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가장 유명한 첩보원일 007 50년 생일을 맞았다고 합니다. 원작자 이안 플레밍은 자기 경험을 살려 1953년 제임스 본드라는 소설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본드를 주인공으로 1962년 영화 <닥터 노>가 나왔고, 20여 편을 거쳤습니다. 숀 코네리부터 다니엘 크레이그까지 여섯 명의 배우를 바꿔가며 2012년 지금까지 장수했죠. 제임스 본드는 스파이의 대명사가 되었고, 첩보물 공식을 성립했으며, 이에 관한 반발이나 패러디도 줄줄이 쏟아질 지경이었습니다. 시리즈가 오래 되다 보니 인기가 시들해진 적도 있었으나, 항상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왔습니다. 필경 앞으로도 더 많은 시리즈가 나올 듯하고요. 그러니 새로 선보이는 영화 <스카이폴>은 반 백 년의 깃발을 꼽는 작품인 셈입니다. 당연히 여타 시리즈와는 의미가 남다르겠죠. 아카데미 상에 빛나는 샘 멘데스가 감독으로 들어서고, 기념비적인 작품을 내놓기 위해 거창한 막을 올렸습니다.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고민이 엄청났을 것 같습니다. 우선 당면한 사실은 제임스 본드가 너무 낡았다는 문제입니다. 50년이나 되었다는 건 대단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볼장 다 봤다는 소리입니다. 007 시리즈의 내용 전개나 스타일은 누구라도 알만 합니다. 요즘 관객은 제임스 본드처럼 느릿하고 여유 넘치는 스파이를 골동품 취급합니다. 격렬하고, 치밀하고, 복잡한 캐릭터만이 현대 문화에서 살아남는 까닭입니다. 90년대 시리즈를 부흥시켰던 마틴 캠벨은 이를 의식하고,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새로운 버전을 고안합니다. 기존 시리즈의 공식을 모두 버리면서 대세에 부합한 캐릭터를 만들어냈죠. 그게 바로 <카지노 로열>이었고, 이 발상이 제대로 먹혀서 제임스 본드는 다시금 액션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샘 멘데스 감독은 이 기세를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제임슨 본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역동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첩보 액션을 찍었을 수도 있었겠죠. 대다수 관객들도 그걸 원했고요. 하지만 50살이나 먹은 캐릭터가 그러기엔 자존심이 너무 강했던 걸까요. 영화 <스카이폴> 90년대 이전 시리즈의 방식으로 회귀합니다.


어찌 보면, 이는 모범적인 답안입니다. 20여 편의 시리즈가 나왔고, 이제 막 50주년 시리즈를 찍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그냥 요즘 취향대로 촬영하면 될까요? 남들이 하는 걸 따라서?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서야 어디 기념비적인 작품이 나오겠습니까.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인지상정이죠. 그래서 제작진은 팬들을 위해 종합 선물 세트를 마련했습니다. 위 문단에서 007 시리즈의 내력을 줄줄 설명한 까닭은 <스카이폴>이 그 역사를 집대성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좀 보태면, 이 작품은 영화의 탈을 쓴 007 역사서라고 해도 됩니다. 1962년부터 2008년까지 제임스 본드가 어떻게 활약했고, 얼마나 바뀌었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되짚어 갑니다. 악당이 나와서 테러하고, 주요 인물들이 갈등을 겪고, 자동차 추격하고 폭발하고 등등의 요소는 어디까지나 매개체일 뿐입니다. 007의 시대 흐름을 보여주기 위한 매개체 말입니다. 냉전 시대에 태어나 새천년을 살아가는 본드를 보노라면 무심한 세월까지 느껴집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007 시리즈가 구식이라는 건 제작진도 뼈저리게 자각하는 사실입니다.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50년이란 시간이 꽤 묵직합니다. 모른 척 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고 인정해야지 어쩝니까. 그래서 그런지, <스카이폴>은 구시대임을 자조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아니, 그냥 많다고 하기보다 아예 영화 자체가 구시대 캐릭터를 자조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옳겠군요. 이 작품은 시종일관 자신에게, 관객에게, 세상에게 자문자답합니다. “맞아, 나는 늙었어. 나이도 많고, 시대에도 뒤쳐졌지. 하지만 그만큼 쌓아온 경력도 있고, 인지도도 괜찮고, 뚝심도 만만치 않아. 그러니까 지금껏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나올 거야.” 흐음, 어쩔 때는 하도 노골적으로 이런 심정을 내비치는지라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노인네라는 걸 그렇게까지 티 내야 하다니요.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런 과정은 언젠가 겪고 넘어가야 할 통과의례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제임스 본드의 성장을 죽 지켜본 입장이라면, 지난 세월을 회고하는 <스카이폴>이 감동적일지도 모릅니다. 본드의 말투, 행동거지, 소품, 차량, 분위기, 음악 등등이 오마쥬에서 오마쥬로 이어집니다. 다사다난한 20여 편을 거치면서 매듭을 짓고, 다시금 힘찬 도약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신나게 때려부수는 액션 영화를 찾은 관객이라면 지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외로 이번 작품은 스케일이 작습니다. 뉴욕을 무대로 형사의 활약을 그리는 다이하드 시리즈보다 더 작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액션 시퀀스도 그리 화끈하지 않으며, 액션의 비중이 결코 크지 않습니다. 줄거리가 반전을 거듭하는 것도 아니고, 플롯이 꽉 짜이지도 않았습니다. 악당의 계략 역시 판이 크다고 하기엔 좀 치졸합니다. 그러니 <카지노 로열>의 모던한 감각을 기대한 관객 역시 실망할 공산이 큽니다. 밋밋한 전투와 느슨한 줄거리, 음울한 분위기에 깜빡 잠드는 관객도 없지 않을 겁니다.


