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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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4
우주보행자 14
바다는 깊었다. 바닥에 닿긴 했지만 곧 다시 꺼질 듯 유리창 너머의 바닥은 금이 가 있었다. 무거운 함선의 하중을 바닥이 버텨내지 못할 것 같았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안정적으로 착륙한 것 같기도 했다. 물 안에서는 이동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까닭이다. 방어막이 간신히 유지 중이었지만 많은 구획들을 봉쇄한지라 대부분의 작업을 함장용 컴퓨터로 감행하여 동력 회로를 우회시켜야 했다. 동력을 복구해서 수면 위로 부상하는 방법은 민간 선박의 눈에 띌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이제껏 우주 함대의 존재를 숨겨오고 우주 대기권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우주왕복선과 인공위성이 전부라고 누차 정부는 항변해왔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도달한 결론은 물 위로 미사일을 한 개씩 쏘아올려서 추락 지점을 우주군 사령부에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비스 함이 페에드부르크 함 나포에 성공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아비스 함의 승무원과 대피한 마에스트로의 승무원들이 사령부를 다시 장악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만약 작전이 실패했는데 미사일을 쏘아 내가 아직 생존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쪽으로 잠수함을 몇 보낼지도 모른다. 방어막이 30%라도 있으면 잠수함의 어뢰 정도는 막는데에 어려움이 없겠지만 극히 미미한 상태에서 맞으면 아마 함선이 연쇄 폭발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지도 저렇게 하지도 못 하여 그저 손 놓고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비컨 행성에서 가져온 보조 동력 배터리의 전원을 마에스트로의 주 동력 엔진에 주입해보았는데, 결과는 좋았다. 하지만 지금 방어막에 동력을 보내면 다시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질지도 몰랐다. 보조 동력 배터리가 서서히 주 동력 엔진에 전이되는 시간은 두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지구에서 만든 게 아니라 덜 발달된 행성인 비컨 행성에서 만든 것이므로. 우리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므로.
함선에 장착된 무기 상태를 센서로 점검해본 결과 레일 포의 가속 장치와 동력조절장치 두 개 다 못 쓸 것 같았다. 괜히 확인한답시고 시도했다가 아직 남아있는 가속 포탄이 터지기라도 하면 정말 최악이다. 미사일 발사 회로로 동력을 공급해도 안전하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미사일을 쏠 지 말 지, 도박을 해볼 지, 아니면 잠자코 기다려볼 지를 생각해야 했다. 선택은 어려웠고 시간은 느리게 갔다. 느린 시간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 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방어막 장치와 무기 시스템이 다운된 페에드부르크는 아비스 함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도킹을 허용했을 것이다. 승무원들 몇 명이 막으려 했겠지만 실패했을 것이고 아비스 함과 마에스트로 함에 있던 함재기 XF-72는 페에드부르크 함의 격납고를 무차별 공격하여 적 함재기가 출격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을 것이다. 얼 준장은 아비스 함에 호송되어왔을 것이고 사령부는 다시 본래 모습을 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전사자 명단에 올릴 것이다. 빈 관을 묻으며 의장대 몇 명이 총을 허공으로 격발하고 몇 명이 정말 슬픈 표정으로 울어주겠지. 나쁜 쪽으로 생각해봐야 득될 것이 없었다. 아마 사령부 내에 숨어있던 쿤 왕조의 사절단들은 모두 사살되었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나는 집과도 다름없는 마에스트로에 혼자 갇혀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이 마에스트로를 버릴 수는 없었다. 미사일을 쏘아 올려 구조대가 온다 해도 어떻게 마에스트로 자체를 다시 띄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구조되어 햇빛을 볼 수 있겠지만 마에스트로는 인양 기술이 발달될 때까지 수장되어있을 것이다. 차라리 나와 함께 수장되는 것이, 나에게도 마에스트로에게도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를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것이냐. 만약 합참에서 나라도 구조하라고 명령이 하달되었다면 나는 이참에 군복을 벗을 것이다. 이런 날을 기다려온 것은 아니지만, 마에스트로라는 이름을 내가 붙여줄 때부터 이 함선에서 맞는 죽음을 몇 번이고 출격할 때마다 생각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주의 끝까지 걷는 것처럼 멀고도 오랜 시간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에게 피격되어 치명적 파손을 입은 후 폭발하는 경우에, 죽음은 너무도 빨리 찾아올 것이다. 그만큼, 우주의 먼 지평선도 내 눈앞으로 주욱, 당겨질까.
