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이 항상 위대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B급 마인드로 만들었지만, 그 쌈마이한 마인드가 오히려 충격적이라서 유명세를 타는 경우도 있습니다. 1982년 존 카펜터가 만든 <더 씽> 역시 그런 사례에 속합니다. 개봉 당시는 흥행도 별로 못했고, 평도 안 좋았다고 하죠. 허나 세월이 흘러 재평가를 받으면서 지금은 빼놓을 수 없는 외계 침공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작품이 꾸준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데, 우선 실감나게 만든 괴물의 변이 과정이 볼만합니다. 정교한 수작업으로 만든 시각효과는 가볍고 느끼한 컴퓨터 그래픽에 없는 현실감을 제공합니다. 괴물 디자인은 악취미라고 할 정도로 기괴하지만, 한편으로는 재치와 상상력이 돋보여요. 이 디자인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이며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외계 생명의 정체를 둘러싼 갈등과 불신은 가히 밀실 살인 미스터리에 비견될 정도로 손에 땀이 배입니다.


2011년 개봉한 <더 씽>은 존 카펜터 영화를 원작 삼은 프리퀄입니다. 프리퀄과 시퀄의 제목이 똑같은데, 제작진은 원래 리메이크를 만들려고 했다는군요. 프리퀄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 나중에 방향을 선회했고요. 그래서 그런지 신작은 리메이크 흔적이 많이 남았으며, 구작의 전개와 설정을 거의 그대로 따라갑니다. 게다가 구작과 이어져야 하므로 사실상 결말이 딱 정해졌다는 한계도 있죠.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외계 생명체가 무슨 짓을 벌일지, 결말이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갈 겁니다. 시퀄과의 차별성을 위해서 우주선을 보여주기도 하고 여성 주인공을 부각시키기도 하는데, 신작만의 거창한 재해석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고요. 원작의 장점을 수용한 건 좋은데, 너무 모범생처럼 따라 가기만 합니다. 하지만 원작의 추억을 다시 맛보고 싶거나 기괴한 B급 SF물을 바라는 관객에겐 더없이 좋은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약간 아쉬운 구석이 있었으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몰입해서 봤습니다.


전체적인 평가는 이쯤 하고, 신작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더 씽> 구작과 신작의 치명적인 내용누설이 있으므로 영화를 안 보신 분께선 주의하세요!


구작 줄거리는 남극 기지의 대원들이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고 감염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작 역시 대략적인 전개는 비슷합니다. 국적이 노르웨이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남극 기지가 나오며, 탐사 과정에서 외계 존재를 발견하고, 괜히 접촉했다가 사건이 터집니다. 애당초 프리퀄은 결말이 정해진 터라 줄거리에 한계가 있겠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판박이란 걸 부정하기 힘듭니다. 보는 내내 익숙한 장면이 계속 이어지더군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어땠을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문제였을 것 같네요. 똑같이 남극 기지가 배경인 이상, 특별히 다른 이야기가 성립하기도 힘들고, 이야기가 너무 달라지면 원작과 멀어진다고 또 욕먹었을 테니까요. 제일 좋은 방법은 남극 기지가 아니라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건데, 이러면 원작과 이어지기 힘든 데다가 남극만큼 외계인의 은신처로 잘 어울리는 장소도 없긴 합니다.


괴물 시각효과는 구작처럼 현실감이 넘치지는 않습니다. 컴퓨터 그래픽 처리를 한 부분이 많고, 수작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래픽으로 보정했습니다. 70~80년대 SF 영화에 나왔던 투박한 매력을 기대했는데, 그런 면은 덜합니다. 대신 괴물에게 일정한 형태가 없다는 걸 강조하며, 변이 과정은 더 자세히 보여줍니다. 그래픽은 가벼운 느낌이 있어도 표현의 자유는 더 넓으니까요. 괴물이 인간을 흡수해서 변하거나 이동하면서 자유자재로 바뀌는 장면은 구식 수작업으론 묘사할 수 없죠. 시각효과를 떠나서 디자인은 ‘깔끔해졌다’는 평을 듣는가 봅니다. 원작이 무서운 블랙 코미디로 보일 만큼 황당한 발상을 했다면, 이번 신작은 그게 부족합니다. 머리에서 다리가 돋아나고, 결국 몸뚱이가 되는 장면은 참 어이가 없으면서도 소름 끼쳤는데요. 감독이랑 제작진이 약 빨고 만들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신작은 흉측하고 무섭기만 할 뿐, 돌발적으로 튀는 부분이 모자랍니다. 당당하게 B급임을 의식하지 않고, A급을 흉내 내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쌈마이 마인드가 좀 더 충만했으면 싶었습니다.


