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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문학관 - 작가 : nitrocity1
글 수 25
얼음의 정령. 청마법사들이 부리는 3대 정령중의 하나.
거대한 크기의 사람 모양 얼음덩어리가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얼음 조각이 휘두르는 주먹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파괴력,
그리고 그보다도 더 무서운, 자신이 공격한 목표를 절대 영도에 가까운 냉기로 얼려버리는 마법력.
물론 그 절대적인 위력에 걸맞는 마나와 겔드가 유지 비용으로 빠져나가고,
정령 소환 마법 자체가 최고급 마법인지라 상위 마법사가 아니면 정령들을 자신의 군대로 끌어들일 수는 없는데다가,
정령 하나를 컨트롤하는데도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제약이 오히려 얼음의 정령을 더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렇게 희귀한 존재인 얼음의 정령이 묘지의 스켈레톤만큼이나 흔해보일 정도로 거대 집단을 이루어 한가지 목표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최상위 청마법사, 블루 포세이돈. 4∼50 정도만 모여도 거의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얼음의 정령을 그 두배 가까운 수를 불러내 놓고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제부터 시작될 전투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 눈을 반짝이고 있다.
역시... 청마법사들은 이해 못할 족속이라니까...
"켄톤"
"네, 마스터"
나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얼음의 정령들을 보며 내 그림자 뒤에 숨어있을 켄톤에게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번 전투의 승패는 시간에 달려있다. 외부의 적들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테니, 네가 알아서 좀비를 제어하도록. 나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겠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하지만 너무 위험한 건 아닐는지..."
"어차피, 이번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아마게돈에 휩쓸려 소멸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운명이라는 올가미를 끝까지 물어뜯는 것이 좋겠지."
"네.. 그럼 전 이만.."
내 그림자가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거대한 낫을 든 사신이 잠시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좋아, 켄톤 정도의 영웅이 제어한다면 좀비의 방어벽이 뚫리지는 않을테고... 오래간만에 드래곤 킬마크나 올려볼까나.."
전투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에는 두가지가 있다. 약자를 밟을 때의 즐거움과 강자를 쓰러트릴 때의 쾌감. 이미 오래 전에 상위 열명의 아크메이지 중 하나가 된 나는, 후자의 기쁨을 누린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즐거움을 다시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드라코니스로 일제히 돌진하는 얼음 정령들의 뒤를 따라, 나도 마나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나를 노려보는 드래곤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가볍게 인사부터 하는 게 좋겠지? 저주! 공포!"
양손에 각각 하나씩, 어둡고 혼탁한 기운이 모였다가 요새에 모여있는 드래곤들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역시,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력한 항마력을 형성하는 결계에 의해 튕겨 나올 뿐이었다.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고레벨 저주와 공포 마법이었건만, 결계 주변에 부딫혀 잠시 파지직거리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좋아, 뭐.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크와아아아~!"
내 마법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드라코니스의 성벽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래드 드래곤들이 하나 둘씩 날개짓을 하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백여마리의 크고 작은 드래곤이 비행을 시작하자 주변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그들이 뿜어내는 불길은 이미 저버린 태양보다도 더 밝았다.
거센 폭풍을 불러일으키며 기세 좋게 하늘로 솟구쳐 오른 레드 드래곤의 부대는 일제히 얼음의 정령들을 향해 급강하를 시작했다.
"블루 포세이돈?"
"왜?"
"드래곤들이 결계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안 쓸거야?"
"귀찮은데..."
"지금 레드 드래곤을 상대해야 하는 건 네가 불러낸 정령들이라구."
"쳇. 어쩔 수 없네..."
블루 포세이돈은 허공에 손짓을 몇 번 하더니, 드래곤들을 향해 한 단어를 말했다.
"중력장"
블루 포세이돈이 장난처럼 흥얼거린 한마디에, 기세 좋게 비행하던 드래곤들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심지어 얼음의 정령들에게 거의 근접했던 몇몇 드래곤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처박히기까지 했다.
"역시, 결계 밖의 지역에 중력장을 걸어버리면 드래곤이 마음껏 설치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마스터N... 저 드래곤들, 보통이 아니야. 다른 드래곤 같았으면 아예 날지도 못하거든. 그런데 저녀석들은 좀 느려지기는 했어도 잘 나네."
