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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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감상, 딴지 모두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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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로센버그-헤인 동부 3지역
헬멧은 이미 옆에 벗어놓은 상태였고, 군복 대신 (모양새가 맘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좀 더 통풍이 잘 되는 환자복을 입고 있으려니 오랜만에 제대로 쉬어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누워 있는 것이 지겨워지자, 다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저 시계의 숫자가 변하는것만 멍하니 지켜 보다가 영 견디기 힘들어져 다시 헬멧을 쓰고 해방연합 채널에 접속했다.
해방연합 채널은 분명히 ‘해방군’채널과 달랐다. 해방군 채널은 나와 같은 ‘전쟁중’인 병사들에게만 공개되는 채널이었고,(그러나 용도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해방연합 채널은 해방연합에 가입한 국가들에게 추가로 제공되는 하나의 채널일 뿐이었지만, 요즘은 국영채널에 맞먹는 사용율을 보이고 있었다.
전쟁중이라 많이 시끄러운 오락 프로그램들은 좀 사라진 듯 하였으나, 그래도 아직 드라마라던가 토론 프로그램등은 예전처럼 계속 제공되고 있는 듯 했다. 그나마도 분위기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처럼 화기애애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참동안 못 보던 프로그램들을 다시 보게 되니 집에 돌아온 것 같아 위안이 많이 되었다.
혹시나 하고 해방연합 채널쪽의 내 계정의 메시지함을 열어보려 했지만, 역시 해방군이 통제해놓은 상태라 들어갈 수 없었다. ‘해방군인들에게 언론매체를 이용할 자유는 있지만 그 때문에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로, 해방군 쪽의 메시지함만 이용할 수 있게 통제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영상이나 소리는 안 되고 오로지 글로서만 가족들과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훈련소에서 화상통신으로 보았던 가족들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라준 덕분에 불안하지는 않았다.
기지 바깥에서, 뭔가가 떨어져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서 놀라 갑자기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동요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환청이었다. 중앙군의 포격에 눈앞에서 갈가리 찢겨 나가는 아군 병사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좀 평온하던 기분이 갑자기 우울해졌다.
어쨌든, 오늘까지는 푹 쉬어야 어깨의 상처가 최소한 조금이라도 아물 것이고- 다시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되려면, 내일까지는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진 오헨- 테르 제 9 주민거주지
여태껏 맞닥뜨린 횟수는 몇 번 없었지만, 그 적은 경험만으로 일단 어느정도 로봇들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로봇들은 (적어도 우리가 여태까지 만나왔던 기종들은)얼굴 부분이 약하고 또 느렸다. 뒤쪽에서 습격하면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까지 적어도 2초는 걸리는 것 같았으므로, 그동안에 충분히 뒷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즉, 어쩌다 만나게 되어도 뒷치기만 제대로 하면 우리가 손해를 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었다.
탄약 잔량 표시기가 작동하지 않으니 다들 불안해하며 재장전을 하거나 총을 흔들어 보고 있었다. 물론 총을 흔들어 본다고 해서 총알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을 턱이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쉴새없이 움직이는 것이 긴장을 푸는 데는 도움이 되는 듯 싶었다.
계속 통로의 방들을 하나 하나 찾아다니다가, 큰 방을 하나 발견하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로봇들이 휩쓸고 갔는지 바닥에는 시전대 대원들의 시체와 총들이 널려 있었고 바닥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피가 말랐는지 끈적끈적하지는 않았다.
일단 아직 쓰이지 않은 탄창들을 회수하고 쓰러져있던 소대장과 통신담당병의 시체에서 상황 기록칩을 빼냈다. 그리고 주위를 계속 수색하다가, 천장을 덮고 있는 판자들 중 하나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일제히 그쪽을 향해 총을 겨눴다. 다행히도 판자 너머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42중대 2소대 소속 미히그 사잔입니다. 쏘지 마십시오!”
“우리는 42중대 6소대입니다. 내려오십시오.”
소대장이 판자쪽을 향해 말했다. 이윽고 판자가 옆으로 치워지더니 스무 명 가량 되는 병사들이 천장 위쪽의 좁은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수가 많았던 것이 매우 다행스러웠다. 그들은 아직 부상병은 없는 듯 했고, 각자 무기도 챙기고 있어서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 소대장이 대뜸 물었다. 미히그가 대답했다.
