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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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8
이른 새벽부터 원진의 단잠을 깨우는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사흘전에 부두에서 짤리고 이제 밖에 나갈 일도 없는데 누구지? 예, 나갑니다."
원진이 방문을 열자마자 거친 두 손이 원진의 멱살을 잡아 원진을 문 밖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원진은 아직 눈이 잘 뜨이지 않아 자신을 잡은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는 힘없이 끌려나왔다.
"설마 이 이시하라 경부의 얼굴을 잊은건 아니겠지?"
이제 좀 사물 식별이 가능해진 원진은 눈 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이자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
인천 부둣가에서 악명높기로 소문난 이시하라 경부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예전에 경찰이 되기 전, 김포 일대의 유지로 유명한 대부호, 홍참판댁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던 염동이라는 인물이었으나, 항상 신분과 관련한 일종의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다가 홍참판댁이 독립 비밀 결사조직에 자금을 대주고 있다며 신고한 후로 외항선을 타고 잠적한 후, 이시하라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채 경찰이 되어 돌아온 인물이었다.
그 이시하라 경부 뒤에는 양복차림의 하급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멎쩍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니......네, 무슨일로......"
"정원진, 축하한다! 제국을 위해 몸 바칠 기회가 왔구나. 육군특별지원병 신청했지?"
이시하라 경부는 원진을 방바닥에 다시 내팽겨친 다음 마이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바닥에 엎드린 원진 위로 던졌다.
'아소 반장 이자식이 결국......'
반장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징집으로 뺀 것을 알았을때는 이미 뒤늦은 상황, 하지만 지금은 남을 원망할 처지가 아니었다.
형 집행 당하기 직전의 사형수 마냥 원진은 손을 떨고 이마에 식은땀을 흐르기 시작했다.
"원래 출항 날짜는 5일후 였지만, 네놈은 특별히 이 이시하라 경부님이 보우하사 특별추천으로 시일을 앞당겨 줬다. 바로 오늘 오후 3시경에 출항이다. 아 아 따로 준비할 거는 없어.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도 필요없고. 그냥 지금 이 상태로 몸만 가면 돼. 왜? 벌써 설레이나?"
이시하라 경부는 마치 과거 자신의 축적된 열등감을 동족을 팔아넘기는걸로 해소하는 참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왜인 경찰들이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지칭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 누구보다 신이나서 앞장서는 사람이었다.
그의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은 것은 비단 조선인들 뿐 만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같이 근무하는 왜인들 조차 그의 기이하다 싶은 이상 행동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니지, 아니지......3시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바로 부두로 나가는건 어떨까? 누가 아나? 대일본제국을 위해 남들보다 몇시간 먼저 나와 기다리는 자랑스런 황국신민으로 지휘관들 눈에 띄어 특진을 하든 뭘 하든 어쩌면 장교까지 해먹을지 말이야. 하하하하하하!"
"아니 저는 그냥......억!"
원진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이시하라경부는 원진의 팔을 끌고 동네 밖까지 나와 트럭에 태우기 시작했다. 이미 트럭 안에는 서너명의 사람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처럼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저항을 했는지 팔에 시퍼런 멍자국이 심하게 난 사람도 있었다.
"다들 그 육군 특별 뭐시기하는 그 말도 안되는 징집당하는 사람들이우? 나원 참 사람 죽으러 가는데 저렇게 좋아하는 미친사람이 있을 줄이야."
"사람이 뭡니까? 짐승이지! 짐승! 아니, 짐승만도 못한놈이지요."
"아니 글쎄 저놈도 원래 조선인이였다지 뭐유. 나원......말로만 들었지 저렇게 동족 팔아넘기는 후레자식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들어보니 원진처럼 자신도 모르게 지원 신청이 되어 끌려가다시피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것 같았다.
하지만 전부터 이시하라 경부의 성격을 알고있었던 원진은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지 않고 그저 비참한 자신을 한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을 비롯 지금 이 짐칸 속 사람들 모두는 공문서에 징집이 아닌 자원입대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어디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비포장 길을 달리는 트럭의 소음때문에 앞좌석에 탄 이시하라 경부의 귀에는 짐칸의 사람들 말 소리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밖에 안들렸다.