"블루 포세이돈, 너 진짜 바보냐? 저건 '드래곤 매니아'의 용들이라구. 분명히 용기사도 몇 명 붙어있을텐데 보통 드래곤하고 비교하면 힘들어."
"그런가? 뭐, 상관없어. 결계 부수고 나서 모두 재워버리면 되겠지. 나 먼저 갈께~"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듯한 말투로, 블루 포세이돈은 드라코니스를 향해 날아갔다.
중력장의 영향을 받고 있을텐데도, 잘도 날아가는군...
그래, 나도 질 수는 없지.
"오래간만이야. 이렇게 직접 전투에 나서는 것은."
품속에서 마법 지팡이를 꺼내들자, 극도로 끌어올린 검은 마나가 들끓는 것이 느껴진다. 아아... 초급 네크로맨서 시절에는, 이렇게 무모한 짓도 많이 했었지. 하지만 뭐,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아.
"암흑의 오러"
곧이어 내 주변에 불길한 기운의 검은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암흑의 오러가 나를 뒤덮자마자 강렬한 불길이 나를 휘감았다.
"뜨겁게 환영해주는건가"
어차피 이정도로 내 방어막이 깨질 리는 없으니 조용히 기다리면 불은 저절로 꺼지기 마련.
나를 휩쓸고 지나간 한차례의 강렬한 불길이 사그러들자, 나를 향해 브레스를 뿜어댄 드래곤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날아온 레드 드래곤은 발톱을 세우며 나를 단번에 두동강낼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결계가 강력해도, 코 앞의 드래곤을 목표로 하는 마법까지 방어해주지는 못한다.
"공포!"
"쿠에에에엑!"
드래곤은 테라 최강의 종족. 그들이 공포를 느낄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만큼, 지금처럼 '공포'라는 감정을 접할 경우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는 것 또한 드래곤이라는 생물.
"쿠에에에!!"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꼴사납게 땅에 처박혀 흐느적거리는 레드 드래곤.
지상 최대, 최강의 생물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겁먹은 덩치 큰 도마뱀에 불과하다.
"궁금하군... 드래곤 일족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환영이란 어떤 것일지.. 죽음? 고통?"
질문을 하며 한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허둥대며 뒤로 기어가는 레드 드래곤을 보니 갑자기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강한 존재일수록 깨끗하게 소멸하는 것이 더 아름답다.
어중간하게 몰락해버리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뭐, 좋아. 이쯤해서 끝내주도록 하지. 너의 그 겁먹은 모습에 어울리는 생물로 바꿔 줄테니까. 폴리모프!"
저주 마법의 마지막 단계, 폴리모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붉은 비늘이 푸른 색의 미끌거리는 피부로, 불타는 듯한 눈은 검은 색의 툭 불거져나온 눈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같은 일족으로 여기지도 않던 존재들에게서 평생동안 도망치면서 살아야겠군."
수풀 속으로 달아나는, 한때는 드래곤이었던 개구리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데이모스는 뭘 하고 있는거지?"
주변을 한바퀴 둘러본 나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아직까지도 후방에서 얼음 화살만을 날리는 데이모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늙었다고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몸 사리기는..."
드래곤 두 마리에게 환각 마법을 걸어놓고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며 응원하는 블루 포세이돈은 봐도 못 본 것으로 치고...
"다들 잘 놀고 있군.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지..."
전쟁은 영웅이 하는 게 아니다. 아크메이지 셋이 아무리 열심히 드래곤을 때려 잡는다고 해도 전투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결국엔 전체적인 병력과 전략에 의해 판가름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현명한 아크메이지라면 전반적인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수시로 점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다지 신경써서 점검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드래곤들이 멋있는 모습으로 일제히 하강하여 얼음의 정령들을 박살내는 모습은 나름대로 볼만했지만,
그중 상당수는 그대로 정령들에게 붙잡혀 지면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이렇게 끌려내려온 드래곤들은 그대로 얼음 조각으로 변해 산산히 부서졌다.
