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0년 미래인 한명이 조선에 도착했고 그로부터 33년 후 나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82년(임진왜란 10년전) 이상 기후로 조선에 큰 흉년이 들었고 여진족 역시 살기 어려워졌고 다음해 2월 여진족은 함경도 일대를 약탈했다. 여진족 1만이 조선을 약탈한 사건을 니탕개의 난이라 불렀다. 하지만 이 변란에 조선이 보낸 것은 겨우 기병 80기가 전부였다. 큰 비웃음을 받았다.

그 때 본래의 역사와는 다른 일이 발생했다. 전라남도 나주에서 종교의 자유와 자치권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3년전 조선에 도착한 미래인 때문에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다. 미래인으로 인해 나주 사람들은 부유해져 있었다. 나주 사람들은 조선이 원하는 군비를 지원해 줬고 그 댓가로 종교의 자유와 자치권을 요구했다. 

조정은 나주 사람들을 속였다. 자치권을 인정해 줄 것 처럼 속인 후 여진족의 변란이 수습되자 바로 5만의 대군을 내려보냈다. 

하지만 토벌군 장수가 원균이였다. 원균이 이끄는 5만의 대군은 겨우 1만 2천에 불과한 나주군에게 허무하게 전멸당했다. 자치권 요구는 반란이 되었다.

33년전 도착한 미래인이 반란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양반 타도를 명분으로 양반들에게 끔찍하고 잔인한 짓을 꺼리김 없이 자행했다. 양반들은 큰 충격을 받고 크게 분노했다.

9월 조정은 신립을 불렀다. 신립은 니탕개의 난에서 큰 활약을 펼쳐 유명해져 있었다. 신립에게 갑주를 입은 정예 8000을 주고 반란 진압을 명했다. 원균의 5만 대군에 비해 숫자는 적어도 전투력은 더 높았다. 조선의 입장에선 힘들게 짜낸 병력이였다. 원균이 전멸시킨 5만의 손실이 너무 컸다. 신립 자신이 직접 키운 철기병 500도 함께 데려갔다.

정예 8000과 신립이 직접키운 철기병 500 나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신립이 이끌고 온 병력이였다. 그에 대항하는 나주 독립군은 보병 6000과 조랑말을 타는 약한 기병 700 이였다.

[1583년 10월 5일]

두 군대는 나주 벌판에서 회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군은 조선군의 전통적인 조선군 옷을 입고 있었고 나주 독립군은 강렬한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의 모양은 프렌치 코트에 가까운 현대 군복이였다. 하지만 갑옷을 걸처 입어 전체적으로는 중세갑옷 같았다.

"전쟁하는 법을 정말 모르는군"

반란을 이끌고 있는 자였다. 신립의 병력배치에 대한 솔직한 소감이였다. 원 역사에서도 신립은 용감하고 싸움은 잘하지만 전장 선택은 할줄 모르던 장수였다. 

조령이라는 천혜의 지형을 포기하고 기병의 장점을 살릴 수 없는 지형에서 배수의 진이라는 객기를 부렸다. 지금도 비슷했다. 신립은 자신이 가진 유리한 점을 전혀 활용하고 있지 못했다.

반란군을 이끄는 수장의 이름은 태연이였다. 33년전 조선에 도착한 미래인이다. 하지만 외모는 매우 어려 보였다. 외모로만 보면 17살 정도로 보였다. 그의 신체나이는 이 시대 기준으로 17살 정도였다. 태연의 시대 인류는 300년의 수명을 갖게 되었고 33년이란 시간은 태연의 수명을 기준으로는 5년 정도의 해당됐다.

<기병대장>

"보병이 있어야 할 곳에 기병이 있군요"

기병대장 나름 신립의 진형을 해석했다. 태연에게 배운 지식이다.

태연은 나이는 어리지만 원균의 5만을 물리쳐 군사적으로도 크게 인정 받고 있었다. 물론 실상은 태연이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원균이 자멸한 것이지만 미래인인 만큼 전략과 전술에 대해 이 시대 사람들보단 많은 지식을 보유한 것도 사실이였다. 

