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르셋, 제라하드."

"네, 마스터."

"일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그, 그런 것 같군요."



구름을 뚫고 땅으로 내려꽂히는 흰색 섬광이 그 빛을 더해감에 따라 레이스 군단의 동요는 점차 더 심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공포는 어쩔 수 없다. 주천사 클래스 집중의 적을 상대하는 것은 방어하기에도 벅찬데, 이번엔 아주 공성을 들어온 꼴이 되어버렸으니...



"퇴로는?"

"없습니다, 마스터. 아무리 국경지대라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된 이상... 아무 피해 없이 돌아가기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전속으로 도망쳐도 우리 영역에 들어서기 전에 따라잡히며 사냥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주천사라는 존재가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완전히 소환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잠깐일 뿐. 그리고 그 잠깐의 시간동안 어떻게든지 살아날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클라르셋."

"네, 마스터."

"레이스 한부대를 나눠줄테니 오펜바흐를 집중적으로 노려라."

"오펜바흐를... 말입니까?"

"그래. 잘하면 주천사들이 완전히 소환되기 전에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클라르셋이 황급히 오펜바흐가 서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쏟아져 내려오는 주천사들의 위용에 당황한 나머지 지금까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실제로 오펜바흐 자신의 주변에 배치된 호위 병력이라곤 기사단과 성직자 약간 뿐. 주천사들이 완전히 소환되기 전에 저곳에 도착만 할 수 있다면 저정도 병력을 쓸어버리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리고 오펜바흐만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다면, 소환주를 잃은 주천사들은 다시 천상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군요! 오펜바흐 녀석, 너무 자만한 나머지 정작 자신의 보호에는 신경을 안 쓴 모양입니다."

"그래, 지금 곧바로 출발하도록. 주천사가 하나라도 앞길을 가로막으면 오펜바흐를 잡는다는 계획도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네, 마스터!"



힘찬 대답과 함께 클라르셋이 레이스 천여마리를 이끌고 오펜바흐를 향해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클라르셋경... 살아날 수 있을까요?"

"알고 있었나, 제라하드?"

"오펜바흐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런 사소한 실수를 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우니까요."

"뭐, 레이스는 거의 전멸하겠지만... 클라르셋은 그래도 명색이 고레벨의 묘지기이니까. 운 좋으면 죽지는 않겠지."

"그나저나 이미 알고 계셨다면... 어째서 클라르셋경을 보내신 겁니까?"



레이스를 이끌고 기세 좋게 앞으로 쏘아져 나가던 클라르셋과 레이스들의 주변에 갑자기 환한 빛무리가 나타났다.



"역시... 대천사들이 있었군."

"예상하셨던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주천사들과는 달리, 대천사들은 잠시 번쩍거리는 빛을 발산함과 거의 동시에 나타나서 전투에 투입되고 있었다. 곧이어 벌어지는 대천사와 레이스의 치열한 접전. 그러나 단지 대천사 뿐이라면 레이스로도 어떻게 해볼만 하겠지만, 얼마 안가 주천사 클래스로 이루어진 주력부대가 내려올 것이 분명한 이상, 레이스만으로 이루어진 부대로는 이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란 거의 없었다.



"제라하드, 소멸의 먼지... 남아있나?"

"네, 마스터. 아직 하나 남아있긴 합니다만... 설마?"

"어차피 도망치긴 글러버린 것 같으니 도박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하, 하지만... 마스터! 아무리 소멸의 먼지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레이스로는 주천사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오펜바흐 녀석은 자신의 코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휘하느라 이쪽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틈을 타서 주천사들의 강림 예상 지점에 레이스들을 분할 배치하도록."

"그것으로 이길 수 있을까요?"

