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들이 부활하고 나서도 한동안, 테라는 평온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정도 국력이 강해지자마자 참을성없는 마법사들의 도발을 시작으로 다시 테라 전역은 아크메이지들의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이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끝이 없는 파멸과 재생은, 언제쯤에나 끝날 것인가..."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언제나 조용하게,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서있는 엑토리우스(Durnore Ectorius). 마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과 허약해보이는 몸, 게다가 내성적인 성격. 여기서 미친듯이 싸우는 광전사의 모습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정신 뒤에 가려진 또 하나의 모습을 보았다.



새로운 테라가 열렸을 때, 아마게돈으로 인해 이전까지 나를 따르던 모든 영웅들은 뿔뿔히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죽음에서 부활한 나는(나 뿐만 아니라 모든 마법사가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동안 쌓아놓은 모든 것, 막대한 영토와 겔드, 무수한 병력, 그리고 심지어는 목숨보다도 중히 여기던 마법 지식과 마력마저 무로 돌아간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 후 한달간. 마법의 연구와 영토 확장으로 정신 없는 나날이 계속되고, 학살과 음모, 이중 첩자 파견과 피튀기는 전쟁을 거듭한 결과, 3000 에이커 정도의 영토에 영웅 두세명 정도는 고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겨우 복구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혼자만의 힘으로 국가 운영이 힘들어져 나를 보좌할 사람을 찾던 중, 주점에서 우연히 만난 영웅이 바로 엑토리우스였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으나, 나는 그의 정신 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 모습을 얼핏이나마 볼 수 있었고, 재빨리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계약을 맺으며 그가 했던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습니다. 단지 나 자신을 잊을 수 있을 정도의 전쟁만 계속되어준다면...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대답.



"빛은 어둠을 물리친다고 하지. 그러나 나는 빛을 삼켜버리는 어둠이 되어 볼 생각이네."



내 대답을 들은 그는 두말하지 않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 후로 지금까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백마법사들과의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졌고 그동안 그가 보여준 능력은 놀랄만했다. 항상 앞장서서 미친듯이 적들을 두동강내는 그의 모습은 군대 전체의 사기를 향상시키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나의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엑토리우스 외에도 바드인 제라하드 듄(Gelahad Dunn)과 묘지기 클라르셋(Clarsett Dawnea)을 고용해 언데드 군단의 효과적인 통솔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마스터, 지금 마스터의 눈은 과거를 바라보고 있군요..."



역시 바드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군. 제라하드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전쟁의 광기와, 피가 흐르는 그 모습을 노래하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스터와 계약을 한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드의 원래 역할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요."

"알았으니 내 마음을 읽는 일따위는 그만두는게 좋아. 정신 건강에 도움될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마스터 타워인 만큼 높이도 상당하고, 따라서 상당히 먼 곳의 풍경까지 볼 수 있다. 사실 '매의 눈' 마법을 사용하면 인간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먼곳까지도 볼 수 있고, 수정구를 이용하면 내 국가 어느곳의 상황이라도 그 즉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내 눈만으로, 보이는 것 그대로를 바라보고 싶었다.



비록 흑마법의 지배하에 놓여있다고는 하지만 그럭저럭 평화로운 나라. 강력한 마력과 엄한 법률은 나의 나라를 질서잡힌, 완벽히 통제되는 국가로 만들 수 있었다. 어둠의 장막으로 인해 햇빛이 좀 덜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아주 못 살 정도의 열악한 환경은 아니다. 이웃의 백마법 국가들처럼 툭하면 마녀재판을 열어 화형시키는 공포정치도 아니고, 적마법 국가들처럼 세금을 쥐어짜일 염려도 없다. 자연 보호라는 미명 아래, 거의 원시인의 삶을 강요당하는 녹마법 국가의 국민이나, 정신 마법의 영향으로 항상 반쯤 얼빠진 상태로 살아야 하는 청마법 국가의 극민들보다도 한층 더 나은 환경이다.



