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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문학관 - 작가 : nitrocity1
글 수 25
"그러면 그렇지, 웬일로 네놈이 이런 기회를 그냥 넘어가나 했다. 우터 에르네스트 디아즈!"
냉소를 띄우며 소리는 쳤지만, 실제로는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다. 트리언트와 맞붙는 것도 피할 정도로 국력 유지에 신경을 썼건만, 숨돌릴 틈도 없이 연이어 들어오는 레드 드래곤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는 건가, 마스터 'N'. 라피스놈에게 죽을뻔 한 것을 살려줬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아무리 예의없는 흑마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는군."
웃기고 있네. 장작더미에 기름까지 뿌려놓은 것에 성냥 한개피 던져놓은 것을 가지고 은혜 운운 하다니.. 하지만... 더 열받는 사실은, 지금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니라 우터, 저놈이라는 데에 있다.
Uther Ernest Diaz (우터 에르네스트 디아즈). 일명 파멸의 불꽃. 그 이름에 걸맞게 막강한 파괴력과 마법력을 자랑하는 적마법사.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으니, 바로 '불타는 겔드 덩어리'가 그의 진정한 이름이다. 적마법사들이 대부분 돈에 쪼들린 나머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두쇠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있지만 이놈은 그 정도가 한층 더 심해서, 돈이 될만한 일이라면 어디에도 그 모습을 나타내고, 보수만 후하다면 무슨 일이건 간에 마다하지 않는 마법사로 널리 알려져있다.
일반적인 적마법사들은 돈에 급급한 나머지 그다지 고급 마법서들을 살 형편도 못되고, 때문에 막강한 마법력을 갖는 적마법사란 존재는 그다지 흔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앞에서 드래곤을 타고 날아다니는 저 구두쇠 녀석은, 돈에 대한 집착은 일반적인 적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심한데도 불구하고, 최상위급 마법사들의 마법 레벨을 상회하는 수준을 갖추고 있다.
이는 모든 적마법사들의 미스테리로 아직까지도 그 원인이 분분한데, 굴복시킨 레드 드래곤의 레어에서 발견한 마법서로 마법 레벨을 올렸다거나, 우터가 실은 고리대금업을 하던 녀석인데 빚 대신 빼앗은 고대 마법서를 보고 마법사의 길로 들어섰다는 등, 별의별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곳에 있었으니, 나도 내 영지에 빌붙어 사는 오크 부족의 족장에게서 들은 이야기이지만, 우터 에르네스트 디아즈는 실은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인물로 원래는 귀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본능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돈을 너무 밝히는 성미 탓에, 가문의 이름을 계승할 정도로 뛰어난 검사이자 마법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우터 가문은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갖는 후손에게 이름을 물려준다고 한다) 그만 가문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그냥 곱게 나오면 될 것을, 반발심으로 가문의 서고에 쌓여있던 금단의 마법서를 모두 훔쳐 들고나왔기 때문에 끝내는 대륙 전역의 기사들에게 쫓기게 되고, 쫓기고 쫓겨서 결국엔 이곳 테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문인지 녀석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단지 U.E.D라는, 이름의 이니셜만을 썼을 뿐, 자신의 본명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도 내가 들은 이야기가 진실일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게다가 우터가(家)는 잦은 몬스터 토벌로 인해 오크와 오우거들의 가장 큰 적으로 이름이 높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대대로 오크들의 공적이며, 따라서 자신이 우터 에르네스트 디아즈를 몰라볼 수가 없다는 오크 족장의 말 또한 신뢰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크헤헤헷! 그래그래, 어서 빨리 겔드부터 약탈하고 있으란 말이다!"
비속한 웃음을 흘리며 리자드맨 군단에게 약탈을 지시하는, 돈에 미친 저놈이 고귀한 가문의 귀족이라니... 아마게돈이 멀지 않았군...
그렇지만 아무리 놈이 마음에 안들어도, 그리고 녀석이 배운 마법이 비록 자기 집에서 훔쳐들고 나온 마법서로 익힌 것이라고 해도 그 위력이 반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엄연히 버티고 있는 백여마리가 넘는 레드 드래곤과 그 밑을 기어다니는 징그럽게도 많은 리자드맨 군단 또한 그들이 모시는 주인의 인품과는 상관 없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할 것임에 틀림없다.
