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모든 생명의 활동이 가장 저조해지기 때문에 흑마법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끔씩 흰 눈이 내린다고 좋아하는 얼뻐진 백마법사들도 있기는 하지만.



겨울답게 테라는 온통 눈에 뒤덮혀 버렸다. 늦가을부터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은 점점 더 본격적으로 퍼붓기 시작했고, 한겨울에 접어든 지금, 세상은 온통 하얗다. 기온은 영하를 한참 밑돌고, 얼음은 갈수록 단단하게 얼어붙어 얼음의 정령들이 축제를 벌이기 좋도록 바뀐다. 이런 날씨에 땀을 흘린다는 것은, 그것도 후끈후끈하게 난방을 하는 실내에서가 아닌 눈내리는 벌판 한가운데서 땀을 흘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부글부글 끓고 있는 쇳물과, 그것을 담고 있는 빨갛게 달아오른 거대한 용광로 때문에 나를 비롯한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야외에서 불을 피워 쇠를 녹이는 일을 하느라 더워 죽을 지경에 처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합리한 일임에 틀림 없다. 아마 대장간을 제외하면 이런 짓 하는 인간은 없겠지.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아크메이지라는, 그 이름도 영광스러운 마법사. 대장간 일을 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용광로 주변에 모여있는 사람들도 모두 나의 견습 마법사들 뿐. 실제로 대장장이는 한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이렇게 미친 척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마스터, 다시 마나가 응집되고 있습니다."

"그래, 이것으로 열 한번째인가. 최소한 본전은 뽑았군."



룬 문자가 새겨진 특수 용광로 안에서 펄펄 끓던 쇳물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잠잠해진다. 순도 99.9%의 쇠가 액체 상태로 저렇게 고요히 있는 것은 분명 보기 드문 광경일 것이다. 용광로 옆의 임시 타워에 선 나는 마나의 기운이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작한다."



나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잠잠하던 쇳물이 서서히 소용돌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광로 주변에 몰려있던 마나도, 마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흡수되었다. 그리고 충분한 마나가 쇳물에 포함되자,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서 커다란 사람 모습의 골렘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용광로가 쓰러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새로운 쇠를 보충해 넣도록."

"네, 마스터"



오천파운드짜리 쇳덩어리가 용광로에서 기어나오고 있었다. 거인족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몸집. 점점 식어가면서 본래의 색을 찾아 은빛으로 번쩍이기 시작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철이라기 보다는 마치 수은처럼 보이는 재질. 한걸음을 움직일때마다 땅이 진동할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마법 생물. 이것으로 열 한번째 아이언 골렘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골렘 안내서임에도 불구하고 이정도 숫자의 아이언 골렘을 생성시켰으니, 분명 손해보는 장사를 한 것은 아니다.



"쇠는 아직 충분한가?"

"네, 아직 9만 파운드 정도가 남아있습니다."

"좋아, 쇠가 다 떨어질 때까지 골렘 생성 작업을 계속한다. 견습 마법사 중에서 체력이 떨어지는 자는 교대시키도록."

"네. 그런데, 마스터께서는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상관없다."

"네... 그럼 다음 작업을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견습 마법사가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자, 용광로에서 방금 태어난, 그야말로 갓 뽑아낸 따끈따끈한 아이언 골렘이 내 눈앞에 섰다.



"다른 골렘들과 함꼐 서 있도록. 다음 명령이 있을때까지 대기하라."



내 말이 떨어지자 마자 골렘은 자신의 동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 덮인 벌판에 거대한 아이언 골렘이 열한대나 서 있는 것은 마치 고대 유적을 보는 것처럼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마, 내 명령이 다시 떨어지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라도 저렇게 서 있겠지.



"마스터, 쇠의 보충과 아이언 골렘 제작 안내서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러면, 작업을 속행한다."



아이언 골렘이 빠져나가면서 그 수위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던 쇳물은, 지금은 다시 넘칠듯이 출렁대었다. 그리고 용광로 옆의 임시 계단에는, 두명의 마법사가 무거운 듯이 네모난 돌덩어리를 들고 있었다. 마법의 문자와 룬이 하나 가득 빽빽히 들어찬 묘비. 바로 골렘 안내서라고 불리는 아이템이다.



"첨벙!"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골렘 안내서는 곧바로 용광로 안으로 던져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또 다시 아까처럼 소용돌이가 일고, 아이언 골렘이 생성되겠지.



나는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비록 내가 서 있는 타워가 용광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 하나의 거리 차이로 인해 내가 느끼는 열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뜨거움에도 상관없이 나는 계속해서 팔을 내밀고 나의 마나를 약간씩 용광로 안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생성되는 아이언 골렘은 영원히 나의 명령에 복종하게 된다.



원래 나는 아이언 골렘이라는 유닛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물론 파괴력도 상당하고, 나의 명령에만 절대 복종하는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능력 대 유지비 효율이 그다지 좋지 못한데다가 무엇보다도 둔해서 전투에 써먹기에는 여러모로 결함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대적인 골렘 생성작업에 들어간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아직까지도 나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마나 폭주의 여파였다.



