈 꾸셨어요?”
엔드류는 활짝 웃었다.
셋은 어째서인지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진은 목례만으로 모든 인사를 대신했다.
“표정이 안 좋은데. 악몽이라도 꾼 거야?”
다이스케가 미소 지으며 말했지만 진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순간 다이스케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마크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고 태규는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좌우로 흔들었다. 엔드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고 린스는 분위기에 다소 난감한 얼굴이었다.
“자. 다 모였으니 시작하자.”
진은 얼굴에 억지 웃음을 띄며 자리에서 일어나 린스에게 손짓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벽면에 붙어있는 디스플레이를 작동시켰다.
어제 밤. 기지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자료였다. 관제탑이 파괴되었고 네 동의 격납고 역시 파괴. 고출력 위성안테나 역시 대파되었다.
진은 위성 안테나 부분에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착륙 해 있던 미데아 수송기 역시 화를 피하지 못했다.
총 네 대의 수송기가 파괴되었으며 그 중에는 중요한 보급품을 실은 것도 있었다. 이곳에서 보급 받기로 한 MS의 부속품 역시 수송기와 함께 파괴되어버린 탓에 1호기의 수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만 했다.
활주로의 파손도 심각해 당분간 비행기의 이착륙은 불가능.
당시 경계 근무 중이었던 MS 6기 역시 대파. 그 중 사망자는 없었다.
그 뒤로 차량 손실 및 인명 피해가 나열되었다.
그리고 포획한 적의 MS역시 대파. 격납고 잔해 속에 묻힌 데다 주요부품은 다 타버렸다.
그리고 앞서 장황하게 나열 된 이 모든 파괴 행위는 어제 밤 평화로웠던 기지에 뛰어든 단 한대의 MS가 저지른 일이었다.
악취미 적인 검은 색상의 구프 커스텀.
유럽 전선에서 악명을 떨쳤던 지온의 검은 유령.
그래 이 녀석 때문이다.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잘도 그랬겠다.
진은 으스스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스크린을 주시했다. 린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설명을 계속 했다.
“정보부가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파일럿의 이름은 케니스 슈타이너. 지온 군 내부에서는 검은 기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린스가 디스플레이와 연결되어 있는 노트북을 조작하자 사진 한 장이 나타났다. 나무 위에서 원거리 렌즈로 찍은 사진 인 듯. 사진 테두리 안에는 나뭇잎들이 듬성듬성 드리워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지온 군복을 입은 금발 남성이 고개를 치켜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재수없는 눈빛이었다.
“또 저 녀석이군.”
진은 중얼거렸다.
진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비상시에는 우주복의 역할을 할 수 있게 제작된 특수한 하얀 교복을 입은 채였다. 진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았다.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거나 평소 듣고 싶었던 음악을 감상하기도 한다. 빡빡한 시간표에 쫓기는 훈련생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위성전문학교인 궤도스테이션 ‘사이드.’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주 개발에 전문화 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콜로니 공사가 세운 학교다. 그 특수성 때문에 지구 궤도에 건설된 우주스테이션을 개조해 학교로 사용했다. 많은 학생이 생활하고 있는 만큼 식당도 세 곳 정도 있었지만 진은 무엇보다 창가가 있는 상층식당을 애용했다. 한쪽 벽면이 완전히 유리 벽으로 되어있는 상층 식당은 그 너머로 보이는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백미였다.
진은 식당 안으로 발을 성큼 내딛고 자리를 둘러보았다. 텅 비다시피 한 식당의 창가 구석에는 고개를 깊게 숙인 금발 청년이 앉아있었다. 그 쪽 창가 너머로 보이는 것은 검은 우주공간과 점점이 박혀있는 별빛뿐. 진은 창가 중앙의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입장에서는 별난 녀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녀석의 이름은 케니스 슈나이더.
입학 초부터 마음이 맞지 않아 자주 언쟁을 벌이곤 했던 상대였다.