파괴를 담당하는 적마법과, 죽음을 관장하는 흑마법. 레벨로만 따진다면 흑마법이 한 수 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도 고위급 유닛인 리치가 존재할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마나폭주의 여파로 급조한 좀비나 구울 정도로는 레드 드래곤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
"좋다! 내가 네녀석의 도움을 받은 것을 인정하지. 난 도움받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보답을 한다. 무엇을 원하나?"
마나 폭주로 인해서 마나는 다 날아가버렸지만 겔드는 아직 쌓여있으니...돈으로 구워삶는 거다.
"하핫, 우리 사이에 무슨 보답은..."
부, 불길한 예감! 저 구두쇠녀석이 저렇게 예의상 한번 사양한다는 것은 놈이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또한 이 상황을 충분히 이용해먹을 거라는 얘기다.
"그, 그러지 말고, 뭐든지 좋으니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하라구. 난 신세지고는 잠도 못 자는 성미니까 말이야. 어떻게든 보답은 해야하지 않겠나?"
애써 웃으며 말하는 내 등 뒤에 식은땀이 한줄기 흐른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끝까지 사양할 수도 없겠군. 그럼 약간의 성의 표시만 해주게. 자네도 알겠지만 내 부하들은 반짝거리는 물건들을 좋아하지."
저런 능글맞은 녀석! 솔직하게 네놈이 돈에 미친 노랭이 적마라는 사실을 밝히란 말이다! 괜히 애꿏은 부하들 탓하지 말고!
"흠... 그렇다면 자네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약소하지만 내가 가진 겔드로 보답의 뜻을 나타내기로 하지, 어떤가?"
"그렇게 해준다면 다들 기뻐할 걸세. 그래, 어느 정도 보내줄 수 있겠나? 아, 아니... 내가 그렇게 많이 바란다는 게 아니고, 내 부하들 말이야. 보는대로지만, 얘네들이 수도 많은데다가 좀 욕심스러운가? 겔드를 너무 조금받으면 나야 괜찮지만 리자드맨과 드래곤, 얘네들은 아무래도 실망하지 않겠나?"
가증스러운 놈. 자신의 욕심을 괜히 유닛들 탓으로 돌리는 저 모습을 좀 보라지. 마음같아서는 협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한판 붙어보고 싶지만...
"그리고 특히 레드 드래곤, 이 녀석들은 실망하면 언제나 투정을 부리지. 전에도 한번 겔드가 적다고 투정을 부리더니만 나라 하나를 소멸시켜버렸지, 하하하... 누굴 닮아 욕심이 저렇게 많은 건지, 내가 교육을 좀 더 잘 시켜놓을 걸 그랬어"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협박을 하다니... 좀비 한마리, 영토 1에이커가 아쉬운 나로써는 아무리 치사하고 아니꼽더라도 협상을 해서 겔드로 입막음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밖에 없다.
'누굴 닮아 그렇게 욕심이 많겠냐, 다 소환자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거지. 게다가 네놈이 조금만 더 교육시켰더라면 테라의 겔드란 겔드는 모조리 모아줘도 만족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레드 드래곤이 탄생했을 거다'
"응? 뭐라구?"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내가 성의껏 겔드를 준비해야 겠다고 중얼거린 것 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군, 난 또 내가 유닛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다고 짜증내는 줄 알았거든."
그리고, 이렇게 예의를 차린 격식있는 대화가 끝나고 나서, 피튀기는 협상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협상이라곤 해도, 칼자루를 우터가 잡고있는 한, 거의 일방적인 요구일 뿐이었고 나는 그 요구의 대부분을 들어주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그게 말이나 되냐구! 내가 가진 돈이 9억겔드뿐인데 어디서 10억겔드를 만들어 내놓으라는 말이냐!"
"하지만 나도 그정도는 받아야 장사가 될 것 아니야? 네놈 눈에는 안보이냐? 브레스를 뿜어내느라 목이 아파 콜록거리는 저 불쌍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이!"
몇시간에 걸친 지루한 협상이 계속되자 우터나 나나 모두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고 예의는 벗어던진 채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린 말싸움으로 대화의 성질이 변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아무리 그래도 10억은 너무하잖아! 그만한 겔드가 없다니까!"
"그럼, 9억."
"너... 그렇게 돈 긁어간 다음에 약탈 공격으로 한번 쳐들어와서 내 나라 멸망시킬 생각이지?"
"..."
"..."
"하하핫, 농담이야, 농담. 내가 아무리 돈을 밝혀도 그렇지 어떻게 예의도 없이 겔드를 모조리 긁어가겠냐?"
저렇게 허둥대는 것을 보니, 정곡을 찔렸군.
