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판 인어라고 하면 어떨까요

※ 영화 <워터월드>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 <워터월드>는 먼 미래, 빙하가 녹아 모든 곳이 물에 잠긴 지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바다 위에 임시 주거지를 만들고 땅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형편으로 어딘가에 마른 땅인 드라이랜드가 있을 거라는 전설을 믿죠. 주인공인 바다사람 마리너는 이런 사람들을 이끌고 마른 땅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가 해적과 같은 약탈자인 스모커들의 추격을 받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물리치고 마른 땅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달리 마리너는 마른 땅에 정착하지 않고 또 다시 바다로 떠나는 것으로 결말이 납니다.

당시 인기배우였던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로 온통 바다 밖에 안 보이기 때문에 해양 액션이 나름대로 볼 만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흥행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세트를 CG가 아니라 실제로 다 만드느라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는 말도 있지만, 주연인 케빈 코스트너가 너무 말썽을 일으켜서 촬영에 차질이 많았다는 소문도 무성합니다. (이 영화를 찍을 때 케빈은 진짜 문제 배우였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영화 흐름이 너무 진부하고 상투적입니다. 전형적인 액션 모험이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시간 때우기로 보면 참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어쩌다 케이블 채널에서 하면 끝까지 보는 편입니다. 설정이라든가 배경 같은 건 마음에 들더군요. 어쩌다가 <매드 맥스>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매드 맥스>처럼 묵시록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인류 문명을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액션 영화 수준이죠. 스케일은 큰데, 그 스케일을 활용하지 못해서 참 아쉽습니다. 지구가 온통 물바다로 가득 찼다면, 그냥 액션으로만 모든 걸 때우지 말고 뭔가 더 집어넣었어야 했는데요.

<워터월드>는 재난 그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재난이 일어난 뒤 변한 상황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극지방의 빙하가 왜 녹았고, 어떻게 해수면이 높아졌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를 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빛나던 과학 문명은 사라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도시를 무슨 신화마냥 여기죠. 그래서 영화 분위기는 전설이나 미신이 흐르는 중세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 날 이후, 인류는 이러했다” 뭐, 이런 식이죠. 상상 과학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최첨단 기술은 등장하지 않지만, 저는 이런 분위기를 참 좋아합니다. ‘현실 이후의 판타지’를 본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특히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이 갔던 건 주인공 마리너였습니다. 마리너는 사실 돌연변이로 아가미가 생기고 발에 물갈퀴가 달린 인간입니다. ‘어류 사피엔스’라고 하던 자막이 기억에 남네요. 바다에서만 살아가다 보니 물에서 생활하기 편하도록 아가미랑 물갈퀴가 생긴 거죠. 그래서 악당 스모커들이 쫓아올 때도 물 속으로 도망친다든가 물에서 공격하는 수법을 주로 씁니다. 아무래도 물 속에서 활동이 부자연스러운 인간들보다는 잘 싸울 테니까요. 하지만 돌연변이란 이유 때문에 사람들한테 공격을 받고, 그래서 인간을 꺼립니다. (SF 작품에서 돌연변이들은 항상 따돌림 받는 걸로 나오기 일쑤죠)

아마 다들 한 번씩 해저 기지나 바다 인간 등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먼 미래에는 바다에 도시를 건설하고,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바다에 적응해 아가미가 생기고…. B급 상상 과학에 나오면 그럴듯한 이야기죠. (:D) 어린이 과학 만화에서도 저런 상상도를 가끔씩 봤고요. 하지만 그만큼 원초적인 부분도 있어서 저는 저런 몽상에 곧잘 잠기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너가 나왔을 때는 참 반가웠습니다. 그 동안 몽상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물고기 인간을 영화에서도 볼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인간보다는 아가미로 숨 쉬고 물갈퀴로 헤엄치는 인간이 더 신비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하늘과 바다가 그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는 깊이가 없습니다. 무언가를 감출 수가 없죠. 새가 하늘을 날면 그 광경은 사람들 눈에 다 보입니다. 그러나 바다에는 잴 수도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바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을 품을 수 있는 장소죠. 그래서 아직까지도 바다뱀이나 거대 오징어, 마의 삼각지대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거 아니겠습니까. 바다는 경외감을 주는 곳이고, 그런 곳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건 상당히 신비스러운 일이죠.

게다가 마리너는 인어이기도 합니다. 물론 전설이나 동화에 나오는 인어와 다르지만, 논리적인 탄생 연유가 있는 인어죠. <스플래시> 같은 영화가 판타지에서 나오는 인어를 그대로 차용했다면, <워터월드>는 그 인어를 과학적 설득력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저는 이런 크리쳐가 판타지와 SF의 차이를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인상 깊게 보는 편입니다. 물론 마리너라는 돌연변이는 설득력이 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강하건 약하건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기이한 상황에 얼마만큼 논리를 부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거죠.

사실 생물학에 그리 능숙하지는 않기에 물바다가 되었다고 정말 마리너 같은 생명체가 나올 수 있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뭐… 나올 확률이 많지 않을까요. 영화 그대로 겉모습은 인간인 채 달랑 아가미 생기고 발에 물갈퀴 생기는 식은 아니겠지만요. 아쉬운 점이라면 마리너를 묘사하는 부분이 좀 부족했다는 겁니다. 케빈 코스트너 이외에 다른 마리너를 보여주고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좀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마리너가 헤엄을 칠 때 아가미로 숨을 쉬는데 인간처럼 수영하는 걸로 보였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특수효과를 이런 데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아쉬운 점을 하나 더 꼽자면, 이 영화는 바다 천지인데도 바다 괴물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바다라는 광활한 무대를 사용하는 이상 바다 괴물 하나 정도는 나와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거대 상어든 거대 오징어든 바다뱀이든 간에 바다 괴물이 안 나왔다는 건 치명적인 실수인 것 같습니다. 최근 작품이라서 비교하기가 뭐하지만, <망자의 함> 같은 영화에는 크라켄이 등장해 배를 침몰시킵니다. 주인공 마리너와 대결하는 식으로 이런 바다 괴물이 하나쯤 나왔어야 했는데… 중간에 식사거리로 잠깐 얼굴만 비추는 게 전부죠.

<워터월드>는 진부하고 평범한 영화이지만, 개인적으로 마리너 때문에 생각할 거리를 제법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저 마리너 크리쳐에 더욱 조명을 비추었다면 더 나은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