“다른 넓은 곳에서 로봇들과 교전하다가 점점 밀려나 결국 지하 통로를 통해 후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출구가 있는 이쪽 방까지 오게 되었는데, 우리가 이곳으로 오기 바로 전에 로봇들이 이곳에 있던 아군들을 공격하고 빠져나간 듯 싶습니다. 빨리 내려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로봇들이 다시 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 일단 상황파악을 위해 저 통로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20명 정도의 병사를 더 얻었다는 것은 전력이 굉장히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저들은 아직 전자마비탄을 몇 개 더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헬멧과 총의 전자장비가 아직 맛이 가지 않은 상태여서 우리 소대원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직 다른 아군과 교신이 되지 않고 있으니, 일단 다른 곳을 계속 수색하는 것이 좋겠다. 정규군이 올 시간도 거의 다 되었을 테니까, 조금만 더 버티자.”
소대장이 좀 안심이 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그대로 우리는 다른 통로를 계속 찾아보다가, 2소대원들 중 통신병인 듯한 병사가 갑자기 들떠서 소리쳤다.
“교-교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여, 여기는 시전대 제 42중대 2소대! 응답하라! 현재 이 교신을 수신중인 자는 소속을 밝히라! 남군연- 지역방위군- 374대대! 오! 살았다! 소대장님- 지역방위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20분내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제 위로 올라가서-”
그 소대원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부터는 정규군과 함께 로봇들을 상대하게 될 테니 전투 상황이 훨씬 더 나아질 것이었고, 어쩌면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잠깐- 무거운 쇳소리가 들렸다! 모두 엄폐!”
소대장이 갑자기 긴장된 목소리로 지시하자 모두 일제히 입을 다물고 각자 엄폐물 뒤로 숨었다. 이윽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통로쪽에서 로봇 열 대 정도가 오는 것이 개머리판에 달린 거울을 통해 보였다.
“사격 준비- 2소대는 소지하고 있을 경우 투폭탄을 3초에 맞춰놓고 던진다!”
소대장이 다시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다들 침착했다. 로봇들이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소대장의 손이 내려가자 수많은 총알들이 로봇들을 형편없는 고철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지상에서는 이제 아침이라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방금 막 들어온 정규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로봇들을 아주 쉽게 제압해 나갔다. 경전차에 중전차까지 가세해 포화를 쏟아붓고 있었고, 보병들의 무장도 우리보다는 강력한 총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일단은 살았다.
모청- 지무 서부 제 57 방어선기지
데마이어가 흠칫 놀라 헬멧을 거의 집어던지다시피 벗었다. 그리고는 전체 강제통보가 이어졌다.
“해방군의 바이러스가 이 기지에 확산중이다- 모든 중대원들은 통신선을 제외한 모든 전자장비의 전원을 잠시 꺼 놓도록 한다!”
“아, 아-짜증나네. 갑자기 화면이 깨지면서 이상한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리더라구! 해방군 전산망이나 중앙군 전산망이나 다 허술하구만! 어떻게 바이러스가 끼어 들어온건지-”
“잠자코 있어.”
내가 끼어들었다.
“왜?”
“우리가 이곳으로 오면서 바이러스가 우리 헬멧이나 우리가 타고 온 트럭에 묻어왔을 가능성이 있어. 안그래도 우릴 보는 눈초리가 안 좋은데, 떠들어 봐야 우릴 향한 의심만 커질 뿐이야.”
“하긴, 교신이 안 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이멜반에 심어놨던 바이러스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해방군 녀석들이 골탕을 좀 제대로 먹으면 좋겠는데.”
데마이어가 내 말에 수긍하는 듯 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데 다시 전체 강제통보가 방송되었다.
“모두 전투준비를 확실히 하도록! 내일이면 해방군이 이곳에 도착한다! 통제관련 암호를 모두 변경하니 모든 중대원들은 40분 내에 확인한다!”
“미치겠구만. 좀 쉬어보는가 했더니 이번엔 해방군이 쳐들어와! 우린 재수가 지지리도 없는가봐. 청, 이번엔 방어전투라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데- 이번에도 AAR-17을 쓸 셈이야? 혼자 총을 수리한답시고 도망갈 핑계대려고 가지고 있는건 아니고?”
데마이어가 비꼬았다. 내일이 그다지 두렵지 않은 것 같았다.
