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라고는 전혀 없는 먼지 가득한 방.

곳곳에 켜져 햇빛을 대신하는 촛불들.

그리고 수많은 책장과, 이를 가득 메운 책들.

이도 부족해서 곳곳에 무더기를 이루며 쌓여있는 더 많은 책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곳이 마법사의 서고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자신의 개인 서고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마법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마법서들을 접해야 한다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내 전용 서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은 구름의 탑'이라고 부르는 나의 마스터 타워 지하에 있다.

그리고 모든 마법사들의 서고가 그러하듯이, 이곳도 수많은 책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너저분하게 쌓여있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마법 개론서에서부터 시작하여, 경매장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고서에, 피를 보지 않고는 구경조차 힘든 저주받은 마법책도 여러권 있다.

그러나 모두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으니, 이중에서 내가 익히지 않은 마법이란 없다는 점이다.

그 비싼 돈을 주고 회색의 마녀, 카라에게서 마법책을 사들이고, 진위여부도 분명치 않은 보물지도를 옆에 끼고 죽어라고 고생해서 스크롤을 찾아내고, 때로는 내가 굴복시킨 아크메이지의 뇌 세척까지 시켜가며 이렇게 마법을 모으는 이유는 이걸 배우기 위해서지 장식품으로 진열해놓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 한권. 가장 구석의 제단 위에 놓여있는 두꺼운 책을 제외한다면...



"후욱!"



바람을 불어 먼지를 불어내자, 희끗희끗하게 책의 제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마게돈.

가장 강력하고, 또한 가장 무력한 마법. 세상을 멸망시키는 봉인의 열쇠이자, 마법의 극의에 달한 자들만이 익힐 수 있을 정도로 난해한 고급 마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 레벨을 올려주지도 않고, 시전하는데 엄청나게 긴 시간과 마나를 필요로 하는 쓸모없는 마법.

하지만 테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야심을 지닌 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씩 손을 대는 마법이기도 하다.



"배워놓을 걸 그랬나?"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먼지 가득한 아마게돈 책의 겉표지를 넘겼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나타나는 난해하기 그지없는 마법진과 각종 수식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존의 그 어떤 마법과도 체계를 달리하는 새로운 마법.

이를 익히기 위해서는, 초기의 국가 발전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해야 한다.

아마게돈 연구에 들어가는 무시무시하게 오랜 시간과, 초반의 국가들에겐 절대 경시못할 만만치 않은 연구비는 국가 발전에 있어서 초기가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단단히 얽어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아마게돈 마법 하나에 얽혀 우물거린다면, 초반부터 개척과 건설, 전쟁을 통해 국력을 발전시킨 다른 아크메이지들을 따라잡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지금같은 상황이 올 것을 알았다면... 역시 배워놓을 걸 그랬어..."



전혀 이해못할 말만 잔뜩 쓰여져있는 책에서 수정구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 동향을 그대로 투영하는 수정구를 보는 나에게, 불타는 돌이 끝없이 떨어지는 풍경이 한 눈 가득히 들어온다.



"이걸로 벌써 여섯 번째. 이번엔 어쩌면 위험할지도..."



누군가가 여섯 번째 아마게돈을 성공적으로 시전했고, 각종 이상 징후들이 나타나며 최후의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하루.

만약 그 짧은 시간 안에 아마게돈을 시전한 여섯명 중 한명을 패퇴시키지 못한다면, 그리고 마지막 한명이 일곱 번째 아마게돈을 시전하여 마지막 봉인을 풀어버린다면 이 테라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최후의 전쟁. 그것이 이제 눈 앞까지 다가와있다.



아마게돈 마법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무용지물인 이유. 그것은 앞서 말한 초반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도, 너무 많은 마나와 시간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아마게돈을 완벽하게 시전할 때까지, 일곱명의 마법사중 한명이라도 남에게 패한다면 그때까지 풀렸던 봉인은 다시 굳게 닫힌다.

죽어라 아마게돈을 시전해도, 마나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방어도 못하고,

또한 아마게돈의 시전자는 위원회의 보호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국가가 소멸할 때까지 계속 공격을 받으며 영토를 뜯어먹히기 십상이었다.

