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별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진실의 모습들. 그 만남은 때론 불화를 낳기도 한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거요? 어떤 방법을 썼길래, 우리 함대가 한달동안이나 공성전을 펼쳐도 점령하지 못했던 곳을 하루만에 진압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회사 기밀인지라."



공식 전후처리 회의장에서 오고가는 대화. 갤럭시 로테이션의 대표는 자신들이 입은 막대한 손해를 생각하며 화를 내는 반면, 미르 사의 대표는 항상 똑같은 어조, 똑같은 말투로 '죄송합니다'를 반복할 뿐. 그래서인지 미르 사가 미안해한다는 느낌은 전혀 오지 않는다.



"좋소,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가는 묻지 않도록 하지요. 우리가 진짜로 궁금한 것은, 무엇때문에 우리 함대가 박살날때까지 그 방법을 쓰지 않았느냐는 거요!"

"죄송합니다. 그것 역시 극비사항이라서..."

"빌어먹을! 이봐, 우리는 당신네가 우리 계열사라는 사실 하나때문에 함대 병력을 밀어넣은 거라구! 그리고 모두 다 날려버렸고! 이제 고가품 운송은 모두 다른 업체에 호위를 부탁해야 할 정도란 말이야! 그런데 대답이 뭐? 이것도 비밀, 저것도 비밀.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죄송합니다, 하나뿐이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함대의 피해 보상은 반드시 해드리겠습니다."

"하! 무슨수로? 돈으로? 에너지로? 아니면 그 알량한 곡식으로? 이봐, 잘 들어! 당신네들이 책정한 예상 피해액은 기껏해야 함대 손실액밖에 안되겠지만, 우리가 실질적으로 입은 피해는 그 액수를 수십, 수백배나 초과한다구!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서 겨우 쿠와르 행성하나 못 점령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우리 회사의 이미지는 말이 아니야. 게다가 앞으로 자체 호위병력을 다시 만들때까지 추가로 지출될 호위 비용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라구!"

"죄송합니다. 하지만 2차 피해까지 우리에게 떠맡기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입니다만? 이미 성간 회의에서도 전쟁의 여파로 인한 2차 피해는 책임지지 않는 것으로..."

"좋아! 좋다구! 이렇게 된 이상, 계열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어! 앞으로 갤럭시 로테이션사는 미르의 일에는 영원히 손을 뗀다. 알았냐구!"



A.A 72년. 성간 기업 11위인 갤럭시 로테이션과 67위인 미르, 완전 결별. 서로의 동맹 관계가 깨어지면서 국력은 각각 14위와 78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로서 갤럭시 로테이션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난 미르는 독자정책을 추구하며 왕성한 발전을 거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을 상회하는 국력을 회복했다. 사실 이정도의 발전은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수년간에 걸쳐 세밀한 계획을 수립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수많은 전문가들은 쿠와르 전쟁을 미르가 갤럭시 로테이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작극으로 보기도 한다.



- 수많은 별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진실의 모습들. 그 만남은 때론 누군가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한다.



"이름은?"

"라제스 릴."

"나이는?"

"23살."

"성별은?"

"내가 남자로 보여요?"

"요즘은 트렌스 젠더가 워낙 많아서 말이죠."

"여자라구요, 당연히."

"용병 경력이나, 군인 경력은?"

"없어요."

"헤에? 그럼 전에는 뭘 하다 왔나요?"

"뉴로다이브 기자였죠. 지금은 쫒겨났지만."

"기자.. 라?"



용병 등록을 위해 신상명세를 작성하던 라제스는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오퍼레이터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어차피 뉴트럴 컴퍼니 정도의 회사라면 지문 하나만 있어도 모든 신상 조회가 가능할텐데, 무엇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거죠?"

"물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지만, 아시다시피 모든 정보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죠. 피할 수 있는 지출이라면 최대한 줄여야하지 않겠어요? 에, 또... 키와 몸무게는?"

"하아..."



끝없이 계속될듯한 지루한 질문에 한숨을 내쉬는 라제스. 하지만 이러한 설문 공세는 이미 뉴로다이브 시절에 마스터한 그녀였기에, 결국 뉴트럴 컴퍼니의 머셔너리 아카데미에는 라제스 릴의 이름이 올라갔다.



