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드기어스라는 작품의 만화가 3종 세트(?)로 나왔습니다. 제목에도 나오는 주역인 를루슈가 주역인 '반역의 를루슈', 를루슈의 친구이자 또 하나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스자쿠를 주역으로 한 '반공의 스자쿠', 그리고 를루슈의 여동생으로 비운의 히로인(?)이라 할 수 있는 나나리가 주역인 '나이트메어 오브 나나리'... (그 밖에 막부 말기를 무대로 한 작품도 있지만, 국내에 나오지도 않았고 직접적인 연결점이 없으니 무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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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드 기어스 만화 3종 세트... 여하튼 동시에 나오는 건 이례적이다. ]

  각각 다른 작가가 만화를 그리고, 다른 시점에서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마치 멀티엔딩의 게임을 보는 느낌일까요?

  이런 식의 전개는 과거에도 꽤 많이 나왔습니다. 그 유명한 에반게리온에서도 게임으로 선보인 외전 스토리였던 "강철의 걸프랜드"에 이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연출한 "강철의 걸프랜드 2", "이카리 신지 육성 계획" 등이 나왔고, 근래에는 "학원타천록"이라는게 나오고 있지요.

  역시 인기작인 "풀메탈 패닉"도 원래의 작품 외에 개그풍을 더욱 강조한 "난데없이 풀메탈패닉" 같은게 있고, 또 다른 인기작(이를테면 1권은 일본 아마존 일본 소설 분야 22위)인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서도 패러디와 개그가 넘쳐나는(개인적으로 이런 작품 중 최고의 역작이라 생각하는) "스즈미야하루히짱의 우울"이라는 작품에 이어, 패러럴 월드 세계를 무대로 한 "나가토 유키짱의 소실"이 나오고 있죠.
(하루히짱과 유키짱을 그린 작가가 같은 사람이라는게 눈에 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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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의 완성도와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도 제작된 하루히짱의 우울. 원작자 스스로 "원작보다 하루히답다."(절반 진심)는 말을 하기도 한 작품이다. ]
 
  만화만 그런가요? 인기 애니메이션 "천지 무용"시리즈는 OVA와는 독자적인 세계를 그린 작품으로(다른 감독이 제작한) TV판, 그리고 "신 천지무용" 등이... "신비의 세계 엘하자드" 역시 OVA판과 TV판을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내용을 펼쳐나갑니다.

  그 밖에, 처음부터 여러 스토리를 나누어 냈던 "쓰르라미 울적에" 같은 작품은 게임판과 마찬가지로 여러 편의 만화로 선보였습니다. 일일이 골라보기 귀찮을 정도로 많이...


  이러한 '패러럴 월드 세계 작품들'은 대개 같은 이야기를 조금 다른 시점에서 펼쳐나가곤 합니다. 앞서 코드 기어스 3종 세트(?)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에반게리온 학원타천록"처럼 캐릭터들은 같고 구성도 비슷해 보이지만 그 연출이 완전히 다른 작품도 있죠. (초능력자 신지라니... 이해가 되십니까?)

  물론, 그들이 학교 연극이라도 하듯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상황에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외전 작품도 많습니다.

  막부말 편(간단히 말해 신선조 이야기에 접목한 경우)은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자주 나오는 주제이고, 판타지편이나 서부극 편 등, 여러가지 내용이 나오기도 하죠. ("여기는 그린우드"처럼 정말로 주인공들이 연극을 하고 있었다는 사례도 나옵니다.)


  이렇게 인물들의 모습과 상황(특히 인물 관계)은 그대로 다른 이야기를 연출하는 작품들은 본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작품을 구현할 때 자주 쓰였습니다. 게임에는 다양한 캐릭터와 상황이 있고, 플레이어마다 각기 다른 캐릭터를 좋아하는 만큼 그들 모두를 만족시킬 방법은 오직 '그들 모두에 대해 각기 다른 이야기'를 쓰는 방법 뿐이었으니까요.

  심지어 대만이나 우리나라에서도 패러디 작품을 냈을 정도로 인기를 끈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작품은 일본 내에서만 각기 다른 스토리와 내용으로 무수한 만화가 나왔습니다. (뭐, 결과적으로는 가장 완성도 높고 충실한,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힘내라 사쿠라" 등을 그린 나카하라 마사히코씨의 작품이 공식적인 만화판으로 결정되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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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하라판 스파 만화 중 하나인, "힘내라 사쿠라". 원작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느껴지는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등장한 설정이 게임에 공식적으로 적용되기도 했다. ]

  그 밖에 "아랑전설"이나 "킹 오브 파이터스", 물론 "사무라이 스피리츠" 같은 작품에서도 만화 작품은 쏟아져 나왔지요. ("포켓몬스터"에 이르면 이미 몇 종인지 세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그 중 계속 진행 중인 건 애니메이션과 "포켓몬스터 스페셜" 뿐이지만...)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캐릭터를 그대로 살린 또 다른 애니메이션("천지무용 등")이 나오는가 하면, 만화 작품으로 무수히 쏟아지게 되었지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가...

