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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문학관 - 작가 : nitrocity1
글 수 25
"드래곤?"
한얼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그 보잘 것 없는 동물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내가 그 덩치 큰 빨간 도마뱀들과 같은 종에 속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인간들이 원숭이를 자신들과 동격으로 놓지 않는 것처럼, 나도 돈만 밝히는 지능 낮은 파충류 취급을 당하긴 싫다."
점점 거대해지며, 또한 끝없이 길어지는 한얼의 몸은 분명히 보통 드래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거대한 뱀과 같은 형상.
그러나 네 개의 발이 달리고, 앞발에는 커다란 수정구를 든, 길이 7~800미터는 족히 됨직한 뱀이라면 도저히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님이 분명하다.
"너희들은, '왕의 후예'들이 어떻게 이 테라에 정착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동방 마법의 힘과 뛰어난 단결력이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렇게 단시간 동안 강대한 연합 국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 순간,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일 프렉시아 공국의 멸망.
아크메이지 일 프렉시아는 동부 지역 국가들중에서는 탑클래스에 드는 강한 마법사였다. 그의 친위대인 마법 병단은 전투 마법사 중에서는 거의 테라 최고의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의 후예들이 점점 그 영역을 확장하고, 결국 일 프렉시아 공국과 그 국경을 마주했을 때, 모두들 그 경계선을 왕의 후예들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라고 생각했다.
일 프렉시아 공국은 신생 국가 연합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의 후예들과 일 프렉시아 공국의 첫 번째 국지전이 있던 날 밤.
아크메이지 일 프렉시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만약 이뿐이었다면 '멍청한 아크메이지 하나가 방심하던 중에 암살당했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 프렉시아는 물론, 그의 거처인 왕성 '네오 프렉탈'과 공국의 수도인 '프렉탈 시티'마저 하룻밤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크메이지들 사이에서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았다.
도대체 어떤 마법을 썼기에, 혹은 어떤 괴물을 소환했기에 하루만에 도시 하나를, 그것도 아크메이지가 머무르는, 한 나라의 수도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릴 수가 있는가?
'왕의 후예'들은 이것이 자신들을 지키는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행해진 일이라며 기세등등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 기이하게 생긴 드래곤의 존재는 그 사실을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런가... 네녀석이 일 프렉시아 공국 멸망의 주범이었나."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르군, 마스터N."
이제 완전히 변신을 끝마친 한얼은, 푸른 빛이 도는 거대한 은색 뱀의 형상을 하고 공중으로 조금씩 날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블루 포세이돈이 한발 앞으로 나가며 물었다.
"어째서 아마게돈을 일으켜 이 테라를 파괴하려는 거지? 너희들은 이미 테라의 동쪽 상당 부분을 장악했잖아. 아깝지도 않은가?"
"훗...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발전이 가능했지만, 솔직히 말해 여기까지가 한계다.
동부 지방을 약간 점령했지만, 남아있는 다른 세력들은 그 기반이 워낙 단단해서 이제는 멸망시키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지.
우리는 이번 아마게돈을 통해 모든 것을 무로 돌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다음 세기에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동부 뿐이 아닌 테라 전역에 걸쳐 왕의 후예들이 지배하는 국가를 세울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정된 일. 그 누구도 막을수 없다! 그것이 비록..."
이제 상당한 높이까지 올라간 드래곤이 붉은 빛으로 불타오르는 눈을 우리쪽으로 치켜뜨면서 말했다.
"테라 최강의 마법사 세명이 연합하여 달려드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너희는 절대 나를, 사방신의 청룡인 나, 한얼을 이길 수 없다!"
한얼이 소리침과 동시에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골고루 하는군. 기죽이려는 건가?"
"아아.. 하지만 실제로 기죽는데요, 스승님. 단지 감정만으로 이렇게 기상을 조절할 수 있다면.."
"흠.. 그래봤자 커다란 파충류에 불과해. 어차피 우리는 저 아마게돈 마법서만 없애면 목표 달성이다."
데이모스 달린이 점점 더 눈부신 빛을 발하는 아마게돈 마법서를 보며 말했다.