설령 자신의 국가가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다른 아마게돈 시전 마법사중의 한명이 패배해버리면 자신이 성공시킨 아마게돈 마저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니, 실제로 일곱 개의 봉인 모두가 풀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때문에 지금처럼 여섯 번째 봉인까지 풀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이는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이번 아마게돈은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이도 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미 아마게돈을 시전한 여섯명 모두 놀라울 정도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있다.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떨며 파멸의 내일을 두려워하는 이 때, 기뻐할 사람이라면 자신의 탑 한구석에서 아마게돈을 시전하는데 성공한 그들 뿐이겠지...



그러나,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혈안이 되어 아마게돈 시전자를 찾고 있다. 첫 번째나 두 번째 봉인이 풀렸을 때만 하더라도 느긋하게 대처하던 마법사들이, 지금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아마게돈 시전자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원수지간이었던 마법사들이라도, 지금만큼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정보를 공유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터. 수정구로부터 전언이 들어옵니다."

"연결하도록"



견습 마법사가 정신을 집중시키자 수정구가 밝아지며 흐릿한 영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상은 점차 뚜렷해지며 검은 망토와 두건을 두른 누군가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비록 자신의 몸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두건에 새겨진 문양을 보면 누구나 그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일식을 도안하여 만든 독특한 문장을 사용하는 아크메이지는 전 테라에 걸쳐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정구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이모스 달린 더 아크 리치."



데이모스 달린. 일명 피의 새벽이라고 불리우는 테라 역사상 가장 잔혹한 아크 리치.

신성 기사단 제 1의 공적이며, 15개 국가를 멸망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두운 망토 속에서 일렁이는 푸른 눈빛만을 발하는 그의 모습을 보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오래간만이군요. 스.승.님"



이 말에, 약간 흠칫하는 듯한 몸짓을 보이는 아크 리치.



"정말로... 오래간만입니다. 그동안 하나도 안 변하셨군요."



달린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푸른 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화내고 있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냐. 뼈다귀밖에 안 남은 리치가 더 변할 것이 있다는 건가?"

"혹시 또 모르죠. 그동안 북쪽의 스켈레톤 마스터처럼 해골바가지에 금칠해놓고 좋아하는 악취미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쨍그랑!"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뒤에 걸려있던 거울이 깨졌다.



"한번만... 더... 나를.... 화나게 한다면... 더... 이상.... 참지... 않겠.... "

"콰앙!"



달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마스터 타워 뒤편 벽이 무너졌다.

한번 당한건 무조건 배로 갚는다. 이게 내 신조다.



"가만 안 두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크 리치 데이모스?"

"훗...."



구멍뚫린 벽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를 진정시켰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에서 타오르던 불길한 푸른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그라들었다.



"실수했군. 나 답지않게 흥분하다니. 나를 리치로 만든 장본인이 눈 앞에 있어서인가..."

"아, 스승님이 리치가 될거라고는 저도 생각 못했으니,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전 당신이 그대로 소멸해줄걸로 생각했거든요."



여전히 비아냥대는 말투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평정을 찾은 듯, 달린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다.



"그나저나... 그동안 많이 발전했나보군. 원거리 저주 마법으로 이 정도 파괴력을 내다니..."

"리치 특유의 그 머리 울리는 소리 듣기 싫으니 빨리 용건이나 말하시죠."



개인적으로 대하기 힘든 상대는 별로 없지만, 데이모스 달린은 정말 마주하기가 껄끄럽다. 아무래도 한때는 내 스승이었고(비록 좋지 않은 추억뿐이었지만), 게다가 내가 직접 나서서 살해 계획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죽이는데 실패한 몇 안되는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뭐, 껍데기만 남은 저 몰골을 보면, 어떤 의미로는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아마게돈의 여섯 번째 봉인이... 풀렸다..."

"네, 네. 눈물나게 고맙군요. 창문만 열어도 곧바로 눈에 보이는 재앙의 징조를 두고도 일부러 그렇게까지 알려주시니... 마나가 남아도나보죠?"