"그럼 어쩌겠나? 오펜바흐는 대천사에 둘러싸여 있으니, 주천사들이 소환되기 전에 그놈을 직접 치는 것은 불가능해. 그렇다고 죽음의 손가락을 쓸까? 주천사 클래스만 있다면 또 모를까, 성직자에 기사에 대천사에 저 뒤쪽의 투석기까지 버티고 있는 이상, 죽음의 손가락으로 주천사 잡길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 도망을 치자니 이미 글렀고. 그나마 최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방향으로 전투를 이끌어나가는 수밖에."

"아, 알겠습니다. 마스터..."



제라하드가 레이스 전체에 소멸의 먼지를 뿌리고, 재빨리 빛의 기둥이 땅에 내리쬐는 주천사들의 강림 예상 지점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다 보면 내가 도망칠 틈 정도는 생길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러나, 나중에 틈을 보아 도망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의 일. 지금은 일단 눈 앞의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다. 주천사를 하나라도 더 죽여야 내가 살아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질테니까. 소멸의 먼지를 뒤집어 쓴 레이스들에게 블러드 러스트를 시전하며 가급적이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피해를 상대에게 입혀 내가 몸을 뺄 틈을 만들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쳇. 엑토리우스 녀석. 이럴 줄 알았으면 잠재우는 게 아닌데... 실수했군."



이렇게 위급할 때, 광전사가 하나 빠진다는 것은 상당히 치명적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엑토리우스는 마음 편하게 잠만 자고 있을 뿐.



"뭐,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싸우는 수밖에."



애써 낙관적인 척 한다지만... 솔직히 지금 내 심정은 상당히 비참했다. 승률이 이렇게 낮은 도박은 해본적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클라르셋이 용케도 도망쳐나와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귀환을 알렸다는 것이었다.



"마스터..."

"클라르셋, 무사했었군."

"죄송합니다, 마스터. 오펜바흐의 주변에는 이미 대천사들이 소환된 후였습니다. 제가 이끌고 간 레이스 정도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지. 수고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전면적으로 붙는 수밖에."

"전면전이라 하시면..."

"이미 제라하드가 레이스들을 주천사가 소환될 위치에 배치시켜 놓았다."

"이길 수 있을까요?"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건, 아무리 죽을 고비를 넘긴 묘지기라 할지라도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다간 될 일도 안될거라는 사실이야."

"아,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제라하드 혼자 힘으로는 레이스 전체를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없을거다. 전장에서 직접 지원해주고, 되도록 많은 레이스를 되살리는데 주력하도록."

"네, 마스터."



클라르셋이 제라하드와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빛줄기가 강해지고, 드디어 주천사들의 거대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얀색 오러가 타오르는 듯한 기운을 내뿜으며, 강렬한 신성력을 끊임없이 방출해내는 절대적인 존재들...



소멸의 먼지를 이용해 투명해진 레이스들이 숨죽이고 대기하고, 주천사들은 드디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니, 그 두 힘의 격돌 직전의 고요함이란 흔히들 말하는 '폭풍 직전의 고요'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숨막히는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마스터N, 겨우 레이스에 소멸의 먼지 정도로 주천사를 이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나?"

"오펜바흐, 너무 자만하지 않는 편이 좋을거야."

"훗. 아까부터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레이스를 분할시켜 주천사들을 각개격파한다는 생각이겠지? 물론 우리측 피해도 좀 더 심하긴 할테지. 아까 그 멍청한 묘지기 녀석을 상대하느라 비록 네녀석이 레이스를 배치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만, 하지만 그정도로 레이스가 주천사 클래스를 이길 수 있을까?"



오펜바흐도 이미 알고 있었군. 하지만 이미 전투 형태는 다 짜여진 뒤. 남은 것은 레이스가 이기느냐, 주천사가 이기느냐의 갈림길일 뿐이다. 분명 단체 전투에서는 레이스가 주천사를 이기기란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각개격파한다면 어느정도 가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느새 주천사들은 소환이 다 끝나 날개를 펄럭이며 고도를 낮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 그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가 한층 더 밝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흰색 오러가 눈 아플정도로 흘러나오던 것이, 갑자기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젠장."



