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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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보행자 6
동력의 대부분을 방어막 수리에 소비하는 중이라 초공간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크로나 은하에서 약 한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우주에 뜬 채로 지구를 보는 것은 아까의 교전에서 겪었던 다급함과 절박함을 잊게 해주었다. 푸른색 바다가 육안으로 보이는 지구. 지금껏 어느 행성도 지구만큼 아름답지는 못했다. 뜨거운 용암으로 가득한 행성이나 추운 겨울, 혹은 사계절이 마구 뒤바뀌는 곳도 있었다. 지구로 돌아간다는 것은 집으로 가는 것을 뜻했다. 휴식의 시간이었다.
빌은 초공간에서 나오자마자 빌은 전방의 함선을 포착했다.
ㅡ 앞에 함선 하나가 있습니다. 아비스 입니다.
ㅡ 통신 채널을 열게.
ㅡ 교전 때문에 통신 상태가 안좋을 수도 있습니다. 연결합니다.
아비스 함 지휘관의 말이 지직거리면서 마에스트로로 전해져왔다. 아비스 함의 지휘관은 내 후배였다. 그의 목소리엔 감기 기운이 있었다. 그의 말과 말 사이에는 몇 번의 기침이 있었다. 교전에서 입은 피해가 큰지 메인 스크린은 동작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생각하는 도리밖엔 없었다.
ㅡ 귀환을 축하합니다, 함장님.
ㅡ 고맙네. 아비스가 왜 출격했나?
ㅡ 합참이 일주일간 지구 궤도의 경계 임무를 맡겼습니다.
ㅡ 그들도 깨달았나보군.
ㅡ 아닙니다. 웨그먼 소장님의 개인적인 지시였습니다.
ㅡ 아, 그랬나? 마에스트로의 상태가 좋지 않네. 가급적이면 통신에 소비되는 전력마저도 아껴야 할 판이지. 아비스함이 있던 지점에 내가 착륙해도 될까?
ㅡ 그러신다면 영광입니다, 준장님.
아비스함은 착륙 가능 지점을 좌표로 내게 전송했다. 마에스트로가 아비스함 옆을 지나쳤다. 아비스함의 함교는 마에스트로와 마찬가지로 후면부에 있었으나 단단한 합금 벽으로 삼중 보호되었다. 마에스트로는 그렇지 못했다. 겉으로 보면 왠 탑이 하나 솟아있는 모습이었다. 마에스트로는 함교도 위험했다. 방어막이 없으면 함교가 피격될 확률히 극히 높아졌다. 나는 지구 대기권으로 들어가면서 방어막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모든 함재기에도 방어막을 만들어야하는 일이 올 것이었다.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착륙이 무사히 끝났을 때 덜렁거리던 좌측 후면부의 레이더가 드디어 부서져 파편이 땅에 떨어졌다. 앞쪽에서 함선의 정비를 맡은 본부 사람들이 몰려왔다. 앞으로 사흘 간은 출격하지 않을 것이었다. 방어막에 대한 것은 그때 강력히 주장을 피력해야 했다. 사택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 캄캄한 어둠 때문에 문을 닫아도 미처 닫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혼자만 사는 집은 조용했고 깨끗했다. 책상 위에 전투기 프라모델이 하나 올려놓아져 있었다. 만들기는 재작년에 다 끝내놓고서 미처 도색을 하지 않아 투박한 형상이었다. 사흘 동안 도색이나 해볼까 생각했다. 빌은 사흘 간의 공백 중 하루를 휴가로 달라고 요청하는 메시지를 내게 보냈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도 쉬어야 할 것이었다.
나는 함선에 대해 다시 걱정했다. 신형 함선은 링컨함이 격침되었다 해도 아비스, 이카루스, 로미누스, 블론드워터 등의 다른 기종들이 아직 건재했다. 이카루스와 로미누스는 전투보다 지구 기지가 함락되었을 때 우주에서 얼마간 지낼 수 있도록 설계된 전투 및 생활용 함선이었다. 때문에 전투 목적함은 아비스와 블론드워터가 다였다. 아비스와 블론드워터 두 대 모두 링컨함에 비하면 미약한 함선이었다. 그러나 지휘관은 명석했다. 나는 지휘관의 지능 지수를 함선보다 더 믿었다. 졸음은 깊은 절벽이었다. 하지만 다시 올라오려고 하지 않는, 떨어지는게 마냥 즐거운 절벽이었다. 목까지 차오른 지퍼를 조금 풀었다. 침대 시트가 땀으로 젖는 것이 느껴졌다. 취침 조명을 소등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마에스트로 앞으로 오각형의 함선 세 대가 출현했다. 방어막은 100% 작동 중이었다. 오각형의 함선으로부터 교신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레일 포의 장전을 명령하고 메인 스크린에 띄워진 적함을 바라보았다. 그때 함선 내부에서 불꽃이 튀기며 빌이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보고했다. 빌 뿐 아니라 승무원 모두가 내게 보고했다. 귀가 아팠다. 그들의 보고는 다급했지만 내 귀가 인식하는 시간은 천 년의 세월처럼 고요했고 길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ㅡ 방어막이 60퍼센트까지 떨어졌습니다! 함장님, 레일 포 두 대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ㅡ 레이더 두 대를 잃었습니다. 후면부를 관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함선 세 대가 다시 뒤에 나타난 것이 보입니다!