사람들은 모두 태연을 군사적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기병이 강한 쪽이 전장을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 쉽게 말해 기병이 강한쪽이 원하는 곳에서 싸울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주도권이라고 한다. 신립은 기병전력에서 나주독립군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고 따라서 전장을 선택할 권리는 신립에게 있었다. 보병은 지형을 어떤 지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위력이 3배~10배 정도 달라진다.

문제는 신립에겐 지형을 이해하고 보병의 특성을 이해하는 눈이 없었다. 신립이 선택한 곳은  보병의 전력을 강화한게 아니라 오히려 깍아 먹고 있었다. 임진왜란때 신립이 결전 장소를 잘못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였다.

신립의 기병은 철기병 500 이다. 숫자로 보면 얼마 안되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전력이다. 철기병은 개개인이 강했다. 말을 타지 않더라도 장정 5명은 상대할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이 말까지 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말의 클래스가 다르다. 같은 레벨의 말이라면 갑옷이 가벼운 쪽이 훨씬 빠르지만 현재는 신립군의 기마들은 건장한 장정을 태우고 더 무거운 갑옷까지 입었는데도 가벼운 갑옷을 입은 나주 기병보다도 속도가 빨랐다.그 정도로 말에 체격에서 큰 차이가 났다.

태연도 기병을 갖고 있긴 했지만 병사 개개인의 능력과 말의 체격 차이를 감안하면 태연군 기병을 학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정도 클래스의 기병은 존재만으로도 압박이다. 기병 500 은 숫자는 작아도 갑옷 입은 정예 보병 8000과 비슷한 전력인 것이다. 게다가 기병과 보병 조합은 시너지가 있어 1+1=2 가 아니라 3~5 정도의 위력을 갖는다.

기병이 강하면 주력인 보병의 진군 속도도 빨라지는데 원균이 진격했던 속도로 진군했다면 나주독립군도 병력을 2만 가까이 모을 시간을 벌었겠지만 진군 속도가 너무 빨라 8000 정도 밖에 모으지 못했다. 

거기다 기병의 압박 때문에 도시 방어를 위해 2000명을 남겨둬야 했다. 그래서 원균과의 전투에서 1만 2000을 동원한 나주 독립군이 이 전투에선 6000 밖에 동원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후위를 지키기 위해 1000명을 빼놓고 있었다. 전투에 참여한 실 병력은 5000 이다.

기병의 압박이란 이런 것이다. 막상 기병이 보병의 벽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자주 보이기 때문에 쓸데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기병이 강한쪽의 보병이 전장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보급로와 후방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병이 강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적의 군사력을 1/4~1/10로 깍을 수 있다. 

기병이 강하면 좋은 위치를 선점할 권리를 갖고 그걸 잘 활용하면 보병이 4배~10배 정도 유리한 위치에서 싸우게 할 수 있지만 신립은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력한 철기병을 키운 신립이였지만 전술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이 부분에서 신립은 바보였다. 신립은 전술적 실수를 두개나 하고 있었다.

먼저 보병이 지켜야할 언덕에 기병을 갖다 놓고 있었다. 기병은 기동성은 좋지만  지키는 것은 하지 못한다. 신립은 아무 생각없이 자신이 말타고 공격하기에 좋다는 이유로 저기 있었다. 언덕의 전술적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저 언덕을 빼앗기면 신립의 보급로와 퇴로가 위협당할 수 있는 위치다. 태연이 언덕에 보병부대를 전진시킨 후 땅을 파고 진지를 강화하면 신립의 본대와 보급부대는 분리되고 언덕의 엄호아래 다른 부대를 전진시켜 보급부대를 위협하면 보급부대는 후퇴할 수 밖에 없다. 

보급부대가 후퇴하면 신립군은 무리를 해서라도 언덕을 공격하거나 후퇴 할 수 밖에 없다. 언덕을 활용하는 쪽이 전투에서 2~4배 정도 유리하고 진지까지 구축해 놓으면 10배 정도까지 유리해 진다. 태연이 언덕을 차지하고 진지를 구축하면 그 곳에 병력을 돌격시킬 수 밖에 없다. 승패가 결정된다.

보병 싸움의 규칙은 유리한 곳을 선점한 후 적이 그곳에 돌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에있다.

