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병사 GM

“이제 편안했던 시간은 안녕 인가.”
마크는 늘어지는 목소리로 탄식 했다. 군인답게 짧게 자른 머리카락 아래 이마에는 수심 때문에 생긴 주름 세 개가 기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명령이니 어쩔 수 없죠.”
호버 트럭의 측면 해치에서 얼굴만 삐죽 내민 린스가 말했다. 그녀는 오늘 출격에 있었던 전투 기록을 정리 중 이었다.
“MS는?”
진은 물었다. 평소 때라면 나무를 베어내고 만든 공간에 세기의 RGM-79G가 해치를 연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어 비번인 병사들이 구리빛 상체를 드러낸 채 족구를 즐기고 있었다.
“전부 미데아에 실어 뒀습니다. 태규 씨가 수고해 줬습니다.”
“그 녀석은 항상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한다니까.”
“그건 빈둥거리기만 하는 누구 씨 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나불대던 마크를 향해 린스가 고양이처럼 눈을 치켜 뜨고 쏘아 붙이자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이거. 나 미움 받고 있었구먼.”
마크는 시원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항상 이런 식 이었다. 하지만 서로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지금까지는 없었다.
“이것 봐 진. 이동 전 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어디서 한잔 어때?”
진의 어깨에 무게가 실렸다. 마크의 팔이 진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마치 눈치 보듯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였다. 기지 내에는 통나무 집을 개수해서 만든 작은 술집이 하나 있었다.
“좋아.”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속에는 아직 앙금이 남아 있었다. 이걸 시원하게 닦아버릴 수 있는 건 알코올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은 마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 한 뒤 호버 트럭에 올라 탔다. 한쪽 측면을 가득 메운 콘솔이 눈에 들어왔다. 깨끗이 치워져 있는 작은 선반 위에는 꼬불꼬불한 선이 연결되어 있는 고감도 헤드폰이 놓여있었다. 그 콘솔은 파시소나의 컨트롤 장비였다. 그 맞은편 장소에 마련된 작은 접이 식 책상 위에서는 한쪽머리를 짚은 채 시선을 책상 위로 떨어뜨리고 있는 린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깨에 닿는 갈색 머리카락에 단정한 이목구비, 가녀린 턱 선이 어깨 너머로 얼핏 보였다.
“아직도 바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어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은 주먹을 쥐어 입에 갔다 대고는 큰소리로 헛기침을 두 번 했다. 그제서야 아래를 쳐다보고 있던 린스의 고개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린스는 허겁지겁 일어나려고 한 탓에 하마터면 천장에 붙어있는 선반에 머리를 부딪힐 뻔 했다. 진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했다. 책상 위에는 붉은 하드 커버로 쌓여있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 옆을 한 자루의 짧은 연필이 굴러갔다.
“일은 아직인 모양이군.”
그녀는 대답을 주저했다.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하도록 해. 태규가 돌아오면. 통나무 집으로 오라고 말해 줘. 같이 오면 더 좋고.”
진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쳤다.
“예.”
린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뻣뻣하게 경례를 붙였다. 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경례에 답하곤 호버 트럭에서 내렸다. 밖은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지평선에 걸쳐있는 해가 하늘과 구름들을 자주 빛 파스텔 톤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진은 문득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남아있던 마크는 어느 틈인가 멀리 철조망이 쳐져 있는 곳에 가 있었다. 그 너머는 기지의 격납고가 즐비해 있었다.
“뭘 그렇게 넋을 빼놓고 보는 거야?”
진은 마크의 옆에 나란히 서며 물었다.
“바로 저거야.”
마크가 턱짓을 하자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일어섰다. 귀에 익은 구동음. 하지만 GM과는 다르게 힘이 넘쳤다. 길다란 그림자를 기울인 이 거인은 파란 몸체에 각진 팔다리가 붙어 있었다. 얼굴에는 사람의 눈과 비슷한 트윈 아이가 번뜩이고 있었고 그 위에는 V자로 뻗은 안테나가 붙어 있었다.
진은 자신도 모르게 철조망을 붙잡았다.
“저게 뭔지 알겠어?”
“건담 이다!”
진은 저 기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저 기체의 정식 제식 명은 RX-79G 건담. 다른 이름으로는 육전형 건담 이라고 부르는 고성능 기체였다. 진의 부대는 얼마 전 두 기의 RX-79G를 이송하는 임무에 투입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기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선두에 선 육전형 건담을 필두로 나머지 2기의 육전형 건담이 뒤따랐다. 건담 만으로 이루어진 편성. 그들이 왼 팔에 차고 있는 방패에는 ‘08’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08소대.”
진은 작게 뇌까렸다. 오늘 아침에 새로 대장이 왔다는 부대였다.
“출격인 모양이군.”
“뭐. 이제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너는 설마 그 포화 속으로 다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마크는 다시 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이곳 임무에서 물러 났으니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 말에 마크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행운을 빌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좋아. 행운이야!”
마크는 길게 여운이 남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08소대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행운이야!”
진은 같이 길게 소리쳤다.
그래. 그들에게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하기를!