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있을 MSUV(Mobile Space utility Vehicle)실습 훈련.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교관들의 농간인지 케니스와 같은 팀을 이루게 되었다. MSV는 본래 일인용 이지만 훈련용MSUV는 이인용으로 서로 역할분담을 번갈아 가며 훈련을 하게 된다. 그런 이상 어느 정도 호흡이 맞지 않으면 좋은 점수는 기대 할 수 없었다. 진은 고민 끝에 성적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친목을 다져보기로 결심 했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식탁 위에 펼쳐둔 책에 시선을 고정시킨 금발 벽안의 사내는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도 던지지 않았다.
진은 헛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케니스의 눈길이 돌아왔다. 기분 탓인지 귀찮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진은 무시하고 입가에 자연스런 미소를 띠었다.
“여기서 보이는 지구는 참 아름답지?”
진은 지금 상황에 맞는 가장 무난하면서도 적절한 화제라고 생각했다.
“아니.”
케니스는 하찮은 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진은 약간 놀라는 척 해 보dkT다. 기대와는 달리 케니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지구에 대한 감흥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 지금 내게 지구는 아름답게 보이지만은 않아.”
케니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지구 쪽을 노려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어째서 혼자 있는 거지?”
진은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맞은편 자리에 털썩 소리 나게 앉았다. 어차피 케니스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왜 혼자 식당에 온 거지? 비슷한 이유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나랑 동급 이었나?”
“그 표현은 부적절 하군.”
케니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기분 나쁜 건 피차 마찬가지다.”
진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용건이 뭐냐?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니까. 어서 말해.”
이제서야 눈치를 챈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한 건지. 진은 그 태도에 약간 짜증을 느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다음 MSUV실습 말이다. 네가 내 파트너가 됐다.”
“알고 있다.”
“실습용 MSUV는 이인용이지. 게다가 두 사람이 힘을 합해 기계를 움직여야 해.”
“계속 해라.”
진은 진부하게 설명을 늘여놓는 자신이 왠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흡이 중요하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 조금 친하게 지내 보는 게 어때?”
이건 마치 친구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다. 진은 입밖에 뱉어놓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역시나.
케니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야기를 계속했다.
“친목을 다지지 않더라도 호흡은 완벽하다. 물론 네 실력에 문제가 없을 때의 이야기 지만 말이야.”
이건 재능이다. 진은 감탄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상대방의 기분을 뭉개버리다니.
“왜 그래 진?”
마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눈 밑에 짙은 다크 서클을 감추지 못한 진은 그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어봤다.
“아. 잠시 옛날 일이 생각나서.”
두 사람은 미데아 소송기의 격납고 안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 눈 앞에는 커다란 거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GM이라고 부르는 연방군의 주력 MS였다. 오른 쪽 어깨에는 부대 마크인 하얀 송곳니를 드러낸 늑대 얼굴이. 왼 어깨에는 4라는 검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째서인지 터부시 되는 숫자였지만 진은 그런 미신에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
GM의 외관은 RGM-79(G)를 더욱 단순화 시킨 모습으로 밋밋한 외관은 마치 공장에서 성의 없이 찍어낸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이 4호기를 직접 보는 건 이번에 두 번째였다. 하나는 이 기체를 수령해 올 때였고 두 번째가 바로 지금이었다. 4호기는 예비 기체인 만큼. 정기 점검 시를 제외 하면 국방색 천에 덥혀 단단히 고정된 채 수송기 한 켠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다. 그런데 1호기가 파손 되었고 수리 하기 위해 필요한 주요 부품을 실은 수송기는 어제 난리 속에서 파괴되어 버렸다.
4호기를 꺼내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이거. 시트 비닐도 뜯지 않았는데?”
미크는 부러운 표정으로 진을 쳐다봤다.
“농담할 기분 아니야.”
진은 오른손을 흔들어 정비반장인 반을 불렀다. 구리 빛 피부에 멋진 턱수염을 기른 신체 건장한 사내가 활짝 웃으며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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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형!
눈물로 얼룩진 어린아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꽃피우며 달려와 품에 안겼다. 진은 온 힘을 다해 어린 동생을 품에 안았다. 더 이상 놓치지 않기 위해서.