그리고 하천을 앞에 놓고 언덕위에서 싸우면 보병이 유리하다는 것에 집착해서 보병을 위치시켜 놓았는데 병법서에서 개울을 앞에 놓고 언덕위에서 싸우라는 것은 모범적인 사례를 예로 든 것이지 병력을 배치시켜야 할 곳은 승패가 결정되는 곳이지 하천을 앞에 놓고 있는 언덕위가 아니다. 병법을 어설프게 이해해서 생긴 문제다.

두번째 문제는 보병의 진형이다. 신립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시기 조선의 군사체계는 큰 문제가 있었다.수백년 동안 제대로 된 전투를 치루지 못해서 생긴일인데 그러다 보니 진법에 큰 문제가 있었다. 

조선은 오위진법이라는 것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게 실전을 통해서 만들어 진게 아니라 음양 오행에 따라 병력을 배치하면 음양에 조화가 일어나 병사들이 잘 싸울것이라는 미신아래 탁상공론으로 만들어진 진법이였다. 

사실 진법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별거 없다. 가장 확실하고 단순한 진법은 단순히 병력을 잘 뭉치는 것이다. 정말 별것 아닌것 같지만 병사들이 똘똘 뭉친다는 것 하나로도 보병은 몇배나 강해진다. 단순히 사람이 똘똘 뭉쳐 있으면 가장 싼 무기인 창만 줘도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오위진법의 황당한 복잡하기는 엄청 복잡하면서 단순히 병력을 뭉치는 것 보다 전투력은 1/4로 기동성은 1/10 떨어지고 대응 능력은 제로에 가까운 어처구니 없는 진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더 심각한 문제인데 오위진법이라고 이름 붙이긴 했지만 사실 진이 아니였다. 

진이라고 이름 붙여 놓다 보니 착각을 하는데 오위진법의 대형은 진이 아니라 영이라는 개념에 해당된다. 

진과 영은 다른 개념인데 진은 보병의 전투 대형을 의미하고 영은 숙영이나 주둔지의 경계나 방어 대형을 의미한다. 오위진법은 방어대형인 영을 전투대형인 진으로 잘못 쓴 경우다. 수백년 동안 평화롭게 지내다 보니 조선군은 진과 영을 구분 못하는 수준까지 퇴보했던 것이다.

조선이 임란때 일본군에게 패했던 것을 조총 탓으로만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조총이 아니더라도 보병은 심각한 상태였다. 

그래서 오위진법은 진이 가져야 하는 기동성과 유연성이 아예 없다. 그렇다고 방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심지어 엉뚱한 곳에서 진법을 펼쳐 놓은 상태다. 전술적으로 보면 정병 8000을 빼고 전투하겠다는 뜻이다. 

보병과 기병이 각개격파 당하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승패는 이미 결정나 있었다. 

전술적으로 수비해야 하는 지점에 엉뚱하게 기병이 있고 진과 영조차도 구분 못해 보병들은 전투를 우두커니 지켜 보고 있다가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정신 차릴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태연 입장에선 보병을 전진시켜 억덕에 있는 적 기병만 밀어내면 승패가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전술을 이해하는 능력이고 전술을 아는 쪽과 모르는 쪽의 차이다.

태연
"자유의 날개 연대로 신립의 기병대를 밀어 낸 후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세요"

연대장
"자유의 날개 연대 출진하겠습니다."

나주 독립군은 테르시오 체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테르시오는 창병과 총병을 결합한 체계로 기병에게 유독 강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언덕의 기병을 밀어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시대 화승총은 장전 하는데 2분이 필요했다. 총병은 장전 하는 동안 대단히 약하다. 사실 총병은 자신을 지켜줄 방책만 있다면 엄청나게 강한 병종이지만 방책같은 구조물은 기동성이 없다. 테르시오는 창병이 움직이는 방책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그 해결한 체계다. 

이렇게 총병과 창병을 결합한 체계가 바로 테르시오다. 단순한 조합이지만 테르시오는 냉병기 시대의 존재했던 모든 조합을 물리치고 화약시대 초반 150년 동안 무적으로 군림했다.

이 시대 무기체계로 테르시오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테르시오 뿐이다.

