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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생각하는 햇빛. <선샤인>은 이런 이미지를 송두리째 날립니다]

영화 <선샤인>은 태양이 점차 죽어가 지구에 에너지가 부족해지자 핵 폭발로 죽어가는 태양을 살리고자 하는 우주인들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핵탄두를 실은 우주선 이카루스를 보냈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연락이 끊기고 결국 임무도 실패합니다. 7년 뒤, 다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주선 이카루스 2호가 출발하지만, 태양 근경에 도달하자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으며 임무가 또 실패할 위기에 몰립니다. 처음에 단순한 재난으로 여겼던 사고는 점차 연쇄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마침내는 우주선 안에 거대한 공포를 드리웁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흔히 보는 우주선 재난 작품이랑 비슷합니다. 멀고 먼 우주에서 지구와는 연락이 두절되고, 갈 곳도 없는 선원들은 봉착한 문제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점차 우주선 내부는 아비규환으로 변해간다는 식이죠. 이 방면의 대표주자로 <이벤트 호라이즌>이 있는데,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면 좋을 듯합니다. 다만, 이 영화는 제목부터 소재 그리고 주제까지 태양을 내세우는 만큼 모든 사건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상영시간 내내 태양의 주된 이미지인 밝고, 뜨거움을 계속 강조하기에 여타 우주선 재난과는 느낌이 약간 달라요. 일반적인 우주 재난 작품들이 우주 특유의 차갑고 어두움을 드러낸다면, <선샤인>은 정반대로 사고를 일으킨다고 할 수 있죠. 물론 보다 보면 상투적인 장면도 몇 개 있습니다만, 관객의 온 몸을 태울 정도로 강렬한 소재 활용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재미는 태양이 일으키는 갖가지 사고를 어떻게 관람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비단, 우주선에게 닥치는 장애만이 아니라 태양이라는 경외감을 일으키는 존재 자체가 재미인 거죠. 사람들에게 태양이란 항상 머리 위에 떠있는 일상적인 부분일 뿐인데, 영화 속에서는 태양이 실제로 어떤 별인지 보여주며 우주가 얼마나 낯설고 위험한 환경인지 보는 이에게 충격을 던지는 거죠. 해를 보면 눈이 멀고 온 몸이 타버린다는 사실이야 상식입니다만, 근거리에서 햇빛을 온몸으로 받는 장면이나 가까이 있는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는 장면은 또 다른 감흥을 일으킵니다. 특히, 열기를 피하지 않고 그 속에 타서 녹아 들어가는 장면은 태양열이 두뇌를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하게 밝고 뜨겁다는 걸 아름다운 영상으로 비유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햇빛을 보면 그 찬란함에 광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일더군요. 아마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아침 하늘을 보면, 어제까지 봤던 해가 좀 달라 보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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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온몸이 타오르도록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태양으로 가는 여행 과정도 즐길만한 볼거리.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우주선에 공급할 산소를 만드는 산소 정원. 우주선 안에 정원을 만들고, 거기서 키운 식물이 내뿜는 산소를 저장해 소비할 공기를 유지한다는 식입니다. 우주선 안에서 녹색 식물을 키우는 장면은 잘 볼 수 없는지라 무척이나 신기했습니다. 우주에 고립된 사람들이 평정을 찾을 수 있도록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보여주는 지구실(Earth Room)은 좀 상투적인 설정이었습니다만. 우주 여행하는 우주선에 이런 장치가 없어서야 안 되겠죠.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 디자인도 독특했는데, 대도시만한 폭탄을 싣고 가는지라 반구형 폭탄 끝에 막대기 모양의 우주선이 붙어있는 형식이었습니다. 우주복 디자인은 굉장히 투박한데, 강한 태양열에 견디기 위함인지 다른 SF 영화에 나온 우주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워낙 투박하게 생겨서 우주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웃음이 나올지도) 우주여행 중 태양을 배경으로 수성이 지나가는 장면은 우주의 신비를 보여주기 충분했고요.

