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보위가 연기한 테슬라

※ 소설과 영화 <프레스티지>의 내용이 결말까지 나와 있습니다. 작품을 안 보신 분은 주의하세요.

대부분 반전이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시시하다는 말로 끝나는 영화 <프레스티지>. 영화 <메멘토>를 감독한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들고, 내용 자체가 비밀스러운데다가 우리나라에서 홍보를 할 때 '반전'을 엄청나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시사회 때는 반전 내용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명까지 받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관객들 심리가 반전만을 강조하면, 으레 다른 부분은 제껴두고 반전만 신경쓰는 법. 그런데 사실 <프레스티지>는 반전에만 목을 매는 작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서를 슬금슬금 제공하며 관객에게 미리 알리는 영화죠. 그래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소감은 반전이 시시해서 재미가 없다는 걸로 결론이 나 버립니다. 엉뚱한 홍보와 지레짐작 때문에 전체 내용을 보지 못하고 일부분만 가지고 모든 것을 평하는 셈이 되었지요. 반전 하나로만 묻어버릴 영화가 아닌데, 참 아쉽습니다.

사실 <프레스티지>의 진짜 재미라면, 복수와 경쟁에 집착하던 두 사람이 파멸해가는 충격적인 과정일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치밀한 편집과 빠른 전개, 여기에 곁들인 마술 공연이 작품의 멋을 더욱 살려주죠.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영화에서 일기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마치 미로 같은 이야기 구성을 택했습니다. 주인공은 보든과 앤지어라는 두 마술사인데, 보든의 장면에서는 앤지어의 일기를 보여주고, 앤지어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보든의 일기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알쏭달쏭하고 산만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특유의 전개 방식에 익숙해져 숨 쉴 틈 없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시간이 넘는 긴 시간이 참 짧게 느껴집니다. 이런 편집 방식은 양날의 칼이라서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재미가 없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꽤 마음에이 들더군요. 사실 <메멘토>도 그렇거니와 이 영화는 정작 결말보다 과정과 편집이 더 재미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소설과 영화 <프레스티지> 내용을 결말까지 소상히 밝히는 바이니 작품을 안 보신 분들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의견 중에는 반전이 시시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갑작스러운 장르 전환이 불쾌하다는 것도 있습니다.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이 영화에는 중반부터 순간 이동 장치가 나오더니 결국 판타지를 넘어 SF 요소까지 이릅니다. 어떻게 보자면 SF 영화라고 할 만하며, 그게 아니더라도 SF 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앤지어의 속임수나 파멸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끼어든 SF 요소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황당무계하다, 어이가 없다는 의견도 상당합니다. 그러나 저는 SF 장르를 좀 더 즐기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면, 이 영화를 그렇게 황당무계하게만 바라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르가 갑작스럽게 변한다는 시선도 줄었을 거고요.

만약 이 영화가 미래를 배경으로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SF 설정이 이상하다거나 장르 전환이라는 말이 줄어들었을 겁니다. 미래 이야기는 SF와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으니까요. '서기 2천 몇 년…'으로 시작하는 영화에 로봇이 나온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죠. 하지만 SF는 단지 미래에만 국한한 장르가 아닙니다. 그리고 소재가 어느 하나로만 정해지지도 않았고요. 시대가 과거이든 현재이든 상관 없습니다. 비록 19세기에 순간 이동 장치가 나왔다고 해도 과학에 상상력을 더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SF가 될 수 있습니다. 꼭 '2xxx년, 어느 은하계의 어느 행성, 모 박사 연구소'가 아니더라도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다니고, 이제 막 과학 기술이란 것이 꽃을 피운 시기라고 해도 과학과 상상력은 결합할 수 있으니까요.

진짜 중요한 건 이런 상상 과학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입니다. 그리고 <프레스티지>는 우리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판 받을 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술사 앤지어는 순간 이동 장치(사실은 복제 장치)로 명성을 얻고 라이벌을 이기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100번이나 살해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죠. 이는 경쟁과 집착에 치여 자신을 서서히 망치는 인간상과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바로 SF의 장점이자 재미이죠.

배경이 19세기라서 거슬린다고요? 기실 '옛날'을 배경으로 삼은 SF는 비단 <프레스티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빅토리아 시대에 화성인이 침공하는 <우주전쟁>이나 역시 엇비슷한 시기에 약물로 변신을 하는 <지키 박사와 하이드 씨>, 인조 인간을 내세운 <프랑켄슈타인> 등등 다양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아, 물론 이것들은 그만큼 옛날에 쓰인 작품들이기도 하죠. 하지만 오늘날 시각으로 그때를 조명하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나요. 저는 <프레스티지>가 공포와 과학을 결합한 고전 SF 냄새를 물씬 풍기는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 아닌 잘못이라면 21세기(원작은 20세기)에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SF를 만들었다는 것일 뿐.

한편으로는 무진장 끔찍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앤지어가 자신을 100명이나 죽였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입이 저절로 딱 벌어지더군요. 아무리 집착이 심해도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지….

게다가 그걸 만드는 사람이 다른 과학자도 아니고 무려 니콜라 테슬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테슬라 이름이 나올 때부터 영화가 어떻게 돌아갈지 슬슬 짐작이 갔습니다. 테슬라의 공상 과학적인 온갖 업적(군함을 가지고 순간 이동 실험을 했다거나…)은 익히 들었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역시 순간 이동 장치가 나와서 오히려 재미있게 봤습니다. 비록 테슬라의 삶을 허구로 다루어서 뜬소문 이미지를 빌린 격이 되었습니다만, 이렇게 숨은 소재를 적극 활용하는 점은 칭찬해야 하지 않을까요. SF 작품에서 자주 인용하는 대중 과학자라고 해야 아이슈타인 정도니…. 영화에는 에디슨과 테슬라가 겨루는 장면도 몇 번 나오는데, 그런 장면은 과학이 피어오르는 시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앤지어와 보든의 라이벌 관계와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앤지어나 보든이 아니라 테슬라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테슬라가 이 작품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큽니다. 원작 소설가인 크리스토퍼 프리스트가 테슬라와 에디슨의 싸움을 계기로 <프레스티지>를 썼다는 평도 있고요. 아마 보든이 테슬라이고, 앤지어가 에디슨이겠죠. 테슬라는 자가 성취한 천재, 에디슨은 기업 연구로 성공한 천재쯤 될 테니까요. 아마 평소에 테슬라와 에디슨의 관계를 잘 알던 사람이라면 영화 보는 맛이 색다를 것도 같습니다.

※ 주연 배우 둘 중에 한쪽에만 표를 던지라면, 저는 휴 잭맨에게 손을 들겠습니다. 중반부에 1인 2역을 할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정장을 쫘~악 빼 입은 모습도 멋지기 그지없었고요. 자연스러운 귀품이 있다고 할까요.

※ 클럽에서 테슬라와 에디슨의 대립을 가끔씩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네요. 그때 읽은 이야기가 영화 감상에 재미를 줄 거라곤 예상도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