마나 폭주로 인해 엄청난 손실을 입은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국력을 부풀려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중위권 국가들에게도 얕보이고, 그러다 잘못해서 방어에 한번이라도 실패하는 날에는 끝없는 추락의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비를 대량으로 제작하기엔 너무도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아이언 골렘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마침 황무지를 개간하는데 나무와 거대한 암석 등의 장애물이 많아 곤란을 겪고 있다는 보고서가 올라와, 판단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제 저렇게 모여서 서 있는 거대한 골렘들은, 전투보다도 황무지 개간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 제거 작업에 더 큰 힘을 쏟게 될 것이다. 저 거대한 힘을 농장 건설 그 자체에 쏟아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도 해보지만, 골렘이 갖는 비정상적인 마나는 파괴 활동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새로운 창조를 하는 데는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런 이유로, 세세한 작업은 죽어도 못하는 골렘에게 어떻게 고생고생해서 손에 경작용 도구를 쥐어주고, 또 죽을 고생을 해가며 밭을 경작하는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천신만고 끝에 개간한 땅은 골렘의 마나로 인해 자연의 기가 완전히 흐트러진 불모지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마나를 가진 골렘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있는 단 하나의 골렘을 제외한다면...



내가 그 골렘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내가 막 풋내기 네크로맨서로 마법 연구에 몰두할 무렵이었다. 그 당시 나는 테라 전역을 떠돌며 마법서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여행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죽음에 이르는 위험을 선물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죽어도 어렵지 않게 부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마법 연구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초보 네크로맨서였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고급 흑마법을 시전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가급적이면 위험한 상황은 피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엔 무엇에 홀렸는지 간 크게도 레드 드래곤의 성지에 숨어들어가 마법서를 훔쳐냈던 것이었다. 훔쳐낸 마법을 익히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당연히 드래곤 떼거리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의 내 실력으로는 레드 드래곤의 상대는 커녕 도망도 제대로 칠 실력이 못 되었고, 당연한 결과로 끝내는 브레스에 맞아 형태도 남기지 못하고 불타버렸다.



시체도 남기지 못한 상황에서 미숙한 실력과 불안정한 마나라는 이중의 장애를 겪으면서 간신히 시전한 부활은 아슬아슬하게, 정말 아슬아슬하게 성공하긴 했지만 엄청난 부작용을 낳고 말았으니.



"우아아앗! 이게 어떻게 된거야아아아!!"



헐렁헐렁한 옷. 작아진 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목에서 나오는 아이 목소리. 결과만 말한다면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부활의 어중간한 성공으로 인해 10년 전의 몸으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뭐, 그 당시 내 정신은 멀쩡했고 그때까지 익혔던 마법 지식도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곧 무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이럴수가. 마나가... 모이질 않아..."



너무 어린 나이엔 몸이 마나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마나의 응집이나 조정도 불가능하게 된다. 적지 않은 흑마법사들이 어린 아이의 겉모습으로 사람들 등쳐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들도 어디까지나 '겉모습만' 어린아이일 뿐, 실제 육체는 마나에 충분히 길들여진 존재이다. 때문에 지금 내가 처한 상황처럼 '아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육체'를 갖게 된 경우엔 적어도 3~4년은 기다려야 최소한의 마나 컨트롤이 가능할만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일단 마나 컨트롤을 시작할때까지가 문제일 뿐, 한번 마나를 모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이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매우 쉽다. 그러나 그 시작점, 즉 내 경우엔 3년에서 4년이라는 그 기간이 무시무시한 장벽이 되어 다가왔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반적인 흑마법사들이 아동기를 무사히 넘기는 이유는, 첫째가 그들의 스승이 보호해주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다지 악업을 쌓을만한 기회가 없기에 특별히 목숨의 위협을 받을 일이 없다는데 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이미 독립한 사령술사. 네크로멘서 치고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당시의 나는 수많은 적들을 갖고 있었고, 특히 내가 힘을 잃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테라 끝까지라도 쫓아와서 나를 박살낼만한 원수들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남의 뒷통수를 치며 음모와 계략을 즐기는 내 성격이 가장 큰 위험 요소로 다가온 것이 바로 그 당시가 아니었나 싶다. 독립한 제자들 하나하나 보호해주다가는 부활도 못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는다는 이유 때문에 스승들은 일단 독립한 제자에 대해서는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런 이유로 누구의 보호도 기대 못하는 상황. 친구랍시고 있는 것들은 이런 내 꼴을 보면 안면 몰수하고 나를 세뇌시켜 내가 가진 마법 지식을 뽑아내려 들테고, 이른바 공명정대하다는 마법사들은 내가 사라졌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 즉시로 내가 죽은 것인지 아니면 숨은 것인지를 밝혀내려고 노력할 것이 뻔했다. 만약 숨었다면 그 약점을 잡아 날 파멸시킬 것이고, 내가 죽은 것으로 밝혀진다면... 모여서 잔치를 벌이겠지.



너무 커서 헐렁한 옷을 (그나마 레드 드래곤의 성지에 들어간다고 비싼 돈 주고 산, 화공 방어 마법이 걸려있는 옷이었는데, 웃기는 건 옷만 멀쩡하고 사람은 홀라당 다 타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럭저럭 자르고 묶어서 대강 맞춰 입은 다음, 내가 한 일은 지나가던 길에 보았던 새로 만들어진 개간 농장 마을을 목표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대도시로 가는 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 죽은 듯이 숨어있으면, 잘만 하면 3년 정도는 들키지 않고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흘 후, 이동 마법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숲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 후 당시 내가 갖고있던 돈을 거의 다 써버릴 즈음 해서 내가 목적지로 점찍어두었던 마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막 개척이 끝난, 그래서 일손이 많이 필요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탓에 일꾼을 대량으로 고용할 형편은 못되는, 아직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마을에 들어서며 내가 첫번째로 생각한 것은 "밥이나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불길한 생각이었다.

수리도 제대로 못해 거의 다 쓰러져가다시피 하는 허름한 초가집들과 이제야 겨우 기틀을 잡아가는 경작지의 모습, 그리고 피곤에 찌든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앞으로 내가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을 가중시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