나는 그제서야 오펜바흐의 옆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축복의 성녀까지 데려다놓고 있었다는 건가."



안그래도 어려운 전황이 한층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일격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하면, 당하는 것은 우리쪽이 되어버린다.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백색 오러에 휩싸여 타오르는 신성력이 실린 무기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레이스는 단번에 소멸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층 더 강해진 무기의 위세를 자랑하며 주천사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서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피에 미친 레이스들이 바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기다려... 지금은 이르다...'



조금씩 조금씩 주천사와 레이스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주천사들이 밝은 광휘를 내뿜으며 땅 위에 내려서려는 순간!



"지금이다!"



내가 소리침과 동시에 레이스들이 순식간에 튀어올라 주천사들을 덮쳤다. 소멸의 먼지마저 한순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빠른 움직임으로 날아오른 레이스들은, 아직 소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의 주천사들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입히기 시작했다.



"흥! 아무리 선제 공격을 가한다 하더라도, 레이스 따위가 주천사를 이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나?"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오펜바흐!"



오펜바흐는 자신 만만한 표정이었다. 하긴, 축복의 성녀가 따라붙은 주천사가 레이스들에게 지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쉬이익!"



어느 순간, 안그래도 미쳐 날뛰던 레이스들의 움직임이 한층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같았으면 아무리 공격해도 끄떡 없었을 주천사들이 하나 둘씩 빛으로 변해 하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후후훗.. 드디어 발동되었군."



얼마 전 나의 영토에 시전한 '전투가' 마법이 때맞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투가에 블러드러스트까지. 그야말로 방어는 도외시한 공격이었지만, 어차피 정규전으로 가면 지는 것은 마찬가지. 이래도 지고, 저래도 질 바에는 이왕 사라질 레이스, 끝까지 이용하는 편이 좋겠지.



"이런 미친!"

"뭐가 말인가?"

"네녀석 제정신이냐? 블러드러스트로도 모자라 전투가라니!"

"난 언제나 제정신인 적이 별로 없었다구. 크하하하하핫!"



레이스들이 날아오르며 주천사를 휘감아 돌며 상처를 입히기 시작했다. 여느때 같았으면 주천사의 오러에 가로막혀 접근도 제대로 하지 못했겠지만, 블러드러스트에 의해 미쳐버린 레이스들은 자신의 유체가 타들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성력이 가득한 오러를 뚫고 들어가 주천사의 본체에 피해를 입혔다.



레이스들이 공격을 시작하고, 단 일격에 주천사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레이스의 공격 정도는 가뿐히 막아낸 다음, 파멸적인 반격으로 레이스들을 박살내야 했겠지만, 각종 공격 증폭 마법이 걸린 레이스들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지금, 그 공격은 절대 '가뿐히 막아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첫 공격에 의해 마비되어버린 주천사들은 반격은커녕 방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뒤이은 레이스들의 집요한 공격에 소멸되기 시작했다.



"어라? 뭐지 이건?"



나는 눈 앞에 벌어지는 의외의 상황에 꽤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전투력을 엄청나게 올려 소멸의 먼지로 치고 들어간다는 작전을 세우기는 했지만, 절대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막대한 피해를 입힌 다음, 주천사들이 레이스를 사냥하기 시작하면 그 틈을 타서 슬쩍 사라지면 되지 않을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건...



"말도 안돼..."



전장 저편에서 오펜바흐가 얼빠진 모습으로 웅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도 그에 못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이건 뭐야... 거의 전멸이잖아?"



주천사가 워낙 거대한 존재이다보니 얼마 소환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수가 3~40을 넘는다면 절대 적은 수라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천사 클래스의 상극이라는 트리언트를 거느리고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레드 드래곤이나 정령, 피닉스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을 소환한 것도 아니고, 그저 어중간한 레이스 부대를 이끌고 상대했을 뿐인데 이렇게 압도적으로 밀어버리다니...