"8억겔드. 어때?"
8억겔드라... 내가 가진 돈의 90%를 넘는 막대한 액수지만 지금은 그걸 가릴만한 처지가 아니다. 지금 전투를 일으키면 이번엔 좀비가 불쏘시개가 되어버린다.
"좋아, 8억겔..."
"그리고 영지 200 에이커"
빌어먹을! 내가 너무 순순히 응낙하는 태도를 보이자, 금세 저렇게 말을 바꾸다니. 하다못해 저 레드 드래곤만 없었어도 한판 붙어서 어떻게 버텨 보겠건만, 우터 녀석은 아까 라피스가 피닉스를 돌려보내고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충분히 봤기 때문인지 드래곤으로 끝까지 무력시위를 한다. 정말... 저 레드 드래곤만 없었어도... 레드 드래곤만... 잠깐. 어쩌면...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영지 200에이커 추가라니! 이게 무슨 음식점 점심식사 메뉴 주문인 줄 알아? 그것도 200에이커 씩이나!"
"그럼 어쩌라구! 레드 드래곤에 리자드 군단까지 끌고 왔는데 겨우 8억 겔드 정도에 그냥 돌아가란 말이야? 영토도 조금은 얻어가야 뭔가 폼이 날 것 아니야!"
"이... 빌어먹을 녀석! 그따위로 사니까 집에서도 쫓겨나지!"
"뭐가 어쩌구 어째?! 시체나 만지작거리면서 빌빌거리는 네크로맨서 주제에!"
"하! 내가 시체나 만지작거리는 거면, 너는 도마뱀 사육사냐?"
"도, 도마뱀 사육사?"
"그래! 돈만 밝히는 도마뱀 사육사! 내말이 틀렸냐!"
"이 자식! 더이상 못참아! 화이어 볼!"
우터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내게 화이어 볼을 던졌다. 그러나 마나를 모아서 제대로 만든 마법이 아닌, 그저 기분에 따라 만들어진 화이어 볼이었기에 그 위력은 변변치않은 것이었고, 때문에 나는 아주 쉽게 그 불덩어리를 피할 수 있었다.
"해보겠다는 거냐?! 나를 뭘로 보고!"
나는 서서히 손가락을 들어 우터를 겨냥하며 말했다.
"Power Word Kill! (절대명령 죽음)"
절대명령 죽음. 일명 죽음의 손가락. 죽음을 관장하는 흑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대상의 모든 생명력을 무(無)로 돌리는 절대적인 마법이다. 그 위력이 절대적인 만큼 냉철한 이성과 상당한 준비가 필요해야 했기에 이런 상황에서 그리 쉽게 발동되는 마법은 아니었지만...
"받아라!"
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녀석의 드래곤만 없었어도...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을 때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일부러 신경을 긁어 나를 공격하게 한 다음, 반격하는 척 하면서 죽음의 손가락을 시전한다. 후후후... 완벽한 계획이야.
"허억! 이.. 망할!"
검은색의 광선과도 비슷한 강렬한 마나의 기운이 우터를 향해 솟아나갔다.
"쿠당탕!"
하지만 아쉽게도 우터는 의자를 넘어뜨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손가락을 피해버렸다. 뭐, 상관 없어. 어차피 죽음의 손가락이 실제로 노린 것은 놈이 아니라, 놈의 뒤에 있는...
"이런! 레드 드래곤!"
훗. 녀석도 내 입가에 띄운 회심의 미소를 보았는지 경악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녀석이 앉아있던 곳 뒤로 일직선상에 위치한 레드 드래곤의 무리. 저정도라면 2~30마리는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고, 그렇다면 전투를 벌이더라도 상대적으로 녀석의 피해가 훨씬 더 크게 된다. 좋아, 이번 공격도 막을 수 있어!
"아, 안돼!"
우터가 절망적으로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레드 드래곤의 덩치로 봐서 아무리 빨리 피한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의 사정권 내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쿠오오오오!!"
뭐지, 저 레드 드래곤들의 엄청난 도약은?! 나의 마법도 빠른 속도로 날아갔지만 드래곤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일반적인 드래곤보다 적어도 배는 빠른 속도로 날아오른 것이었다.
"콰앙!"
나의 마법이 지면과 충돌하여 검은 파문을 일으켰지만, 내가 정작 노린 드래곤들은 아슬아슬하게 그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 버렸고, 애꿏은 리자드맨만 한부대정도 죽어나갔을 뿐이었다.
"잘했어, 리나르도경(sir.Rinalro)!"