  이것은 "스타워즈"나 "인디아나 존스"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 작가가 소설을 쓰는 미국의 "프랜차이즈 상품"과 비슷한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만, 미국의 것과 다른 점은 미국의 프랜차이즈 상품이 거대한 연대기의 일부라는 느낌으로 각각 다른 시대의 -심지어는 주인공도 다른- 다른 이야기를 쓴다면, 일본의 "패러럴 기획 작품"은 같은 시점에서 같은 캐릭터들을 이용해 다른 이야기를 쓰는 사례가 더 많다는 점이겠지요. (앞서 말했듯 멀티 엔딩의 게임 하는 기분...)

  코드기어스 만화 3종 세트는 바로 이러한 "패러럴 기획 상품"의 한가지 사례가 되겠습니다. 전에 나온 "쓰르라미 울적에"는 본래 여러 개의 결말을 가진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반면 코드기어스라는 작품은 애니메이션에서 한가지 결말이 이미 소개되었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세 이야기를 동시에 만화로 판매한다니... 정말이지 상업적 기획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해야 할지...

  한편으로 이는 오타쿠 중심의 동인 시장이 그만큼 활성화되었다는 반례일지도 모릅니다. 본래 이런 식의 기획은 그 게임이나 만화 등 원작을 좋아하는 이들이 애정을 갖고 접근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서 재미있는 것을 골라서 내는 방식이었거든요.

  '원작과는 다른 결말을 보고 싶다.' 뭐 이런 희망에 대한 상업적인 선택이라고 할까요?


  이렇듯 캐릭터 중심의 '패러럴 기획 작품'의 가장 큰 이점은, 역시 그 작품(이라기보다는 캐릭터)에 애착을 가진 팬들에게 여러가지 선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연애 어드벤쳐 게임 등의 엔딩이 여러 개인 것은 제각기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공략하게 하기 위함인데, 그처럼 마음에 드는 결말을 팬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겠지요. (물론, 팬들의 선택에 맡기면 엉망이 될 뿐만 아니라 그야 말로 스토리에 끝이 없을테니 어느 정도 제약하겠지만...)

  하지만, 이런 '패러럴 기획 작품'이 정말로 환영할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들 패러럴 기획 상품 중에는 나카하라 마사히코씨의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처럼 원작 이상으로 충실한 내용을 구성하여 원작의 개발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 있는가 하면, 오쿠다 히토시씨의 "천지무용 료오키!"처럼 원작의 내용과 스토리를 따르면서도 원작에 없는 내용을 추가하여 재미를 주는 것도 있고, "스즈미야 하루히짱의 우울"처럼 원작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좀 더 즐거운 느낌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독자적인 상품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그만큼 완성도도 높고 재미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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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쿠다 히토시판의 천지무용 만화판. 원작의 분위기와 세계관을 잘 살린 좋은 작품으로 2부. 총 22권이 나왔다. ]

  하지만, 게임을 원작으로 옮긴 만화 대부분이 그렇듯,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옮긴 만화 대부분이 그렇듯, 원작의 재미를 더해주기는 고사하고 원작에서의 감동을 망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애니메이션이 인기가 좋으면 그것을 만화로 만들어 돈을 벌고 싶어지는 것은 인지상정... 그 인기에 편입하고자 노력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온 작품 중 정말로 재미있는 것은 한줌도 되지 않고, 나머지는 돈과 시간이 아깝다는 느낌일 뿐이지요.

  만일, "천지무용 료오키!"처럼 아예 외전 스토리를 연출한다면 '원작에는 없는 것'이니 좋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제가 꼽는 '애니를 원작으로 한 만화' 중 가장 잘 만든 쪽에 속합니다. 그만큼 "천지무용"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독자적인 흐름을 이끌어나가고 있으니까요.)

  또는 "건담 오리진"처럼 원작의 내용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더욱 깊이있는 충실한 연출, 훨씬 완성도 높은 구성으로 인정받는 방법도 있습니다. (솔직히 건담 얘기를 정말로 재미있고 충실하게 보려면 '퍼스트 건담' 애니보다는 이 작품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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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의 일러스트를 맡은 야스히코 요시카즈씨가 직접 그린 건담 오리진. 애니메이션에는 나오지 못한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애니메이션에선 연출할 수 없었던 내용들을 야스히코씨의 중후한 그림으로 완성한 명작이지만, 국내에선 -뉴타입에서 연재하고 있음에도- 11권 이후 소식이 없다. ]


  하지만, 코드 기어스 3종 세트처럼 이들 작품 대부분은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되 일부만 변화를 준 정도... 원작을 이미 본 사람으로서는 솔직히 귀찮고 짜증이 나는 사례가 많죠.