나주 독립군의 테르시오는 50%의 창병 40%의 활,투석,석궁병 10%의 총병으로 구성된 초기형 테르시오였다. 초기형이긴 해도 조선의 보병시스템이 워낙 문제가 심각해서 10%의 총병으로도 조선군 시스템에 10배 정도의 화력을 가진다. 

언덕 점령을 맡은 자유의 날개 연대는 태연군 최강의 부대였다. 100% 백정 출신으로 이뤄진 부대로 단결력이 강했다. 그래서 다른 부대는 숫자로 지칭되지만 자유의 날개 연대는 숫자가 아닌 고유명칭으로 불렸다.

각 테르시오 연대는 정원 1000 에 총병 100 창병 500 이 기준 이지만 출신과 지역별로 부대를 편성했기 때문에 연대별로 약간씩 달랐다. 자유의 날개 연대는 120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병이 200 인 부대였다. 

화력을 강화하기 위해 예비대에서 총병 200과 궁수 100명을 추가시켜 1500명 짜리 강력한 방진을 만들었다. 2연대를 늪이 위치한 곳에 진출시켜 자유의 날개 연대의 엄호를 명했다. 정면이 늪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형이라 자연 방어물이 되고 활과 투석의 사거리를 이용하면 엄호해 줄 수 있었다.

언덕은 500미터 거리에 있었다. 전투대형으로 진군하면 대략 5~10분 정도 걸린다.

그때 신립이 움직였다. 기병 30을 끌고 200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기병들이 편전을 쏘았다. 

"괴물 같은 자식들"
태연이 읍조렸다.

말에서 활을 쏘는건 어렵다. 땅에서 쏘는 것이 말에서 쏘는 것 보다 사거리가 100 미터 정도 길다. 정확도나 위력도 그만큼 차이난다. 하지만 신립의 군사들은 같은 실력이 아니였다. 말에서 쏘는데도 땅에서 쏘는 궁수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몇몇이 화살을 맞았지만 투구와 갑옷을 뚫지 못했다. 나주 독립군은 반란군 답지 않게 정규군급 그것도 정예병급 무장을 하고 있었다. 나주의 경제력이 발전한 결과다.

기병으로 부터 공격을 받은 테르시오는 빠르게 대응했다. 활과 투석병을 가지고 있어서 빠른 대응이 가능했다. 총같은 화기가 냉병기에 비해 훨씬 강하지만 반응 속도라는 측면에서는 냉병기가 훨씬 빠르다. 태연의 테르시오는 총병의 숫자가 작은 대신 냉병기를 사용하는 투석병과 궁병의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반응 속도 때문이다. 

총은 강하지만 대응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반해 냉병기들은 대응시간이 빨랐다. 이 점 때문에 태연은 냉병기를 많이 쓰는 조합을 사용했다. 공격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안정성을 추구한 조합이다.

테르시오에 궁수 300이 바로 화살 600발을 대응사격 했다. 그리고 투석병들이 줄을 이용해 돌을 던지는 도구인 줄팔매로 강철탄 수백개를 던졌다. 궁수와 투석병은 총병과 달리 곡사가 가능하고 이런 즉응성이 있다. 이들 역시 주력인 총병을 엄호하는 역할이다.

신립의 군사들도 갑주가 튼실한 철기병이였다. 이 시대 갑옷의 방어력 요구 수준이 바로 이런 투석과 활을 막는 것이다. 그래도 활과 투석을 계속 맞으면 다치기 때문에 철기병들도 위협을 느끼게 되는데 그래서 정확한 제대로된 사격이 불가능해진다. 대응 사격 때문에 궁기병의 활의 정확도나 위력이 크게 반감되는 것이다.

200 미터 거리에서 기병이 보병궁수를 상대한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다. 같은 무기를 가졌을 경우 보병궁수가 더 강하다.

기병중 최고의 사수들 만이 이 정도 사거리를 내지만 보병은 평범한 보병궁수로 대응 가능하다. 철기병들은 편전 30발을 쏘고 활과 투석을 1000발 정도 맞았다. 신립군이 훨씬 뛰어나지만 숫자 차이가 압도적이였다. 