때문에 지금은 함부로 덤벼들지 않고, 다만 하늘에서 브레스나 내뿜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드래곤 자신들은 안전할지 몰라도 정령을 소멸시키는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
브레스를 맞아 녹아내려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전진하는 얼음의 정령들은, 비록 4분의 1정도가 제대로 활약도 하지 못하고 수증기로 변해버렸지만,
아직도 5~60에 달하는 거대한 얼음 거인들이 성공적으로 드라코니스의 일차 방어선에 도착했고,
곧이어 무시무시한 파괴력으로 성벽과 요새, 그리고 결계를 이루는 마법진을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아마 이 상태대로라면 채 한시간도 지나기 전에 2중 방어선까지 모두 뚫리고, 한얼의 거처이자 요새의 마지막 방어선인 드라코니스 성채까지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드래곤들이 계속해서 얼음의 정령들을 녹여버리고는 있지만, 이미 결계가 파괴되기 시작한 이상, 뒤에서 지원 사격으로 마법을 뿌려대는 리치의 군단이 슬금슬금 전진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상황은 한얼에게 불리해질 것이 틀림없다.
"1차 방어선은 생각보다 빨리 뚫을 수 있겠는걸?"
어느 새 내 옆까지 다가온 블루 포세이돈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도 시간이 부족한 건 사실이야."
이제 하늘 한가운데로 올라와버린 달을 바라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아마 2차 방어선을 돌파하기도 전에 얼음의 정령들은 다 녹아버리겠지. 그떄부터는 리치와 우리들만의 힘으로 드라코니스 본성을 공략해야 한다.
온전한 병력의 리치 군단으로 성 하나 함락시키는 것쯤은 문제가 안되지만...
문제는 역시 시간이겠지."
"소원 마법이라도 시전해볼까? 혹시 알아? 시간이 좀 더 늘어날수도 있잖아."
"네녀석은 시간 늘리려다 오히려 시간 줄여먹을 놈이야."
"아앗~ 너무해.. 그렇게 심한 말을..."
눈물 글썽거리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블루 포세이돈.
귀여운 어린 아이의 울먹이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쌍하다거나 애처롭다고 생각하겠지만,
저 녀석의 본 모습을 아는 내 입장에서는 소름끼칠 뿐이다.
"장난 그만치고... 그럴 여유 있으면 드래곤이나 한 마리 더 잡아버려."
"쳇... 재미없기는..."
"흑마법사가 농담따먹기나 하면서 시간 보내면, 살아남을 놈은 하나도 없겠..."
나는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리치들 사이에서 쉬지않고 프리즈 애로우를 날리던 데이모스 달린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짓는 블루 포세이돈도,
성벽을 부수던 얼음의 정령들과 마법 주문을 읊던 리치들도,
심지어는 외곽 방어선에 몰려있는 좀비들 마저도,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느 새 한곳으로 뭉친 드래곤들이,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길 정도로 거대한 마법력을 모으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응.. 아마도 그거겠지?"
"데이모스, 어떻게 좀 해볼 수 없어요?"
"마스터N, 난 지금 리치들 제어해서 방어대형 구축하기도 바쁘다."
"쳇. 이대로 얼음의 정령들은 다 녹여버려야 하는 건가."
"에엥... 저거 불러들이느라고 고생 꽤나 했는데..."
몇마디 대화를 하는 동안, 그 무시무시한 마법력은 점점 더 거대해지며 하나의 불꽃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인페르노. 지옥의 불꽃.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절대 주문. 아크메이지들 조차도 고위급 마법사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최상급 마법.
그러나 드래곤들은, 비록 한정된 범위 내에서이긴 하지만, 이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드래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위력은 더욱 증폭된다.
따라서 지금 저 인페르노는, 아마도 아크메이지 두세명은 힘을 모아야 가능할 정도의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겠지.
"어둠의 장막. 암흑의 오러. 화공 방어 스크롤"
"얼음 벽. 바람의 방패, 마법 방어."
나와 블루 포세이돈은 겹겹으로 마법 방어막을 치는데 여념이 없었고,
데이모스 역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치들을 밀집 대형으로 긁어모아 방어벽을 구축하는데 온 정신을 다 쏟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래곤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불의 파도가 우리를 덮쳤다.
