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개봉한 헐리우드의 SF 블록버스터 영화 '크리에이터'를 보았습니다. 감독은 '스타워즈 로그원'을 만들고 7년 만에 신작을 발표한 것이라고 하고, 그래서 그런지 화면 하나하나 정성이 느껴졌고 SF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극장에 관객이 별로 없더군요. 완성도에 비해 호불호도 갈리고 있고... 

    

실은 그럴만도 한 것이, 작품의 메인 테마부터 신선할 게 별로 없고, 어쩌면 SF 장르에서 너무 오래 써 먹은 고리짝 물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I와 인간의 대결"이라는...
멀게는 100 여 년 전 카렐 차페크의 R.U.R. 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가깝게는 터미네이터로 40 년 전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20년 전 매트릭스 트롤로지로 그 붐이 끝나다시피 했었던 그 테마를 "또 다시" 정면으로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안타깝게도 20~30년전과 지금은 관객의 눈높이가 많이 다릅니다. 2019년에 나온 터미네이터 6편 다크 페이트는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흥행에 망하다시피 했고, (20년 만에 나온) 2021년작 매트릭스 4편 리저렉션도 코로나 기간이었다고 하지만 제대로 화제조차 되지 못하였고 사실상 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터'라는 최신 영화가 다루는 테마는 더 이상 관객들에게 먹히지 않는 식상한 이야기 입니다.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가 식상한 것이라면, 그 이야기를 전개하고 풀어내는 방식이 참신하거나 뛰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식상한 이야기도 설득력과 감동을 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는 산만하게 전개되었고, '참신한 뭔가'라든지 '예상하지 못한 반전' 등은 전혀 없었습니다. 떡밥을 뿌려대면서 궁금증을 유발하는 전통적인 방식마저 거의 사용하지 않고, 그냥 평이하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 그나마도 산만하게... 

그 와중에 1980 년대와 1990 년대 크게 화제가 되었던 영화 애니메이션에서 한 번 쯤 보았을 만한 장면을 통채로 가져 온 것이 너무 많아서, 오타쿠의 SF에 대한 덕심에 기인한 오마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오마주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지적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였고, 몰입에 방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몇 군데 은근슬쩍 끼워 넣어 놓았다면 SF 골수 매니아 입장에서 숨은 아이템 찾는 재미라도 있을 것인데, 그게 도가 지나치게 많으니 원...

'브래드버리'라는 이름의 여성 병사가 어이없이 전투 중에 죽어 사라지는 엑스트라로 소모되고, 메모리스틱에 죽은 사람의 기억을 담아 사이보그에 연결하면 다시 부활한 것처럼 사이보그가 기억을 이어받아 활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철통같은 방어가 쳐진 구체 모양의 방(또는 감금실?) 안에는 어린이 모습의 최종병기가 TV를 보고 있고... 

SF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오타쿠 출신 감독이 작품 중에 대 놓고 덕질하는 케이스로는 안노 히데야키도 있었지만, 어떻든 안노 히데야키 감독은 나름의 스타일리쉬한 연출과 고급진 구석이 있어서 덕질로 도배를 하더라도 그만의 독특한 색깔로 인해 봐줄 만 했습니다. 그런데 '크리에이터'의 경우에는 평이한 연출력과 이야기 전개를 덕질로 덮어버리는 모습이어서, 그 덕질이 빛나지 못하고 있었죠.

      

그나마 인상적었던 것은... "AI vs. 인간"라는 고전적인 테마의 틀 안에 있기는 하지만, AI는 평화를 원하고 인간은 AI를 말살하는 전쟁을 추구하는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평화를 원하는 쪽의 손을 들어주기까지의 입장 변화를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디즈니 영화답게) 주연과 주연급 조연을 백인이 아닌 흑인, 동양인으로 캐스팅한 것도 나름 이채로왔고... 

심지어 미군을 궁극의 악역으로 묘사하고 아시아(또는 중국)의 AI + 인간 혼성 군대를 선역으로 묘사하였는데, '람보2' 시절의 헐리우드 영화를 뒤집어서 패러디하고 있는 모습으로 느껴지기도 하였고, '아바타'의 오마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나름 감독이 용기를 낸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