다음날 나는 미사일을 발사했다. 함대함 미사일의 회로를 변형시켜 수직으로 발사되도록 조정했다. 함대함 미사일이었지만 수직으로 발사되니 지대공 미사일과 다를 바 없었다. 삼십 분이 지나도 아무런 교신이 없었고 나는 다시 1기를 더 발사했다. 혹시 내가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은 아닐까. 곧 잠수함과 대잠미사일 수십 기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나는 두려워졌다. 우주의 끝을 경험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공포가 막연하게 무서웠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다행히도 기우였다. 북서쪽에서 접근한 잠수함 한 대에서 교신이 들어왔다.
ㅡ 준장님, 무사하셨군요!
ㅡ 폴, 자네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군. 하지만 난 마에스트로에서 나갈 생각이 없네.
ㅡ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흰 준장님을...
ㅡ 나를 구하는 건 좋지만 마에스트로를 이곳에 처박아둘 수는 없네. 새 동력 배터리를 가져와 주 동력을 복구한다 해도 민간 선박에 눈에 띌 수도 있고, 그리고 도킹해서 함교로 오게끔 되어 있는 7번 구획은 이미 봉쇄했네. 물이 가득 차올랐거든.
ㅡ 빌도 준장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것이라 제게 말했습니다.
ㅡ 빌은 무사한가? 다행이군. 그렇다면 빌이 자네에게 어찌 하라고 하던가.
ㅡ 빌이 한 가지 계획을 짜서 합참에게 전달했고 합참은 묘안이라 여겼습니다. 잠수팀들과 마에스트로 안으로 들어가서 새 동력을 갈아 끼우고 우주로 발진하는 겁니다. 물론 마에스트로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만큼의 수역은 모두 봉쇄되었구요. 그리고 민간인들이 우리 존재를 알 수 없도록 플로리다 우주 연구기지에서 인공위성 하나를 쏠 예정입니다. 네 달 후에 쏠 것이었는데 좀 앞당겨졌습니다. 인공위성이 발사되어 사방으로 빛과 연기를 뿌리면, 그때 마에스트로가 최고속으로 발진하면 우린 언론에게 우주선이 아니라 인공위성이었다고 항변할 수 있을 거라고, 빌이 말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음, 역시 빌 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어려운 순간에서도 대비책을 교묘하게 절충하여 차선책을 만들어냈다. 나는 7번 구획의 문을 열었고 잠수부 다섯 명의 생체 신호가 센서에 잡혔다. 7번 구획에서 엔진실까지 가려면 9번 구획을 경유해야 했는데 나는 그곳 역시 문을 열어버렸다. 물론 물이 쏟아질 것이라는 잠수부들에게의 경고도 잊지 않았다. 동력 수치가 올라가며 그래프가 안정적으로 표시되었다. 폴은 내게 플로리다 우주 연구기지로의 교신을 들려주었다. 말하자면 스피커폰 같은 것이어서, 플로리다와 폴의 교신 내용을 나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최고 속력으로 발진하려면 일단 주 엔진에 동력을 쏟아야 했다. 나는 무기와 초공간 엔진의 동력을 돌려서 주 엔진에 쏟아부었다. 폴이 지금입니다, 하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발진시켰다. 몸이 뒤로 확 쏠리면서 수면을 뚫고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지구 궤도에 안정적으로 도달하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폴이 내게 교신을 보내왔다.
ㅡ 합참에선 준장님의 공로를 치하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반란자의 수괴를 처형하는 것을 명령했습니다.
ㅡ 얼 준장 말이군. 작전은 성공한 것인가?
ㅡ 그렇습니다, 준장님. 도킹에 성공한 저희들은 페에드부르크의 승무원과 얼 준장을 체포하여 아비스 함의 격납고에 전부 가둬두고 모조리 지하 형무소로 보냈습니다. 죄질이 무겁고 선동적이었던 승무원 몇 명과 얼 준장을 잡아 형무소 사형대기실에 수감시켰고 나머지는 사령부의 형무소에서 따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ㅡ 그래, 사형 집행관은 누가 되었나?