거대한 크기의 사람 모양 얼음덩어리가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얼음 조각이 휘두르는 주먹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파괴력,
그리고 그보다도 더 무서운, 자신이 공격한 목표를 절대 영도에 가까운 냉기로 얼려버리는 마법력.
물론 그 절대적인 위력에 걸맞는 마나와 겔드가 유지 비용으로 빠져나가고,
정령 소환 마법 자체가 최고급 마법인지라 상위 마법사가 아니면 정령들을 자신의 군대로 끌어들일 수는 없는데다가,
정령 하나를 컨트롤하는데도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제약이 오히려 얼음의 정령을 더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렇게 희귀한 존재인 얼음의 정령이 묘지의 스켈레톤만큼이나 흔해보일 정도로 거대 집단을 이루어 한가지 목표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최상위 청마법사, 블루 포세이돈. 4∼50 정도만 모여도 거의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얼음의 정령을 그 두배 가까운 수를 불러내 놓고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제부터 시작될 전투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 눈을 반짝이고 있다.
역시... 청마법사들은 이해 못할 족속이라니까...
"켄톤"
"네, 마스터"
나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얼음의 정령들을 보며 내 그림자 뒤에 숨어있을 켄톤에게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번 전투의 승패는 시간에 달려있다. 외부의 적들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테니, 네가 알아서 좀비를 제어하도록. 나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겠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하지만 너무 위험한 건 아닐는지..."
"어차피, 이번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아마게돈에 휩쓸려 소멸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운명이라는 올가미를 끝까지 물어뜯는 것이 좋겠지."
"네.. 그럼 전 이만.."
내 그림자가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거대한 낫을 든 사신이 잠시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좋아, 켄톤 정도의 영웅이 제어한다면 좀비의 방어벽이 뚫리지는 않을테고... 오래간만에 드래곤 킬마크나 올려볼까나.."
전투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에는 두가지가 있다. 약자를 밟을 때의 즐거움과 강자를 쓰러트릴 때의 쾌감. 이미 오래 전에 상위 열명의 아크메이지 중 하나가 된 나는, 후자의 기쁨을 누린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즐거움을 다시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드라코니스로 일제히 돌진하는 얼음 정령들의 뒤를 따라, 나도 마나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나를 노려보는 드래곤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가볍게 인사부터 하는 게 좋겠지? 저주! 공포!"
양손에 각각 하나씩, 어둡고 혼탁한 기운이 모였다가 요새에 모여있는 드래곤들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역시,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력한 항마력을 형성하는 결계에 의해 튕겨 나올 뿐이었다.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고레벨 저주와 공포 마법이었건만, 결계 주변에 부딫혀 잠시 파지직거리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좋아, 뭐.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크와아아아~!"
내 마법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드라코니스의 성벽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래드 드래곤들이 하나 둘씩 날개짓을 하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백여마리의 크고 작은 드래곤이 비행을 시작하자 주변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그들이 뿜어내는 불길은 이미 저버린 태양보다도 더 밝았다.
거센 폭풍을 불러일으키며 기세 좋게 하늘로 솟구쳐 오른 레드 드래곤의 부대는 일제히 얼음의 정령들을 향해 급강하를 시작했다.
"블루 포세이돈?"
"왜?"
"드래곤들이 결계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안 쓸거야?"
"귀찮은데..."
"지금 레드 드래곤을 상대해야 하는 건 네가 불러낸 정령들이라구."
"쳇. 어쩔 수 없네..."
블루 포세이돈은 허공에 손짓을 몇 번 하더니, 드래곤들을 향해 한 단어를 말했다.
"중력장"
블루 포세이돈이 장난처럼 흥얼거린 한마디에, 기세 좋게 비행하던 드래곤들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심지어 얼음의 정령들에게 거의 근접했던 몇몇 드래곤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처박히기까지 했다.
"역시, 결계 밖의 지역에 중력장을 걸어버리면 드래곤이 마음껏 설치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마스터N... 저 드래곤들, 보통이 아니야. 다른 드래곤 같았으면 아예 날지도 못하거든. 그런데 저녀석들은 좀 느려지기는 했어도 잘 나네."
