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은 순식간이었다. 인터넷 포탈과 각종 얼리 어댑터 커뮤니티, 블로그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네티즌이라는 족속들은 몰락과 굴욕이라는 단어에 병적으로 몰려드는 습성이 있었다.

“벌써 조회 수 1,000회를 돌파했군.”

심드렁한 목소리로 누트2가 한마디 했다. 가족들 중 유일하게 Wi-Fi를 내장하고, 신문 서비스를 받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말(*1)이었다.

“뭐 그까짓 거. 나는 그 열 배되는 개티즌들한테 두드려 맞았었다고.”

파피루스 역시 한 마디 거들었다. 그 역시 출시 전에는 스토리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던 터였습니다. 자그마치 그의 가문인 삼성에서 전자책 시장에 뛰어든다는 상징성은 연일 매스컴에서 떠들어 댔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불과 3일도 채 안돼서, 파피루스는 정상에서 곤두박질쳤다.

그는 이제 본가에서도 거의 내쳐질 정도였다. 짐짓 눈을 감듯이 하면서, 스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자신과도 겹쳐 보였다. 하지만, 이내 패널을 리플래쉬 시킨다. 그의 몰락에 결정타를 내리 꽂은 것이 바로 스토리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에 시달리던 그에 대한 지원을 거의 끊다시피 한 본가의 결정은 바로 스토리의 등장이었다.

삼성은 이대로는 아이리버에 당할 수 없다고 여겼던지, 가차 없이 파피루스를 헌신짝처럼 내다버렸다.(*2) 소위 파워 블로거라고 불리는 축들에게서 들리는 루머로는 본가에서 뭔가 새로운 녀석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만 간간히 들을 뿐이었다.

문득, 패널을 든 스토리와 파피루스가 마주쳤다. 시간이 지나자 스토리의 패널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주보는 거울과 같은 대치 상태가 한 동안 계속 되었다. 상대방의 패널에 비쳐진 자신의 패널을 보고 있으면, 또 다시 상대의 패널이 비쳐지고, 다시 자신의 얼굴이 반복적으로 비쳐지는 현기증 나는 이 화면 싸움은 언제 그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먼저 패널을 돌린 건 파피루스 쪽이었다.

스토리의 패널이 비처진 자신의 작은 패널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용기가 없었다.(*3) 그로서는 그 1인치라는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숫자가 못내 아쉽고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아무리 네티즌들의 조롱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스토리는 사람들의 입 소문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과는 이미 차원을 달리 하게 된 것이다. 아니, 이제 그는 한 때 못난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누트2보다도 못한 신세였다.

그로서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고작 한 줌도 안 되는 키보드 워리어들의 신소리에 풀이 죽은 스토티가 가소로울 뿐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또 하나의 축복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오라버니, 이제 그만 쉬시고, 충전하셔야지요.”

또 다시 오지랖 넓은 쿨러가 나선다.

“그만 두어라! 예비 배터리(*4)는 이미 챙겨 두고 있단 말이다.”

비틀 거리는 하네스를 지탱하던 스타일러스 펜이 거칠게 휘휘 내젓는다. 본가에서 그에게 유일하게 준 생일 선물이라고는 이 비싼 수입산 스타일러스 펜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제품 수명에 더해서, 그에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은 위협은 극심한 배터리 소모였다.

‘LCD만도 못한 몹쓸 몸 같으니...’

입술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지금 그것을 깨물었을 것이다.

“많이 좋아 졌구나?”

푸근한 목소리의 등장에 파피루스는 다시 패널을 돌렸다.

“큰 오라버니!”

막내 쿨러가 어리광을 부리자, 누트는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다. MP3 허용 주파수가 낮은 탓(*5)에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진중하고, 슬기로운 노년처럼 들렸다. 스토리는 불과 자신과 몇 년 차이 나지 않는 이 누트가, 변화가 빠른 디지털 기기 시장에서 너무도 아득한 연배처럼 느껴지는 것에 왠지 모를 비애에 젖어 버린다.

인간들은 너무 쉽게 달아 올랐다가는, 너무 쉽게 식어버린다.

“저렇게 보면 꼭 부녀 같다니까?”

커더란 덩치의 킨들 DX가 허허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둘의 컬러링만 놓고 봤을 때도 킨들 DX의 말은 사실처럼 들렸다.

밤색의 누트1과 핑크 빛의 쿨러는 사실 같은 제조사에서 태어난 사이였다. 본가의 가풍에 따라 이미 계약이 정해진 타사에 OEM으로 납품되었던 두 기기는 아마도 한국의 어느 열광적인 수집가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6) 그 탓에 둘의 형태는 너무도 흡사했다. 버튼 위치라든지, 이어폰 잭, 일부 기능들. 단지, 누트1은 지원되는 파일 포맷이 쿨러에 비해서 너무도 적었고, 쿨러의 일부 기능-90도 회전 화면, 수도쿠 게임 지원 등-은 구현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늙은 아버지와 어린 딸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래, 패널은 좀 어떠니?”

염려스러움이 가득 묻은 낮음 목소리가 울려 왔다. 스토리는 그저 수줍게 페이지 갱신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제와 같은 백지 현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만하면 원래 상태로 돌아 온 것 같구나.”

“사람들이 호들갑스러운 거지요.”

누트2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쿨러가 딸이라면, 누트2는 누트1의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설계및 개발의 연배순만으로만 본다면, 누트2는 누트1의 아들이자 쿨러의 동생내지 조카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형님.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을 찾아 다녔단다.”