동생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너무 세게 끌어 안았기 때문일까? 진은 팔에 준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래도 동생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때 진은 깨달았다. 동생의 작은 몸이 끝부터 점점 타 들어가고 있었다.
-형!
어찌할 세도 없이. 동생은 품 속에서 시뻘건 숯 덩어리로 변해 천천히 으스러져갔다.
-진.
-진아.
메아리 치는 듯한 목소리. 불꽃 속에는 서로 손을 꽉 쥔 부부가 다 타 들어간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애타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퀭한 눈 구멍은 어디로 향 한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젠 작은 체구의 숯덩이가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형.
“테오 야!”
고통이 느껴졌다. 이번엔 진의 몸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세 사람은 왠지 슬픈 표정이었다.
불타는 광경을 봤기 때문일까.
한달 만에 꾸는 악몽이었다. 진은 몸을 일으켜 곧장 세면대로 향했다. 거울을 보자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의 사내가 생기 없는 검은 눈빛으로 마주보고 있는 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그런 꿈이나 꾸다니.”
중얼거리며 진은 땀에 절은 불쾌한 육체를 샤워실 벽에 기댄 체 레버를 돌렸다. 온도 설정을 하지 않은 탓에 시린 찬물이 피부를 때렸지만 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샤워를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진은 머리에 하얀 수건만을 얹은 채 젖은 몸을 방안으로 옮겼다. 침대 맞은 편에 마련된 양철 책상 위에는 서류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책상과 세트인 의자의 등받이에는 어제 아무렇게나 벗어둔 군복이 얹어져 있었다.
진은 물기를 닦아내고 옷을 입었다. 다시 거울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제법 말쑥해 보이는 군인이 서 있었다. 비록 눈 밑이 시커멓고 표정이 좋진 못했지만. 진은 시선을 돌리다 한 켠에 꽂아놓은 사진에 눈을 고정시켰다. 사진 속에는 단란한 가족이 서로를 껴안은 채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인상 좋은 아버지.
아름다운 어머니.
불과 몇 년 전의 자신.
말괄량이 민아.
늦둥이 태오.
진의 표정에 다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복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린 곳에는 학창 시절에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마지못해 웃고 있는 표정으로 찍힌 두 남자. 그 중 하나는 자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짧게 자른 금발과 비취 빛 눈동자에 단정한 이목구비의 소유자는 냉랭한 분위기를 풍겨대고 있었다.
“케니스.”
진은 음산한 목소리로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켰던 상대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그에 반해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어깨동무를 한 붉은 머리 소녀의 얼굴에는 장난끼 가득한 미소가 가득 했다.
호출 음이 회상을 정지 시켰다. 침대 머리맡에 붙어있는 작은 액정 모니터에서 린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일어나셨군요. 브리핑 룸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아. 그러지.”
진은 곧장 방을 나섰다. 모니터 속의 린스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브리핑 룸은 미데아 수송선의 조종실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조종실로 향하는 좁은 복도를 따라가서 오른쪽에 보이는 가장 마지막 문이 바로 브리핑 룸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어제 소동 속에서 기숙사 건물이 파괴되는 바람에 기지에서는 새로운 방을 내어줄 만한 형편이 못되었다. 그런고로 늘 그랬듯이 수송기가 숙소이자 사령부가 되었다.
문을 열었다.
브리핑 실이라고 해 봤자 대합실을 목적에 맞게 개조한 것뿐이기에 중앙에 놓인 전술탁자와 벽을 따라 놓인 의자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 좌측으로 보이는 벽면에 걸려있는 다목적 디스플레이가 전부였다. 디스플레이가 걸려있는 벽면 오른쪽으로는 검은 케이스 두 개가 쌓여있었는데 움직이지 않도록 케이블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책상으로 대신 하듯. 그 위에는 화면에 자료가 가득한 노트북이 놓여있다. 그리고 마침 그 화면에서 눈을 돌리던 린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서 오세요.”
“좋은 아침이야.”