"블루 포세이돈, 너 진짜 바보냐? 저건 '드래곤 매니아'의 용들이라구. 분명히 용기사도 몇 명 붙어있을텐데 보통 드래곤하고 비교하면 힘들어."
"그런가? 뭐, 상관없어. 결계 부수고 나서 모두 재워버리면 되겠지. 나 먼저 갈께~"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듯한 말투로, 블루 포세이돈은 드라코니스를 향해 날아갔다.
중력장의 영향을 받고 있을텐데도, 잘도 날아가는군...
그래, 나도 질 수는 없지.
"오래간만이야. 이렇게 직접 전투에 나서는 것은."
품속에서 마법 지팡이를 꺼내들자, 극도로 끌어올린 검은 마나가 들끓는 것이 느껴진다. 아아... 초급 네크로맨서 시절에는, 이렇게 무모한 짓도 많이 했었지. 하지만 뭐,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아.
"암흑의 오러"
곧이어 내 주변에 불길한 기운의 검은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암흑의 오러가 나를 뒤덮자마자 강렬한 불길이 나를 휘감았다.
"뜨겁게 환영해주는건가"
어차피 이정도로 내 방어막이 깨질 리는 없으니 조용히 기다리면 불은 저절로 꺼지기 마련.
나를 휩쓸고 지나간 한차례의 강렬한 불길이 사그러들자, 나를 향해 브레스를 뿜어댄 드래곤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날아온 레드 드래곤은 발톱을 세우며 나를 단번에 두동강낼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결계가 강력해도, 코 앞의 드래곤을 목표로 하는 마법까지 방어해주지는 못한다.
"공포!"
"쿠에에에엑!"
드래곤은 테라 최강의 종족. 그들이 공포를 느낄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만큼, 지금처럼 '공포'라는 감정을 접할 경우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는 것 또한 드래곤이라는 생물.
"쿠에에에!!"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꼴사납게 땅에 처박혀 흐느적거리는 레드 드래곤.
지상 최대, 최강의 생물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겁먹은 덩치 큰 도마뱀에 불과하다.
"궁금하군... 드래곤 일족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환영이란 어떤 것일지.. 죽음? 고통?"
질문을 하며 한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허둥대며 뒤로 기어가는 레드 드래곤을 보니 갑자기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강한 존재일수록 깨끗하게 소멸하는 것이 더 아름답다.
어중간하게 몰락해버리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뭐, 좋아. 이쯤해서 끝내주도록 하지. 너의 그 겁먹은 모습에 어울리는 생물로 바꿔 줄테니까. 폴리모프!"
저주 마법의 마지막 단계, 폴리모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붉은 비늘이 푸른 색의 미끌거리는 피부로, 불타는 듯한 눈은 검은 색의 툭 불거져나온 눈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같은 일족으로 여기지도 않던 존재들에게서 평생동안 도망치면서 살아야겠군."
수풀 속으로 달아나는, 한때는 드래곤이었던 개구리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데이모스는 뭘 하고 있는거지?"
주변을 한바퀴 둘러본 나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아직까지도 후방에서 얼음 화살만을 날리는 데이모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늙었다고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몸 사리기는..."
드래곤 두 마리에게 환각 마법을 걸어놓고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며 응원하는 블루 포세이돈은 봐도 못 본 것으로 치고...
"다들 잘 놀고 있군.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지..."
전쟁은 영웅이 하는 게 아니다. 아크메이지 셋이 아무리 열심히 드래곤을 때려 잡는다고 해도 전투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결국엔 전체적인 병력과 전략에 의해 판가름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현명한 아크메이지라면 전반적인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수시로 점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다지 신경써서 점검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드래곤들이 멋있는 모습으로 일제히 하강하여 얼음의 정령들을 박살내는 모습은 나름대로 볼만했지만,
그중 상당수는 그대로 정령들에게 붙잡혀 지면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이렇게 끌려내려온 드래곤들은 그대로 얼음 조각으로 변해 산산히 부서졌다.