  마치 얼마전 많은 사람들을 황당하고 짜증나게 했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 엔드리스 에이트 편-"의 사례와 같다고 보겠습니다.
(* 엔드리스 에이트편 - 하루히 시리즈의 내용 중 하나로, 여름 방학이 영원히 반복되는 내용. 주인공들이 그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만큼 거의 같은 내용이 계속되고 결국 수많은 반복 끝에 끝난다는 이야기인데,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정말로 8번 같은 내용을 -그것도 내용을 생략하거나 추가하지 않고- 반복해서 원성을 샀다. 처음엔 '다음이면 끝나겠지.'라던 이들이 방영한 건 녹화해두고 일단 결말을 먼저 보고 볼까 말까 결정하기도 했으니...)


  만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다면, 또는 애니에서 소설로 옮겼다면 나름대로 뭔가 얻는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선 [만화->애니]라면 만화에는 없는 움직임과 목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더 오래 봐야 한다는게 흠이지만("원피스" 같은 작품은 2~3편의 만화 내용을 바탕으로 3~4편의 TV판 애니를 만들기도 하니...) 그만큼 더 재미있게 볼 수도 있지요. 소설로 옮긴다면 원작에서는 표현하지 못한 내면의 깊이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볼거리'는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물론 [소설 -> 만화/애니]라고 해도 그림을 즐길 수 있으니...)

  그러나, [애니 -> 만화]의 경우는 그만큼 좋은 작품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정보량은 훨씬 줄어들고, 표현할 수 있는 내용도 한계가 있으니...

  이럴 때는 아예 완전히 다른 컨셉의 작품("에반게리온 이카리 신지 육성 계획" 등)이나, 외전 스토리("천지무용 료오키!")를 펼쳐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캐릭터의 인기에 편승한 '코드 기어스 3종 세트' 같은 사례라면 아무래도 재미를 살리기는 쉽지 않지요.

  코드기어스라는 만화 자체가 상업성을 염두에 둔 작품인 만큼, 이런 작품이 나올 가능성은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러럴 스토리 작품"을 동시에 3개를 내놓을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지요. (그리고 이걸 봐야만 하는지...)

  사실 저는 "코드 기어스"라는 작품은 상업적으로 뛰어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작품으로서의 완성도가 높은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만, 최소한 상업적인 애니메이션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흥미롭고 인기를 얻을만한 요인을 잘 배치한 기획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탄생한 "만화 3종 세트"는 어딘지 부족해 보입니다. 내용도 그렇고 연출도 그렇고... 본래부터 서사 구조보다는 캐릭터성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당연한 얘기겠지만...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들이라면 애니메이션의 내용과 같은 "반역의 를루슈" 외의 얘기는 흥미를 가질지도 모릅니다. (캐릭터의 팬이나 오타쿠들이라면 당연히 볼테고...) 하지만, 결국 원작과 같은 내용이니 흥미가 덜합니다.

  말하자면 "그때 저 사람은 뭘 하고 있었나?" 같은 내용으로 보이기 쉬우니... 그리고 원작의 팬이 아니라면 "결국 비슷한 얘기를 3개나 봐야 하냐?"라고 반문하겠지요.

  또 하나의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캐릭터가 넘쳐나고 -특히 여성 캐릭터가- 비슷하게 보이는 작품인데, 3종 세트 각각 만화가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림의 수준을 생각하기에 앞서 만화마다 어느 캐릭터가 어느 캐릭터인지 헛갈리고 복잡, 복잡...

  결론적으로 "코드 기어스 만화 3종 세트"는 -여타 광팬 대상의 기획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어차피 낼거라면 3개 다'라는 시도는 참 독특하다고 생각하지만, 살짝 살펴본 것만으로 돈벌이 목적이라는게 여실히 보이는 작품 3개를 돈을 내고 사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봐야 겠지요. 3종 세트라고 말했듯, 왠지 3개를 묶어야 1개 값어치를 할(지도 모르는) 듯한 느낌이 역력하니 말입니다.

  물론, 코드기어스의 광팬, 캐릭터의 광팬이라면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는게 하나의 매력이 될 지도 모릅니다.



추신) 근래에 들어 일본 만화계에서 이런 편승 상품이 늘어납니다. 만화만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라이트 노벨이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미디어 믹스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것이 그만큼 매력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원작을 아예 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그 작품이 새롭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작에 이미 있는 내용, 똑같은 이야기를 만화로 다시 볼 필요가 있을까요? (게다가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 노벨 등을 원작으로 만화를 쓰면, 대개 이야기가 삭제되거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등 축소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만화->애니]일 때는 반대로 외전 이야기를 새로 넣는 일이 많지만...)