자세히 보니 드래곤 위에서 고개를 끄덕하며 우터에게 인사하는 기사가 보인다.
'제길, 용기사까지 있었나. 아쉽게 되어 버렸군.'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협상을 재개시켜 평화적으로 끝내는 수밖에 없다.
"너, 마스터'N', 이자식! 일부러 내 드래곤을 노리고 그런거지?!"
"무슨 소리야? 공격은 네가 먼저 했잖아!"
"웃기지 말라구! 그런 고위급 마법을 그렇게 쉽게 시전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분명히 미리 준비한 게 틀림없어! 좋아, 그런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상대해 주지! 전쟁이다!"
"그전에 잠깐!"
막 폭주하려는 녀석을 간신히 제지시켰다. 지금 전투가 붙어버리면 내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좀 아깝긴 하지만...
"네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겠다. 8억 겔드와 영토 200에이커"
"장난하냐?! 협상 결렬이야! 이미 끝난 일이라구!"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녀석도 죽을 고비를 넘긴 이상, 순순히 재협상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그리고...이것을 추가로 주지"
"웃기지마, 이것이고 저것이고 간에 그냥... 뭐가 들었는데?"
내가 앞으로 밀어놓은 보물 상자 하나. 녀석은 길길이 날뛰다 말고 그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이것은?!"
"나도 어렵게 모은 거야. 그 선에서 타협하자구. 싫다면 나도 이제 어쩔 수 없어. 진짜로 전투를 벌이는 수밖에"
녀석의 얼굴에서 갑자기 분노가 사라졌다. 탐욕과 자존심. 어느쪽을 선택하느냐의 저울질. 옆에서 보고있는 내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갈등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결론이 나올지는 뻔하지.
"좋, 좋아. 오늘은 이정도로 참기로 하지"
허겁지겁 상자를 끌어가는 우터.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괜히 별명이 불타는 겔드 덩어리가 아니지.
"그 대신, 영지의 권리서는 지금 당장 내게 넘겨라. 난 라피스같은 바보가 아니야."
"좋아, 좋아. 마음대로 하라구."
내가 작성해 준 영지 200에이커의 권리서와 (8)억겔드의 황금, 그리고 마지막에 건네준 보물 상자 하나. 녀석은 그 전과에 만족한 듯, 발걸음도 가볍게 자신의 영토로 물러갔다.
"마스터, 마지막에 준 상자가 무엇이었습니까? 설마 평범한 보물 상자는 아니었을테고..."
협상 테이블에서 재정 담당 고문의 역할로 나와 함께 앉아있던 드리스탄이 물었다.
"기름병."
"기름병이요?"
"그래."
"아니, 암시장에서 기름병이 고가에 거래되는 것은 알지만, 그리고 적마법사들이 기름병 못 구해서 허덕이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겨우 기름병 하나에 물러간다는 말입니까?"
"하나가 아니야."
"네? 그럼..."
"라피스 놈에게 쓰고 남은 것 전부 다."
"네? 전부 다요? 열개가 넘을텐데!"
"어쩔 수 없었다. 녀석과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면 영지가 최소한 600에이커는 박살났을 테니까."
"그, 그렇군요. 하지만 너무 아까운데요."
"아깝지. 그래서 나도 화풀이를 좀 했다."
나는 마스터 타워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씩 웃음을 띄웠다.
"화풀이...라고 하시면...?"
"녀석에게 준 땅의 위치를 잘 봐."
"땅의 위치? 아! 그렇군요! 하하핫!"
내가 전에 죽음과 쇠퇴를 시전한 산을 중심으로 반경 200에이커. 녀석이 상위 적마법사라고는 하지만, 나도 또한 상위 흑마법사. 그걸 해제시키려면 고생 꽤나 하게될거다.
"크크큭. 기분이 좀 풀리긴 하는군. 하지만..."
나는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웃고 있을 시간은 없다. 빨리 좀비를 제작하고 영토를 복구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 후속 공격을 막는다!"
"넷"
자, 그럼 돌아가 볼까. 아직도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구.
"마스터 타워로 텔레포... 쿨럭!"
갑자기 날아와 내 어깨를 꿰뚫은 은촉 화살 한대.
극심한 고통이 온 몸을 타고 흘렀지만, 그보다 놀라움과 절망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저 멀리 언덕 위에서 화살을 날린, 흰색 갑옷을 입은 기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들어오는 기사단과, 하늘에서 빛을 뿌리며 내려오기 시작하는 천사들...
