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SF, 판타지, 무협 등 다양한 장르의 창작 소설이나 개인의 세계관을 소개합니다.
왼쪽의 작품 이름을 선택하면 해당 작품 만을 보실 수 있습니다.
10개 이상의 글이 등록되면 독립 게시판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왼쪽의 작품 이름을 선택하면 해당 작품 만을 보실 수 있습니다.
10개 이상의 글이 등록되면 독립 게시판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글 수 296
주빈은 샤라이가 걱정했던 것 보다는 더 신중했던 탓에 마음이 놓여서 얼마간은 안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 바로 다음날에 벌어진 사태의 책임이 주빈에게 있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전혀 뜻밖에도 라쓰류와 정면 충돌한 당사자는 샤라이만큼 라쓰류와 사이가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반노였다.
일이 터진 것은 점심 시간도 이미 한참 지나가고 난 후에서였다. 라쓰류는 아직도 잠자고 있는 시우의 상처를 살피고 붕대를 갈았고, 그 시간에 반노는 묵은 수즈를 다듬고 있었다. 원래대로면 라쓰류도 함께 했어야 할 일이지만 시우 앞에 가겠다고 한 사람은 라쓰류 밖에 없었으니 파밀이 대신 도왔다. 파밀은 평소 그러던 대로 자꾸 허둥허둥하면서 실수를 했고 그러면서 자기 변명하기보단 라쓰류 변명해주기 바빴으나 반노가 과히 그에 마음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갑자기 확 터뜨린 거라기 보다는 전날 저녁의 강독 모임이 끝나고 나서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주빈으로써는 아직 마음이 굳지 않은 샤라이보다는 결심이 선 반노를 붙잡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라쓰류가 붕대를 확인하고 마무리하고 나왔을 때 마침 반노의 일도 다 끝났다. 거기서 어긋났으면 아무 탈 없었을 것을, 일이 터지려면 기어코 그렇게 되어야 하기 마련인지 라쓰류는 약풀 찧는데 쓴 그릇을 곧장 부엌에 두러 갔고 반노는 수즈 다듬는데 쓴 그릇들을 씻으러 부엌으로 갔다. 반노가 파밀에게 대신 일을 맡겼던가 라쓰류가 그리 바로 부엌으로 가지만 않았어도 될 일인데 결국 두 사람은 바로 마주쳤다. 라쓰류가 약풀 특유의 쓴 냄새 나는 그릇들을 씻는 것을 보고 반노는 아무 말 않고도 지금 라쓰류가 막 시우에게 갔다 오는 길인 것을 알았다. 한동안 부엌 안에는 달그락 거리는 씻는 소리만 부딫혀 울렸다. 반노는 몇차례 흘끔 흘끔 라쓰류 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라쓰류는 그릇에만 눈을 두고 있었다. 헹구고 나서 라쓰류가 오전에 못다한 청소를 마저 하려고 일어섰을 때, 반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기, 라쓰류. 할 얘기가 있는데 좀 괜찮을까.”
이번에도 반노는 목소리를 별로 높히지 않는다. 라쓰류가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럼. 바닥쓰는 거 정도는 금방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 다음에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했다. 라쓰류 쪽에서 반노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라쓰류가 대답한 후에도 바로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말을 고르려다가 결국에는 처음부터 정통으로 들어간다.
“라쓰류, 너 타마후니?”
라쓰류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 질문은 너무 뜻밖이다. 잔뜩 독이 오른 샤라이도 ‘타마후 같다’고 말하면 모를까 라쓰류더러 대놓고 타마후라고 한 적은 없었다. 생각이 복잡해진 반노야 말 중에서 그나마 나아 보이는 걸 골랐겠지만 그리 적절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라쓰류는 살짝 웃었다.
“깜짝이야, 근처에 정부군이라도 있을까봐 겁나네.”
딱히 별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말은 아니었다. 너무 뜻밖인 질문에 잠시 시간을 버는 정도면 모를까. 하지만 이 웃음은 심각한 반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다. 반노는 평소보다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어물 어물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대답해.”
라쓰류는 반노의 말에서 상대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일상적으로 그냥 하는 대화가 아니다. 한 번 떠보는 것도 아니고, 거의 심문하는 태도다. 전날에는 크게 부딫히지 않고 넘어갔지만, 오늘은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듯 하다. 라쓰류는 반노에게서 일종의 묘한 적의 같은 것마저 느낄 수 있었다. 샤라이와 말싸움할 때 느껴질 법한 것이었다. 하지만 라쓰류는 그런 것 때문에 생각을 입 밖으로 못 내는 축은 아니다.