"너는 블루 포세이돈과 함께 파상 공격을 펼쳐서 저녀석이 정신없이 대응하도록 만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동안 내가 아마게돈 마법서를 파괴시킬테니까."
"좋아. 정신없게 만드는 거면 난 자신 있어."
"아아.. 블루 포세이돈. 너라면 가능 하겠지. 안그래도 정신없는 놈이니..."
"무, 무슨! 실례라구, 마스터N."
우리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화하는 동안, 한얼은 마치 기지개라도 펴는 것처럼 온 몸을 길게 폈다.
"콰앙!"
한얼의 꼬리가 거대한 연회장 한쪽 벽을 무너뜨렸다.
"아아... 이곳은 역시 싸우기엔 너무 좁군. 밖으로 나가지. 하지만, 그 전에..."
"덥썩!"
"아앗?!"
벽에 구멍을 내고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가는가 싶던 한얼은 갑자기 고개를 틀어 아마게돈 마법서를 단번에 삼켜버렸다.
"이제.. 어떻게 할텐가? 나를 죽이기 전에는 아마게돈을 저지할 수 없다. 어떻게든 책만 파괴하고 도망치려는 잔꾀는 안 통해."
"들었나?"
"나를 도마뱀 취급하면 곤란하다고 하지 않았나, 데이모스."
가소롭다는 듯한 비웃음을 띄우며 탑 밖으로 나가는 한얼. 리치들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탑 밖으로 나갔다.
"쳇. 이렇게 된 이상.. 별 수 없군. 저녀석을 죽이고 배를 가르는 수밖에 없겠어."
"하지만... 시간이 없는걸?"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달은 이미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 앞으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눈 앞이 캄캄하군. 혼자서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괴물과 싸워야 한단 말이지.
그것도 시간에 쫒겨가면서..
나는 이 일에 나를 끌어들인 주범인 데이모스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데이모스... 어쩔거예요...?"
"일단 부딪혀 보고나서 생각해보지. 아직 리치도 많이 남았고, 우리도 마법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니까."
"좋아. 결정 되었으면 빨리 끝내버리자구~"
블루 포세이돈이 즐겁다는 듯이 외치고는 한얼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뛰어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생기발랄한 목소리.
"자~ 받아보라구! 프리즈 애로우!"
나와 데이모스는 멍청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경악한 표정으로 (물론 데이모스는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따라가기 시작했다.
"저, 저런 멍청한!"
"네녀석 혼자 싸우다 죽는 것은 상관 없지만, 우리가 더 피곤해진단 말이다!"
우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투는 시작되어버렸다.
맑은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한얼의 능력으로 인해 밖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쉴 새 없이 얼음 화살을 날려대는 블루 포세이돈이 날뛰고,
한얼과 블루 포세이돈을 중심에 놓고 원형으로 사방에 둘러서서 계속적인 마법 공격을 가하는 리치들이 있었고,
그리고 웬만한 리치들의 마법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몸으로 받아내고, 간간히 들어오는 아크 리치나 블루 포세이돈의 공격만 마법 방어막으로 막아내거나, 슬쩍 피하며 여유를 보이는 거대한 드래곤, 한얼이 버티고 있었다.
"젠장. 블루 포세이돈, 저녀석은 여기 놀러온 게 분명해..."
"그런 불평할 시간 있으면 우선 한얼 녀석부터 쓰러트리고 나서 하라구. 비행!"
데이모스가 내 불평을 막으며 날아 올랐다.
"어디, 동방에서 온 뱀은 뭐가 다른지 볼까! 파이어 볼"
불덩이 하나가 빠른 속도로 한얼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용권풍!"
한얼이 이빨을 드러내며 중얼거린 이 한마디에 사방에서 칼날같은 바람이 불어와 파이어볼을 산산히 흩어버렸다.
자신이 불러낸 바람이 파이어 볼을 소멸시키는 것을 감상한 뒤,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은 한얼이 말했다.
"이제야 모든 등장 인물이 다 모인 것인가. 그러면..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래곤이 그 긴 몸을 이끌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올라가는가 싶더니, 앞 발에 들고 있던 수정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전뢰격!"