ㅡ 본래 작전이 성공하면 준장님께서 맡으셔야 할 것이었는데 합참에선 어제까지만 해도 준장님을 사망자로 표시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형 집행관은 제가 되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ㅡ 아니, 사형 집행관은 자네가 하지. 난 다만 그를 면회하고 싶네. 면회를 하고 웨그먼 소장님을 뵙도록 하지.
ㅡ 웨그먼 소장님께선 군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면회가 끝나면 제가 준장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마에스트로가 착륙하자 바로 앞에 폴의 지프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빌이 와 경례했고 나는 답례했다. 그의 연인이었던 에이미는 아직 눈물자국이 눈에 가시지 않았다. 폴이 에이미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ㅡ 에이미 중위가 빌의 연인이 아니었더라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 지구 사령부에 페에드부르크 나포 소식이 들어갔으면 아마 사령부에선 핵 미사일을 발사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쿤 왕조의 사절단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지구 궤도의 관측 장교였던 에이미 중위 덕분에 우리 작전은 적 수뇌부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다행이었습니다, 준장님.
ㅡ 고맙네, 중위. 빌, 마에스트로 승무원들에게 2주일 동안은 근무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도록. 함선도 손봐야 하고, 당분간 출격은 어려울 것 같네. 경례는 필요 없네. 그래, 들어가 쉬게.
얼 준장은 푸른 수형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 안엔 권총으로 무장한 위병 두 명이 차렷자세로 서서 그를 감시했고 나는 문을 열도록 했다. 듬직한 위병 세 명이 먼저 들어가고 나는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위병 두 명은 문을 지켰고 한 명은 내 옆에 열중 쉬어 자세로 섰다. 나는 가만히 얼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배반했나, 왜 적에게 붙었나, 왜 우리를 공격했나, 모든 질문들이 그와 대면한 이 자리에서는 쓸모 없을 것 같았다. 먼저 입을 연건 그였다.
ㅡ 난 솔직히 놀랐네. 초공간이 열린 것도 감지하지 못했고, 비컨 행성의 의원들에게 페에드부르크를 시찰시켜주던 참에 자네가 급습해서 방어막 발전기를 박살내었으니. 나중에 들으니 자네가 먼저 비컨 행성에 손을 썼다고 하더군. 모든게 함정이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페에드부르크로 그들을 안내한 것이었지.
ㅡ 자넨 내게 항복을 말하지 않았나? 싸울 때 말이야.
ㅡ 사실, 항복을 말하면서 시간을 끌면 쿤 왕조의 함선들이 출격해서 자네를 저지하리라 생각했거든. 자네 부관의 비행 솜씨가 제법이었던 모양이야. 강력한 쿤 왕조의 함선들을 모조리 격추하다니. 하지만 마에스트로도 거의 격침 위기에 놓인 걸 나는 센서로 보고, 하하, 다행이다 싶었지. 내가 이겼구나, 하고 말이야. 하지만, 난 아비스 함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젠장할!
ㅡ 아비스 함이 먼저 페에드부르크를 공격했다면 승패가 뒤바뀔수도 있었네. 마에스트로가 날렵하지 않았다면 또 승패가 바뀌었겠지. 난 자네에게 해줄 말이 없네. 자네의 월권 행동으로 죄 없는 페에드부르크 승무원 두 명이 아비스 함의 기동부대원들에게 사살 당했지.
ㅡ ......
ㅡ 난 말일세. 페에드부르크에 쫓겨 다른 행성에 가 머무를 때, 내 승무원들을 하나라도 잃지 않겠다고, 모두 집과 직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나 자신에게 맹세했네. 하지만 자넨 지휘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밑의 승무원들을 강제 명령으로 억압하며 대항하라고 했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승무원 두 명이 그 덕에 사살되었고 말일세. 그 뿐이 아냐. 컴퓨터 바이러스를 미리 링컨 함에 심어놓았지. 링컨 함의 생존자들에게 물어보니까, 다들 그러더군. 적함에 피격되자마자 방어막이 거의 다운되었다고.
