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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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8
"야, 이렇게 누워있으니 술 생각난다야. 누가 나가서 술좀 사와라. 중국 술 있잖아. 독한걸로."
야마구치는 마치 자신이 장교라도 된 듯 여관방 한켠 이불 뭉치위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원진과 한 팀인 통역병이 벌떡일어났다.
"제가 사오겠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누군가에 의해 손목을 붙들리고 말았다. 그를 감시하고 있던 사수였다.
"같이 가지? 혼자가는건 위험할텐데......"
"아아 그래, 둘이 같이나가. 밖에 위험해. 하암......"
야마구치는 크게 하품을 한 후 피곤한지 다시 이불위에 누운 채 잠을 청했다.
방 한쪽구석에 앉아있던 원진이 일어났다. 그러자 야마구치는 신경이 거슬린다는 듯 짜증을 내며 원진에게 물었다.
"넌 또 무슨일이야?"
"변소 좀 다녀오겠습니다. 지금 좀 급해서......"
"그래? 빨리갔다와.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 나가면 변소 하나 있드라. 아참, 이놈과 같이 가라. 밖에 위험해."
야마구치는 원진에게 자기쪽 사수를 붙여주었다.
"날씨 참 좋다! 안그래 친구?"
술을 사러 나간 통역이 중국어로 말을 걸어보지만, 중국어를 못 알아들은 사수는 그저 입만 다물고 있을 뿐 이었다.
한편, 원진 역시 변소에 앉아 큰일을 보는 중이었다. 변소 밖에서는 사수 한명이 누가 오나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얼마나 크고 딱딱한 놈이 나오길래......끄응......"
신문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부르르 떨렸다.
'내가 명색이 일등병인데 저런 이등병새끼 똥 싸는거나 지키고 서있어야 하다니......'
변소 밖을 지키는 사수는 품 속에서 일본 담배 하나를 꺼내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눈치를 살살 보더니 변소 한켠으로 돌아가 바지 단추를 끌렀다.
양 다리 사이로 물줄기가 흰 연기를 내며 하나 떨어져 내려왔다.
"허어 시워언 하다. 근데 저 공장은 휴일도 없나?"
그의 시선은 낮은 담벼락 너머로 공장건물지붕위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고정되어있었다.
한편, 중경에서 동쪽으로 10여리 떨어진 한 산골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차밭에서 차잎을 따고 있었다.
"이번에 차 농사가 아주 잘 되었어."
"그러게 말이야. 아주 신이 절로 나는 구만. 하하하하."
마을사람들은 신바람에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차 잎을 따고 있었다.
그때 우르릉 소리와 함께 하늘이 어두워 지는 듯 하더니 이내 검은 그림자가 온 차밭을 덮었다.
찻잎이 파르르 떨리고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리는 거 같았다.
거센 바람도 부는거 같았다.
"뭐야? 비가내리려나?"
"그런가 보지 뭐. 매년 이맘때면 비가 많이 쏟아지잖아. 안그래?"
마을 사람 중 한명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엇! 저게 뭐야!"
하늘을 봤던 마을사람은 놀라서 차밭에 자빠져 나뒹굴렀다.
하늘에서는 구름이 아닌 거대한 비행기들이 떼지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비행기들은 산 뒤켠에서 나타나 마치 손에 닿을 듯 저공으로 마을사람들 머리 위를 지나갔다.
거대한 엔진 굉음이 온 산을 흔드는 듯 하였고, 찻잎은 파르르 떨리다 못해 차 나무가지에서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나무에 묶어두었던 염소들이 놀라서 이리저리 날뛰었고, 그 중에는 줄이 끊어져 산속으로 도망치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제 곧 중국 놈들의 본거지인 중경에 도착하겠사오니 손님여러분께서는 고고도 비행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상."
"하하 중국 녀석들에게 쓴맛을 보여주자고!"
비행기들은 기수를 들어 하늘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하나 둘 구름위로 사라지더니, 이내 온 산을 뒤덮었던 모든 비행기의 그림자들이 구름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산골마을은 다시 예전처럼 조용해졌으나, 마을사람들은 일제히 멍 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 보고만 있을 뿐 이었다.
한편, 중경의 여관에서는 야마구치가 짜증이 난 듯한 표정으로 이불위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이녀석들 술 사오랬는데 왜 이리 감감 무소식이야? 가게가 코앞이거늘......"
답답한듯 야마구치는 벌떡일어나 여관을 나서기 시작했다.
"야, 통역, 바람좀 쐬고 오자. 도대체 답답해서 방 안에 있을 수 없구나."
여관을 나선 야마구치와 그의 통역은 산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식혔다.
"아, 나오니까 좀 살것같네."
그때 공급경보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성문 쪽에서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문 성루 위로 작은 정찰기 한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녀석들 또 시작이야? 이번엔 도대체 무슨 사진을 찍으시려고? 사진은 우리가 다 찍고 있구만......"
그때 정찰기 뒤로 거대한 비행기 무리들이 등장했다.
야마구치 입에 물려있던 담배는 야마구치의 발등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야마구치는 눈 앞에 벌어진 엄청난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거대한 비행기 무리들이 하늘을 덮고있었던 것이다. 성문쪽 일대가 비행기 그림자로 인해 이내 어둠에 휩싸였다.