"드디어 끝을 보자는 건가..."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 13 신성기사단장, 'coldblood'.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군."
냉소를 띄우며 소리는 쳤지만, 실제로는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다. 트리언트와 맞붙는 것도 피할 정도로 국력 유지에 신경을 썼건만, 숨돌릴 틈도 없이 연이어 들어오는 레드 드래곤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는 건가, 마스터 'N'. 라피스놈에게 죽을뻔 한 것을 살려줬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아무리 예의없는 흑마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는군."
웃기고 있네. 장작더미에 기름까지 뿌려놓은 것에 성냥 한개피 던져놓은 것을 가지고 은혜 운운 하다니.. 하지만... 더 열받는 사실은, 지금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니라 우터, 저놈이라는 데에 있다.
Uther Ernest Diaz (우터 에르네스트 디아즈). 일명 파멸의 불꽃. 그 이름에 걸맞게 막강한 파괴력과 마법력을 자랑하는 적마법사.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으니, 바로 '불타는 겔드 덩어리'가 그의 진정한 이름이다. 적마법사들이 대부분 돈에 쪼들린 나머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두쇠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있지만 이놈은 그 정도가 한층 더 심해서, 돈이 될만한 일이라면 어디에도 그 모습을 나타내고, 보수만 후하다면 무슨 일이건 간에 마다하지 않는 마법사로 널리 알려져있다.
일반적인 적마법사들은 돈에 급급한 나머지 그다지 고급 마법서들을 살 형편도 못되고, 때문에 막강한 마법력을 갖는 적마법사란 존재는 그다지 흔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앞에서 드래곤을 타고 날아다니는 저 구두쇠 녀석은, 돈에 대한 집착은 일반적인 적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심한데도 불구하고, 최상위급 마법사들의 마법 레벨을 상회하는 수준을 갖추고 있다.
이는 모든 적마법사들의 미스테리로 아직까지도 그 원인이 분분한데, 굴복시킨 레드 드래곤의 레어에서 발견한 마법서로 마법 레벨을 올렸다거나, 우터가 실은 고리대금업을 하던 녀석인데 빚 대신 빼앗은 고대 마법서를 보고 마법사의 길로 들어섰다는 등, 별의별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곳에 있었으니, 나도 내 영지에 빌붙어 사는 오크 부족의 족장에게서 들은 이야기이지만, 우터 에르네스트 디아즈는 실은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인물로 원래는 귀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본능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돈을 너무 밝히는 성미 탓에, 가문의 이름을 계승할 정도로 뛰어난 검사이자 마법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우터 가문은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갖는 후손에게 이름을 물려준다고 한다) 그만 가문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그냥 곱게 나오면 될 것을, 반발심으로 가문의 서고에 쌓여있던 금단의 마법서를 모두 훔쳐 들고나왔기 때문에 끝내는 대륙 전역의 기사들에게 쫓기게 되고, 쫓기고 쫓겨서 결국엔 이곳 테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문인지 녀석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단지 U.E.D라는, 이름의 이니셜만을 썼을 뿐, 자신의 본명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도 내가 들은 이야기가 진실일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게다가 우터가(家)는 잦은 몬스터 토벌로 인해 오크와 오우거들의 가장 큰 적으로 이름이 높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대대로 오크들의 공적이며, 따라서 자신이 우터 에르네스트 디아즈를 몰라볼 수가 없다는 오크 족장의 말 또한 신뢰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크헤헤헷! 그래그래, 어서 빨리 겔드부터 약탈하고 있으란 말이다!"
비속한 웃음을 흘리며 리자드맨 군단에게 약탈을 지시하는, 돈에 미친 저놈이 고귀한 가문의 귀족이라니... 아마게돈이 멀지 않았군...
그렇지만 아무리 놈이 마음에 안들어도, 그리고 녀석이 배운 마법이 비록 자기 집에서 훔쳐들고 나온 마법서로 익힌 것이라고 해도 그 위력이 반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엄연히 버티고 있는 백여마리가 넘는 레드 드래곤과 그 밑을 기어다니는 징그럽게도 많은 리자드맨 군단 또한 그들이 모시는 주인의 인품과는 상관 없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할 것임에 틀림없다.
파괴를 담당하는 적마법과, 죽음을 관장하는 흑마법. 레벨로만 따진다면 흑마법이 한 수 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도 고위급 유닛인 리치가 존재할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마나폭주의 여파로 급조한 좀비나 구울 정도로는 레드 드래곤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
"좋다! 내가 네녀석의 도움을 받은 것을 인정하지. 난 도움받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보답을 한다. 무엇을 원하나?"