이게 보병과 기병의 차이다.두 병종은 가격차이 만큼 동원할 수 있는 숫자 차이가 명확환 것이다. 신립이 말을 돌리자 태연군쪽에선 함성이 터졌다. 

별것 아닌것 처럼 끝났지만 신립이 쓰던 전술은 몽골에서 들어온 극악한 전술이다. 

일반적인 반란군 즉 보병의 무장이 정규군보다 떨어지는 무장이라면 통하는 전술이다. 현재 나주 반란군의 무장은 정규군의 무장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통하지 않은 것이다.

신립이 사용하려고 했던 전술은 스웜 전술의 하나로 몽고가 보병을 상대로 할때 쓰던 표준 전술이다.스웜 전술중 괴롭히기 전술이란 것으로 몽고는 뛰어난 각궁을 갖고 있었고 이 점을 이용해 상대 보병을 농락했다. 우월한 각궁의 사거리를 이용해 상대 무기의 사거리 밖에서 교대하면서 계속 상대 보병 부대를 쏘는 것이다. 

30명씩 부대를 이뤄 쏘고 도망가고 쏘고 도망가기를 반복한다. 활로 적을 쏘는 것은 별 타격을 줄 수 없지만 그걸 막기위해 보병은 뙤약볕 아래 무기를 장비하고 대형을 유지한 상태로 계속 서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보병의 체력은 계속 소모된다. 적 기병 때문에 보병은 쉬지 못하고 피로가 계속 누적되는 것이다. 

반면 몽골군은 소수만 공격하고 로테이션으로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유지한다. 

상대를 괴롭히기 전술이다.

몇십명 정도의 병력으로 보병 수천을 계속 괴롭히는 것이다. 반면 보병은 대형을 풀지 못하고 활을 몇시간에서 몇일씩 계속 맞는다. 일방적으로 얻어 맞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상처 입는 사람도 조금씩 생기고 치명상을 당하는 사람도 한두명 생긴다.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몽고군을 쫒아가면 몽고군은 딱 그 만큼만 도망간다. 거리만 유지하는 것이다. 몽골기병을 잡으로 기병을 내 보내면 기병을 요격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서 계속 활을 쏜다. 이게 몇시간에서~몇일씩 계속되는 것이다. 긴장을 풀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활을 맞는 지옥같은 상황이 끝없이 계속 되는 것이다.

이 상태로 몽고 기병은 보병 주위를 천천히 천천히 돌면서 적을 계속 피곤하게 만들고 빈틈을 찾는다. 아무리 진형을 잘 짜더라도 결국 군대는 인간으로 구성된 조직이고 결국 약점이 생기거나 괴롭힘 당하는 것에 지쳐 무모한 공격을 시도하게 된다.

몽고군은 이렇케 활의 사거리와 말의 기동성을 이용해 철저히 유리한 국면을 만들고 전투를 했다.강한 활을 가졌던 몽고군이 보병을 농락했던 전술이다. 

그런데 이게 고려를 상대할땐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고려의 활이 더 뛰어났고 궁수의 실력도 사기성이 있었다. 거기에 고려는 요와 금을 상대하면서 쌓은 실전 능력이 상당했다.

이런 류의 스웜 전술은 활이 강하면 안통한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달랐다. 몽골 기병에 비해 고려 보병의 활이 강했던 것이지 신립의 궁기병들은 기병의 단점을 무시할 정도로 강했다는게 문제였다. 즉 기병인데도 불구하고 강한 활이라는 게 문제였다.

방금전 교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활에 사거리에 대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활에는 3 종류의 사거리가 있다. 

먼저 갑옷을 뚫는 사거리다. 최대 사거리 300m 정도를 가진 각궁도 갑옷을 상대하는 사거리는 30m 정도다. 두번째는 조준해서 맞출 수 있는 거리다. 이건 개인의 능력과 훈련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50~100미터 정도다. 갑옷으로 방어안된 부분을 맞추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세번째는 최대 사거리다. 활이 도달하는 거리로 활을 맞아도 경상으로 끝난다.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렵지만 상대를 위협할 수 있다.

활은 곡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최대 사거리가 길지만 이 거리에서는 약한 클래스의 갑옷으로도 방어 가능하다. 