“아니야.”
“그럼 확실히, 라아다야?”
“글쎄, 있는 편은 라아다기는 하지만, 난 라아다가 아닌걸.”
“뭐?”
“아니, 아니, 반노. 넌 타마후도 아니고 라아다도 아니라 반노잖아. 마찬가지야. 난 라쓰류지, 타마후나 라아다가 아니야.”
라쓰류는 솔직하게 말했지만, 이 말은 반노의 노여움에 한층 불을 질렀다. 반노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말장난 하지 마! 그럼 저 방에 있는 그 애도 타마후가 아니라고 말할꺼야?”
“그럼,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타마후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난 라아다야! 저 애가 너한테 자기는 타마후나 적이 아니라고 뭐라고 알랑거렸는지는 몰라도, 나는 라아다라구!”
“그건 너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거야. 넌 스스로를 라아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반노지, 라아다가 아냐.”
“굳이 너 말대로 하자면 라아다의 가르침을 믿고 있는 반노지. 쟤는 타마후의 가르침(반노는 타마후 다음에 가르침이라고 말할 때 약간 주저했다)을 믿고 있는 누군가겠고. 그래서, 너는 뭐야? 라아다의 가르침을 믿고 있는 라쓰류라는 거야?”
“라아다인 반노일지는 모르지만, 반노인 라아다는 아니야. 그렇잖아?”
잘 생각해보면 라쓰류가 한 말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텐데도, 화가 난 반노는 그저 라쓰류가 인정하기 힘든 추궁을 말장난으로 넘기려 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반노가 벌떡 일어서자 그릇이 쫘르르 소리를 내며 대야 속으로 떨어지고 이리 저리 물이 튀었다. 이젠 라쓰류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씨근거리는 숨이 라쓰류에게 와 닿을 정도다.
“내가 너처럼 똑똑하지 못해서 딴 건 잘 몰라도, 너가 그 질문에 대해서 명확히 대답하지 못하겠다는 건 알았어. 좋아,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자. 라쓰류인 라쓰류는 라아다인 반노를 앞에서 타마후인 반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야. 그 애를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두는 거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걘 부상당했다구, 밀림에 그대로 뒀다가는 이틀도 못 버텨.”
“그래서 라아다로써 타마후를 용인할 수 있는거야?”
“그럼 당장 내쫓아야 한다는 얘기야? 혼자서 죽게?”
“말 돌리지 말고 내 질문에 대답해!”
“아니, 지금 말 돌리고 있는 건 너야. 라아다건 타마후건 어쩔 셈이지? 죽게 내버려둬야 한다는거야? 목숨을 구해줘야 한다는 거야?”
반노가 멈칫하는 사이 라쓰류가 재빨리 맹공을 퍼붓는다.
“라아다면 치료해주고, 타마후면 죽게 내버려둔다? 너가 말하는 라아다의 가르침은 이런 거니? 자기 가르침 바깥에 있는 것들은 신경쓸 필요 없는 거야? 라아다인지 타마후인지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봐. 죽일거야? 살릴거야?”
그러나 반노도 만만치 않다. 곧 정신을 차리고 반격했다.
“라아다의 가르침 바깥이라면 당연히 그건 죄야! 벌 받아 마땅한 죄라고! 자기 힘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받아들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면 죽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거네?”
반노는 큭 하고 이를 악물었지만 곧 무겁게 피투성이 말을 뱉어낸다. 그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으나, 라쓰류한테는 쿵 하고 깊숙한 곳에서 뭔가 부딫히는 듯한 충격을 준다.
“그래.”
“ - 충실한 개구나.”
라쓰류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화약 냄새처럼 만연한 증오야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총소리에 놀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무서운 말을 해 버릴 수가 있다니! 해 버리다니! 이 애는, 푹 쓰러지는 시체의 묵직함이 어떤 건지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고 있어. 총열의 뜨거움, 썩어 들어가는 상처, 어느 검문소가 폭발했다느니 사람이 핏자국으로 밖에 남지 않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렇게 말하고 있어! 아니, 어쩌면 너무 많이 보아 버려서 더이상 놀랍지 않은 걸지도 몰라. 한 두번은 무섭고 끔찍했어도, 이젠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익숙해 질 수가 있지!
