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의 특징은 인간이 다른 대상과 교류한다는 점입니다. 외계인이나 인공지능, 인조인간 등이 사람을 상대합니다. 인류는 이들과 소통하거나 혹은 싸우면서 자신을 돌아보죠. 인간 이외의 존재가 인간의 거울이 된다는 구성인 셈입니다. 이 중에서 인공지능(로봇)은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람과 닮아가고, 이런 점이 흥미를 끌어 자주 쓰이죠. 대략적인 레퍼토리는 서툰 인공지능이 사람과 교류하며 점점 감정을 익히다가 끝내 인간과 비슷해진다는 식으로 흘러갑니다. 인공지능과 소통하는 인간 역시 상대가 같은 사람이 아닌데도 너무나 감성적인 모습 때문에 또는 자신의 감성을 투영해서 끌리거나 하죠. 아시모프가 쓴 구닥다리 양전자 두뇌부터 이어져 오는 주제입니다. 피그말리온 신화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기술적인 문제가 끼어들어 갈등으로 번진다는 점이 큰 차이입니다. 어디까지 인간적이고 그렇지 않은지 기계를 묘사하는 방식도 중요하고요.



스파이크 존즈가 감독한 <그녀>도 대략 비슷한 내용입니다. 근미래 도시에서 가상 인격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아내와 헤어져서 지치고, 우울하고, 위로가 필요한 남자죠. 하긴 주인공의 사정이 중요한 게 아닐 겁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고, 가슴 한구석에 커다란 상처 하나쯤 있기 마련이니까요. 세상에서 사람을 대하는 것만큼 힘든 게 없다는 말이 있죠. 사회적 동물이라서 천 년 동안 소통 기술을 발전시켰네 어쨌네 합니다만. 그래도 끊임없이 충돌하고, 서로에게 맞추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이런 게 무서워서 아예 대인관계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남과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에게 딱 맞는 대화 상대가 나타나면 어떨까요. 항상 유쾌하고, 기분을 알아주고, 부담 없이 말을 걸 수 있는 상대 말입니다. 그것도 사람이 아니니, 상처 입을 일도 없고요. 그야말로 이상적인 관계처럼 보입니다만.



주인공 시어도어 톰블턴은 이렇게 가상 인격을 대하며, 점차 절실한 인간 관계에 눈뜹니다. 가상 인격 역시 시어도어에게 배우며 사람과 가까워지려는 욕구를 드러내고요. 둘의 감정이 처음과 달리 어떻게 바뀌는가에 따라 주위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달라집니다. 가상 인격이라고 해서 마냥 편한 건 아니라, 때로는 다투고 토라질 때도 있습니다. 인간과 유사한 인격체이니만큼 맞지 않는 구석이 있을 수밖에요. 중요한 건 그런 부분을 어떻게 극복하고, 서로를 배려하느냐 이겁니다. 시어도어는 언제나 자신을 상대해주는 가상 인격 덕분에 그런 점을 차차 배워갑니다. 이런 부류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 양쪽이 완전히 만족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만. 사실 그 점은 같은 인간과 상대한다 해도 마찬가지고, 어디까지 자신을 맞춰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가상 인격체가 프로그램대로 행동하는지, 정말 감정이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다른 이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갔으니 그거면 충분해요.



영화는 이렇듯 서로의 감성을 보듬고 가다듬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할애합니다. 그래서 시어도어와 가상 인격의 대화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둘의 대화는 때로는 유쾌하게, 귀엽게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마음을 자극합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 때문에 좀 불편해할 관객도 있겠네요. 둘이 그냥 만담만 주고 받는 게 아니라 굉장히 진하고 깊은 관계까지 가거든요. 주저하지 않고 노골적인 부분까지 건드리는 터라 기분이 찜찜할 수도 있겠습니다. 뭐, SF 장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인공지능이 벌이는 온갖 해괴한 짓에 익숙할 테니 상관 없겠지만요. 그런 걸 잘 모르는 일반 관객은 이상하다고 볼 수도 있을 듯. 그런 만큼, 배우의 연기가 중요하기 마련인데, 호아퀸 피닉스의 표정과 말투는 정말 끝내주네요. 보이지 않는 상대와 대화하며 자기 감정을 표출하는 솜씨가 능수능란해요. 사실상 모노 드라마에 가까운데, 2시간 가량의 상영시간을 혼자서 다양하게 끌어갑니다.



인공지능이 주연이지만, 뭐 그리 기술적인 부분은 파고들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런 의도로 만든 작품이 아니니까요. 비교하자면, 음,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나 <프로스트와 베타> 같은 식이죠. 인공지능은 그리 대단하거나 새로울 건 없습니다. 어디서나 봤음직한 일처리 잘 하고, 말상대 잘 해주고, 점차 진화하고, 인간과 비슷해지려는 여성 인격이에요. 가상 인격의 변화에 관해서 철학 전공자들이 봤다면, 실존에 관해 논하겠지만…. 그런 부분은 잘 모르는 터라 여타 작품에 나온 인공지능과 그리 다르다는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 그 자체보다 감정을 교류하는 방식이 꽤 파격적이라 놀랐습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목소리 연기는 스칼렛 요한슨이 맡았는데, 호아퀸 피닉스와 호흡이 아주 딱딱 맞네요. 좀 더 목소리 좋은 배우 아니면 전문 성우가 맡았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습니다만. 멋진 연기를 보여줬으니,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이걸 우리나라에서 더빙한다면, 어떤 성우가 맡으려나.)



감각적인 영상과 마음을 울리는 음악도 빼놓을 수 없겠죠. 시어도어의 사무실이 자주 나오는데, 색감이 참 화사하네요. 도대체 저런 식의 색깔 배치는 어떻게 신묘하게 하는 건지. 디자이너들이 비율 맞추느라고 애 좀 썼을 것 같아요. 대화의 주 무대인 방 구조도 센스 넘치고, 대도시의 풍경 역시 산뜻하게 담아냅니다. 영화를 보노라면, 저런 식으로 도심지를 한가롭게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잔잔하면서도 짠~하게 적시는 음악은 백미. 아무래도 주인공 중 하나는 목소리만 나오다 보니까, 감정을 배가시켜줄 장치가 필요했을 겁니다. 음악이 표정 연기나 존재감을 대신했다고 봐요. 배우들이 직접 부른 Moon Song이 좋은 평가를 받던데, 저는 피아노 곡이 더 기억에 남네요. 사진 대신 만들었다는 그 곡이 좋았습니다. 영화가 재미없는 사람이라도 배경음악 때문에 귀를 호강할 수도 있겠네요.



비단 대인 감정의 변화를 다룬다는 점 외에도 해석할 여지가 무궁무진합니다. 누군가는 인터넷과 소외된 사람들을 볼 것이고, 누군가는 재미있는 여성과 무능한 남성의 로맨스로 보겠죠. 다양하게 발전하는 포르노 산업이나 개인의 취향을 두둔하는 내용으로 읽을 수도 있겠네요. 그만큼 곳곳에 비유적인 장치를 속속들이 들여놨습니다. 오버 테크놀러지는 아니지만,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기기들도 볼만하고요. 특히 시어도어가 자주 하던 우주인 탐험 게임은 한 번 해보고 싶더군요. 오큘러스와 인공지능이 만나면, 그렇게 되려나. 하도 호평이 많아서 어떤지 궁금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감각적이고, 참신하고,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평론가들의 호평 일색이 무색하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