ㅡ 미사일을 발사하라! 고도를 높여라!
ㅡ 함대함 미사일 열 발이 모두 요격되었습니다! 미사일 튜브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ㅡ 초공간은?
ㅡ 초공간 엔진은 아까 잃었습니다. 근접 방어체계 기관포의 탄약이 거의 떨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생사가 걸린 사냥감처럼 급했지만 나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피곤했다. 내 옆에서 나를 보고 있는 빌이 빌이 아닌것 같았다. 마에스트로가 아닌 것 같았다. 초공간이 열리며 적함 다섯 대가 더 나타났다. 포위된 마에스트로의 외벽에 금이 계속 가는 것이 센서에 포착되었으나 나는 왠지 모르게 안심했다.
ㅡ 미사일이 먹히지 않습니다!
ㅡ 방어막이 30퍼센트까지 떨어졌습니다, 아니, 20퍼센트, 10퍼센트 입니다! 이건 말도 안돼는 일입니다!
ㅡ 모두 탈출선으로 가라. 핵미사일을 발사하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가 나의 말을 대신해서 옮기는 듯 들렸다. 마약에 취한 듯 시야가 흐렸다. 적함의 푸른색 플라즈마 공격 한 방에 함교의 유리가 뚫렸다. 승무원 네 명이 우주 밖으로 빨려나갔다. 빌은 간신히 의자를 붙잡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왼손으로는 인공 중력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으나 허사였다. 다시 피격당하자 레일 포가 있는 전면부의 장갑이 통째로 부서져나갔다. 이제 대응할 무기는 없었다. 그때 나는 내 옆에 한 남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ㅡ 당신은 누군가?
ㅡ 이제 끝났소, 대령. 포기하시오.
ㅡ 누구냔 말이야! 넌 누구야?!
그의 말은 조용했다. 나의 말은 마음과 달리 조급하고 거칠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는데도 내 입에선 말이 새어나왔다. 나를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확실하지 않았다. 안경을 낀 듯 했지만 복장이 계속 바뀌었다. 검은색 양복이었다가 다시 녹색의 공군복이었고 와이셔츠에 츄리닝이었다가 맨몸으로 바뀌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공이치기를 당기고 그를 조준했다. 함교의 유리가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엄청난 바람을 맞고서도 그는 멀쩡했다.
ㅡ 대령, 나를 믿으시오. 이제 끝났소. 탈출선은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갔소이다.
그는 악마처럼 보였다. 악마에게 총알이 먹힐까? 나는 생각했으나 손가락은 방아쇠를 연신 눌러댔다. 그의 가슴과 배에서 선혈이 튀며 그가 함교의 벽에 축 늘어졌다. 나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가 악수를 건넨 링컨함의 함장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도 빌이 아니었다. 빌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그의 명찰에 수놓아진 이름 탓이었다. 이름은 흐릿했다. 앞글자의 B만 알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가 죽은 걸 확인한 나는 앞에 있는 적함에게도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거리가 짧았고 적함은 강력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내 앞에 또다른 내가 나타났다. 내가 나에게 근엄하게 외쳤다.
ㅡ 그러게 내가 전면전은 피하랬잖소!
ㅡ 난 누구고 넌 누구지? 난, 난!
ㅡ 내 말을 왜 듣지 않았소? 아무튼, 지옥에서나 봅시다.