"좋아, 이제 시작이야. 카림, 네 몫까지 내가 해줄테니 지켜보고 있으라구."



전직 뉴로다이브 기자였던 라제스 릴. 입학 3주만에 용병 아카데미 사상 최단시간, 최고기록으로 졸업. 그녀의 주특기 분야는 컴뱃 오퍼레이터로, 전장에서의 전투뿐만 아니라 현장의 정보를 분석, 최전선에서 가장 합당한 판단을 내리는 역할이었다. 언제나 적들을 전멸시켜버리는 놀라운 상황분석 능력과 반쯤 불타버린 레이져 펜을 마스코트처럼 항상 목에 걸고 다님으로 해서 얻은 닉네임 '파괴의 작가'. 그 별명은 항상 라제스를 따라다녔지만 그 펜을 무엇때문에 걸고 다니는지에 대한 진실은 3년 후 크라크 데 슈발리에 공방전이 있기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수많은 별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진실의 모습들. 그리고 그중엔 숨겨진 진실이 있을때도 있다.



"여기는?"



카림이 눈을 뜬 곳은 녹색 세포배양액으로 가득한 튜브 안이었다.



"아, 이제 깨어났군. 어때, 몸은 좀 괜찮은가?"



친절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왔다. 배양액이 시야를 가리기는 했지만 상대가 마음씨 좋아보이는 중년 남자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당신은...?"

"걱정말게. 우리도 뉴트럴 컴퍼니 직원이니까. 내 이름은 제랄드 불. 6함대 소속 무기 개발팀 수석 연구원이지."

"6...함대? 설마 배틀랩...입니까?"

"거의 맞았어.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은 배틀랩 산하의 리서치 아웃포스트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카림은 문득 생각난 듯,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기관포탄을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놀란듯한 그의 표정을 본 제랄드는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아.. 사라진 오른팔은 왼팔을 참고해서 완전히 원상복구시켰지만, 손은 그렇게 할 수 없었어. 자네도 기억하겠지만 양손이 다 없었거든. 할 수 없이 표준 스펙의 손을 기준으로 다시 만들어 붙였네. 얼마동안은 좀 어색할거야."

"라제스는, 제 호위 대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임무 완수라. 좋은 태도야."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던 제랄드가 말을 이었다.

"걱정할 것 없네. 그녀는 무사히 귀환했으니까.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뉴로다이브에 사표를 내고 사라진 듯 싶네만, 그거야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지."

"그렇습니까.."



라제스가 탈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카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전 분명히 죽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곳에?"

"마침 우리 6함대에서도 그 지역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거든. 내가 복귀하는 길에 아군 생명반응이 나타나길래 데려온거야."

"감사합니다."

"별로 감사할 건 없어. 자네도 알겠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물론 치료비는 지불해야겠지요. 그 정도는.."



말을 이어가던 카림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젠장! 라제스에게 내 개인 카르고의 물품들을 모조리 넘겨달라고 부탁해놨었는데!"

"아... 이미 늦었네. 벌써 확인해 봤지만. 자네의 잔고는 제로야."

"맙소사.."

"그래서 말인데..."



닥터 제랄드가 말을 이었다.



"어떤가? 기존 재산을 물려준 라제스는 행방이 묘연하고, 용병직을 하려면 돈은 필요할테니. 이번 기회에 우리 함대에 전속 계약을 맺고 일해볼 생각 없나?"

"전속 계약이요?"

"그래. 계약금으로 장비 구입비를 지불하겠네. 게다가 일정 기본급은 보장하지. 성과급으로 빚을 갚아나가면 되는거야."

"왠지 너무 좋은 조건인데요."



카림이 의심어린 눈초리로 제랄드를 쳐다보자,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뭐든지 한번씩은 의심해보는게 중요하지. 좋은 습관이야.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 없네. 사실은 치프가 자네의 임무 완수에 목숨을 거는 것을 보고 마음에 든 모양이야. 그래서 이렇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거지."

"치프?"

"우리 함대 사령관 말이야."

"헤에?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절 직접 스카웃했다구요?"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특별대우지."

"좋아요. 한번 해보도록 하죠.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으니까."

"잘 생각했네. 그러면, 며칠 후에 완쾌되면 그때 다시보세."