분명히 맑은 밤하늘이다. 비가 계속 내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달과 별이 보일 정도로 맑은 하늘이다.
그런데 먹구름 한점 없는 이 날씨에 난데없이 수십줄기의 번개가 땅으로 내려꽂히는 것은 뭣때문이냐구우!
"라이트닝 볼트!"
나는 재빨리 나를 향해 떨어지는 번개를 향해 라이트닝 볼트를 날렸다.
"파짓!"
강력한 두 개의 전기 빛줄기가 충돌하며 사방으로 스파크가 튀는 것이 보였다.
"젠장! 무슨 드래곤이 저따위야! 빌어먹을!"
한차례의 벼락 세례가 휩쓸고 지나가자,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비록 나와 블루 포세이돈, 데이모스 달린, 그리고 몇몇 아크 리치들은 무사했지만, 주변에 있던 리치들은 대부분 쌔카맣게 타서 재가 되어 있었다.
하긴, 비를 맞아 완전히 젖어있었을 테니, 전기가 잘 통했겠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뇌전!"
한얼이 소리치며 브레스를 뿜어냈다. 강한 섬광의 번개 줄기가 빠른 속도로 블루 포세이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쳇. 아이스 쉴드!"
"파지직!"
블루 포세이돈의 앞에 둥그런 얼음 방패가 형성되고, 한얼의 강한 번개는 여기에 부딪혀 수십 갈래로 퍼지며 사라졌다.
블루 포세이돈은 무서했지만, 이 때문에 주위에 서 있던 애꿎은 리치들만 또 번개에 꿰뚫려 재로 변했다.
"안되겠는데요, 스승님! 아무래도 저 드래곤 녀석에게는 리치의 공격도 통하지 않아요."
"그래.. 모두 철수하도록! 이제부터는 아크메이지들만의 싸움이다!"
데이모스의 이 말이 떨어지자, 빠른 속도로 리치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저들이 한얼에게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아무런 소용 없지만, 나중에 전투가 진행되다가 부상이라도 입어 약해진 상대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때를 위해서는 단 하나의 리치라도 아끼는 편이 좋겠지.
"크크크.. 뭔가.. 이제 엑스트라는 다 빠지고 주인공들만 남자, 이건가?"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두고보겠다... 허리케인!"
나는 자신 만만하게 소리치며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곧이어 나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는 바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흠... 흑마법사 주제에 별 마법을 다 쓰는군..."
"허리케인 마법책... 비싸게 줬거든. 써먹을 수 있을 때 제대로 써야하지 않겠나."
어느 새 강한 바람의 기둥이 소욜돌이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이정도 쯤이야...."
왠만한 드래곤도 땅으로 박아넣을 수 있는 허리케인이었지만, 역시 한얼은 그 회오리 바람을 버텨내고 있었다.
"크큭... 청룡인 내가... 겨우 이따위 바람에..."
이봐, 이봐.. 그렇게 힘들여서 말하면 별로 설득력이 없다구.
"좋아! 여기 하나 더 간다!"
때맞춰 블루 포세이돈 역시 허리케인을 하나 불러냈다.
또 하나의 바람 기둥이 내가 만들어놓은 허리케인과 합류하며 더욱 더 거대한 회오리를 불러 일으켰다.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강한 소용돌이가 하늘과 땅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자,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던 한얼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바람을 다스리는 내가! 겨우 이정도에!!"
"시끄러워! 그만 떨어지라구!"
"크아악!!"
결국 한얼은 회오리 바람에 휘말려 한바퀴 거대한 원을 그리며 공중에서 휘둘린 다음,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쳤다.
"이이익!! 이 미천한 인간들이 감히!! 뇌전!"
온 몸이 내팽겨쳐진 상태에서 겨우 고개를 든 한얼이 으르렁거리며 내 쪽을 향해 입을 벌렸다. 왜 하필이면 나냐구!
"비행!"
잽싸게 하늘로 날아오른 나의 바로 밑으로, 한 줄기의 번개가 스치듯이 지나갔다.