"저......저......녀석들......도대체......무슨 짓을......하는......거야......"
작은 비행기 한대가 대열을 이탈하여 급강하 하는가 싶더니 여관 근처 의복 공장 지붕위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연이어 다른 두대의 비행기 역시 그 공장건물과 마당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한편 변소에서 일을 보던 원진은 뻥 하는 굉음과 함께 아랫도리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시원한 순간이었다.
"아, 속이 다 시워언 하다!"
하지만 뻥 뚫린건 원진의 속 뿐 만이 아니었다. 속이 뻥 뚫려서 시원함을 느끼는건 순간이지만, 이 시원한 느낌은 아주 오래갔다. 바람까지 부는 듯 하였다.
그리고 어두침침하던 변소 내부가 갑자기 밝아진 느낌이었다.
원진은 자신의 뒤쪽이 시원하다 못해 추워지는 느낌이 들자 뒤를 돌아다 보았다.
순간 그는 푸세식 변소 위로 주저앉아 떨어질 뻔했다.
"저......저게 뭐야?"
변소 뒤쪽 벽이 언제 벽이 있었냐는 듯 뻥 뚫려있었고, 그 뚫린 벽 너머로 여러명의 사람들이 물 양동이를 들고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시커멓게 화염에 휩싸인 큰 건물이 보였다.
여관 옆의 의복 공장이었다.
"말도 안돼......"
서둘러 신문지로 뒤를 닦고 바지를 추켜올린 원진은 변소 뚫린 벽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다 발밑에 무언가 물컹한게 밟히는 것을 느꼈다.
무너진 건물 잔해에 삐져나온 사람의 손이었다.
원진은 자신도 모르게 건물 잔해를 치웠고, 물 양동이를 지고 가던 사람들도 몇명 붙어 도와주었다.
"흐억!"
건물 잔해를 다 치우자 원진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변소 밖을 지키던 야마구치의 사수였던 것이다.
한편, 폭발음을 들은건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술을 사러 나간 통역과 사수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당황하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일이지? 벌써 폭격을 할 리는 없는데......이럴 수는 없는데......"
하늘은 비행기 무리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공포화로 시커멓게 물들었고, 거리는 온통 폭격을 피할곳을 찾기위해 뛰어다니는 시민들로 바글거렸다.
말이 뛰어다닌다는거지 사실상 사람들끼리 서로 엉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통역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하나 스쳐 지나갔다.
'내가 지금 이럴때가 아니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통역이 아니었다. 그는 냅다 몸을 낮춰 사람들 틈바구니로 숨어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 이 자식이!"
사수는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어 통역을 쫒아가려 했지만, 폭탄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의 장벽을 뚫기가 어려웠다.
공중을 향해 총을 몇발 쏘면서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려고도 했지만, 폭격기에서 떨어진 폭탄으로 인한 폭발음때문에 총 소리 역이 묻히고 있었다.
또한 총 소리를 들었다고 물러날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폭격을 피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하늘에서는 비행기들이 먹잇감을 사냥하는 늑대들 마냥 편대를 지어 각자의 먹잇감을 향해 급강하를 하였다.
도망치는 통역 주변으로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다. 비행기에서 떨어진 폭탄은 마치 통역을 쫒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용케도 통역은 그 폭발 사이를 마구 달려갔다.
"헤헤, 이렇게 쉽게 죽을 내가 아니지.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그때 통역이 지나가던 바로 옆 공장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고, 순간 통역은 머리가 멍 해짐과 동시에 세상이 어질어질 해지더니 이내 정신을 잃었다.
한편, 원진 역시 이번을 전쟁에서 도망칠 기회로 보고 있었다.
폭격을 틈타 임시정부나 조선인 거주구역으로 들어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의 위협이 없는 중국 서부로 숨어들 생각이었다.
원진은 길거리로 뛰어 나오자마자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다.
"어엇, 죄송합니다."
살아남기위해 조선말로 사과를 하자 낯익은 대답이 들려왔다.
"너 이자식, 방금 뭐라 그랬어?"
고개를 들어본 원진은 가슴이 철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야마구치였던 것이다.
원진은 두말할거없이 서둘러 혼란스러운 사람들 틈새로 달렸다.
"너 이자식, 거기 안서! 뭐해? 어서 쫒아!"
야마구치는 자신의 통역에게 쫒으라고 지시한 후 자신 역시 원진 뒤를 쫒았다.
하지만 원진은 이미 사람들 틈새로 사라진 후였다.
한편, 통역은 무언가 차가운 것이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것을 느꼈고,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정신이 드십니까?"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있는것을 본 통역은 즉시 몸을 털고 일어났다.
물벼락을 낮은 그의 꼴은 흡사 물에빠진 생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아, 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오......"
통역은 냅다 사람들을 제치고 달렸다.
통역의 이러한 행동에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참 이상한 사람 다보겠네."
한참을 달리던 통역은 주택가 골목길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
"너 넌!"
"아 씨......"
통역과 원진은 서로 부딪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을 쫒으러 온 줄 알고 반대방향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이 가고자 하는곳은 같은 장소였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