그런 라쓰류와는 달리, 여태까지 쉽게 대답해버리지 못하던 질문 앞에서 주저하던 반노는 일단 탁 답을 뱉어 놓고 나자 기세가 살아났다. 멍한 라쓰류 앞에서 반노가 양 허리에 손을 대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래, 그래서 라아다인거야! 충실한 개는 잠에 곯아 떨어져 있어서도 안 되지만, 담장을 넘어 오는 도둑을 인정으로 못 본 척 해서도 안 돼! 봤으면 짖고, 달려들어 물어야지! 그에 반해서 - ”
하고 반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소리를 높혔다.
“자기 스스로를 호랑이라고 착각하는, 저 불성실한 개들은 대체 어떤 일인지! 바깥에는 굶주린 죄들이 이리며 승냥이처럼 돌아다니는데도, 자기들은 스스로 그걸 싸워서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해. 승냥이는 영약해서, 도로 도망쳐 달아날 수도 있는 개를 단번에 잡으려 하진 않아. 대신 진 척하고, 당해낼 수 없는 척 하고 슬쩍 물러나지! 그러고 나면 자기가 호랑이라고 착각하는 개들은, 충실한 개를 도리어 비웃는단 말야! 그 곁에는 자기랑 닮은 이리가 가까이 와서 같이 부추기고! 이렇게 자유로운데, 자유로운 건데 하는데, 하면서!”
“사냥개는 아니란 말이지.”
“ - 뭐?”
라쓰류가 나직하게 한마디 하는 바람에 당황해서 말의 흐름을 놓친다. 라쓰류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충실하게 집 지키는 개인지는 몰라도 사냥개는 아니니 다행이네. 말씀의 적들을, 네가 말하는대로 이리며 승냥이들을 그리고 호랑이인 척 하는 개들을 물어 죽이려고 쫓아다니지는 않으니 말야. 그런 사냥개였다면, 지금쯤 넌 정부군에 있겠지. 아니면 선전 영화 같은데 나오는 민병대라든가. 여튼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직접 손에 피를 묻히고 있겠네.”
“비꼬지 마. 지금 나보고 그렇게 말할 꺼면 그 애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거야?”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 걸. 뭐, 넌 내가 말하는대로 하진 않겠지. 라아다의 가르침대로 할 테니까 말야. 그러면 라아다께서는 뭐라고 하시고 있니?”
“라쓰류, 너!”
“라아다 바깥에 있는 게 죄라면서, 그냥 집 안으로 죄가 들어오지 않게 하라고만 하시고 있니? 직접 세상의 죄를 없애라거나 하는 얘기는 않고, 집 안으로 들어온 부상당한 타마후는 내쫓아서 죽게 하라고만 하시는 거야?”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그럼 집 안으로 들어온 타마후가 부상당하지 않았을 때는 어땠을지 궁금하네. 충실한 개라면 도둑이 손에 칼을 들고 위협해도 겁 먹어서는 안 되니까. 낡아빠진 라아다의 호통 소총이 어딨는지는 알고 있을테니, 그거 찾아서 들고 나가면 되겠네. 게다가 타마후들은 자기네들 말씀을 따르느라 여자와 아이는 죽일 수도 없고 말야! 잘 됐네! 지금 당장에라도 소녀 민병대를 만들어서 밀림으로 떠나지 그래? 오발만 조심하면 절대로 다치지도 않고 연전연승할테고, 어디 나중에 선전 영화에도 나오겠구나. 정부군은 왜 여군을 육성하지 않나 몰라. 하긴, 그러면 자기들이 전혀 소용없어질테니까 그렇겠구나.”
이야기가 이쯤 이르렀을 때는 둘의 목소리가 모두 너무 커져 있었다. 반노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고, 라쓰류는 안색이 딱히 변하진 않았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설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부엌 근처에서 놀던 야이챠와 두람이 무슨 일인가 보러 왔다가 분위기에 겁 먹어서 오도 가도 못하고 숨 죽이고만 있었다. 전해달란 말이 있어서 왔던 유구림도 끼어들 자리를 못 찾았다. 야이챠와 두람이 얼른 치마에 매달리자, 유구림은 둘을 안았다. 하지만 반노와 라쓰류의 말싸움은 금방 끝날 기세가 아니다.