나는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 앞에 나는 모로 쓰러졌다. 근처에 굴러다니던 철골이 내 가슴에 박혔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으로 다시 링컨 함의 함장이 나타났다. 그는 수십 년의 나이를 더 먹은 듯 노인의 형상이었다. 그때, 내가 탄 함선이 폭발했다. 나는 함선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별이 폭발하는 것이며, 빅뱅이 시작되고, 웜홀이 열리면서 그 속으로 들어가면 나는 살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내 앞에서 커다란 함선이 두조각으로 붕괴되었다. 눈부시고도 뜨거운 화염 속에서, 아까 본 이상한 남자가 나를 비웃었다. 나는 권총을 찾았으나 총은 아무데도 없었다. 총성이 울렸다. 내가 쏜 것인가? 아니, 내가 맞았다. 피가 가슴에서 번져나와 우주 밖으로 흘러나갔다. 나는 잠에서 깼다. 다행히 꿈이었지만 잠은 더이상 오지 않았다. 침실의 불을 모두 켜고 나서 무작정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푸른 새벽하늘은 싸늘했다. 바람 또한 매서웠다. 마치 적의 공격처럼, 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왔다.
꿈을 해몽하는 사람을 찾고 싶었지만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나는 심란했다. 링컨함이 격침된 꿈. 링컨함이 부서질 당시에 나도 거기 있었던 꿈. 나는 애써 털어버리려고 마음먹으며 냉수를 한 컵 따라 마셨다. 합참 회의에 보고할 것이 남아 있었다. 나는 정복을 입었다. 정복의 까만 색깔과 옷감의 검정색 실은 내 몸에서 무겁게 느껴졌다. 하루가 이상할 것 같았다. 합참 회의는 오전 9시였다. 아까 새벽에 일어난 나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잠들면 같은 꿈을 도로 꾸거나, 아니면 그 꿈이 이어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더 끔찍한 꿈의 장소에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의무관을 호출했다. 호출 시간은 10시로 맞춰놓았다.
합참의장이 참석한 회의장에서 나는 그들의 의견을 반박했다. 그들은 새 링컨함을 만드는 중이었다.
ㅡ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실전에선 신형 함선들의 큰 몸집이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마에스트로 급의 함선을 건조하는게 더 유리할 것입니다, 의장님.
ㅡ 새 링컨함의 건조는 이미 시작되었네.
ㅡ 중지시키고 그 자재로 마에스트로급 함선 두 척을 만드는 것이 더 낫습니다.
ㅡ 기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ㅡ 페에드부르크가 기함이지 않습니까. 대피용 함선은 로미누스로 충분합니다. 사실 전 이카루스의 생활용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고 아비스와 같은 전투함으로 만드는 것을 권장합니다.
ㅡ 페에드부르크는 무장이 거의 없네. 방어막 형성에 80%를 차지하는 동력을 전환시켜 링컨 급의 기함으로 만들고, 전술 장비를 새로 업데이트하려면 시간이 배로 걸릴 것일세.
ㅡ 천천히 생각해도 좋습니다. 방어막에 대한 것이 더 시급합니다.
ㅡ 방어막 말인가?
ㅡ 아, 준장. 방어막은 걱정 말게. 내 이미 아비스의 방어막과 똑같은 방어막을 갖게 하도록 했어. 기존의 것보다야 세 배 조금 안 되는 방어력을 갖게 될걸세.
ㅡ 다시 부를 때까지 휴가일세. 나가보게, 준장.
나는 회의실을 나왔다. 정복은 불편했다. 빌이 정복을 싫어하는 이유가, 이런 불편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합참 회의란 것 자체가 원래 불편한 자리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항공작전지휘본부로 걸음을 옮겼다. 지휘본부는 작은 도시만했다. 전투 공역에 특별히 지어놓은 비밀 시설이었다. 지름 70km의 시설 안에 크고 작은 건물들과 활주로, 그리고 격납고가 있었다. 수십 개의 전략위성 안테나들이 우주로부터 송신되는 전파들을 하나씩 걸러 분석하고 합참 회의에 보고했다. 대기권 밖에 나가 있는 함선들과도 원거리 통신이 가능했다. 지휘본부가 세워진 곳은 개척 시대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을만큼 삼면이 협곡이었다. 헬기를 이용하지 않는 이상 육로로 들어올 곳은 내가 방금 거친 정문 밖에는 없었다. 불과 3km 떨어진 곳에 육군 2대 기계화 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항속 거리 3분 남짓한 곳에 차세대 공군 전투기지가 자리했다. 절벽 위엔 수많은 미사일 포대들이 하늘을 표적으로 삼고 고개를 우뚝 쳐들고 있었다. 미사일 중에는 대륙간 탄도탄이 많았다. 원거리 미사일은 적국이 심상치 않은 입장을 취했을 때 가동 완료되었다. 함선은 모두 지하 격납고에 착륙해 있었다. 마에스트로는 전장 220m의 작은 함선이었다. 지휘본부에서 나는 마에스트로의 업그레이드가 80% 정도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보고자는 이곳에서 6년 있었다는 한 소령이었다. 빌과 같은 나이였으나 계급은 한단계 더 높았다. 나머지 업그레이드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다.