제랄드는 다시 회복을 위해 깊은 잠에 빠져든 카림을 뒤로 한채 방에서 걸어나왔다.



"닥터 제랄드,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나?"



그가 문에서 걸어나오자 마자, 기다리고 있던 다른 과학자 한사람이 궁금하다는 듯이 질문했다.



"뭐야, 마샬인가."

"치프가 직접 찍었다면서? 쓸만한가?"

"모르겠어. 아직은 어린아이니까. 뭐, 치프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긴 닥터 니트로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맞아."



마샬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나저나 치프는 어디 간거야?"

"본사에. 보스를 만나러 간다더군."

"흠. 깨질 준비는 확실히 하고 갔으려나?"

"어째서? 이번 실험은 성공 아니었나?"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제랄드는 창 밖으로 보이는 우주의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뉴트럴 컴퍼니 본사를 떠올리며 말했다.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만난다는 건가..."

"하지만 본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다 그런 부류니까."

"뭐, 나도 나름대로 제대로 미친 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멀었다구, 우리는."



마샬과 마주보며 뜻모를 웃음을 교환하던 제랄드가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러면 나는 이만. 치프가 맡긴 일이 있어서..."

"고생이군.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텐데."

"내가 주워온 녀석이니 최소한의 책임은 지라더군. 마침 실험용 파워슈츠가 하나 남아서 말이야."

"죽일 셈인가."

"모르지. 운 좋으면 살아날지도."



불과 몇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대화가 오고간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림은 여전히 잠꼬대를 하며 깊은 수면상태에 빠져있을 뿐이었다.



"음냐... 일이니까... 괜찮아.... 쿠울.... 일이니까...."



알 카림. 쿠와르 전쟁에서 극적으로 구조된 후 6함대에 편입. 전속 계약사원으로 선발된다. 그 후 대함 특수작전 부대 '소울 브레이커'에서 활동하며 크고 작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지만, 부대의 특성상 그의 개인 신상명세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때문에 크라크 데 슈발리에 공방전에 참여할 때까지 카림의 인적사항은 '행방불명'으로 남아있었다.



- 수많은 별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진실의 모습들. 그리고 그 그림자 뒤에는 모든 것을 지켜보는 주시자의 눈이 있다.



어두운 방 안. 불빛이라고는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어가 전부인 이곳에서, 가스 마스크를 쓰고 화학 실험복을 입은 한 남자가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 실험은 어떤 면에서는 완전한 성공, 어떤 면에서는 완전한 실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라 화면이 변하며 쿠와르 전쟁에서 선보였던 이동형 오르비탈 캐논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개발팀에서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파괴력과 안정성. 성능은 분명히 기대 이상이지만,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쿠와르 해방전선에서 받은 의뢰금 정도는 오르비탈 캐논의 첫 한발에 쏟아부은 자금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자 디스플레이의 반대편, 얼핏 보면 아무도 없다고 착각할만한 곳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술상으로는 성공이지만, 실제 효용성은 그다지 기대할 수 없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사장님. 두번째 발사 비용과 운송 비용을 감안한다면 거의 쓸모가 없다고 보는 편이 좋습니다."



곧이어 누군가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디스플레이의 불빛이 미치는 범위까지 걸어나온 또 다른 한 남자. 20대 중반인지 30대 초반인지 가늠하기 힘든 얼굴에, 특이하게도 은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그 색깔에 맞추기라도 한듯 메탈릭 실버로 염색한 머리. 그리고 그러한 은색을 더욱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검은 정장. 하지만 가장 특이한 점은 역시 몸 곳곳에서 뻗어나와 방 안 이곳저곳에 연결된 길다란 전선들이었다.



마치 사람을 얽어매기라도 한듯, 제각기 다른 굵기를 가진 수십가닥의 전선이 그의 몸에 붙어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너무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 전선들이 엉키지 않게 움직이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단지 The Boss, 사장으로만 일컬어지는 인물. 뉴트럴 컴퍼니의 최고 책임자이자 대표이사인 동시에, 단순 국력 37위, 순수 무력 7위의 거대한 용병 회사를 움직이는 숨은 두뇌. 그가 지금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닥터 니트로? 자신이 개발해낸 물건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쓸모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쉽지 않을텐데요."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겁니다. 에너지 응집 기술이 조금 더 발달해준다면 적어도 10년 이내에는 손익분기점을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10년이라... 뭐, 상관없겠죠. 어차피 박사의 발명품 열에 아홉은 수익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니."