"모두 닥치고 가만히 있어! 뭔놈의 말들이 많아! 입 다물고 조용히 해!"
어느새 트럭은 부둣가에 들어서고 어느 화물선 앞에 도착하자 차가 멈췄다.
"다들 내려! 빨리빨리!"
이시하라 경부의 우락부락한 손들이 짐칸의 사람들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네, 네 알아서 내립니다요. 경부 나으리."
짐칸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비아냥 거리듯 말하면서 트럭을 내리자,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경부는 그 사람을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는 밟아대기 시작했다.
"너 방금 한 말 다시한번 해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게 뭔 줄 알아? 바로 너같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는 놈들이야."
수차례 발길질을 한 이시하라 경부는 스스로 애써 진정을 시키려는 듯 심호흡을 하고는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대강 손질하며 발길질을 하다가 땅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털고는 그것을 쓰는 행동을 취했다.
"그렇지......네놈들은 자랑스런 대일본제국의 황군이 되실 놈들이지. 내가 이러면 안되지......내가 이러면 안되지......"
한편, 원진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주의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아주 낯이 익은 장소였다. 바로 사흘전에 그가 해고당했던 바로 그 장소. 심하게 얻어맞고 집까지 기어왔던 바로 그 창고가 보였다. 그리고 창고 사무실 안에서 낯익은 인물 한명이 나오는것도 보였다.
바로 그를 해고시킨 아소 반장이었다.
원진과 반장이 눈이 마주치자 반장은 원진의 약을 올리듯 비웃는 표정을 지었고, 원진은 반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반장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이 원진이, 어디가는거야? 너희들 인도하실 지휘관님 오실때까지 여기 꼼짝말고 서 있어."
이시하라가 원진의 팔을 강하게 잡아 원진을 세웠다.
이윽고 낮 3시경이 되었다. 원진을 비롯한 아침도 못 먹고 새벽부터 온 사람들은 허기에 지쳐 쓰러져 있다시피 했다.
어느새 부둣가는 그 말도 안되는 징집 끌려온 신병대상자들과 그들을 보기위한 주민들과 가족들 일장기를 들고 동원된 학생들, 그리고 그들을 통제하는 군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다른 부두에서는 전차 등의 장갑차량이 크레인에 실려 대형 화물선에 적재되는 중이었고, 부두 노동자들은 각 화물선에 각종 탄약과 화기, 전차와 비행기 등의 부품등이 실린 상자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군인들의 통제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트럭이 한대 오고, 그 안에서 화물선 선원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밤새 술판을 벌였는지 아직도 술이 덜깬 듯한 선원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원진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원진이 해고될 당시 창고앞에 정박해 있던 그 배, 가고시마행 세이쇼마루의 그 항해사였다. 그 옆에는 선장으로 보이는 나름대로 말쑥한 제복차림의 사내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서 있었다.
'세이쇼마루......결국 내가 이 배를 탄다고? 이게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그럼 설마 우리를 인도한다는 지휘관도?'
"이봐요 형씨, 뭘 그리 생각하시우? 설마 벌써 전쟁이 끝날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곳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하는건 아니우? 꿈 깨슈. 이사람이 듣기로는 전쟁터에 나가서 죽기 전 까지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고 들었소이다. 어, 간혹 죽은 후에 머리카락이나 뼈가루가 유언장과 함께 돌아왔다는 말은 들었소이다. 그냥 마음을 비우고 어차피 죽을목숨이라 생각하는게 속이 더 편하다우."
'그래, 이 사람의 말이 맞겠지. 그래, 어차피 의지할 곳 없는 인생, 그렇게 생각하는게 마음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지.'
그때 차량 한대가 들어오고, 차 문을 열고 지휘관 한명이 내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가토와는 달리 뚱뚱하지 않은 체구에 오히려 왜소해 보였지만, 단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화물선 앞에 마련된 연단에 올라가 자신의 키 보다 더 커 보이는 마이크 앞에 섰다.
"난, 제군들을 인도하고 최정예 군대로 훈련시킬 훈련소의 대대장 아베 신타로 중좌다. 제군들은 내 뒤에 보이는 이 화물선을 타고 상해에 도착하여 이번에 상해 외곽에 새로 마련된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이후의 일정은 도착하여 알려줄 것이다. 다시한번 육군특별지원병에 자원한 제군들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상."