“그래서, 너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뭐 없니? 타마후를 들여놔서는 안 돼 부상당한 타마후를 간호해서는 안 돼, 그럼 뭘 해야 하지? 아, 내쫓는 거도 뭔가 하기는 하는 일인가? 아니면 정말로 무슨 일을 저지를 셈이야?”
“애초부터 우리 얘기는 라아다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뭘 해야되는지가 아니었잖아? 라아다로써 타마후를 곁에 두는 걸 용인해야 하느냔 얘기지!”
“그게 그거잖아! 용인할 수 있다, 없다고 말하는 거 자체가 뭘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거 아니었어? 밀림 안에만 있을 때는 여태까지 잘 참아 왔는데, 당장 내 눈 앞에 나타나니까 의로운 분노가 하늘을 찔러서 견딜 수 없는 거 아니니?”
“함부로 비꼬지 마. 너!”
“난 비꼬지 않았어. 사실을 말한 거 뿐이야. 당장 손에 피 묻히기가 무서운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아다든 타마후든 똑같이 피를 흘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거잖아.”
“그래서 내가 당장 저 방에 들어가서 저 애를 찌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 아니, 반노, 내가 한 말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거잖아. 설령 너가 라아다의 바깥은 죄이고,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 맙소사! -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금 들어온 타마후가 부상당해서 약해져 있는 동안에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잖니. 안 그래?”
“- 그래.”
“왜 그럴까? 피가 무섭든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무섭든 어떻든 간에 넌 그 애가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타마후는 죄인이야.”
“하지만 죄인들도 고통스러워하지. 죄인들도 피를 흘린다구.”
“그렇다고 해서 죄가 씻겨지진 않아.”
“바로 그거야, 반노.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죄는 피로 씻겨지지 않아. 타마후가 죄인이고 아니고서를 떠나서, 그 자신의 피든, 누구 다른 사람의 피든, 피로 죄가 씻겨지진 않거든. 피로 얼룩진 옷을 다시 피로 빨아서 하얗게 할 수 있을까? 피로 얼룩진 죄를 다시 피를 흘리게 해서 지울 수 있느냔 말야?”
“그러면 어떻게 해서 죄를 씻어낼 수 있는데?”
“저 하늘에 계신 분이지.”
라쓰류가 엄숙하게 말하자 반노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평소 라쓰류의 태도로 인해, 반노의 마음 속에서 대개 라쓰류는 불신자들의 실물 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한데 이렇게 말하면 이젠 거짓 믿음을 지닌 자의 실물로 옮겨야 되는 건가? 반노가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라쓰류가 말했다.
“타마후가 죄인지 아닌지, 라아다의 밖이 죄인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 네 얘기대로 타마후가 죄인이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그래서 그 죄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다른 얘기지. 죽여서 마땅히 그 죄 값을 치르게 하라는 이야기는 하란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오직 너희를 건져 올려 씻어 주실 분이시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우리는?”
하고 반노가 좀 힘없이 물었다. 이야기 주제가 급격히 바뀌는 바람에 기세가 한풀 꺾였다.
“글쎄, 나도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최소한 우리 손으로 피를 흘리게 해서 죄를 씻으란 이야기는 없잖아? 그리고 상처 입은 자를 내버려 두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있지.”
라쓰류가 으쓱해 보였다.
“그러면 죄를 따지기 전에 먼저 돌봐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죄인이 그 후에 더 죄를 짓게 되는 건 어떻게 할 거지.”
“어차피 죄를 지을 테니까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 문제는 좀 다른 얘기야. 저 애가 증상이 좀 나아지고 나면, 라아다로 개종시키려고 설득하건 말건 그건 네 마음이야. 하지만 아직은 무리하면 안 되는 상태니까, 좀만 냅둬 줘. 신학 토론보단 휴식을 취해야지.”
“나도 잘 모르겠다.”
반노가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난 너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선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우린 타마후를 용인해야 하는 거야? 우리가 죄를 심판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 너가 부인하고 있는 것 뿐이지, 너도 알고 있는거야. 죽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내쫓으라고만 말한 거, 아무리 냉혹하게 말하려 해도 ‘나가서 죽게 내버려둬’라고만 하고 ‘지금 내가 이 칼로 끝장을 볼 테니까’라고 말하지 않는 거만 봐도 알 수 있는 얘기야.”
“글쎄.”