마크가 팔짱을 낀 채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인사말을 던졌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태규는 경직된 표정으로 물었다.
“좋은 꿈 꾸셨어요?”
엔드류는 활짝 웃었다.
셋은 어째서인지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진은 목례만으로 모든 인사를 대신했다.
“표정이 안 좋은데. 악몽이라도 꾼 거야?”
다이스케가 미소 지으며 말했지만 진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순간 다이스케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마크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고 태규는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좌우로 흔들었다. 엔드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고 린스는 분위기에 다소 난감한 얼굴이었다.
“자. 다 모였으니 시작하자.”
진은 얼굴에 억지 웃음을 띄며 자리에서 일어나 린스에게 손짓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벽면에 붙어있는 디스플레이를 작동시켰다.
어제 밤. 기지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자료였다. 관제탑이 파괴되었고 네 동의 격납고 역시 파괴. 고출력 위성안테나 역시 대파되었다.
진은 위성 안테나 부분에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착륙 해 있던 미데아 수송기 역시 화를 피하지 못했다.
총 네 대의 수송기가 파괴되었으며 그 중에는 중요한 보급품을 실은 것도 있었다. 이곳에서 보급 받기로 한 MS의 부속품 역시 수송기와 함께 파괴되어버린 탓에 1호기의 수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만 했다.
활주로의 파손도 심각해 당분간 비행기의 이착륙은 불가능.
당시 경계 근무 중이었던 MS 6기 역시 대파. 그 중 사망자는 없었다.
그 뒤로 차량 손실 및 인명 피해가 나열되었다.
그리고 포획한 적의 MS역시 대파. 격납고 잔해 속에 묻힌 데다 주요부품은 다 타버렸다.
그리고 앞서 장황하게 나열 된 이 모든 파괴 행위는 어제 밤 평화로웠던 기지에 뛰어든 단 한대의 MS가 저지른 일이었다.
악취미 적인 검은 색상의 구프 커스텀.
유럽 전선에서 악명을 떨쳤던 지온의 검은 유령.
그래 이 녀석 때문이다.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잘도 그랬겠다.
진은 으스스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스크린을 주시했다. 린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설명을 계속 했다.
“정보부가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파일럿의 이름은 케니스 슈타이너. 지온 군 내부에서는 검은 기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린스가 디스플레이와 연결되어 있는 노트북을 조작하자 사진 한 장이 나타났다. 나무 위에서 원거리 렌즈로 찍은 사진 인 듯. 사진 테두리 안에는 나뭇잎들이 듬성듬성 드리워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지온 군복을 입은 금발 남성이 고개를 치켜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재수없는 눈빛이었다.
“또 저 녀석이군.”
진은 중얼거렸다.
진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비상시에는 우주복의 역할을 할 수 있게 제작된 특수한 하얀 교복을 입은 채였다. 진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았다.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거나 평소 듣고 싶었던 음악을 감상하기도 한다. 빡빡한 시간표에 쫓기는 훈련생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위성전문학교인 궤도스테이션 ‘사이드.’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주 개발에 전문화 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콜로니 공사가 세운 학교다. 그 특수성 때문에 지구 궤도에 건설된 우주스테이션을 개조해 학교로 사용했다. 많은 학생이 생활하고 있는 만큼 식당도 세 곳 정도 있었지만 진은 무엇보다 창가가 있는 상층식당을 애용했다. 한쪽 벽면이 완전히 유리 벽으로 되어있는 상층 식당은 그 너머로 보이는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백미였다.
진은 식당 안으로 발을 성큼 내딛고 자리를 둘러보았다. 텅 비다시피 한 식당의 창가 구석에는 고개를 깊게 숙인 금발 청년이 앉아있었다. 그 쪽 창가 너머로 보이는 것은 검은 우주공간과 점점이 박혀있는 별빛뿐. 진은 창가 중앙의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입장에서는 별난 녀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녀석의 이름은 케니스 슈나이더.
입학 초부터 마음이 맞지 않아 자주 언쟁을 벌이곤 했던 상대였다.