그리고는 수하 장교의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내려와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신병대상자 열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신병대상자 중 몇명이 시선이 아베 중좌에게 쏠리는 순간을 이용해 인파속으로 탈출을 시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군중을 통제하는 군인들에 의해 곧 붙들려 돌아왔다.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해! 할일이 남았단 말이야! 이거 놔! 집으로 돌아가야 해! 난 여기에 지원을 하지 않았단 말이야!"
특히 그 중 한명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심하게 반항을 하였다.
원진역시 다른 신병대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반항하는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20살도 채 안된듯한 소년처럼 보였다.
그 역시 누군가에 의해 지원서가 제출되었으리라.
아베 중좌 역시 그를 주시했다. 그러자 통제 군인 중 대위 계급장을 단 한 군인이 아베 중좌쪽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무슨일인가?"
"네, 한쪽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전부 다시 잡아들였으니 다시는 이와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조치를 취하겠다고? 조치를 취하겠다고! 이미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조치를 취하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가? 저들은 어디까지나 지원병이야! 지원병! 구라파 열강들은 다 보고있단 말이야! 자네, 상해에 도착한 후에 처분을 기다리게나. 그리고 탈출을 시도한 자는 따로 모아다 한쪽에 감금시키게."
아베 중좌는 불쾌한듯 서둘러 자신의 선실로 들어갔다.
"뭘 멍하니 구경하고 있어! 어서 올라가지 못해!"
지금까지 이 상황을 지켜봤던 신병대상자들은 통제 군인들이 총으로 밀어붙이자 배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방금 전 상황으로 인해 군인들의 행동이 격해졌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는 기색이 보인다 치면 개머리판으로 구타까지 하면서 신병대상자들을 배 위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이쇼마루호는 출항하였고, 갑판위의 군 간부들은 항구를 향해 손을 흔들거나, 배를 향해 몰려드는 갈매기들에게 먹을것을 주고 있었다. 어떤 간부는 권총을 꺼내들고 갈매기들을 겨냥하는 시늉을 하며 자신이 무슨 사냥꾼이라도 된 마냥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반면, 신병대상자들은 빛이 들지 않는 창문하나 없는 큰 방 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원래는 대형 화물을 싣는 화물칸이었지만, 그 화물칸 역시 이번에 전국 팔도에서 차출된 젊은이들을 다 태우기에는 너무 비좁은 공간이었다.
난생 처음 배를 칸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화물칸 한쪽 구석에 마련된 양동이 역시 그 사람들의 멀미로인한 고통의 산물들을 다 채워주질 못했다. 얼마안되어 화물칸 안은 멀미하는 사람들의 구토로 인해 악취로 가득찬 질퍽한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하암, 졸려......"
새벽 일찍부터 부두에 나왔던 원진은 춥고 배고프고 잠이 쏟아졌으나, 이런 공간에서 잠을 잔다는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는 식사시간 때문에 잠을 자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왜냐하면 오전부터 한끼도 먹지 못했고, 만약 자신이 자고 있는 동안 식사배급이 온다면 이 수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결국 자신은 식사배급을 못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원진의 몸은 수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원진은 화물칸 한쪽 구석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채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는 꿈 속에서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아소 반장, 이시하라 경부......모두 다 안녕이다!'
사람들은 설령 점쟁이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앞일을 예견하지 못한다.
원진 역시 그러한 보통 사람이었다. 그 스스로 앞으로 자신이 어떠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 까맣게 모르는 보통 사람이었다.
하지만 확실한것은 그가 겪게 될 앞으로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거 보다 더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심지어는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최악의 상황일지언정 더 편하고 안락하지는 않을거라는것......
그는 지금 한치 앞을 예상하지 못하는 죽음의 선, 사선(死線)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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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특별지원병 :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돼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됐다. 17세 이상, 신장 160㎝ 이상의 소학교 졸업 학력을 가진 조선인 남자에게 육군특별지원병 지원 자격을 부여하고,선발된 자들을 훈련시켜 군대에 배치했다. 이렇게하여 1943년까지 1만7664명의 조선인이 일본군대로 동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