비록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는 했지만, 주변의 공기가 파지직거리며 기분 나쁠 정도로 따끔거린다.
쳇. 그대로 갚아주지!
"낙뢰 초래!"
위로 날아오르며 한얼을 겨냥해 발동한 마법은 곧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번쩍!"
비록 한얼의 전뢰격 정도는 아니었지만, 몇 줄기의 벼락이 거대한 드래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앙!"
"하! 겨우 이정도 번개를 번개라고 부르는 거냐? 뇌전으로 청룡을 상대하려 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구... 커헉! 끄아아아아아!!"
내가 뿌린 번개들은 분명 한얼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파랗게 빛나는 은빛 비늘에 의해 모두 반사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주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아까부터 데이모스 달린이 몸을 숨긴 채 한얼에게 접근하려고 계속 시도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단지 그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가장 요란한 마법을 시전한 것 뿐.
그리고 한바탕 전기 폭풍이 지나가자, 그 틈을 타 데이모스가 재빨리 한얼과의 거리를 좁혔고, 의기양양한 탓에 순간적으로 방심한 한얼은 수정구를 들고 있던 그의 앞발로 방심의 댓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아무리 명검이라도 용의 비늘을 그렇게 단번에 잘라버릴 수는 없을텐데!"
잘려나간 앞발에서 피를 흩뿌리며 소리지르는 한얼은 무시한 채, 데이모스 달린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스터N, 내가 항상 가르쳐줬던 것 한가지.. 기억나냐?"
"스승님이 가르쳐 준 거라면... 잔인하게 사람 죽이는거요?"
"그거 말고."
"아니면, 가장 효율적으로 뒷통수 때리는 방법이요?"
"지금 장난하는거냐. 내가 항상 말했잖나. 아크메이지란 언제 어디서든 비장의 카드 하나정도는 숨기고 있어야 한다고! 이렇게 말이다!"
데이모스 달린이 화를 내며 자신이 들고 있던 롱소드를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그 검을 자세히 보던 나와 블루 포세이돈은 뒤로 뒤집어질 듯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얼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그 보잘 것 없는 동물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내가 그 덩치 큰 빨간 도마뱀들과 같은 종에 속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인간들이 원숭이를 자신들과 동격으로 놓지 않는 것처럼, 나도 돈만 밝히는 지능 낮은 파충류 취급을 당하긴 싫다."
점점 거대해지며, 또한 끝없이 길어지는 한얼의 몸은 분명히 보통 드래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거대한 뱀과 같은 형상.
그러나 네 개의 발이 달리고, 앞발에는 커다란 수정구를 든, 길이 7~800미터는 족히 됨직한 뱀이라면 도저히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님이 분명하다.
"너희들은, '왕의 후예'들이 어떻게 이 테라에 정착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동방 마법의 힘과 뛰어난 단결력이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렇게 단시간 동안 강대한 연합 국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 순간,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일 프렉시아 공국의 멸망.
아크메이지 일 프렉시아는 동부 지역 국가들중에서는 탑클래스에 드는 강한 마법사였다. 그의 친위대인 마법 병단은 전투 마법사 중에서는 거의 테라 최고의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의 후예들이 점점 그 영역을 확장하고, 결국 일 프렉시아 공국과 그 국경을 마주했을 때, 모두들 그 경계선을 왕의 후예들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라고 생각했다.
일 프렉시아 공국은 신생 국가 연합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의 후예들과 일 프렉시아 공국의 첫 번째 국지전이 있던 날 밤.
아크메이지 일 프렉시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만약 이뿐이었다면 '멍청한 아크메이지 하나가 방심하던 중에 암살당했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 프렉시아는 물론, 그의 거처인 왕성 '네오 프렉탈'과 공국의 수도인 '프렉탈 시티'마저 하룻밤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크메이지들 사이에서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았다.
도대체 어떤 마법을 썼기에, 혹은 어떤 괴물을 소환했기에 하루만에 도시 하나를, 그것도 아크메이지가 머무르는, 한 나라의 수도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릴 수가 있는가?