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있을 MSUV(Mobile Space utility Vehicle)실습 훈련.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교관들의 농간인지 케니스와 같은 팀을 이루게 되었다. MSV는 본래 일인용 이지만 훈련용MSUV는 이인용으로 서로 역할분담을 번갈아 가며 훈련을 하게 된다. 그런 이상 어느 정도 호흡이 맞지 않으면 좋은 점수는 기대 할 수 없었다. 진은 고민 끝에 성적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친목을 다져보기로 결심 했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식탁 위에 펼쳐둔 책에 시선을 고정시킨 금발 벽안의 사내는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도 던지지 않았다.
진은 헛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케니스의 눈길이 돌아왔다. 기분 탓인지 귀찮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진은 무시하고 입가에 자연스런 미소를 띠었다.
“여기서 보이는 지구는 참 아름답지?”
진은 지금 상황에 맞는 가장 무난하면서도 적절한 화제라고 생각했다.
“아니.”
케니스는 하찮은 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진은 약간 놀라는 척 해 보dkT다. 기대와는 달리 케니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지구에 대한 감흥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 지금 내게 지구는 아름답게 보이지만은 않아.”
케니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지구 쪽을 노려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어째서 혼자 있는 거지?”
진은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맞은편 자리에 털썩 소리 나게 앉았다. 어차피 케니스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왜 혼자 식당에 온 거지? 비슷한 이유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나랑 동급 이었나?”
“그 표현은 부적절 하군.”
케니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기분 나쁜 건 피차 마찬가지다.”
진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용건이 뭐냐?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니까. 어서 말해.”
이제서야 눈치를 챈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한 건지. 진은 그 태도에 약간 짜증을 느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다음 MSUV실습 말이다. 네가 내 파트너가 됐다.”
“알고 있다.”
“실습용 MSUV는 이인용이지. 게다가 두 사람이 힘을 합해 기계를 움직여야 해.”
“계속 해라.”
진은 진부하게 설명을 늘여놓는 자신이 왠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흡이 중요하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 조금 친하게 지내 보는 게 어때?”
이건 마치 친구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다. 진은 입밖에 뱉어놓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역시나.
케니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야기를 계속했다.
“친목을 다지지 않더라도 호흡은 완벽하다. 물론 네 실력에 문제가 없을 때의 이야기 지만 말이야.”
이건 재능이다. 진은 감탄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상대방의 기분을 뭉개버리다니.
“왜 그래 진?”
마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눈 밑에 짙은 다크 서클을 감추지 못한 진은 그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어봤다.
“아. 잠시 옛날 일이 생각나서.”
두 사람은 미데아 소송기의 격납고 안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 눈 앞에는 커다란 거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GM이라고 부르는 연방군의 주력 MS였다. 오른 쪽 어깨에는 부대 마크인 하얀 송곳니를 드러낸 늑대 얼굴이. 왼 어깨에는 4라는 검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째서인지 터부시 되는 숫자였지만 진은 그런 미신에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
GM의 외관은 RGM-79(G)를 더욱 단순화 시킨 모습으로 밋밋한 외관은 마치 공장에서 성의 없이 찍어낸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이 4호기를 직접 보는 건 이번에 두 번째였다. 하나는 이 기체를 수령해 올 때였고 두 번째가 바로 지금이었다. 4호기는 예비 기체인 만큼. 정기 점검 시를 제외 하면 국방색 천에 덥혀 단단히 고정된 채 수송기 한 켠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다. 그런데 1호기가 파손 되었고 수리 하기 위해 필요한 주요 부품을 실은 수송기는 어제 난리 속에서 파괴되어 버렸다.
4호기를 꺼내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이거. 시트 비닐도 뜯지 않았는데?”
미크는 부러운 표정으로 진을 쳐다봤다.
“농담할 기분 아니야.”
진은 오른손을 흔들어 정비반장인 반을 불렀다. 구리 빛 피부에 멋진 턱수염을 기른 신체 건장한 사내가 활짝 웃으며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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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그런데 아직도 '유령' 이란 MS가 뭘지 참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