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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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8
북만주 일대는 수일째 장마가 계속되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양동이로 물을 들이 붓 듯 비는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일본군 23사단 최전방 대대들은 장마에도 불구하고, 지난 전투때 피해를 입은 곳을 수리, 보수하였고, 진지 확장까지 마친상태였다.
그렇게 수일째 일본-몽골 양측진영은 서로 대치만 하고있는 실정이었다.
"그래, 적들의 다른 움직임은 없고?"
"네, 지난 전투때 적들도 피해를 많이 입어 선뜻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거 같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가봐."
사단 직할 1대대장인 가토 중좌는 일선 중대장들에게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그는 심심해서인지, 아니면 피곤과의 싸움에서 이기려고 해서인지 중대장들이 보고를 마치고 나갈때마다 쉴새없이 발을 떨어대었다.
"이거 애간장이 타들어가 죽겠구만. 공격을 했으면 다시한번 제대로 해보던가, 아니면 그냥 포기를 하던가......도대체 놈들의 속을 알 수 있어야지."
가토는 창분 밖 풍경을 보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붓는 와중에도 강도높은 훈련은 계속되어지고 있었다.
몽골군의 동향이 궁금한 가토는 옷걸이에걸린 쌍안경을 빼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쓰레기 더미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폐전차와 부대에서 나오는 각종 고철 , 책상, 의자 등 폐목재 등의 쓰레기 더미로 만든 방벽이었다.
쓰레기더미 방벽 중간 중간에는 폐전차에서 떼어낸 포탑으로 만든 회전 포대가 있었고, 기관총 토치카도 있었다.
"놈들이 저렇게 대문을 꽁꽁 걸어잠그고 있으니 어디 공격을 할 수도 없고......"
쌍안경 안의 몽골진영 풍경은 쓰레기 방벽에 가려져 병력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간혹 경계 교대를 위해 병사 몇명이 방벽위를 왔다갔다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아이고 답답해.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가토는 자신의 집무실 한 가운데 놓여진 소파에 가로로 길게 뻗었다.
한편, 강 상류의 몽골군이 점령한 일본군 기지에서는 몽골군 지휘관이 통신시설 앞에서 마치 연락을 기다리는 마냥 초조하게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통신소 한켠에서는 다른 몽골군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다른 한켠에서는 일본군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본군 각 사단에 계속해서 전신을 타전하는 중이었다.
"왜 아직 연락이 오지 않는거지? 왜......무슨일이라도 생긴건가? 하나의 실수라도 발생할 시에는 우리는 이곳에서 철수를 해야하는데......"
지휘관은 초조한지 손톱을 자꾸 이빨로 물어 뜯었다.
그때, 몽골 지휘관이 기다리고 있었던 전신의 기계음이 들려왔다. 통신병은 모스 부호에 맞춰 전신 내용을 종이에 적어갔다.
"그래, 이리 줘봐."
지휘관은 통신병이 건네 준 전신의 내용을 읽었다.
'사막에 매가 둥지를 틀었으니, 이제 새 역사의 부화를 위해 먹이를 찾아 비상할 일만 남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기지에서 산 쪽으로 불빛 신호를 보내자 산 중턱에서 검은 형상들이 일렁였다.
흡사 산 전체가 움직이는거 처럼 보였다.
또한 기지 주변 들판의 건초더미들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건초더미들 속에서 경전차들과 장갑차들, 보병 병력들이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한 사람이 무언가에 쫒기듯 허둥지둥 달아나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가토 중좌였다.
"사......살려줘. 살려줘......내가 잘못했어. 제발......"
가토는 도망치는데에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연신 손바닥의 지문이 닳도록 싹싹 빌어대었다.
이러한 그를 향해 수많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린속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있는 총에는 총검이 착검된 상태였다.
"아, 안돼......가까이 오지마. 안돼......"
사람들은 가토를 향해 총검날을 바짝 세운체 가토를 찌르기위해 총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 안돼!"
가토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총 소리가 울리더니 가토를 찌르려던 무리들은 순식간에 모두 쓰러져버렸다.