다만, 호흡이 느린 건 어디까지나 의도적인 장치일 뿐, 연출력의 한계는 아닙니다. 감독의 전작인 <로드 투 퍼디션>이나 <자헤드>를 봐도 쾌속질주하는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심지어 <자헤드>는 전쟁물임에도 제대로 된 전투 장면조차 없습니다. 이쯤 되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이 양반을 감독 자리에 앉혔다고 봐야겠지요. 샘 멘데스 감독은 호흡이 느리다는 단점을 만회하기 위해 색감에 공을 들였습니다. 각 장면마다 저마다의 색깔이 뚜렷해서 비주얼이 눈에 확 들어와요. 카메라 감독 로저 디킨스의 솜씨는 역시 어디 안 가더군요. 거장의 손길답게 정말 능수능란한데, 영화가 재미있건 없건 이 부분은 모든 관객이 공감할 것 같습니다. 화려한 야경, 거대한 초원 풍경, 축축하고 암울한 도시 등 멋진 그림이 연속으로 지나갑니다. 그림 감상은 천천히 해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이는 한 걸음 느릿하게 걷는 제임스 본드와 잘 어울리고, 그래서 빨리 달리기에 급급한 요즘 첩보원에게 없는 품격이 있습니다. 평론가들이 하나같이 현대의 고전 운운한 이유가 있었네요. 블록버스터로서는 이례적인 도전이라 대중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본드걸의 활약이 별 거 없다는 의견도 많던데, 사실 이번 영화의 진짜 본드걸은 M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의 M은 단순한 첩보 부서의 상관이 아니라 보호자 같은 느낌까지 줍니다. 제임스 본드를 발굴하고, 지켜주고, 아껴주고, 한동안 집을 떠났어도 따스하게 반겨주는그런 이미지가 겹치더군요. 여성이라는 점에서 일부분 어머니 같은 모습도 보여줍니다. 완전한 어머니 상이라고 하기엔 모자라는 감이 있지만요. 그리고 보면, M을 비롯하여 유독 이 작품에는 본드를 둘러싸고 도와주는 인물이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인물들이 본드와 신뢰를 쌓고, 사건을 해결하고,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하나의 조직을 완성하죠. , 조직이란 단어가 좀 딱딱하면 유사 가족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완성된 조직(가정)에서 제임스 본드는 지난날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작품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말입니다. 제작진이 50주년을 기념하며 노린 점도 이것이겠죠.


배우들의 연기도 관록이 묻어나는 쪽입니다. 제임스 본드, M, 말로니, 악당까지 품위를 유지할 줄 압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여전히 성미 급하고 거칠지만,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는 쪽으로 변했습니다. 생김새가 워낙 근육질이고 거구라서 노동자 같은 이미지를 완전히 벗지는 못하겠지만, 제임스 본드의 명성에 부합할 정도는 됩니다. 주디 덴치가 연기하는 M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말로니 역의 랄프 파인즈도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 하비에르 바르뎀의 존재감이 굉장합니다. 고의적으로 첫 등장을 롱테이크로 길~게 잡아주는데, 고전적이면서도 사악한 악당임을 부각하기에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본드와 대면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온 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나긋하고 부드러운 영국식 미치광이를 보여준 것도 점수를 주고 싶어요. 소리만 질러대는 미국식 사이코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액션 장면에서는 그런 광기가 살아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럭저럭 봤습니다만, 올드 팬과 신세대를 동시에 사로잡을 작품인지는 좀 의문입니다. 잘 만들고 좋은 영화라는 건 인정하지만, 잘 만든 영화가 항상 재미있진 않으니까요. 특히나 이전작 <퀀텀 오브 솔러스>까지만 해도 현대물 추세를 따르다가 고전으로 복귀한 것도 너무 갑작스럽고요. (아마 대부분 관객들은 <카지노 로열> 분위기를 기대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반 백 년을 회고하며 새 출발하는 제임스 본드가 앞으로 어떻게 활약할지 궁금해집니다.


007 시리즈의 또 다른 특징은 SF 소재를 자주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위성을 이용한 지구정복, 개인용 비행 로켓, 손목에서 발사하는 레이저, 각종 장치를 부착한 차량 등등. 이런 특징은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이던 90년대 시리즈까지 자주 나왔습니다. 분위기를 전환한 <카지노 로열> <퀀텀 오브 솔러스>는 그렇지 않았죠. 최대한 현실감을 추구했는데, 레이저총 쏘면 어색할 테니까요. 아예 Q라는 존재까지 무시하잖아요. 하지만 이번 편부터는 고전 007을 의식해서 그런지 소소한 신무기가 등장합니다. 손목 레이저 같은 SF 물품이 다시 나올지야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이왕이면 꼭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첩보물에는 별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007 시리즈를 챙겨보는 이유가 저것 때문이거든요. 당시의 과학 기술상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도 볼거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