"하지만 열개중의 한개, 그 한개만 가지고도 나머지 아홉개의 손실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는 이득을 가져온 것으로 압니다만?"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국이 적대적으로 움직일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구출해왔는데, 최소한 그정도는 해주어야죠."

"아아.. 옛날 추억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죠.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 오르비탈 캐논이 우리 것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겁니다."

"하긴, 이 사실이 알려지면 갤럭시 로테이션과 미르, 둘 다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일단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인원중 불필요 자원에 대한 처리는 끝났습니다."

"여전히 잔인하네요."

"확실한 게 좋은 법이죠."

"그러면, 그 밖에 이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일단 우리와 직접적으로 거래했던 쿠와르 쪽의 인물들은 전부 사망이 확인되었고, 컴퍼니의 인원들 중에서도 수석 연구관과 차석 연구관을 제외한 하급 연구진들의 처리는 끝난 상태입니다만..."

"다만?"

"딱 한명, 약간 의구심이 드는 인물이 있습니다."

"아, 그 사람이라면 보고서에서 읽었습니다. 라제스 릴이었던가.. 뉴로다이브 기자였지요?"

"네.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C플러스급 계약직 에이전트인 리우 웬의 보고에 의하면 성공적으로 쿠와르에서 탈출한 것은 확실합니다만, 그 후 어디로 갔는지는 추적이 불가능합니다."

"흠.. 잠깐만..."



보스가 눈을 감고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 상태에서 기다리기를 약 30여초. 그의 입에서 미소가 떠올랐다.



"의외로군요. 등잔 밑이 어두웠어."



그 말과 함께 디스플레이 화면이 갑자기 바뀌었고, 그 커다란 화면 가득히 라제스의 모습이 잡혔다. 그녀가 있는 곳은 사원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았을만한 곳. 뉴트럴 컴퍼니 인적자원 관리부의 접수 데스크였다.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상담 오퍼레이터와 마주앉은 라제스 릴. 그리고 보스는 계약서에 싸인하는 그녀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재밌군. 보통 사람이라면 그정도 당하고 나면 전쟁터에 진저리 칠만도 한데."

"아마 알 카림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뉴로다이브에 대한 분노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친구는 살아있잖습니까?"

"네, 오르비탈 캐논 통제를 맡은 닥터 제랄드가 복귀하면서 주워왔습니다. 본인 말로는 다 죽어가는 계약직 용병이 기절한 채 쓰러져 있길래 데려왔다더군요. 현재는 배틀 랩에서 치료중입니다. 여기저기 긁히긴 했지만 용병 일을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 둘이 혹시라도 만나게 될 것 같으면 내게 연락 좀 해주세요. 왠지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둘 다 계약직 에이전트가 된 이상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만나게 하지는 않으실겁니까?"

"당연하죠.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되었을 때야 진짜로 재밌는 거니까. 그럼, 오늘은 이정도로 마치도록 하지요. 잘 가시길."



마치 재미있는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처럼, 기대감이 넘치는 어투로 보스가 말을 마치곤 다시 어둠 속으로 물러서며 안락의자에 기대 앉았다.



"엇갈린 운명. 뒤틀린 진실. 그 교차점이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더 재밌는 거겠지. 좋아, 지켜보겠습니다, 라제스 릴, 그리고 알 카림. 당신들이 그 교차점을 어떻게 바꾸어가는지.."



쿠와르 전쟁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였던 이동형 오르비탈 캐논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기사를 취재했던 기자마저도 행방불명되며 결국 그러한 무기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마저도 제기되었으나, 갤럭시 로테이션의 함대가 전멸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때문에 그 이후로도 이동형 오르비탈 캐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무기가 뉴트럴 컴퍼니 제 6함대 - 배틀랩의 실험실에 보관되어있다는 사실까지는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덕분에 이동형 오르비탈 캐논은 무수한 전설중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동형 오르비탈 캐논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을, 초신성처럼 빛나는 또 하나의 전설이 이 일을 계기고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