"어, 억!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가토는 자신을 살려준 무리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의 다리를 붙잡고 마구 울부짖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땀, 콧물등으로 범벅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때 가토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그렇게 고마우면 은혜를 갚아야지."
가토의 머리에 차가운 무언가가 접촉하는것이 느껴졌다.
"에, 엑!"
가토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머리 위에 총이 겨누어져있는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있는 총 너머로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가토는 공포감에 온 몸이 마비가 된 듯 얼어붙었다. 그는 다름아닌 또다른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안돼!"
"어헛!"
가토가 부대가 떠나가라 괴성을 지르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자, 가토의 머리위에 얼음 주머니를 올려놓았던 군의관이 놀라서 바닥에 엎어졌다.
옆에 서서 군의관을 보조하던 병사 역시 놀라서 손에 들고있던 집기들을 떨어뜨렸다.
머리의 차가운 감촉은 총이 아닌 얼음주머니 였던 것이다.
"헉......헉......내가 지금 살아있는건가?"
가토는 자신의 볼을 강하게 꼬집었다.
"악! 꿈이었군......하지만 너무 생생했어......"
가토는 서둘러 일어나 창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몽골군 진영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 저놈들때문이야. 내 저놈들을 싸그리 잡아다 죽이지 않는 한 도저히 발을 뻗고 편히 잘 수 없어."
가토는 다시 쌍안경을 눈에 가져자 대고는 몽골진영쪽을 응시했다.
"내 저녀석들을 그냥......어, 저건 또 뭐야."
쌍안경 안의 몽골군 진영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피어올랐다기보다는 팡팡 하고 터지는 느낌이었다.
순간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더니 이내 기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부 엎드려!"
가토는 자신의 소파를 건너뛰어 몸을 웅크렸다. 가토가 소파 뒤로 숨자마자 가토의 집무실 창문들이 폭발여파로 인해 깨져 유리 파편들이 날아들어왔다.
"아악!"
군의관을 보조하던 병사는 유리파편에 맞은 듯 한쪽 눈 부분을 손으로 부여잡은채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의 손에는 피가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고, 온 얼굴은 피바다가 되었다.
황급히 장교 한명이 가토의 집무실 문을 열고 소리를 쳤다.
"대대장님! 어서 지하 지휘소로 피하십시오!"
가토는 군의관과 그 장교의 부축을 받은 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분노로 인해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남서쪽, 북서쪽, 동쪽, 동북쪽방향에서 계속해서 적들의 포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부대들은 무얼했단 말인가? 저들의 포격 거리에 들어오도록 다른 전방 부대들은 도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그게 저......"
바깥에서 벌어지고있는 포격으로 인해 지하 지휘소는 진동과함께 천장에서 먼지들이 떨어져 내려왔다.
"전부 적들에게 점령된거 같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가 고립되었단 말이지......사단과도 떨어진 채 놈들에게 포위되었단 말이지......"
"굳이 말하자면 우리대대 뿐 아니라 3대대랑 5대대 까지......네, 그렇습니......"
"아으아악!"
가토는 가슴속에 눌러두었던 울화통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들을 마구 집어다 구기고 찢고 던졌다.
"당장 사단에 무전을 타전해. 어서 당장!"
"이미 사단과 인근 연대에 지원요청을 하였습니다."
"아니, 폭격기를 불러. 일단 놈들의 포격부터 잠재우란 말이야!"
한편, 통신소에서는 사단과 각 연대에 지원요청 내용의 전신을 보내는 중이었다.
몇번의 시도 끝에 사단에서 지원요청을 수락하는 답장이 날아왔다.
그때 장교가 황급히 통신소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잠깐! 사단에 연락보냈어?"
"네, 지금 지원을 수락한다는 전문이 날아왔습니다."
"다시 보내. 놈들의 포격을 잠재울 폭격지원을 요청한다고. 가능한 빨리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통신병이 폭격지원을 요청하기위해 전신기에 손을 대는 순간 큰 폭발과 함께 통신소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대대장님!"
"그래, 폭격지원은?"
"그게 저......통신소가......면목없습니다!"
"아악!"