ㅡ 그래, 맞아.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링컨 함의 생존자도 모두 처리해버릴 걸 그랬어. 꼬리가 길면 밟히는군.
나는 일어서서 주먹을 한 대 날렸다. 얼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한 방 더 날리려는 찰나 얼은 나를 쏘아보았다.
ㅡ 이제 자네는 쿤 왕조를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할 거야. 아무리 함선이 업그레이드 되었다해도 쿤 왕조를 멸망시킬 순 없네. 우리보다 훨씬 강력하니까!
ㅡ 좋아. 자넨 이제 곧 사형당할 테니 말해도 상관 없겠지. 난 빠르면 다음 달에 페에드부르크를 출격시켜서 쿤 왕조의 행성을 핵으로 공격할걸세. 어차피 방사능이 지구까지 넘어오진 않으니까, 이미 51구역과 다른 비밀 기지에서 강력한 핵무기가 만들어지고 있고, 나는 모조리 탑재해서 쿤 왕조의 행성 자체를 날려버릴 걸세. 자네의 허망한 꿈처럼 말이야.
ㅡ 쿤 왕조가 지배하는 행성에도 무고한 사람들이 있을텐데.
ㅡ 그들에겐 자네가 죽어서 위로해주도록. 모든 게 자네의 배신 때문에 일어난거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으로 나가자 위병 세 명이 나를 따라왔다. 사형 날짜는 다음주 수요일이었다. 오늘이 화요일이었으니 얼의 목숨은 8일이 남은 것이었다. 폴은 나를 지프에 태워 군 병원에 내려주었다. 폴과 나는 장성급 병동 5층 30호의 문을 열었다. 웨그먼 소장은 가만히 잠들어있었다. 그의 심전도 기계가 삑삑거리며 환자의 불편한 호흡을 내게 보여주었다. 인자한 얼굴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폴을 보자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ㅡ 죄송합니다, 준장님. 상태를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얼 준장이 사령부를 장악할 때 웨그먼 소장님을 권총으로 쏘았습니다. 왼팔은 거의 움직이실 수 없으시고 총알이 심장을 가까스로 빗겨갔지만 혈액이 찢어진 혈관에서 새어나와 역류했습니다. 국내 최고의 의료진들이 소장님을 진찰하고 계시지만, 그들도 한 달을 제일 많이 잡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ㅡ 폴, 자넨가?
ㅡ 예, 소장님. 마에스트로 함의 지휘관께서도 와 계십니다.
소장은 내 이름을 불렀으나 나는 그의 심각한 상태에 얼이 빠져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다 폴이 나를 툭툭 치자 비로소 웨그먼 소장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늙은 시간들이 주름과 저승꽃이 되어 그의 얼굴에 피어 있었다.
ㅡ 자네에게, 빚을 하나 진 셈이구만. 사형 집행일은....정해졌나?
ㅡ 다음주 수요일입니다, 소장님. 8일 남았습니다.
ㅡ 자네, 마음 고생이 심하겠군. 아무리 그래도 사관학교 동기 아니었나. 자네도 많이 놀랐겠고.....
ㅡ 그는 소장님을 쏘았습니다. 소장님을 위해서라도 그의 형량을 덜어줄 수가 없습니다.
ㅡ 죽을 사람은 안 그래도 죽게 된다네. 총에 맞아 죽든 다른 방식으로 죽든, 나는 지구에서 죽어서 만족하네.
ㅡ 벌써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소장님.
ㅡ 가 보게. 가서 새 계급장을 받게. 진급의 영광을 맘껏 누리게. 자네와 폴이 없었으면 나는 이렇게 병원 치료도 받지 못 했을 것이 아닌가. 난 이 상태에 만족하네.
폴은 나를 집에 내려주었다. 오랜만에 침대에 눕자 나른한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감으니 우주가 보였다. 깜깜했고 가늠할 방향도 보이지 않았다. 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겨누고 있는 사수들의 모습도 상상했다. 한때 이곳에서 악몽을 꾸었으나 이번엔 나 스스로 악몽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빛을 차단하기 위해 리모컨으로 블라인드를 쳤다. 누워있고만 싶었다. 그저 누워있고만, 마치 병상에 누운 부상병처럼 그렇게 쉬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