때문에 지금은 함부로 덤벼들지 않고, 다만 하늘에서 브레스나 내뿜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드래곤 자신들은 안전할지 몰라도 정령을 소멸시키는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
브레스를 맞아 녹아내려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전진하는 얼음의 정령들은, 비록 4분의 1정도가 제대로 활약도 하지 못하고 수증기로 변해버렸지만,
아직도 5~60에 달하는 거대한 얼음 거인들이 성공적으로 드라코니스의 일차 방어선에 도착했고,
곧이어 무시무시한 파괴력으로 성벽과 요새, 그리고 결계를 이루는 마법진을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아마 이 상태대로라면 채 한시간도 지나기 전에 2중 방어선까지 모두 뚫리고, 한얼의 거처이자 요새의 마지막 방어선인 드라코니스 성채까지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드래곤들이 계속해서 얼음의 정령들을 녹여버리고는 있지만, 이미 결계가 파괴되기 시작한 이상, 뒤에서 지원 사격으로 마법을 뿌려대는 리치의 군단이 슬금슬금 전진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상황은 한얼에게 불리해질 것이 틀림없다.
"1차 방어선은 생각보다 빨리 뚫을 수 있겠는걸?"
어느 새 내 옆까지 다가온 블루 포세이돈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도 시간이 부족한 건 사실이야."
이제 하늘 한가운데로 올라와버린 달을 바라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아마 2차 방어선을 돌파하기도 전에 얼음의 정령들은 다 녹아버리겠지. 그떄부터는 리치와 우리들만의 힘으로 드라코니스 본성을 공략해야 한다.
온전한 병력의 리치 군단으로 성 하나 함락시키는 것쯤은 문제가 안되지만...
문제는 역시 시간이겠지."
"소원 마법이라도 시전해볼까? 혹시 알아? 시간이 좀 더 늘어날수도 있잖아."
"네녀석은 시간 늘리려다 오히려 시간 줄여먹을 놈이야."
"아앗~ 너무해.. 그렇게 심한 말을..."
눈물 글썽거리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블루 포세이돈.
귀여운 어린 아이의 울먹이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쌍하다거나 애처롭다고 생각하겠지만,
저 녀석의 본 모습을 아는 내 입장에서는 소름끼칠 뿐이다.
"장난 그만치고... 그럴 여유 있으면 드래곤이나 한 마리 더 잡아버려."
"쳇... 재미없기는..."
"흑마법사가 농담따먹기나 하면서 시간 보내면, 살아남을 놈은 하나도 없겠..."
나는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리치들 사이에서 쉬지않고 프리즈 애로우를 날리던 데이모스 달린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짓는 블루 포세이돈도,
성벽을 부수던 얼음의 정령들과 마법 주문을 읊던 리치들도,
심지어는 외곽 방어선에 몰려있는 좀비들 마저도,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느 새 한곳으로 뭉친 드래곤들이,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길 정도로 거대한 마법력을 모으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응.. 아마도 그거겠지?"
"데이모스, 어떻게 좀 해볼 수 없어요?"
"마스터N, 난 지금 리치들 제어해서 방어대형 구축하기도 바쁘다."
"쳇. 이대로 얼음의 정령들은 다 녹여버려야 하는 건가."
"에엥... 저거 불러들이느라고 고생 꽤나 했는데..."
몇마디 대화를 하는 동안, 그 무시무시한 마법력은 점점 더 거대해지며 하나의 불꽃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인페르노. 지옥의 불꽃.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절대 주문. 아크메이지들 조차도 고위급 마법사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최상급 마법.
그러나 드래곤들은, 비록 한정된 범위 내에서이긴 하지만, 이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드래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위력은 더욱 증폭된다.
따라서 지금 저 인페르노는, 아마도 아크메이지 두세명은 힘을 모아야 가능할 정도의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겠지.
"어둠의 장막. 암흑의 오러. 화공 방어 스크롤"
"얼음 벽. 바람의 방패, 마법 방어."
나와 블루 포세이돈은 겹겹으로 마법 방어막을 치는데 여념이 없었고,
데이모스 역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치들을 밀집 대형으로 긁어모아 방어벽을 구축하는데 온 정신을 다 쏟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래곤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불의 파도가 우리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