“SMC를 쓸 거야. 녀석들이 가까이 올 때는 권총으로 이마에 한 발씩만 박아주면 될 테고.”
“넌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받으니까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재미가 없잖아- 내가 아직도 농담따먹기 할 친구를 못 사귄게 참 신기하다. 설마 너, 방금 했던 그 말을 농담이랍시고 한 것은 아니지?”
데마이어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푸념했다.
“그랬나.”
-5월 22일
그나마 하루만이라도 제대로 쉬었더니 피곤이 많이 풀렸다. 이 기지에 있던 모든 병사들은 일어나자마자 각자 무기를 들고서 집합해 있었다. 무인드론도 몇 대 보였다.
“넌 평소에도 방송을 거의 안 보는 인간이니, 처음으로 남군연이 적이 생겼다는 소식도 몰랐겠지?”
데마이어가 내 옆에서 같이 멍하니 서 있다가 대뜸 말을 꺼냈다.
“남군연이 적이 생겼다니, 어떤 정신나간 테러단체가 남군연에-”
남군연은 그 세력이 해방군에 거의 맞먹는 군사단체라, 테러단체나 국가들은 남군연을 적대시 한 일이 거의 없었다. 중앙국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남군연에게 대들 만한 단체나 나라는 내 기억에는 없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크래커가 테르 공장지대를 점령해서 무시무시한 살인 로봇들을 쏟아내고 있다는군. 처음에는 시전대 정도로 간신히 제압을 했던 모양인데, 로봇들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서 결국 정규군을 투입시켰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위대한 남군연 본부의 대변인이라는 작자가 하는 말이 ‘로봇들의 소탕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분석되었다’였어.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일지 상상이 가?”
“상상하기 싫을 수준이겠군. 아직 중앙국이나 해방군과의 연관성에 대해선 말이 없었어?”
“아직은. 그나저나, 너 방송좀 보고 살아라. 너 말야, 150년 전에도 선진국 국민들의 평균 방송 시청시간이 두 시간이나 되었다는 건 알아? 다들 바깥 소식정도는 알고 지냈다니까.”
“인터넷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중화됐어. 2000년도 초반에만 해도 이미 tv는 소식통으로서의 역할을 잃었다고.”
“쳇,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통계 이야길 꺼냈나.”
데마이어가 되려 당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해방군 공군 접근중- 아직 다른 곳에 있는 중대원들은 신속히 근처의 방호지역으로 집합하라!”
다시 강제통보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밖에서 폭음이 계속되면서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기지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방군의 폭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내 귀에는 폭음이 익숙했다. 6년 전에 중앙군 특수 침투대에 지원하여 훈련을 시작했을 때 접했던 투폭탄 폭음을 시작으로 음향식별 훈련에서 들었던 해방군과 중앙군의 갖가지 장비들의 발사음과 폭발음, 그리고 실제 임무를 수행하며 들었던 폭음 등 여러 가지 폭음들이 내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다가 총소리를 가까이서 들어도 귀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주위 소리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고, 음악만큼이나 폭음은 나에게 익숙한 소리가 되었다.
“낮고 울림이 거의 없는 폭음- DSD [Defense System Destroyer-정확도를 높이고 폭약의 약을 줄여 경량화시킨 폭탄. 한 발의 폭발범위가 좁은 대신 완파 확률을 높인 기종이다.]폭탄이로군. 그럼 위에 날아다니는 기종은 3형이나 5형 폭격기겠고.”
데마이어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음향식별 훈련에서 배웠던 것을 되뇌이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중얼거리던 데마이어는 큰 충돌음과 함께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자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건 폭탄이 아니라 폭격기가 추락한거야. 뭐, 이곳 방공망은 좀 쓸만하군.”
“해방군의 폭격기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해방군의 자주포 사격이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군이 올 것이다- 전 중대원은 방어 위치로!”
“뭐 이리 멀어? 한참 뛰어야겠네.”
데마이어가 레이더를 통해 우리가 있어야 할 방어 위치를 보고는 불평했다.