마나 폭주로 인해서 마나는 다 날아가버렸지만 겔드는 아직 쌓여있으니...돈으로 구워삶는 거다.
"하핫, 우리 사이에 무슨 보답은..."
부, 불길한 예감! 저 구두쇠녀석이 저렇게 예의상 한번 사양한다는 것은 놈이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또한 이 상황을 충분히 이용해먹을 거라는 얘기다.
"그, 그러지 말고, 뭐든지 좋으니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하라구. 난 신세지고는 잠도 못 자는 성미니까 말이야. 어떻게든 보답은 해야하지 않겠나?"
애써 웃으며 말하는 내 등 뒤에 식은땀이 한줄기 흐른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끝까지 사양할 수도 없겠군. 그럼 약간의 성의 표시만 해주게. 자네도 알겠지만 내 부하들은 반짝거리는 물건들을 좋아하지."
저런 능글맞은 녀석! 솔직하게 네놈이 돈에 미친 노랭이 적마라는 사실을 밝히란 말이다! 괜히 애꿏은 부하들 탓하지 말고!
"흠... 그렇다면 자네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약소하지만 내가 가진 겔드로 보답의 뜻을 나타내기로 하지, 어떤가?"
"그렇게 해준다면 다들 기뻐할 걸세. 그래, 어느 정도 보내줄 수 있겠나? 아, 아니... 내가 그렇게 많이 바란다는 게 아니고, 내 부하들 말이야. 보는대로지만, 얘네들이 수도 많은데다가 좀 욕심스러운가? 겔드를 너무 조금받으면 나야 괜찮지만 리자드맨과 드래곤, 얘네들은 아무래도 실망하지 않겠나?"
가증스러운 놈. 자신의 욕심을 괜히 유닛들 탓으로 돌리는 저 모습을 좀 보라지. 마음같아서는 협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한판 붙어보고 싶지만...
"그리고 특히 레드 드래곤, 이 녀석들은 실망하면 언제나 투정을 부리지. 전에도 한번 겔드가 적다고 투정을 부리더니만 나라 하나를 소멸시켜버렸지, 하하하... 누굴 닮아 욕심이 저렇게 많은 건지, 내가 교육을 좀 더 잘 시켜놓을 걸 그랬어"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협박을 하다니... 좀비 한마리, 영토 1에이커가 아쉬운 나로써는 아무리 치사하고 아니꼽더라도 협상을 해서 겔드로 입막음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밖에 없다.
'누굴 닮아 그렇게 욕심이 많겠냐, 다 소환자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거지. 게다가 네놈이 조금만 더 교육시켰더라면 테라의 겔드란 겔드는 모조리 모아줘도 만족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레드 드래곤이 탄생했을 거다'
"응? 뭐라구?"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내가 성의껏 겔드를 준비해야 겠다고 중얼거린 것 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군, 난 또 내가 유닛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다고 짜증내는 줄 알았거든."
그리고, 이렇게 예의를 차린 격식있는 대화가 끝나고 나서, 피튀기는 협상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협상이라곤 해도, 칼자루를 우터가 잡고있는 한, 거의 일방적인 요구일 뿐이었고 나는 그 요구의 대부분을 들어주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그게 말이나 되냐구! 내가 가진 돈이 9억겔드뿐인데 어디서 10억겔드를 만들어 내놓으라는 말이냐!"
"하지만 나도 그정도는 받아야 장사가 될 것 아니야? 네놈 눈에는 안보이냐? 브레스를 뿜어내느라 목이 아파 콜록거리는 저 불쌍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이!"
몇시간에 걸친 지루한 협상이 계속되자 우터나 나나 모두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고 예의는 벗어던진 채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린 말싸움으로 대화의 성질이 변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아무리 그래도 10억은 너무하잖아! 그만한 겔드가 없다니까!"
"그럼, 9억."
"너... 그렇게 돈 긁어간 다음에 약탈 공격으로 한번 쳐들어와서 내 나라 멸망시킬 생각이지?"
"..."
"..."
"하하핫, 농담이야, 농담. 내가 아무리 돈을 밝혀도 그렇지 어떻게 예의도 없이 겔드를 모조리 긁어가겠냐?"
저렇게 허둥대는 것을 보니, 정곡을 찔렸군.
"8억겔드. 어때?"