가토는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책상을 들어엎어 버리고는 허리에 찬 칼을 빼들어 허공을 향해 난도질을 하였다.
그러다 지친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이놈들......감히 내 자존심을 건드렸겠다. 네놈들이 감히 이 가토의 자존심을 말이야."
가토는 장교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병사들을 벙커와 대대 건물들 지하로 전부 대피시켜. 포격이 멈출때까지 말이야. 시간없어. 어서 빨리!"
명령을 받은 장교는 황급히 지하 지휘소를 빠져나갔다.
가토 옆에 앉아있던 다른 장교가 가토에게 질문을 하였다.
"무슨 뾰족한 작전이라도 가지고 계신겁니까?"
"뻔한거 아닌가? 어차피 놈들은 이곳으로 오게 되어있어. 놈들의 목표는 국경을 바꾸는 거니까 말이야. 놈들이 움직인다면 포격을 멈출것이야. 그때 한방에 쓸어버리는거지."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적들에게 포위당한 상태라......"
"놈들이 우리와 사단 사이를 가로막고 진을 치고 포격을 하고있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아는가? 놈들이 자신들의 포병을 보호하기위해 포병 주변에 적지않은 병력이 있다는 말일테고, 특히나, 우리 23사단 지원병력의 공격을 막기위해 놈들의 병력이 사단으로 통하는 특정 길목에 집중 배치되어있다는 거지."
"그럼 사단의 지원은 어려워 지는것이 아닙니까?"
"아직도 이해 못하는가? 이건 역으로 그놈들만 깨부수면 놈들을 역으로 고립및 포위시킬 수 있다는 뜻이야! 그놈들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하면 우리가 놈들을 역으로 포위하는거지......놈들은 지금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게 호랑이 입속으로 머리를 집어놓고있는 상태란 말일세."
"아, 이제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놈들이 포위중인것으로 보이지만, 알고보면 놈들 스스로가 고립을 자초하고있다 이말씀이시군요."
"바로 그거야. 우리는 오는 놈들만 쓸어버리고, 그 후방 놈들은 사단에서 알아서 처리하는거지. 그리고 지금 적들의 강건너 본진은 지금 포격하고있는 포병과 일부 경계병 을 제외하면 텅텅 비어 있을것이야. 잘하면 역으로 그들을 우리가 칠 수도 있을거야. 놈들의 소원대로 국경선을 바꾸어 주자고......흐흐흐"
가토는 미친듯이 웃어대었다. 그것을 본 부하 장교들 역시 비로소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편, 후지와라 중위는 자신의 군수 계원들을 이끌고 지하 벙커로 피신중이었다.
"또다시 전투가 시작되었군. 적들의 기세를 보니 이번에는 좀 만만치 않을거 같은데......"
태성 역시 두려워하긴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그는 지난 전투때 돌변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어떠한 사람이든 전쟁을 경험하면 미친다더니......그래, 이번에는 전투는 피해다닐 것이야. 그래, 이번에는 가토만 피해다니자. 지난번에 그놈에게 강제로 끌려다닌거 생각하면......'
포격이 멈출 생각이 없이 계속되고, 지하 벙커 역시 적지않게 흔들리자, 병사들은 지하 벙커 안에서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윽고 포격이 멈추자, 병사들 중 몇몇이 벙커 문을 열려고 하였다.
"잠깐! 명령 대기해."
후지와라 중위는 문을 열려는 병사들을 급구 말렸다. 병사들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시 가토 손에 이끌려 전장으로 끌려다닐 수 밖에 없어. 그 전에 몸을 숨겨야해. 이대로 여기 있다가는 놈에게 끌려다니게 될 것이야. 어쨌든 빨리 이곳을 나가야 해.'
태성은 자신도 모르게 철문쪽으로 걸어가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말 못들었어? 명령대기해."
후지와라 중위는 태성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태성의 손은 문고리를 반쯤 돌린 후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태성은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에 의해 문이 가로막혀 있었다.
"시간이 되었군. 너희들은 내가 직접 데려가지. 지금은 전투중이니 명령에 불복종하는 놈들은 바로 즉결 처형이다."
태성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다름아닌 대대장인 가토 중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