-여러분은 중앙국 정부의 만행을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오존층 발생기를 개조하여 끔찍한 대량 살상무기로 만들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번 이 일이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정복의 야욕을 버리지 못해 또다시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인류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해방군에 투항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환영할 것이며, 정의를 위해 큰 결심을 하신 여러분을 우대할 것입니다.- 해방군의 대 중앙군 선전용 프로그램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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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로센버그-헤인 동부 3지역
헬멧은 이미 옆에 벗어놓은 상태였고, 군복 대신 (모양새가 맘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좀 더 통풍이 잘 되는 환자복을 입고 있으려니 오랜만에 제대로 쉬어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누워 있는 것이 지겨워지자, 다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저 시계의 숫자가 변하는것만 멍하니 지켜 보다가 영 견디기 힘들어져 다시 헬멧을 쓰고 해방연합 채널에 접속했다.
해방연합 채널은 분명히 ‘해방군’채널과 달랐다. 해방군 채널은 나와 같은 ‘전쟁중’인 병사들에게만 공개되는 채널이었고,(그러나 용도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해방연합 채널은 해방연합에 가입한 국가들에게 추가로 제공되는 하나의 채널일 뿐이었지만, 요즘은 국영채널에 맞먹는 사용율을 보이고 있었다.
전쟁중이라 많이 시끄러운 오락 프로그램들은 좀 사라진 듯 하였으나, 그래도 아직 드라마라던가 토론 프로그램등은 예전처럼 계속 제공되고 있는 듯 했다. 그나마도 분위기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처럼 화기애애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참동안 못 보던 프로그램들을 다시 보게 되니 집에 돌아온 것 같아 위안이 많이 되었다.
혹시나 하고 해방연합 채널쪽의 내 계정의 메시지함을 열어보려 했지만, 역시 해방군이 통제해놓은 상태라 들어갈 수 없었다. ‘해방군인들에게 언론매체를 이용할 자유는 있지만 그 때문에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로, 해방군 쪽의 메시지함만 이용할 수 있게 통제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영상이나 소리는 안 되고 오로지 글로서만 가족들과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훈련소에서 화상통신으로 보았던 가족들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라준 덕분에 불안하지는 않았다.
기지 바깥에서, 뭔가가 떨어져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서 놀라 갑자기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동요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환청이었다. 중앙군의 포격에 눈앞에서 갈가리 찢겨 나가는 아군 병사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좀 평온하던 기분이 갑자기 우울해졌다.
어쨌든, 오늘까지는 푹 쉬어야 어깨의 상처가 최소한 조금이라도 아물 것이고- 다시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되려면, 내일까지는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진 오헨- 테르 제 9 주민거주지
여태껏 맞닥뜨린 횟수는 몇 번 없었지만, 그 적은 경험만으로 일단 어느정도 로봇들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로봇들은 (적어도 우리가 여태까지 만나왔던 기종들은)얼굴 부분이 약하고 또 느렸다. 뒤쪽에서 습격하면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까지 적어도 2초는 걸리는 것 같았으므로, 그동안에 충분히 뒷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즉, 어쩌다 만나게 되어도 뒷치기만 제대로 하면 우리가 손해를 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었다.
탄약 잔량 표시기가 작동하지 않으니 다들 불안해하며 재장전을 하거나 총을 흔들어 보고 있었다. 물론 총을 흔들어 본다고 해서 총알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을 턱이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쉴새없이 움직이는 것이 긴장을 푸는 데는 도움이 되는 듯 싶었다.
계속 통로의 방들을 하나 하나 찾아다니다가, 큰 방을 하나 발견하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로봇들이 휩쓸고 갔는지 바닥에는 시전대 대원들의 시체와 총들이 널려 있었고 바닥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피가 말랐는지 끈적끈적하지는 않았다.
일단 아직 쓰이지 않은 탄창들을 회수하고 쓰러져있던 소대장과 통신담당병의 시체에서 상황 기록칩을 빼냈다. 그리고 주위를 계속 수색하다가, 천장을 덮고 있는 판자들 중 하나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일제히 그쪽을 향해 총을 겨눴다. 다행히도 판자 너머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42중대 2소대 소속 미히그 사잔입니다. 쏘지 마십시오!”
“우리는 42중대 6소대입니다. 내려오십시오.”
소대장이 판자쪽을 향해 말했다. 이윽고 판자가 옆으로 치워지더니 스무 명 가량 되는 병사들이 천장 위쪽의 좁은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수가 많았던 것이 매우 다행스러웠다. 그들은 아직 부상병은 없는 듯 했고, 각자 무기도 챙기고 있어서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 소대장이 대뜸 물었다. 미히그가 대답했다.