지휘본부 건물 중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곳이 바로 대기권 내 함선들과 원활한 통신이 가능한 통신본부였다. 아비스함은 2시간마다 경과를 보고했다. 적의 동향은 느껴지지 않았고 지구 궤도는 평온했다. 아비스함은 완전 무장되어 있었다. 초공간이 열리는 즉시 스캔하고 적이라는 것이 판명되면 즉각 선제공격을 가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아비스함은 전투함 중 가장 나은 함선이었다. 나는 통신 시설을 나와 복도를 걷다가 빌을 만났다. 빌은 옆에 여자 장교를 하나 데리고 같이 가고 있었다. 둘이 나에게 경례했다. 답례를 마치고 나는 빌에게 물었다.
ㅡ 휴가가 어제까지였나, 아니면 오늘까지인가.
ㅡ 아, 어제까지였습니다, 함장님. 친구가 이곳으로 전입해와서 잠깐 들른 것 뿐입니다.
ㅡ 그런가... 어쨌든 휴가는 사흘이니 꼭 어제로 휴가를 끝낼 필요는 없네.
ㅡ 감사합니다, 함장님.
빌이 아닌 빌 옆의 여자 중위가 대답했다. 빌은 중위를 툭툭 쳤으나 중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그래' 하는 샐쭉한 대답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얼 준장의 사무실로 가는 복도를 향했다. 얼은 마침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권하는 커피를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냉커피였다. 찬 커피의 맛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나는 얼에게 물었다.
ㅡ 마에스트로에도 아비스와 같은 방어막이 설치된다더군.
ㅡ 그래, 들었어. 좋은 일이야. 구형 함선이라고 방어막까지 약할 필요는 없지.
ㅡ 그런데 말야. 자네, 링컨함의 승무원 목록을 갖고 있나? 갖고 있으면 좀 주게. 알아볼 게 있어서.
ㅡ 링컨함? 어디보자... 내겐 없지만 여기서 출력할 수 있네. 클리어파일에 넣어줄게. 어디, 함장직은 아직도 맘에 드나?
ㅡ 나야 뭐 함장이 천직이지. 사무적인 건 내게 안 어울려. 아, 가급적이면 합참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목록도 좀 알아봐.
ㅡ 합참 회의? 자넨 거기 들어갈 수 있잖나. 장성이잖아.
ㅡ 그냥, 궁금해서 그래. 어쨌든, 자네가 합참을 좀 설득해봐.
ㅡ 내가 무슨 수로 그들을 설득해? 난 원스타일 뿐 별다른 실권이 없네. 실권이라면 함선 지휘관인 자네가 더 있을걸.
ㅡ 형식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끼리 노는 법이야.
얼은 좀 생각하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가진 걱정거리를 알고 있었다. 함선의 건조. 링컨급의 함선 건조는 무의미했다. 링컨 급은 우리보다 약한 적과 싸울 때 안정적으로 적을 맞을 수 있는 함선이지 강력한 함선에는 대항하기가 어려웠다. 문제는 몸집에 있었다. 마에스트로나 아비스와 링컨을 비교한다는 것은, 초계함과 구축함에서 항공모함을 비교하는 것과 같았다. 아니, 항공모함 이상일 것이었다. 항공모함 속의 항공모함 정도? 나는 실없이 웃었다.
목록이 인쇄된 종이를 파일에 담아갖고 나는 사택으로 돌아왔다. 함장의 직위를 가진 사람은 모든 차량 대여가 무상이었다. 지프차를 타고 사택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깝고도 멀었다. 산중턱에 위치한 함장들의 사택은 주로 승무원들의 구보 코스로 이용되곤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옆으로 함선 승무원들의 구보가 한창이었다. 한때 내가 달릴 때에도 지프차가 휭 하고 앞을 지나가면 부러워했었다. 이젠 내가 그 꼴이란 말인가. 경사진 도로가 끝나는 곳에 사택이 있었다. 함선과 함장에 대한 정보는 공군의 기밀로 취급되어졌다. 그만큼 함장에게는 혜택이 많았다. 사택도 더 편했고 아늑하며 다기능이었다. 메시지가 두 통 와 있었다. 하나는 의무관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급한 환자가 있어 2시간 정도 약속을 미루어야겠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의 약속을 염두해두지 않고 항작지휘부로 갔었구나,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오려면 이십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머지 한 통을 들으려고 버튼을 눌렀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빈 녹음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나는 삭제하려다 그만두었다. 내일 항작지휘부로 갈 때 복원해보려는 마음 탓이었다. 왠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