"그렇다면, 내가 네 번째 아마게돈의 시전자를 찾아냈다는 사실도 알고 있나?"



그제서야 나는 자세를 고치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입니까?"

"첫 번째 봉인이 풀렸을 때부터 꾸준히 첩자와 천리안을 활용한 결과지."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온 셈이다.

아마게돈을 시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라면 최소한 5~7000에이커 정도는 갖고 있겠지. 게다가 모든 국가들이 다투어 공격할테니 이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테고.

파이날 워(Final War)의 위협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영토까지 먹을 수 있다.

물론...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지만...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일 것 같나?"



내 말을 끊으며 달린이 말했다.



"나를 이꼴로 만들어놓은 배신자 놈과 굳이 이렇게 귀중한 정보를 공유하려는 건.. 왜일 것 같나?"

"어라? 지금 옛날 일을 끄집어내자는 겁니까?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구요. 원래 스승님이 나를 희생 제의의 제물로 실험해보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런..."

"훗. 웃기는군. 네녀석은 어차피 나를 배신할 생각 아니었나? 그날 보여준 네놈 부하들의 반응 속도는 분명히 몇 번씩 연습해본 솜씨였어. 내가 너를 제물로 쓰려고 했건, 그렇지 않건간에 결과는 똑같았겠지."

"글쎄요.. 정확히 하자면, 솔직히 말해서 결과가 똑같지는 않았을텐데요. 희생 당할거라는 위협만 받지 않았어도 모든 일을 계획했던대로 처리했을테고,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스승님이 덜 죽어서 돌아다니지도 않았겠죠. 확실하게 소멸시켰을테니까요."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뭐, 좋다. 지금에 와서 굳이 그걸 따지자는 건 아니니까."

"네, 그냥 넘어가기로 하죠. 그건 그렇고... 그래서, 그걸 나에게 가르쳐주려는 이유는?"

"너도 알고 있겠지. 아마게돈의 시전자는 보호 위원회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약간 끄덕였다.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아마게돈 시전자를 일단 찾아내서 영토를 빼앗아오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한없이 점령해버릴 수 있다. 아크메이지가 소멸할 때까지 말이야.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해."

"하이에나들 때문...입니까?"

"그래. 죽을 고생해서 겨우 전투에서 승리해놓으면 내가 얼마 점령하기도 전에 사방팔방에서 다른 국가들이 몰려와 다 뜯어먹지. 사자가 애써 사냥해 놓으면 하이에나 떼거리에게 쫓겨서 얼마 먹지도 못하는 것과 같아."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다른 사자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먹이를 나누어먹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하이에나들에게 뜯기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이번엔 달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해가 빠르군."

"하지만 그게 대답이 되지는 못한다는 걸 잘 아실텐데요. 왜 저를 택한 겁니까? 다른 마법사들도 많지 않습니까. 굳이 미운털 박힌 저를 고를 필요는 없었을텐데요."

"물론, 흑마법사는 많아. 그리고 그중에서는 꽤 강력한 놈들도 몇몇 있지. 하지만, 테라상에서 좀비 군단으로 십대 강국 안에 드는 미친놈은 너밖에 없어."

"그렇군요.. 머릿수로 밀어 붙여서 다른 아크메이지들이 접근 못하게 하라?"

"아아.. 물론이다. 네가 다른 잡다한 놈들을 상대하는 동안 우리는 안쪽에서 박살낸다는 거지"

"우리?"

"이번 전투는 모두 세명이 참가한다. 피의 새벽, 데이모스 달린. 이건 물론 나지. 그리고 한없이 어둠에 가까운 회색의 마법사, 마스터N. 이건 네녀석이고."

"잠깐만, 우리 둘만으로도 벌써 10대 강국중의 흑마법사 두명이 합친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그래, 여기에 덧붙여서 진실의 파괴자, 포세이돈도 참가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세가지를 의심했다. 우선 내 귀를 의심했고, 그 다음엔 달린이 미친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했으며, 마지막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설정을 만들어낸 신들이 과연 제정신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세이돈이라니... 다른 마법사도 아니고, 하필이면 진실 파괴자, 블루 포세이돈이라니!