“다른 넓은 곳에서 로봇들과 교전하다가 점점 밀려나 결국 지하 통로를 통해 후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출구가 있는 이쪽 방까지 오게 되었는데, 우리가 이곳으로 오기 바로 전에 로봇들이 이곳에 있던 아군들을 공격하고 빠져나간 듯 싶습니다. 빨리 내려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로봇들이 다시 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 일단 상황파악을 위해 저 통로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20명 정도의 병사를 더 얻었다는 것은 전력이 굉장히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저들은 아직 전자마비탄을 몇 개 더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헬멧과 총의 전자장비가 아직 맛이 가지 않은 상태여서 우리 소대원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직 다른 아군과 교신이 되지 않고 있으니, 일단 다른 곳을 계속 수색하는 것이 좋겠다. 정규군이 올 시간도 거의 다 되었을 테니까, 조금만 더 버티자.”
소대장이 좀 안심이 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그대로 우리는 다른 통로를 계속 찾아보다가, 2소대원들 중 통신병인 듯한 병사가 갑자기 들떠서 소리쳤다.
“교-교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여, 여기는 시전대 제 42중대 2소대! 응답하라! 현재 이 교신을 수신중인 자는 소속을 밝히라! 남군연- 지역방위군- 374대대! 오! 살았다! 소대장님- 지역방위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20분내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제 위로 올라가서-”
그 소대원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부터는 정규군과 함께 로봇들을 상대하게 될 테니 전투 상황이 훨씬 더 나아질 것이었고, 어쩌면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잠깐- 무거운 쇳소리가 들렸다! 모두 엄폐!”
소대장이 갑자기 긴장된 목소리로 지시하자 모두 일제히 입을 다물고 각자 엄폐물 뒤로 숨었다. 이윽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통로쪽에서 로봇 열 대 정도가 오는 것이 개머리판에 달린 거울을 통해 보였다.
“사격 준비- 2소대는 소지하고 있을 경우 투폭탄을 3초에 맞춰놓고 던진다!”
소대장이 다시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다들 침착했다. 로봇들이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소대장의 손이 내려가자 수많은 총알들이 로봇들을 형편없는 고철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지상에서는 이제 아침이라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방금 막 들어온 정규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로봇들을 아주 쉽게 제압해 나갔다. 경전차에 중전차까지 가세해 포화를 쏟아붓고 있었고, 보병들의 무장도 우리보다는 강력한 총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일단은 살았다.
모청- 지무 서부 제 57 방어선기지
데마이어가 흠칫 놀라 헬멧을 거의 집어던지다시피 벗었다. 그리고는 전체 강제통보가 이어졌다.
“해방군의 바이러스가 이 기지에 확산중이다- 모든 중대원들은 통신선을 제외한 모든 전자장비의 전원을 잠시 꺼 놓도록 한다!”
“아, 아-짜증나네. 갑자기 화면이 깨지면서 이상한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리더라구! 해방군 전산망이나 중앙군 전산망이나 다 허술하구만! 어떻게 바이러스가 끼어 들어온건지-”
“잠자코 있어.”
내가 끼어들었다.
“왜?”
“우리가 이곳으로 오면서 바이러스가 우리 헬멧이나 우리가 타고 온 트럭에 묻어왔을 가능성이 있어. 안그래도 우릴 보는 눈초리가 안 좋은데, 떠들어 봐야 우릴 향한 의심만 커질 뿐이야.”
“하긴, 교신이 안 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이멜반에 심어놨던 바이러스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해방군 녀석들이 골탕을 좀 제대로 먹으면 좋겠는데.”
데마이어가 내 말에 수긍하는 듯 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데 다시 전체 강제통보가 방송되었다.
“모두 전투준비를 확실히 하도록! 내일이면 해방군이 이곳에 도착한다! 통제관련 암호를 모두 변경하니 모든 중대원들은 40분 내에 확인한다!”
“미치겠구만. 좀 쉬어보는가 했더니 이번엔 해방군이 쳐들어와! 우린 재수가 지지리도 없는가봐. 청, 이번엔 방어전투라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데- 이번에도 AAR-17을 쓸 셈이야? 혼자 총을 수리한답시고 도망갈 핑계대려고 가지고 있는건 아니고?”
데마이어가 비꼬았다. 내일이 그다지 두렵지 않은 것 같았다.