통나무 집은 소란스럽기 보다는 한산 했다. 병사들이 많이 몰릴 저녁 시간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좀 전부터 전선에서 진행중인 전투 탓에 일반 병사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구석진 테이블에 나이 많은 키 작은 장교 하나가 턱을 괴고 졸고 있을 뿐이었다. 유난히 긴 코에 벗겨진 머리를 카우보이 모자로 감추고 다니는 유별난, 그리고 술을 무척 좋아하는 닉터드 대위였다. 그가 코로 숨을 내쉴 때마다 길게 자란 코털이 파르르 흔들렸다. 그라면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술집에서 졸면서 앉아 있는 것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하고 또 자유 분방한 사람이었다.
그를 제외 하고는 유난히 소란스러운 사람이 둘. 호버 트럭을 맡고 있는 다이스케 준위와 대기 파일럿인 앤드류 였다. 짧은 검은 머리카락에 샤프한 이미지를 풍기는 다이스케 준위는 얼굴 만면에 짓궂은 미소를 띄우며 금발벽안 청년의 목을 팔로 휘감은 채 마구 흔들고 있었다.
“변함없이 시끄러운 녀석 들이군.”
마크는 어이없다는 듯 내뱉고는 그들 사이에 합류해 버렸다.
“모두들 그쯤 해둬!”
진은 소리치지만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단지 다이스케 만이 고개를 잠시 치켜들곤 ‘어어. 대장 왔어.’라고 말하곤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다이스케는 벌써 얼큰하게 취한 모양 이었다. 진은 기가 막혔다. 진은 그들의 틈에 끼어있는 앤드류의 어깨 죽지를 붙잡고 강하게 잡아 당겼다. 마치 코르크 마개를 빼는 듯한 느낌으로 쏙 빠져 나온 앤드류는 벌써 기진 맥진한 표정이었다.
“또 강제로 술을 먹였군.”
진은 앤드류를 닉터드 대위의 테이블에 앉힌 뒤 엎드리게 했다. 그는 곧장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진은 외투를 벗어 그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대장이 몰라서 그러는데. 그 녀석 술을 먹으면 귀여워 진다고.”
“취한 주제에 그런 말을 잘도 내뱉는군.”
다이스케는, 마크와 더불어 지나치게 유쾌했다. 그 탓에 종종. 남이 꺼리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지껄이곤 했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빈축을 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진으로서는 신기할 노릇 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격한 감정을 품에 담고 있을 뿐 겉으로 표출하지 않을 뿐 인지도 몰랐지만 다이스케 에게는 그것 조차 아무런 의미 없게 만드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진이 잔을 내밀자 다이스케는 말없이 술을 따랐다. 얼음이 든 작은 술잔에 갈색 투명한 액체가 반쯤 차 올랐다.
“다음 작전 사항이 결정 되었다며.”
다이스케의 물음에 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취해버리면 위험하지 않은 일도 위험해져 버려. 부하가 음주 운전 하다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듣기 싫으니까. 적당히 마셔.”
진의 말에 다이스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내 실력은 발군 이라고. 겨우 알코올 따위에. 아 그렇다고 해서 가져갈 필요 까지는 없잖아.”
마크가 술병을 품에 안아버리자 다이스케는 바둥거리며 항의했다. 그 모습이 웃겨 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제가 하게 되는 군요.”
호버 트럭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건 태규 였다. 그는 술자리에 합류 하기는 했지만 잔을 들지는 않았다. 그는 스스로도 뒤처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다이스케가 운전을 하겠다고 악을 썼지만 술 취한 운전병에게 운전대를 맞기는 멍청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결국 마크가 그를 끌고 미데아로 들어갔고 진은 호버 트럭의 조수석에 앉았다. 이제 호버 트럭만 미데아에 실으면 이동 준비는 끝난다. 태규가 가속 페달을 밟자 호버 트럭은 소음과 함께 몸을 떨며 앞으로 나아갔다. 숲을 베어내고 만든 공터에 착륙 해 있는 거대한 수송기가 눈에 들어왔다. 부대의 야전 사령부 이자 수송기인 미데아 였다. 미데아는 거대한 컨테이너를 품에 안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상부에 나란히 붙어있는 네 개의 거대한 제트엔진과 주 날개에 하나씩 붙어있는 보조 엔진에서 발생하는 추력으로 이륙한다. 속력 보다는 수송량을 중시했기 때문에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아 적에게 격추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 연방군은 MS 및 각종 군사물품의 소송에 이 거대 수송기를 이용하고 있었다. 진이 소속된 부대에 배치된 미데아는 MS 수송 전용으로 약간의 개수를 거친 모델로 평범한 미데아에 비해 출력이나 수납 용량이 조금 증가한 모델 이었다. 미데아는 이륙 준비를 완전히 마친 듯 엔진에서 시끄러운 소음을 마구 뱉어내고 있었다. 진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다음 임무에 관한 브리핑은 언제 합니까?”
태규는 지상과 컨테이너 사이의 턱을 부드럽게 타넘기며 물었다. 진은 그의 변함없는 표정을 잠시 살피다 입을 열었다.
“브리핑은. 현지에서 이뤄질 예정이야. 푹 쉬어 두라고.”
태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데아의 수송용 컨테이너 안은. 마치 거대한 창고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복잡한 장비들이 고정된 채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며 대부분의 자리는 트레일러에 고정된 상태로 실려있는 RGM-79G가 차지하고 있었다. 진은 호버 트럭에서 내려 고정용 줄을 감는 것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