"장난이죠?"

"..."

"진심이군요."

"그래"

"좋아요, 좋아. 난 이번 일에서 손 떼죠."

"뭘 그렇게 겁내나?"



빠직.

수정구에 금이 갔다. 이런, 너무 흥분했나?



"아실텐데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레드 드래곤 만난 트리언트처럼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지?"

"블루 포세이돈 그 작자가 무서운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스승님도 아시잖습니까! 그 사람과 연관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블루 포세이돈. 그의 이름처럼 블루 포세이돈은 바다의 왕이 총애하는 물의 지배자. 절대적인 아크메이지 중의 한명이다.

청마법사들의 특기인 정신계 마법에도 지극히 뛰어나서, 그의 국가는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다.

거의 절대적인 환각 마법에 의해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블루 포세이돈의 국가를 공격한 아크메이지 중에서 성공적으로 도착한 사람조차도 얼마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끔씩 그의 국가에 도착한 군대는 얼마 후엔 여지없이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며 되돌아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블루 포세이돈의 진정한 무서움은 그정도가 아니다.

그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몇 명 되지 않지만, 다행히 나도 그 몇 명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블루 포세이돈이라는 아크메이지가 어떠한 인물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소문난 그의 본모습 때문에 블루 포세이돈은 십대 강국 내에 드는 유일한 청마법사이면서도 '물의 왕'이나 '정신의 지배자'라는 멋진 칭호를 버리고 '진실 파괴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인간이 끼어들면 당연하게 될 일도 절대 이루어지지 않고, 절대 불가능한 일도 아주 당연하게 이루어진다구요! 골치 아프단 말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적마법사에게 부탁할까? 우리에게 항상 당하느라 하늘 끝까지 원한이 사무친 놈들을? 아마 내일 당장 테라가 끝장이 난다고 하더라도 우리 목부터 조르려고 들걸. 그러면, 녹마법사들? 알고 있을텐데. 제법 강하다는 녹마법사 중에서 우리에게 좋은 감정 가진 녀석들 별로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백마법사들과 손을 잡자는 미친 소리는 안 하겠지? 흑마법사 아니면 청마법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10대 강국중에서 흑마법사는 우리 둘. 청마법사는 블루 포세이돈 하나뿐이야."



물론 현실은 나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블루 포세이돈이 하는 일들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도피하고픈 현실이다.

도대체가! 마인드 플레이어를 말려서 찢어먹는 청마법사를, 양 백만마리를 모아서 (그것도 비행 마법에 동물 거대화를 건 다음에) 드래곤과 싸움붙이는 아크메이지를 무슨 수로 믿느냔 말이다!



"이, 이봐요, 달린..."

"이제 스승님 대우는 집어치우기로 한건가?"

"지금 내가 그런거 따지게 생겼어요! 도대체 우리 둘만으로 뭐가 부족해서 그런 싸이코 청마법사까지 끌어들이냔 말입니다!"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아무리 생각해도 최소한 탑텐급 아크메이지 세명은 모아야 하니까."

"도대체 누군데, 도대체 그 잘난 작자가 누군데 피의 새벽과 회색의 마법사, 여기에 진실 파괴자까지 달라붙어야 한다는 겁니까?"



달린은 수정구 저편에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아크메이지는... 동방 대륙에서 온 자들의 지도자. '한얼'이다"



젠장. 어쩐지 데이모스 달린이 수정구를 통해 나타날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니...

이건 하이에나를 쫓기 위해 사자 세 마리가 모인 것이 아니라, 사자 사냥꾼을 상대하기 위해 사자 세 마리가 손을 잡는 꼴 아닌가.



평소같았으면 절대로 응하지 않았을 제안이었지만, 수정구를 통해 보이는, 내 영토로 끝없이 떨어지는 불붙은 돌덩어리들은 나를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길로 내몰고 있었다.



이미 여섯 번째까지 풀려버린 아마게돈의 봉인. 이제 다른 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