 

우주 선원들을 연기한 인물들도 좋았는데, 요즘 한창 뜨는 킬리안 머피가 우주선 물리학자 카파를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연기도 연기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한 그 새파란 눈동자가 참 이채로운 배우입니다.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 허수아비를 연기할 때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해요. 선장 카네다 역을 맡은 사나다 히로유키는 위험한 임무를 이끄는 카리스마를 적절히 발휘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선장은 백인 남성일 경우가 많은데, 우주선장이 동양인이라니, 좀 놀라기도 했어요. 동양인 승무원은 또 나오는데, 양자경(누님!)이 맡은 코라존이 그렇습니다. 코라존은 산소 정원을 관리하는 역인데, 직업이 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식물을 다루니까 생물학자가 아닌지 추측합니다. 조종사 메이스 역을 맡은 크리스 에반스는 <판타스틱 4>에도 나왔었는데, 다혈질적인 조종사를 잘 소화했습니다. 조종사 캐시 역할의 로즈 번은 화장 안 한 맨 얼굴인데도 청초하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이카루스 2호(그러니까 우주선 메인 컴퓨터)의 성우는 드라마 배우라고 하던데, 딱히 튀는 면은 없었습니다. 이카루스가 다른 SF의 인공지능과는 달리 인간에게 반기를 일으킨다든가 하는 점이 전혀 없는, 어디까지나 그저 기계일 따름인지라.

 

선원들이 각자 직업에 따라 역할을 분배해 행동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 모종의 이유로 우주선 궤도를 수정하는 결정권을 물리학자인 카파에게 전부 위임한다든가, 태양열에 통신탑이 불타버리니 통신 장교의 생존권이 가장 낮다고 하는 장면(이때 통신 장교의 표정이 진짜 볼만 합니다)이 그럴 듯했습니다. 조종사와 심리학자, 통신 장교, 물리학자가 진공간으로 들어가기 직전, 물리학자에게 하나뿐인 우주복을 입히는 것도 그랬고요. 핵탄두의 궤도를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물리학자이고, 이카루스는 결국 탄두를 발사하는 게 우선 임무라서 그렇다는 이유입니다. 우주선이 위험에 봉착했고, 결국 세 사람만 살려야 한다. 누구를 살리겠는가? 이런 설문은 클럽 무한발상에도 가끔 올라오곤 하는데, 그런 설문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주선의 생물학자 역할을 좋아하는 편인데, 코라존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별로 나오지 않아 아쉽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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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월드> 분위기도 나네요. 시종일관 이런 분위기라 꽤 즐거웠습니다]

 

최대한 과학에 입각해서 시나리오를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사실에 입각한 사고 발생, 그리고 과학에 입각한 문제 해결. 영화 속 대사처럼 등장인물이 하나같이 우주인이며, 과학자인 덕분에 상상 과학을 다루는 방법도 설득력 있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2001 우주대장정>이 아닙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사실에서 벗어난 듯한 장면도 보이고, 상상 과학이 좀 부족한 듯한 면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그래도 뻔하디 뻔한 액션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사실 액션이랄 것도 별로 없습니다) 이런 장면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카파와 메이스, 통신 장교인 하비가 탈출하는 부분. 절대절명의 극한 위기 속에서도 머리를 굴리며 침착하게 계산하는 게 멋지기까지 했습니다. 과학자랍시고 나와서 총질이나 해대는 블록버스터 주인공들은 좀 본 받아야. (과학자라면 역시 논리에 입각한 사고를 해야 하거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마지막 장면은 태양의 아름다움에 가슴이 벅찼다고 할까요. 너울거리는 금빛 플라즈마가 화면을 온통 수놓는 장면은 정말이지 큰 화면에서 봐야만 합니다. 이걸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본 게 너무나 아쉽네요.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찔한 태양을 보고 싶으시다면 필히 DVD급 이상 가는 화질로 감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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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급 화질로 온 몸을 불태워 봅시다]



※ 내용누설 한 가지.





영화 후반부 이카루스 1호 선장이 등장해 태양을 신성시하며 선원들을 살해하는 장면은 좀 뜬금없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프닝에서 심리학자 서릴이 햇빛을 온몸으로 받는 장면이나 카네다 선장이 빛과 열기에 홀려 자리를 뜨지 못하고 죽는 장면은 범인에 관한 복선이라고 할 수 있죠. 눈치가 빠른 관객이라면 후반부 범인이 누구일지 예측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제 경우에는 뜬금이 없다기 보다 서릴이나 카네다 선장 같은 사람도 있으니 결국 저런 태양 광신도도 나오는구나, 하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강렬한 영상미에 빠진 관객이라면 범인의 등장이 그리 갑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래도 시뻘겋게 타버린 우주 범인이라니, <이벤트 호라이즌>과 많이 닮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