'왕의 후예'들은 이것이 자신들을 지키는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행해진 일이라며 기세등등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 기이하게 생긴 드래곤의 존재는 그 사실을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런가... 네녀석이 일 프렉시아 공국 멸망의 주범이었나."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르군, 마스터N."
이제 완전히 변신을 끝마친 한얼은, 푸른 빛이 도는 거대한 은색 뱀의 형상을 하고 공중으로 조금씩 날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블루 포세이돈이 한발 앞으로 나가며 물었다.
"어째서 아마게돈을 일으켜 이 테라를 파괴하려는 거지? 너희들은 이미 테라의 동쪽 상당 부분을 장악했잖아. 아깝지도 않은가?"
"훗...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발전이 가능했지만, 솔직히 말해 여기까지가 한계다.
동부 지방을 약간 점령했지만, 남아있는 다른 세력들은 그 기반이 워낙 단단해서 이제는 멸망시키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지.
우리는 이번 아마게돈을 통해 모든 것을 무로 돌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다음 세기에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동부 뿐이 아닌 테라 전역에 걸쳐 왕의 후예들이 지배하는 국가를 세울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정된 일. 그 누구도 막을수 없다! 그것이 비록..."
이제 상당한 높이까지 올라간 드래곤이 붉은 빛으로 불타오르는 눈을 우리쪽으로 치켜뜨면서 말했다.
"테라 최강의 마법사 세명이 연합하여 달려드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너희는 절대 나를, 사방신의 청룡인 나, 한얼을 이길 수 없다!"
한얼이 소리침과 동시에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골고루 하는군. 기죽이려는 건가?"
"아아.. 하지만 실제로 기죽는데요, 스승님. 단지 감정만으로 이렇게 기상을 조절할 수 있다면.."
"흠.. 그래봤자 커다란 파충류에 불과해. 어차피 우리는 저 아마게돈 마법서만 없애면 목표 달성이다."
데이모스 달린이 점점 더 눈부신 빛을 발하는 아마게돈 마법서를 보며 말했다.
"너는 블루 포세이돈과 함께 파상 공격을 펼쳐서 저녀석이 정신없이 대응하도록 만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동안 내가 아마게돈 마법서를 파괴시킬테니까."
"좋아. 정신없게 만드는 거면 난 자신 있어."
"아아.. 블루 포세이돈. 너라면 가능 하겠지. 안그래도 정신없는 놈이니..."
"무, 무슨! 실례라구, 마스터N."
우리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화하는 동안, 한얼은 마치 기지개라도 펴는 것처럼 온 몸을 길게 폈다.
"콰앙!"
한얼의 꼬리가 거대한 연회장 한쪽 벽을 무너뜨렸다.
"아아... 이곳은 역시 싸우기엔 너무 좁군. 밖으로 나가지. 하지만, 그 전에..."
"덥썩!"
"아앗?!"
벽에 구멍을 내고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가는가 싶던 한얼은 갑자기 고개를 틀어 아마게돈 마법서를 단번에 삼켜버렸다.
"이제.. 어떻게 할텐가? 나를 죽이기 전에는 아마게돈을 저지할 수 없다. 어떻게든 책만 파괴하고 도망치려는 잔꾀는 안 통해."
"들었나?"
"나를 도마뱀 취급하면 곤란하다고 하지 않았나, 데이모스."
가소롭다는 듯한 비웃음을 띄우며 탑 밖으로 나가는 한얼. 리치들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탑 밖으로 나갔다.
"쳇. 이렇게 된 이상.. 별 수 없군. 저녀석을 죽이고 배를 가르는 수밖에 없겠어."
"하지만... 시간이 없는걸?"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달은 이미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 앞으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눈 앞이 캄캄하군. 혼자서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괴물과 싸워야 한단 말이지.
그것도 시간에 쫒겨가면서..
나는 이 일에 나를 끌어들인 주범인 데이모스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데이모스... 어쩔거예요...?"
"일단 부딪혀 보고나서 생각해보지. 아직 리치도 많이 남았고, 우리도 마법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니까."