8억겔드라... 내가 가진 돈의 90%를 넘는 막대한 액수지만 지금은 그걸 가릴만한 처지가 아니다. 지금 전투를 일으키면 이번엔 좀비가 불쏘시개가 되어버린다.
"좋아, 8억겔..."
"그리고 영지 200 에이커"
빌어먹을! 내가 너무 순순히 응낙하는 태도를 보이자, 금세 저렇게 말을 바꾸다니. 하다못해 저 레드 드래곤만 없었어도 한판 붙어서 어떻게 버텨 보겠건만, 우터 녀석은 아까 라피스가 피닉스를 돌려보내고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충분히 봤기 때문인지 드래곤으로 끝까지 무력시위를 한다. 정말... 저 레드 드래곤만 없었어도... 레드 드래곤만... 잠깐. 어쩌면...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영지 200에이커 추가라니! 이게 무슨 음식점 점심식사 메뉴 주문인 줄 알아? 그것도 200에이커 씩이나!"
"그럼 어쩌라구! 레드 드래곤에 리자드 군단까지 끌고 왔는데 겨우 8억 겔드 정도에 그냥 돌아가란 말이야? 영토도 조금은 얻어가야 뭔가 폼이 날 것 아니야!"
"이... 빌어먹을 녀석! 그따위로 사니까 집에서도 쫓겨나지!"
"뭐가 어쩌구 어째?! 시체나 만지작거리면서 빌빌거리는 네크로맨서 주제에!"
"하! 내가 시체나 만지작거리는 거면, 너는 도마뱀 사육사냐?"
"도, 도마뱀 사육사?"
"그래! 돈만 밝히는 도마뱀 사육사! 내말이 틀렸냐!"
"이 자식! 더이상 못참아! 화이어 볼!"
우터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내게 화이어 볼을 던졌다. 그러나 마나를 모아서 제대로 만든 마법이 아닌, 그저 기분에 따라 만들어진 화이어 볼이었기에 그 위력은 변변치않은 것이었고, 때문에 나는 아주 쉽게 그 불덩어리를 피할 수 있었다.
"해보겠다는 거냐?! 나를 뭘로 보고!"
나는 서서히 손가락을 들어 우터를 겨냥하며 말했다.
"Power Word Kill! (절대명령 죽음)"
절대명령 죽음. 일명 죽음의 손가락. 죽음을 관장하는 흑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대상의 모든 생명력을 무(無)로 돌리는 절대적인 마법이다. 그 위력이 절대적인 만큼 냉철한 이성과 상당한 준비가 필요해야 했기에 이런 상황에서 그리 쉽게 발동되는 마법은 아니었지만...
"받아라!"
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녀석의 드래곤만 없었어도...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을 때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일부러 신경을 긁어 나를 공격하게 한 다음, 반격하는 척 하면서 죽음의 손가락을 시전한다. 후후후... 완벽한 계획이야.
"허억! 이.. 망할!"
검은색의 광선과도 비슷한 강렬한 마나의 기운이 우터를 향해 솟아나갔다.
"쿠당탕!"
하지만 아쉽게도 우터는 의자를 넘어뜨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손가락을 피해버렸다. 뭐, 상관 없어. 어차피 죽음의 손가락이 실제로 노린 것은 놈이 아니라, 놈의 뒤에 있는...
"이런! 레드 드래곤!"
훗. 녀석도 내 입가에 띄운 회심의 미소를 보았는지 경악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녀석이 앉아있던 곳 뒤로 일직선상에 위치한 레드 드래곤의 무리. 저정도라면 2~30마리는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고, 그렇다면 전투를 벌이더라도 상대적으로 녀석의 피해가 훨씬 더 크게 된다. 좋아, 이번 공격도 막을 수 있어!
"아, 안돼!"
우터가 절망적으로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레드 드래곤의 덩치로 봐서 아무리 빨리 피한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의 사정권 내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쿠오오오오!!"
뭐지, 저 레드 드래곤들의 엄청난 도약은?! 나의 마법도 빠른 속도로 날아갔지만 드래곤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일반적인 드래곤보다 적어도 배는 빠른 속도로 날아오른 것이었다.
"콰앙!"
나의 마법이 지면과 충돌하여 검은 파문을 일으켰지만, 내가 정작 노린 드래곤들은 아슬아슬하게 그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 버렸고, 애꿏은 리자드맨만 한부대정도 죽어나갔을 뿐이었다.
"잘했어, 리나르도경(sir.Rinalro)!"
자세히 보니 드래곤 위에서 고개를 끄덕하며 우터에게 인사하는 기사가 보인다.