  물론 그 중에는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의 외전인 "어떤 과학의 초전자포"처럼 완전히 다른 외전 작품을 기술하는 일도 있지만,(앞서 말한 오쿠다판 "천지무용 료오키!" 역시 비슷한 사례이지요.) 대다수 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다운사이징'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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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편과는 다른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어떤 과학의 초전자포. 세계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그 결과 원작 세계를 좀 더 충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 ]

  이런 작품을 만들 때는 뭔가 특별한 것(이를테면 이야기를 만들고 창작하는 능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야기꾼에게 필수적인 '교양'도 필요하지 않지요. 필요한 것은 단지 콘티를 짜거나 재구성하는 '기술'만 있으면 되지요. 그러다 보니 신인 작가들이 맡는 일이 많고 만화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도 뒤지는 일도 많습니다.

  일본 만화 창작 작품의 수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잡지는 생겨나고 새로운 작가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일부를 제외하면 매체만 바꾼 타입의 작품 수가 부쩍 늘어나고(애니메이션 역시 상당 수가 '라이트 노벨'이나 '게임'이나 '만화' 원작이지만...) 이른바 제대로 된 창작 작품은 그다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분야의 쇠퇴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요? 만화 생산이 정점을 찍은 90년대 중반 이후 휴대용 게임기나 휴대폰, 휴대용 TV 등 휴대 기기의 발달로 만화를 보는 인구와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독서 인구 자체는 많이 줄지 않았지만, 만화를 보는 사람들의 숫자와 그 시간은 90년대 이후 거의 절반 이하로 감소... 즉, 책을 보는 사람 중에서 만화를 보는 사람의 비율이 대폭적으로 줄어든 것입니다.(특히 청소년 층에서 만화를 보는 이들이 줄어든데는 라이트 노벨이나 하이틴 로맨스 등 만화 이외의 읽을 거리가 늘어난 것도 영향이 있을 듯 합니다.)

  드래곤볼의 작가인 토리야마 아키라씨는 전국에서도 손꼽는 수입을 올렸지만, 2000년대 최고 인기작 원피스의 오다 에이치로씨의 수입은 아무래도 그에 비해 떨어지는 편...(점프 자체의 판매량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 시점에서 권수가 더 많음에도 단행본 누계 판매량은 드래곤볼과 비슷하니, 결국 권당 판매량은 원피스가 더 적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보니 특히 만화 시장의 주역이 아닌 업체들은 1차 창작물보다는 2차 창작물에 관심을 가집니다. 심지어 "월희", "쓰르라미 울적에"처럼 동인 시장의 인기작을 끌어오기도 하지요.(이들의 인기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 탓도 있겠지만, '동인 제작'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만화 원작 영화가 늘어나는 할리우드처럼 일본에서도 원작이 있는 작품의 만화화, 애니화가 넘쳐나며 실질적인 창작 작품 수는 도리어 줄어드는 상황... 게다가, 원작 작품이라는 것은 대부분 '오타쿠' 취항의 미소녀(모에) 작품들... 오직 캐릭터 상품의 판매로만 승부하는 싸구려 스테레오 타입들이 넘쳐나고 있지요. 게다가 그 완성도는...-_-;;

  이러한 변화는 공유 사이트의 범람과 경기 침체 등으로 DVD 판매와 광고 수익이 줄고 수익이 오타쿠의 모에 캐릭터 시장 중심으로 편중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충대충 그린 미소녀 애니메이션의 수익이 독특한 아이디어를 갖고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에 비해 훨씬 높은 결과가 나오고, 결론적으로 작품성에 승부하는 업체들의 수익률이 떨어지면서 이른바 '명작'의 숫자는 격감하는 것이지요. (2006년에 선보인 <펌프킨 시저스>가 무너진 후 스튜디오 곤조가 <마르두크 스크램블> 등의 제작을 취소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 결과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애니, 만화 작품 속에서 볼만한 것이 별로 없는 현실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작품은 넘쳐나지만 정말로 볼만한 작품이 없는 우리나라 '대여점'의 현실 그대로죠.

  물론, 일본은 그나마 낫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인층을 위한 만화 잡지, 청소년 만화 잡지, 그리고 월간지가 있어 완성도 높은 작품이 등장하니까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런 만화 잡지에서는 모에만을 내세운 미소녀 만화 쪽이 훨씬 인기가 떨어집니다.) 이를테면 <해황기>처럼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대할 수 없고, 캐릭터 상품은 더더욱 안 팔릴 만화가 자그마치 40권에 이르도록 이어지고 있으니...

  반면, 대여점 이외의 시장이 존재하지 않고 그나마 나오는 만화는 모두 일본 만화(망가)의 모에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더더욱 슬픈 현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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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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