"좋아. 결정 되었으면 빨리 끝내버리자구~"
블루 포세이돈이 즐겁다는 듯이 외치고는 한얼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뛰어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생기발랄한 목소리.
"자~ 받아보라구! 프리즈 애로우!"
나와 데이모스는 멍청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경악한 표정으로 (물론 데이모스는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따라가기 시작했다.
"저, 저런 멍청한!"
"네녀석 혼자 싸우다 죽는 것은 상관 없지만, 우리가 더 피곤해진단 말이다!"
우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투는 시작되어버렸다.
맑은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한얼의 능력으로 인해 밖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쉴 새 없이 얼음 화살을 날려대는 블루 포세이돈이 날뛰고,
한얼과 블루 포세이돈을 중심에 놓고 원형으로 사방에 둘러서서 계속적인 마법 공격을 가하는 리치들이 있었고,
그리고 웬만한 리치들의 마법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몸으로 받아내고, 간간히 들어오는 아크 리치나 블루 포세이돈의 공격만 마법 방어막으로 막아내거나, 슬쩍 피하며 여유를 보이는 거대한 드래곤, 한얼이 버티고 있었다.
"젠장. 블루 포세이돈, 저녀석은 여기 놀러온 게 분명해..."
"그런 불평할 시간 있으면 우선 한얼 녀석부터 쓰러트리고 나서 하라구. 비행!"
데이모스가 내 불평을 막으며 날아 올랐다.
"어디, 동방에서 온 뱀은 뭐가 다른지 볼까! 파이어 볼"
불덩이 하나가 빠른 속도로 한얼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용권풍!"
한얼이 이빨을 드러내며 중얼거린 이 한마디에 사방에서 칼날같은 바람이 불어와 파이어볼을 산산히 흩어버렸다.
자신이 불러낸 바람이 파이어 볼을 소멸시키는 것을 감상한 뒤,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은 한얼이 말했다.
"이제야 모든 등장 인물이 다 모인 것인가. 그러면..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래곤이 그 긴 몸을 이끌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올라가는가 싶더니, 앞 발에 들고 있던 수정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전뢰격!"
분명히 맑은 밤하늘이다. 비가 계속 내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달과 별이 보일 정도로 맑은 하늘이다.
그런데 먹구름 한점 없는 이 날씨에 난데없이 수십줄기의 번개가 땅으로 내려꽂히는 것은 뭣때문이냐구우!
"라이트닝 볼트!"
나는 재빨리 나를 향해 떨어지는 번개를 향해 라이트닝 볼트를 날렸다.
"파짓!"
강력한 두 개의 전기 빛줄기가 충돌하며 사방으로 스파크가 튀는 것이 보였다.
"젠장! 무슨 드래곤이 저따위야! 빌어먹을!"
한차례의 벼락 세례가 휩쓸고 지나가자,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비록 나와 블루 포세이돈, 데이모스 달린, 그리고 몇몇 아크 리치들은 무사했지만, 주변에 있던 리치들은 대부분 쌔카맣게 타서 재가 되어 있었다.
하긴, 비를 맞아 완전히 젖어있었을 테니, 전기가 잘 통했겠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뇌전!"
한얼이 소리치며 브레스를 뿜어냈다. 강한 섬광의 번개 줄기가 빠른 속도로 블루 포세이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쳇. 아이스 쉴드!"
"파지직!"
블루 포세이돈의 앞에 둥그런 얼음 방패가 형성되고, 한얼의 강한 번개는 여기에 부딪혀 수십 갈래로 퍼지며 사라졌다.
블루 포세이돈은 무서했지만, 이 때문에 주위에 서 있던 애꿎은 리치들만 또 번개에 꿰뚫려 재로 변했다.
"안되겠는데요, 스승님! 아무래도 저 드래곤 녀석에게는 리치의 공격도 통하지 않아요."
"그래.. 모두 철수하도록! 이제부터는 아크메이지들만의 싸움이다!"
데이모스의 이 말이 떨어지자, 빠른 속도로 리치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저들이 한얼에게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아무런 소용 없지만, 나중에 전투가 진행되다가 부상이라도 입어 약해진 상대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때를 위해서는 단 하나의 리치라도 아끼는 편이 좋겠지.