물론 가끔씩 뒷골목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그놈 안보이니까 살맛나네' 내지는 '그런 사람이 있었나?' 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일 뿐. 즉 되도록이면 죽어 마땅한 놈들을 골라서 언데드의 유지에 사용한다는 거다.



때문에 마스터 타워의 창문으로 보는 이 나라의 풍경은,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의 악선전에 사용되는 전형적인 '악마의 나라'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평화로운 곳에 불과하다. (솔직히 말해 아무리 흑마법 국가라 해도 다른 나라들이 갖고있는 일반적인 인식-즉 지옥에 가까운 나라-에 맞추려면 영혼의 계약을 맺기 전에는 힘들다.)



게다가 이전까지는 좀비나 구울 등의 언데드를 주요 병력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주민들의 불만이 꽤 많이 쌓였지만, 이번 세기에는 '빛을 집어삼키는 어둠'이 되기 위해 대대적인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에 그런 걱정도 없었다.



"마스터, 전 레이스의 관리를 해야하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레이스. 강한 원한을 가진 영혼. 그들의 몸은 어둠의 장막과 섞여 마치 검은 구름처럼 나라 전체를 떠돌고 있다.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원한과 증오밖에 남은 것이 없는 악령들. 그리고, 나는 천사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레이스를 선택했다.



신성력 저항에 약한 것은 흑마법 세력의 존재라면 숙명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문제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최소한 천사들의 그 무시무시한 성검과 스피어에 의해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실체가 없는 레이스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대응책이었다.



단지, 그들이 국민들을 무작정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항상 신경을 써줄 필요는 있었다. 이전까지는 나 혼자만의 마력으로 일만이 넘는 레이스 모두를 제어해야했기 때문에 약간 힘들었지만, 클라르셋과 계약한 이후로는 한결 쉬워진 것이 사실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내 시야에 돌연 검은색 기류가 한줄기 하늘을 흐르는 것이 보였다.



"클라르셋이 제어를 시작한 모양이군."



수많은 영혼들이 붉은 눈을 번득이며 하늘을 날아 마스터 타워 주변에 내려앉는 모습은, 확실히 좀비나 스켈레톤들이 비실비실거리며 썩은 냄새를 풍기는 것보다는 나아보였다.



한층 더 어두워진듯한 하늘. 마스터 타워 주변을 감싸며 짙어지는 불길한 영혼들의 모습. 지금은 해가 중천에 뜬 정오이지만, 레이스들이 모이자 마치 한밤중이라도 된 것처럼 캄캄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어두워지자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먼 산 너머의 불빛이 비치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젠장...



"제라하드. 내 수정구를!"

"네, 마스터."



수정구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산너머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히는 저 하얀색 광휘는...



"여기, 수정구를 준비했습니다."



곧이어 떠오르는 영상. 언제나 그렇듯이...



"천사들이군요"

"엑토리우스, 준비하도록."

"네, 마스터"



엑토리우스가 곧 황급히 걸어나가자, 나는 시선을 다시 수정구로 돌렸다.



"해보자는 것인가... 백마법사 티아..."



수정구 저편에서, 마치 내가 보고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시선을 그대로 마주 쏘아보는 백마법사. 안경을 쓰고 커다란 마법책을 한손에 든, 마법사라기보다는 학자가 더 어울릴듯한 스타일의 백마사. 약간은 순진해보이는 얼굴이지만, 그 순진한 모습에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차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있는, 내가 며칠전 침략해 수백 에이커의 땅을 불바다로 만든 나라의 주인. 레 그라 알디우스 티아. 백마법사 협회에서 명명한 호칭을 그대로 이름을 쓰는, 백마법에 미친 학자.



"어울리지 않게 복수란 것을 좋아하는군. 좋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재미있는 인형극의 시작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호기심과 기대에 가득한 미소가 내 얼굴에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출전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빛에 의해 소멸되는 어둠이 될 것인지, 빛을 삼키는 거대한 암흑이 될 것인지... 내 운을 한번 시험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