첫 일격에서 모든 것이 결정나고 말았다. 대부분의 주천사들이 연이은 레이스들의 공격에 의해 빛줄기로 변해 하늘로 돌아갔고, 그나마 남은 주천사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오펜바흐를 지키기 위해 남아있는 병력을 생각해 보아도...



"이겼네?"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지만 나조차도 믿기 어려웠다. 그것도 피튀기는 혈전 끝에 어렵게 이긴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공격으로 모든 것이 결판나고 말았다. 하다못해 대천사나 그리핀을 상대할때도 이렇게 허무하게 전투가 끝난 적은 없었는데...



"크에에에엑!"



얼마 남지 않은 주천사들이 온 힘을 다해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과연 주천사들의 파괴적인 위력은 대단한 데다가, 이미 전투력 상승 마법이 몇 개씩이나 걸려있는 레이스들은 방어에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취약한지라, 주천사의 공격 한번에 그 주변의 레이스들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러나 레이스의 첫 공격에 주천사들이 워낙 많이 소멸되어버렸기 때문에, 얼마 남지도 않은 주천사들이 가하는 공격은 위력적이기는 해도, 전체적인 레이스 숫자를 생각하면 그다지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천사들의 발악에 가까운 공격 뒤에 이어지는 것은 또다시 계속되는 레이스의 물결. 첫 번째 공격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던 얼마 되지도 않는 주천사들은 두 번째 공격에 의해 괴멸되고 말았다.



"하하..."



허탈한 웃음을 짓는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레이스가 우글거리며 형성하는 검은 안개와, 한줄기 빛이 되어 사라져 흔적도 남지 않은 주천사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전장 반대편에서 경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오펜바흐와 그의 어설픈 호위부대들도 아직 남아있기는 했다.



"마, 마스터N... 설마.. 레이스의 탈을 쓴 악마를 불러낸 거냐...?"

"나도 지금 놀라고 있다구. 이 정도로 이기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신들의 제단에 기부한 것도 없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어쨌거나, 이긴 건 이긴거니까... 승자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것까지 다 누려야 하겠지?



"나를 놀라게 한 댓가는 확실히 치르게 해 주지, 오펜바흐."

"자, 잠깐만... 그래도 내 덕분에 티아가 아무런 의심 없이 자네 영지에 들어왔다가 패한 것 아닌가? 여기, 티아도 돌려줄테니까 이번엔 그냥 서로 좋게 끝내도록 하자구."

"흐음?"

"생각해 보게. 자네의 철천지 원수 티아를 이번 기회에 끝장내는 것으로 만족하면 어떤가?"

"서로... 좋게... 끝낸다...라..."

"그래, 그래!"

"나한테는 오펜바흐 네놈도 철천지 원수이긴 마찬가지야."

"그러니 이번 기회에 서로 친하게 지내보자는 것 아닌가. 서로 웃는 얼굴로 끝내자구"

"내게 있어서 웃는 얼굴로 끝낸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네놈과 티아 둘 다 저세상으로 보낸 다음 주인 잃은 영지를 내가 모조리 꿀꺽해버리는 거야."

"그, 그런 바보같은! 티아는 마법사 협회의 회원이고, 나는 신성 의회 원로원의 원로원이다! 그 두 거대 세력을 상대로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오펜바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나는 백마법사 협회와 신성 회의 원로원의 1급 현상 수배 명단에 올라와있는 몸이다. 몰랐나?"

"하지만..."

"게다가!"



나는 우물거리는 오펜바흐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계속 말했다.



"그 두 거대 세력이라는 놈들이, 너희 둘 정도 사라진다고 해서 눈이나 깜짝할 것 같은가?"

"당연하지! 우리가 당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반드시 복수하러 올 거다!"

