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로는 차가운 지하철 역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고향에서 와서 안산에 있는 공장에 취직하고, 자신처럼 매일 매일 어렵게 살아가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급하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기에 모처럼 시간을 쪼개 그를 만나러 나온 것이었다.

바람은 그들의 고향과는 달리 매섭고 차가웠다. 그런 바람을 맞으며 친구를 기다리는 안젤로의 마음도 걱정스럽기 그지 없었다. 왜 갑자기 평일에 보자고 한건지 알 수 없었던 터라 일말의 불안감을 떨굴 길이 없었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안젤로의 얼굴이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는 활짝 펴졌다.

"오. 내 친구 안젤로." 고향 친구 보라펠로였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만리타향에서 바쁘게 일하며 살던 그들은 서로를 반갑게 끌어안았다. 낯선 타향땅에서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다른 이들을 믿지말고 그들 스스로를 믿으라는 매우 소박하고도 냉엄한 진리였다. 그런 각박함 속에서도 유일하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안을 수 있는 존재였다.

"하하, 잘 지냈나? 바쁠텐데 어떻게 시간을 낸거야?"

"자네가 불렀잖아. 뭔 일이라도 있는 건가?"

"글쎄? 뭘까? 맞춰보라고?" 보라펠로는 활짝 웃었다.

"설마.. 아냐. 그럴리가!!!"

"그 설마가 맞다네! 친구!" 보라펠로는 안젤로를 얼싸 안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몸으로도 열심히 살아가던 보라펠로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깡총깡총 뛰듯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끄러운 외국어로 떠드는 두 사람을 비켜서 지나가고 있었다.

"어. 이럴게 아니라 우리 술이라도 한잔 하러 가지. 내가 살테니."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고 술집으로 향했다. 가끔 들리던 선술집이었다.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새어 나왔다. 실내로 들어가 빈 자리를 찾아 앉고 보니 차가운 바깥 바람을 막아주는 얇은 유리문 하나의 두께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유리창에는 습기가 맺혀 떨어지고 있었고 실내는 사람들의 온기와 음식의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이 집은 여전하군 그래. 그나저나 이야기를 해 봐! 어떻게 된건가?"

"뭐. 예상한 대로네. 그 때 본 그 여자분이랑 결혼하기로 한 거지."

"그렇군. 자네는 마침내 만난게로구만. 축하하네."

"고맙네. 하지만 정말 이렇게 홀가분한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네. 자네도 어서 찾아야지?"
보라펠로는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띄었다.

"글쎄. 과연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자네처럼 순수한 영혼을 만날 수 있을 자신이 없어."

"허, 이 친구 약한 소리를 하네. 자네가 왜 이 세상에 왔다고 생각하나? 그건 맑고 순수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서라네. 사랑을 하게. 마음을 열고, 다가서. 그럼 진심이 보일걸세. 이건 친구이자 선배로서 충고하는 거네."

마침 주문을 위해 다가온 아주머니에게 어눌한 발음으로 두 사람은 소주 두병과 찌게 하나를 시켰다. 잠시 후 그들 앞에도 밖의 추위를 녹여버릴 듯한 뜨거운 찌게와 그보다 더 뜨거운 화기를 품은 술병 두개가 놓여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그나저나 그 여자분 자네가 왜 여기 왔는지 이야기 했나?"

"아직 안했네."

"떠나기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수 없지. 나도 남는 수 밖에."

"말도 안돼! 그건 옳지 않아."

"옳고 옳지 않고 같은 식으로 나눌 일이 아니야. 생각해 보게. 그 사람과 함께있는 것이 진정 행복이라 느껴지는 그런 감정 가져본 적이 있나?"
보라펠로의 말에 안젤로는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에 어떤 행복도 완전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지복을 제외하면 모든 불은 꺼질 운명을 가진 불완전한 빛일 뿐이다

"설마 자네도 자네 회사의 사장처럼 타락한 건 아닐테지." 안젤로는 무서운 얼굴이 되어 물었다. 보라펠로는 붉어진 얼굴로 강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내가 백번 타락한다고 해도 그만할 수 있을까. 자네 농담이 심하네."

"어쨌거나 어려운 일 해냈네. 순수한 영혼이라. 정말 부럽기 짝이 없군."

"어쨌든, 오늘 가서 물어볼 셈이네. 나를 따라 떠날 생각이 있느냐고."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네. 그녀도 현명한 여자니 어느게 참 행복인지는 잘 알 수 있을테지."

"안젤로, 자네는 어떤가? 지난번에 만난다던 사람이 있지 않았나."

"그건... 글쎄. 그냥 친구일 뿐이야."

"좋은 인연이 있길 비네." 보라펠로는 술잔을 부딪히며 그렇게 축복했다.

둘은 한참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병을 비우고는 어깨동무를 한 채로 지하철 역을 향해 걸었다. 얼큰하게 오르는 취기 속에서 안젤로는 보라펠로가 부러웠다. 자신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기회, 그리고 행운. 그들의 일은 더러운 것 속에서 순결한 것을 찾아내는 것, 더럽혀진 것 속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것을 추려내는 일이었다. 도금 공장의 유독한 증기는 그들의 살을 파고들고 눈을 아프게 했지만 그것은 참을 수 있었다. 그들을 진정 아프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들의 영혼을 빛나게 할 수정의 결정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 공휴일 저녁, 해가 지고 난 어스름한 시간에 그들은 교회 뒷편의 야산에 올라갔다. 마침내 보라펠로는 그의 아내와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아내는 그의 말에 놀랐지만 곧 그를 따라 가겠다고 했다. 보라펠로를 아는 몇몇 고향친구들은 환영의 모임을 가졌다. 둥글게 둘러선 몇 사람 사이로 보라펠로와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는 입맞춤을 했고, 보라펠로는 찬란하게 빛나는, 그러나 타락한 영혼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커다란 은빛 날개를 펼쳤다.
그는 소중하게 자신의 동반자, 자신의 영혼을 선택한 이를 안고 죄많은 땅을 떠나 먼 하늘을 향해 날아 올랐다.

모여든 이들은 소리없이 이루어지는 휴거의 웅장한 모습에 미소지으며 열리는 천국문을 올려다 보았다. 안젤로는 그런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하며 뒤돌아섰다. 며칠전 만나던 그녀가 떠나며 남긴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미스터 안젤로, 사람이 착하기만 해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어. 그게 전부라면 이제 헤어져. 어차피 순수한 마음만으로 세상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세상을 택했다. 안젤로는 그런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녀가 주말마다 나가는 교회에서 약속한 구원을 안젤로가 직접 가져 왔는데, 그녀는 그 선물을 보지도 않고 던져 버렸다. 안젤로는 자신이 그 선물임을 밝히고 싶었지만, 결코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개입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 라파엘로와 한 여자의 실종이 뉴스에 잠깐 흘러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과연 어디로 갔을지 상상도 못할 것이었다. 애초에 천사가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으로 그들곁에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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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