“SMC를 쓸 거야. 녀석들이 가까이 올 때는 권총으로 이마에 한 발씩만 박아주면 될 테고.”
“넌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받으니까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재미가 없잖아- 내가 아직도 농담따먹기 할 친구를 못 사귄게 참 신기하다. 설마 너, 방금 했던 그 말을 농담이랍시고 한 것은 아니지?”
데마이어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푸념했다.
“그랬나.”
-5월 22일
그나마 하루만이라도 제대로 쉬었더니 피곤이 많이 풀렸다. 이 기지에 있던 모든 병사들은 일어나자마자 각자 무기를 들고서 집합해 있었다. 무인드론도 몇 대 보였다.
“넌 평소에도 방송을 거의 안 보는 인간이니, 처음으로 남군연이 적이 생겼다는 소식도 몰랐겠지?”
데마이어가 내 옆에서 같이 멍하니 서 있다가 대뜸 말을 꺼냈다.
“남군연이 적이 생겼다니, 어떤 정신나간 테러단체가 남군연에-”
남군연은 그 세력이 해방군에 거의 맞먹는 군사단체라, 테러단체나 국가들은 남군연을 적대시 한 일이 거의 없었다. 중앙국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남군연에게 대들 만한 단체나 나라는 내 기억에는 없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크래커가 테르 공장지대를 점령해서 무시무시한 살인 로봇들을 쏟아내고 있다는군. 처음에는 시전대 정도로 간신히 제압을 했던 모양인데, 로봇들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서 결국 정규군을 투입시켰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위대한 남군연 본부의 대변인이라는 작자가 하는 말이 ‘로봇들의 소탕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분석되었다’였어.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일지 상상이 가?”
“상상하기 싫을 수준이겠군. 아직 중앙국이나 해방군과의 연관성에 대해선 말이 없었어?”
“아직은. 그나저나, 너 방송좀 보고 살아라. 너 말야, 150년 전에도 선진국 국민들의 평균 방송 시청시간이 두 시간이나 되었다는 건 알아? 다들 바깥 소식정도는 알고 지냈다니까.”
“인터넷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중화됐어. 2000년도 초반에만 해도 이미 tv는 소식통으로서의 역할을 잃었다고.”
“쳇,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통계 이야길 꺼냈나.”
데마이어가 되려 당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해방군 공군 접근중- 아직 다른 곳에 있는 중대원들은 신속히 근처의 방호지역으로 집합하라!”
다시 강제통보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밖에서 폭음이 계속되면서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기지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방군의 폭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내 귀에는 폭음이 익숙했다. 6년 전에 중앙군 특수 침투대에 지원하여 훈련을 시작했을 때 접했던 투폭탄 폭음을 시작으로 음향식별 훈련에서 들었던 해방군과 중앙군의 갖가지 장비들의 발사음과 폭발음, 그리고 실제 임무를 수행하며 들었던 폭음 등 여러 가지 폭음들이 내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다가 총소리를 가까이서 들어도 귀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주위 소리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고, 음악만큼이나 폭음은 나에게 익숙한 소리가 되었다.
“낮고 울림이 거의 없는 폭음- DSD [Defense System Destroyer-정확도를 높이고 폭약의 약을 줄여 경량화시킨 폭탄. 한 발의 폭발범위가 좁은 대신 완파 확률을 높인 기종이다.]폭탄이로군. 그럼 위에 날아다니는 기종은 3형이나 5형 폭격기겠고.”
데마이어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음향식별 훈련에서 배웠던 것을 되뇌이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중얼거리던 데마이어는 큰 충돌음과 함께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자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건 폭탄이 아니라 폭격기가 추락한거야. 뭐, 이곳 방공망은 좀 쓸만하군.”
“해방군의 폭격기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해방군의 자주포 사격이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군이 올 것이다- 전 중대원은 방어 위치로!”
“뭐 이리 멀어? 한참 뛰어야겠네.”
데마이어가 레이더를 통해 우리가 있어야 할 방어 위치를 보고는 불평했다.
-여러분은 중앙국 정부의 만행을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오존층 발생기를 개조하여 끔찍한 대량 살상무기로 만들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번 이 일이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정복의 야욕을 버리지 못해 또다시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인류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해방군에 투항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환영할 것이며, 정의를 위해 큰 결심을 하신 여러분을 우대할 것입니다.- 해방군의 대 중앙군 선전용 프로그램 내용 중에서.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