"크크크.. 뭔가.. 이제 엑스트라는 다 빠지고 주인공들만 남자, 이건가?"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두고보겠다... 허리케인!"
나는 자신 만만하게 소리치며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곧이어 나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는 바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흠... 흑마법사 주제에 별 마법을 다 쓰는군..."
"허리케인 마법책... 비싸게 줬거든. 써먹을 수 있을 때 제대로 써야하지 않겠나."
어느 새 강한 바람의 기둥이 소욜돌이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이정도 쯤이야...."
왠만한 드래곤도 땅으로 박아넣을 수 있는 허리케인이었지만, 역시 한얼은 그 회오리 바람을 버텨내고 있었다.
"크큭... 청룡인 내가... 겨우 이따위 바람에..."
이봐, 이봐.. 그렇게 힘들여서 말하면 별로 설득력이 없다구.
"좋아! 여기 하나 더 간다!"
때맞춰 블루 포세이돈 역시 허리케인을 하나 불러냈다.
또 하나의 바람 기둥이 내가 만들어놓은 허리케인과 합류하며 더욱 더 거대한 회오리를 불러 일으켰다.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강한 소용돌이가 하늘과 땅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자,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던 한얼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바람을 다스리는 내가! 겨우 이정도에!!"
"시끄러워! 그만 떨어지라구!"
"크아악!!"
결국 한얼은 회오리 바람에 휘말려 한바퀴 거대한 원을 그리며 공중에서 휘둘린 다음,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쳤다.
"이이익!! 이 미천한 인간들이 감히!! 뇌전!"
온 몸이 내팽겨쳐진 상태에서 겨우 고개를 든 한얼이 으르렁거리며 내 쪽을 향해 입을 벌렸다. 왜 하필이면 나냐구!
"비행!"
잽싸게 하늘로 날아오른 나의 바로 밑으로, 한 줄기의 번개가 스치듯이 지나갔다.
비록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는 했지만, 주변의 공기가 파지직거리며 기분 나쁠 정도로 따끔거린다.
쳇. 그대로 갚아주지!
"낙뢰 초래!"
위로 날아오르며 한얼을 겨냥해 발동한 마법은 곧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번쩍!"
비록 한얼의 전뢰격 정도는 아니었지만, 몇 줄기의 벼락이 거대한 드래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앙!"
"하! 겨우 이정도 번개를 번개라고 부르는 거냐? 뇌전으로 청룡을 상대하려 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구... 커헉! 끄아아아아아!!"
내가 뿌린 번개들은 분명 한얼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파랗게 빛나는 은빛 비늘에 의해 모두 반사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주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아까부터 데이모스 달린이 몸을 숨긴 채 한얼에게 접근하려고 계속 시도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단지 그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가장 요란한 마법을 시전한 것 뿐.
그리고 한바탕 전기 폭풍이 지나가자, 그 틈을 타 데이모스가 재빨리 한얼과의 거리를 좁혔고, 의기양양한 탓에 순간적으로 방심한 한얼은 수정구를 들고 있던 그의 앞발로 방심의 댓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아무리 명검이라도 용의 비늘을 그렇게 단번에 잘라버릴 수는 없을텐데!"
잘려나간 앞발에서 피를 흩뿌리며 소리지르는 한얼은 무시한 채, 데이모스 달린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스터N, 내가 항상 가르쳐줬던 것 한가지.. 기억나냐?"
"스승님이 가르쳐 준 거라면... 잔인하게 사람 죽이는거요?"
"그거 말고."
"아니면, 가장 효율적으로 뒷통수 때리는 방법이요?"
"지금 장난하는거냐. 내가 항상 말했잖나. 아크메이지란 언제 어디서든 비장의 카드 하나정도는 숨기고 있어야 한다고! 이렇게 말이다!"
데이모스 달린이 화를 내며 자신이 들고 있던 롱소드를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그 검을 자세히 보던 나와 블루 포세이돈은 뒤로 뒤집어질 듯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