'제길, 용기사까지 있었나. 아쉽게 되어 버렸군.'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협상을 재개시켜 평화적으로 끝내는 수밖에 없다.
"너, 마스터'N', 이자식! 일부러 내 드래곤을 노리고 그런거지?!"
"무슨 소리야? 공격은 네가 먼저 했잖아!"
"웃기지 말라구! 그런 고위급 마법을 그렇게 쉽게 시전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분명히 미리 준비한 게 틀림없어! 좋아, 그런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상대해 주지! 전쟁이다!"
"그전에 잠깐!"
막 폭주하려는 녀석을 간신히 제지시켰다. 지금 전투가 붙어버리면 내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좀 아깝긴 하지만...
"네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겠다. 8억 겔드와 영토 200에이커"
"장난하냐?! 협상 결렬이야! 이미 끝난 일이라구!"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녀석도 죽을 고비를 넘긴 이상, 순순히 재협상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그리고...이것을 추가로 주지"
"웃기지마, 이것이고 저것이고 간에 그냥... 뭐가 들었는데?"
내가 앞으로 밀어놓은 보물 상자 하나. 녀석은 길길이 날뛰다 말고 그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이것은?!"
"나도 어렵게 모은 거야. 그 선에서 타협하자구. 싫다면 나도 이제 어쩔 수 없어. 진짜로 전투를 벌이는 수밖에"
녀석의 얼굴에서 갑자기 분노가 사라졌다. 탐욕과 자존심. 어느쪽을 선택하느냐의 저울질. 옆에서 보고있는 내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갈등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결론이 나올지는 뻔하지.
"좋, 좋아. 오늘은 이정도로 참기로 하지"
허겁지겁 상자를 끌어가는 우터.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괜히 별명이 불타는 겔드 덩어리가 아니지.
"그 대신, 영지의 권리서는 지금 당장 내게 넘겨라. 난 라피스같은 바보가 아니야."
"좋아, 좋아. 마음대로 하라구."
내가 작성해 준 영지 200에이커의 권리서와 (8)억겔드의 황금, 그리고 마지막에 건네준 보물 상자 하나. 녀석은 그 전과에 만족한 듯, 발걸음도 가볍게 자신의 영토로 물러갔다.
"마스터, 마지막에 준 상자가 무엇이었습니까? 설마 평범한 보물 상자는 아니었을테고..."
협상 테이블에서 재정 담당 고문의 역할로 나와 함께 앉아있던 드리스탄이 물었다.
"기름병."
"기름병이요?"
"그래."
"아니, 암시장에서 기름병이 고가에 거래되는 것은 알지만, 그리고 적마법사들이 기름병 못 구해서 허덕이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겨우 기름병 하나에 물러간다는 말입니까?"
"하나가 아니야."
"네? 그럼..."
"라피스 놈에게 쓰고 남은 것 전부 다."
"네? 전부 다요? 열개가 넘을텐데!"
"어쩔 수 없었다. 녀석과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면 영지가 최소한 600에이커는 박살났을 테니까."
"그, 그렇군요. 하지만 너무 아까운데요."
"아깝지. 그래서 나도 화풀이를 좀 했다."
나는 마스터 타워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씩 웃음을 띄웠다.
"화풀이...라고 하시면...?"
"녀석에게 준 땅의 위치를 잘 봐."
"땅의 위치? 아! 그렇군요! 하하핫!"
내가 전에 죽음과 쇠퇴를 시전한 산을 중심으로 반경 200에이커. 녀석이 상위 적마법사라고는 하지만, 나도 또한 상위 흑마법사. 그걸 해제시키려면 고생 꽤나 하게될거다.
"크크큭. 기분이 좀 풀리긴 하는군. 하지만..."
나는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웃고 있을 시간은 없다. 빨리 좀비를 제작하고 영토를 복구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 후속 공격을 막는다!"
"넷"
자, 그럼 돌아가 볼까. 아직도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구.
"마스터 타워로 텔레포... 쿨럭!"
갑자기 날아와 내 어깨를 꿰뚫은 은촉 화살 한대.
극심한 고통이 온 몸을 타고 흘렀지만, 그보다 놀라움과 절망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저 멀리 언덕 위에서 화살을 날린, 흰색 갑옷을 입은 기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들어오는 기사단과, 하늘에서 빛을 뿌리며 내려오기 시작하는 천사들...
"드디어 끝을 보자는 건가..."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 13 신성기사단장, 'coldblood'.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