괴롭히기 전술을 상대하는 방법은 쫒아내기인데 총병을 활용해서 쫒아 내려 했다면 대응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기병은 활을 쏜 다음 도망치면 끝이다. 

총병은 총을 쏠 기회조차 없다. 화승총이기 때문인데 초기 화약무기인 화승총은 대응속도가 대단히 느리다. 그리고 철 다루는 기술이 떨어졌기 때문에 150미터급 교전 즉 각궁과 교전을 펼칠 수 있는 총들은 8~12kg 짜리 물건이 된다. 

이런 기술적 한계 때문에 태연군이 사용하고 있는 총도 10kg 짜리 총인데 이 총은 대응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리고 총이 워낙 무겁다 보니 다루기도 어렵고 장전하는 것도 엄청 힘들다.

고려는 몽고의 장끼인 활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나라여서 몽고는 고려정복에 상당히 고생했다. 보통 몽고를 상대했던 다른 나라들은 몽고의 활에 대한 공포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고려는 특이하게 몽고의 접근전만 기록으로 남기게 됐다. 

원나라 식민지 시절 이런 몽고의 전략 전술이 들어왔고 몽고에서 천부장으로 벼슬살이 하던 이성계가 몽고의 군사전술로 승리해 조선을 건국했다. 임진왜란전 조선군은 아직 몽고식 투구와 복장을 사용하고 있었다. 

신립이 사용한 몽고식 전술은 50 미터 짜리 활을 쓰는 여진족들에게는 잘 통했을지 몰라도 같은 각궁을 쓰는 조선 보병을 상대로는 어림도 없는 전술이다. 더군다나 강한 갑옷과 원거리 투사력을 가진 테르시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신립에 명성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는데 적을 쫒아내자 다들 사기 충천했다. 언덕 공략을 위한 진형을 다시 준비했다. 그때 다시 신립이 왔다. 이번엔 4명의 병사만 이끌고 있었다. 300 미터 거리에서 신립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활을 쐈다.

자유의 날개 연대 하사관이 활에 맞았다.하사관들은 다른 병사들 보다 눈에 뛰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신립은 그들을 지휘관으로 생각했던 것이다.활이 갑옷을 뚫고 살속에 박혔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저 거리에서 갑옷을 뚫는 활을 날린 것이다.활은 총과는 다르다.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위력이 전혀 다르다. 

신립이 좋은 지휘관은 아니였지만 활 만큼은 보우 마스터라 불려도 손색없는 명궁이였다. 신립은 보우마스터의 방법으로 대결을 걸어왔다.

신립은 활을 재어 다시 쏘았다. 다른 하사관의 투구에 맞고 활이 튕겨졌다. 나주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사관이나 지휘관들이 물러서는 것은 부대의 사기와 직결된다. 그래서 하사관이나 지휘관들에겐 총을 맞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자부심을 요구했다.

테르시오에서 활과 투석 수백발이 발사되었다. 신립을 향해서였다.하늘을 까많게 물들일 것 같았다.신립 주위로 활과 투석 수백발이 쏱아졌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정확도는 없지만 어쨋던 곡사로 쏘면 활과 투석도 이 거리에 도달한다.

신립을 죽일 수는 없어도 신립의 사격을 방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립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신립은 다시 활을 쏘았다. 이번엔 장교의 목울 꿰뚫었다. 장교는 즉사했고 태연의 진형은 일순간 침묵에 빠졌다. 신립은 팔을 들어 승리의 표했다. 

뒤에 500의 철기병들도 일제히 환호했다. 다시 활과 투석이 날라갔다. 몇몇 화살이 신립을 맞췄지만 신립의 갑옷이 모조리 튕겨냈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단지 말 몇마리가 놀라 날뒤고 있었다. 하지만 신립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보우마스터의 신립의 위력이다.

그때 화승총 300 정이 준비되었다. 총은 전투전 장전된 상태지만 총을 받치는 막대기를 꼽고 화약접시에 화약을 담는데 40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유의 날개 에서 200정 엄호를 맡은 2 연대에서도 100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 신립을 향해 조준되어 있었다.

일제 사격이 시작 되어 300정의 총알 모두 신립을 향해 발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