원작은 대원들의 갈등 구조가 밀실 사건과 유사했습니다. 외계 생명체는 사람을 복제하므로 겉으로만 봐서는 누가 진짜 인간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외계인이라고 추정할만한 혐의가 모두에게 조금씩 있습니다. 외계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 잠깐 자리를 비운 사람, 아무도 안 보는 곳에 있었던 사람 등등 다들 감염자라고 의심할만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불신했고, 관객조차 누가 진짜 범인(?)인지, 진짜 범인이 있긴 한 건지 혼동했지요. 심지어 주인공이 범인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이와 달리 신작은 극한 상황에서의 혼란을 조명할 뿐, 미스터리로 끌고 가진 않습니다. 증거를 없앴다며 동료를 의심하는 장면이 두어 번 나오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이런 의심이 쌓이고 쌓여서 하이라이트로 뻥 터져야 하는데, 갈등 구도가 약하니 하이라이트도 없지요.


밀실 사건에서 제일 빛나는 부분은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는 장면이죠. 이는 <더 씽>도 그렇습니다. 원작에서는 외계인을 골라내기 위해 혈액 검사를 했고, 감염자가 어쩔 수 없이 들통났습니다. 과연 누구 혈액에서 반응이 나올지 지켜보는 순간이 참 조마조마했지요. 신작에서는 혈액 검사 기기가 불타서 다른 방법을 씁니다. 괴물이 무기체는 복제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치아 보충제가 없는 사람을 가려냅니다. 그런데 이는 완벽한 선별법이 아니죠. 치아가 건강해서 보충제 안 쓰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용의자도 무려 4명이었고, 그 중에서 누가 제일 의심스러운지 판별하지도 못합니다. 즉, 주인공은 누가 괴물인지 밝혀내지 못했고, 우발적인 폭발 사고 때문에 정체가 드러납니다. 뭔가 필연적인 이유로 괴물을 찾아내야 그럴 듯한데, 우연히 정체가 밝혀지니까 김이 좀 샜습니다. 으음, 주인공이 생물학자인 만큼 뭔가 더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설마 그 사람이 범인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신작이 원작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우주선일 겁니다. 원작에는 우주선이 잠깐 나오고 그쳤지만, 신작에서는 사람이 들어가 돌아다니며 자세히 보여줍니다. 인테리어는 그리 특별한 건 없고, 격자로 쪼개지며 조립을 반복하던 구조물이 기억에 남습니다. 항법장치인지 뭔지 용도는 모르겠으나, 끊임없이 형태가 바뀌는 모습이 외계인의 정체를 비유하는 듯했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여성인 것도 원작과는 정반대입니다. 커트 러셀이 다소 마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면, 메리 윈스티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입니다. 일찌감치 괴물의 특징을 파악하고 막아보려 하지만, 상대가 워낙 괴악한지라 사태가 악화되는 걸 막지 못하죠. 아무에게도 인정 못 받고 혼자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중년 남성인 탐험대장과 자주 대립하는데, <에일리언>에서 달라스와 다투던 리플리가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라는 주제까지 가진 않습니다.


프리퀄이라서 그런지 원작과 이어지는 장면도 깨알같이 등장합니다. 노르웨이 기지의 전반적인 풍경이나 아수라장이 된 내부, 얼어 죽은 대원, 괴물의 불타버린 시체 등은 물론이고, 결말은 원작 오프닝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저는 원작을 본 지가 좀 되어서 정확히 어떤 장면이 이어지는지 가물가물한데, 대충 기억나는 게 저 정도네요. 다만, 원작의 오프닝과 이어지는 장면은 엔딩 크레딧의 쿠키에 가깝습니다. 감독이 의도한 진짜 결말은 주인공 혼자 생존해서 두려움에 휩싸이는 암울한 장면이에요. 충격이 워낙 컸는지 제정신을 못 차리고 멍한 표정을 짓는데, 저래서 앞으로 제대로 살아갈까 걱정입니다. 참, 원작 오프닝을 장식하고 미국 기지 사건의 주범인 그 개는 의외로 별로 안 나오더군요. 그 놈이 노르웨이 기지에서도 한 건 할 줄 알았는데, 비중이 거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나쁜 영화는 아닙니다. 원작 명성에 먹칠할 정도로 못 만든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놓고 봐도 그럴듯한 B급 외계인 침공물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딱히 자기만의 장점으로 튀는 부분도 없어요. 그 이상을 바라는 관객이라면 실망할 공산이 큽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전 80년대 SF물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만족했습니다. 어쩌면 제작진이 의도했던 것도 (원작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향수를 되살리는 거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점에서는 한 번쯤 볼만한 작품입니다.


원작 <더 씽>은 영화만이 아니라 포스터도 명작으로 쳐주죠. 신작 포스터는 깔끔하고 담백하게 만들긴 했는데, 압도적인 맛은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원작 주제음악은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했지요. 신작 주제음악도 (영화가 그렇듯이) 원작풍을 그대로 따라 가는데, 폐쇄적이고 암울한 분위기가 일품이더군요. 특히 엔딩 크레딧의 쿠기 장면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은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