"글쎄... 난 아크메이지를 잃고 혼란에 빠진 너희들의 영토를 나눠먹기에 바빠서 복수따위엔 여념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생각해 보라구. 자네라면 어쩌겠나? 주인 잃은 영토에 기사단 한부대만 파견하면 얻을 수 있는 땅과, 레이스들이 기세 등등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에 주천사에 대천사 수두룩하게 보내도 결과를 예측 못할 내 땅. 어느쪽에 더 신경이 쓰이지?"

"그, 그건..."



오펜바흐 녀석,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만 하더라도 전쟁에 쉽게 이기기 위해 질것이 뻔한 전투로 티아를 몰아넣지 않았던가.



"전군! 오펜바흐를 목표로! 내일 저녁 달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라!"

"이런 제길! 마스터N! 다음에 두고 보자, 이 원한은 잊지 않겠다아아아!"



삼류 악당들이 쫓겨날 때 공통적으로 외치는 대사를 읊은 오펜바흐는 빠른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클라르셋, 오펜바흐! 놓치지 마라!"

"네, 마스터!"



그 수가 몇만에 이르는 레이스의 대부대가 오펜바흐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흠... 아슬아슬하겠군. 오펜바흐의 친위 부대가 얼마나 버티느냐에 따라서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된다고 봐야겠어..."



나는 여유있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치 사냥개를 풀어 여우 사냥을 하는 사냥꾼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뭐, 저녀석들이 잡히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없긴 하지. 어차피 주변의 하이에나들이 버티고 있는 이상, 내가 먹을 수 있는 영토의 크기란 비슷할테니까."



실제로 그랬다. 오펜바흐와 티아의 영토 주변에는 나 말고도 여러명의 마법사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때문에 내가 저들을 잡더라도 현실적으로 얻는 이득에는 별 차이가 없을 터였다. 오히려 그것보다도, 그리핀은 물론 주천사마저도 단칼에 전멸시켜버린 레이스의 새로운 활용성을 찾아낸 것이 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위험한 고비도 지나갔고, 앞으로 방어 병력도 전혀 없는 티아와 오펜바흐의 영지를 마음껏 점령할 생각을 하니 마음의 긴장이 단번에 풀리는 듯 했다.



"그럼, 대부분 정리가 된 것 같으니 마스터 타워로 슬슬 돌아가 볼..."



편안한 마음으로 마스터 타워로 가기 위해 돌아서던 나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굳어지고 말았다.



온 몸에 큰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멀쩡하게 남아있는 주천사 하나.

아마 전장에서 밀려나와 전투를 이탈했다가 다시 돌아온 주천사인 듯 했다.



게다가 지금 내 주변에는 호위 병력이 하나도 없는 상태.



약간만 여유가 있다면, 저정도 주천사 하나쯤은 마법으로 단번에 소멸시킬수도 있겠지만...



이미 적과 나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져있었다. 게다가 주천사의 거대한 칼은 가속도가 붙은 채로, 신성력이 담긴 하얀 불길을 내뿜으며 내 머리 위로 내려 떨어지기 시작한 상태였다. 이 타이밍으로는, 마법으로 주천사를 날려버리기는커녕...



"피하기에도 늦었다. 젠장!"



방어 마법이나, 하다못해 헤이스트라도 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만 있더라도 어떻게 이 공격을 피한 다음 반격으로 날려버릴 수 있을텐데...



안그래도 거대한 주천사의 검은 신성력까지 더해져 그 파괴 범위가 무지하게 넓은 상태. 그냥 몸을 날려 피하기엔 그 공격 범위가 너무 넓었고, 그렇다고 마법을 걸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전쟁에서 다 이겨놓고, 패잔병 하나 때문에 죽게되는 것인가...

신성력이 가득한 칼에 몸이 반동강 나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번 세기 내로는 되살아나기 힘들겠지...



'훗. 전쟁에 다 이겨놓고도 마지막에가서 잠깐 방심하는 바람에 이렇게 끝나고 마는군...'



나는 다 글렀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참담한 심정으로 나를 향해 떨어지는 주천사의 공격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