“우리라니요? 그 문제는 스토리만 겪고 있는 문제일 뿐이에요.”

누트2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워. 워. 참아요. 형님. 큰 형님께서 아직 말씀이 끝나지 않으셨잖아요.”

“넌 참견마!”

말리려던 킨들 DX는 누트2의 서슬에 그만 움츠렸다. 그 바람에 버튼을 몇 번 눌러도 화면이 갱신되지 않았다. 한 참을 슬라이드 버튼을 밀었다가 당기자 다시 원래대로 오프 화면용 스크린 세이버가 패널에 나타났다.(*7)

“그게 그렇지만도 않단다. 어쩌면 이 문제는 E-Ink 패널을 쓰는 우리 모두의 문제일지도 모른단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 사건은 스토리한테만 벌어진 일이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거의 같은 회사의 패널을 사용하고 있지. 패널 제조사는 두 회사 밖에는 존재하지 않아.(*8) 게다가, 그 패널 회사들도 결국은 E-Ink사의 전자 잉크 필름을 공통으로 사용하는 게 현재 실정이야.”(*9)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인정 못합니다. 형님도 아시지요! 제가 한 창 더운 여름 한 날에 뙤약볕에서 독서를 위해서 페이지 전환을 했던 걸. 그 때 저는 아무런 문제도 겪지 않았어요.”

누트2는 말을 하면서 짐짓 스토리를 처다 보았다. 그로서는 본의 아니게 누구나 암묵적으로 터부시했던 말을 내뱉은 꼴이었다.

“그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더구나.”

“대체 그게 누구지요? 정말 어지간히 할 일도 없는 사람인가 보군요?”

누트2의 냉담함 태도에도 불구하고, 누트1은 자상한 아버지처럼 자신의 패널을 띄웠다. 한참 동안 모두가 기다린 끝에 뿌려진 4계조 명암은 누트1의 지나간 트렌드를 짐작케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갈무리한 한 인터넷 사이트 화면을 보여주었다. 정확히는 불로그였다.

blog.daum.net/jijabella

한 쪽 구석에 위치한 방문자 수는 겨우 세자리(*10)를 넘기고 있었다. 개설한지 얼마 안 되는 어느 초보자의 것이거나,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네트적 낙오자의 것일 거라는 짐작을 하게 했다. 아마도 후자였던 모양이다.

올라온 얼마 안 되는 포스팅은 매우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장문의 글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간간히 보이는 짧은 글 쪼가리들조차도 ‘신은 무엇인가?’라는 개풀 뜯어 먹는 소리뿐이었다.

“레드매드니스엔젤의 도전 준비 공간? 영어 공부 헛했군.”

킨들 DX가 없는 혀를 차며 그 큰 몸집을 이리 저리 흔들어 댔다.

“인터넷 핸들 네임인 모양이더구나. 하지만, 사람들은 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대신 이렇게 부르더구나. 이북 탐정 이광희라고…….”

 

*1 실제로 현재(09년)까지는 신문 서비스 외에 인터넷 서비스 접속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는 소설의 진행및 분위기를 위해서 인터넷 검색이 된다는 것처럼 썼을 뿐입니다.

*2 이 부분은 최근 교보의 성대훈 팀장님의 발언-삼성이 새로운 전자책 단말기를 준비한다.-을 바탕으로 추측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사실과 다를 수 있으니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추가 사항 : 이 글을 쓰던 시기가 11월이었는데, 현재 이 사항은 어느 정도 사실로 들어났습니다.)

*3 파피루스는 이제까지 출시된 일반적인 전자책 단말기들과 달리 5인치의 다소 작은 E-Ink패널을 채택했습니다.

*4 파피루스는 예비 배터리가 포함되어서 판매됩니다. 이것은 일부 휴대폰 배터리와 호환된다고 합니다. 터치 패드에 의한 전력 소모가 큰 탓에 삼성에서 판매시 보너스 배터리를 포함시킨 걸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5 누트1에 내장되었던 음원 모듈은 MP3 재생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재생할 수 있는 샘플링 주파수 가역대가 낮았기 때문에, 고음질 재생은 되지 않았습니다.

*6 그게 바로 접니다.

*7 전자책 단말기의 명기라는 킨들 DX도 의외로 다운이 잘 됩니다. USB로 파일 전송 시나, 매우 빠른 페이지 버튼 연타 등으로 화면이 멎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먹통 현상 혹은 벽돌 현상 시에는 전원 슬라이드 스위치는 20~30초 동안 밀고 있으면, 자동으로 리셋 기능이 작동됩니다. 킨들 시리즈는 기기를 끌 경우 랜덤으로 스크린 세이버를 화면에 띄웁니다. 이것은 전기를 끊어도 화면이 유지되는 E-Paper의 특성을 응용한 기능입니다.

*8 유리 기판을 기반으로 한 E-Ink형 E-paper의 제조는 현재(09년) LG디스플레이(LGD)와 프라임 뷰 인터내셔널(PVI)뿐입니다.

*9 E-Ink는 E-paper구동 방식중 하나를 뜻하며, 동시에 그 구동을 위해 필요한 전자영동형 잉크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잉크 캡슐 및 라미네이트용 필름 제조사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PVI에 인수된 상태입니다.

*10 지금(09년 12월)은 9만 명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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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참 유리 같구나... 그래, 사실 난 방탄 유리야.

eBook탐정 이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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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Book (생명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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