“타마후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 얘기야. 죄인이든 아니든, 넌 최소한 ‘죽여!’라고 말하지는 않고 있어.”
“그럼 타마후가 죄인이라는 건 인정 하는거야? 너 생각으로도?”
“네가 말한대로 라면 죄인이겠지. 라아다의 바깥에 있는 거잖아. 하지만 누가 죄인인가 얘기는 좀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거 같구나. 둘이서만 너무 오래 얘기했네.”
하고 유구림와 거기 안긴 야이챠와 두람을 쳐다보았다. 야이챠와 두람이 라쓰류에게 와서 안기자 가만히 둘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유구림은 파밀이 수즈 한 뭉치를 깜빡하고 덜 다듬어서 이따 마저 해야 겠다더라고 전했다. 두람이 말했다.
“언니들, 싸우지 마.”
“안 싸워요. 목소리 크게 말한 건 미안.”
반노는 라쓰류가 그러는 걸 물끄러미 쳐다 본다. 죄인이라고 해도 그 죄를 피로 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여태까지 라쓰류가 믿음을 전혀 갖지 않았다고만 생각했기 떄문에 라쓰류의 반응은 꽤 뜻밖이었다. 그래서 처음 반군이 비틀거리면서 찾아 들고, 라쓰류가 그걸 보살펴줘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도 그저 라쓰류가 타마후건 라아다건 상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한 걸 생각해 보면 라쓰류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아직 아무리 그래도 타마후인데... 하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냥 단순히 타마후니까, 하고 그 반군을 내쫓아야 한다고 말한 건 생각이 짧았다. 그렇게 말하려면 좀 더 생각해 보고서 충분한 이유를 찾아서 반군을 저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정말 라쓰류 말대로 설득해서 라아다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하는 게 더 옳은 시도일지도.
하지만 마지막에서, 라쓰류는 타마후를 명확히 죄인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피했다. 반노가 한 말에 따르면 죄인이라고만 말했지 자기 입으로 죄라고 한 것은 아니다.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걸 보면, 타마후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반노가 화내는 것을 피하려고 일부러 돌려 말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라쓰류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걸까? 그래, 이 점은 좀 나중에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를 해 보고 나서 다시 라쓰류와 얘기해야겠다. 신학 토론을 한다고 해도, 라쓰류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닐 듯 하다.
----------------------------------------------------------------------
근래 들어서 세부설정 사항들은 엄청나게 진전이 있었습니다만(배경 세계의 역사라든가 고아원 내의 흥망사 등등) 이렇게 글 외적인 요소가 발전하는 건 본문 자체가 잘 안 써진다는 소리인 법이죠. -_-ㅋ 애초에 습작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니 만큼, 줄거리 진행에서 부족한 점이 너무 눈에 자주 뜨이고, 앞으로 끌어갈 전체적인 맥락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매 화마다 그냥 등장인물들끼리 말싸움이나 하고 있고.
그래도 일단은 되는데까지 써 보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전부 다 다시 써야 한다고 해도, 그러면 그 때는 지금보다 더 나은 걸 쓰게 될 테고, 지금은 지금 쓰는 걸 마저 해야죠. .... 라고는 하지만 또 개강하고 나니 통 글에 손을 못대는 것 같아 유감입니다.
이 화에서 라쓰류는 어느 정도, 맹자의 화법을 따라 해 봤습니다.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측은지심의 단서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일이 터진 것은 점심 시간도 이미 한참 지나가고 난 후에서였다. 라쓰류는 아직도 잠자고 있는 시우의 상처를 살피고 붕대를 갈았고, 그 시간에 반노는 묵은 수즈를 다듬고 있었다. 원래대로면 라쓰류도 함께 했어야 할 일이지만 시우 앞에 가겠다고 한 사람은 라쓰류 밖에 없었으니 파밀이 대신 도왔다. 파밀은 평소 그러던 대로 자꾸 허둥허둥하면서 실수를 했고 그러면서 자기 변명하기보단 라쓰류 변명해주기 바빴으나 반노가 과히 그에 마음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갑자기 확 터뜨린 거라기 보다는 전날 저녁의 강독 모임이 끝나고 나서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주빈으로써는 아직 마음이 굳지 않은 샤라이보다는 결심이 선 반노를 붙잡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라쓰류가 붕대를 확인하고 마무리하고 나왔을 때 마침 반노의 일도 다 끝났다. 거기서 어긋났으면 아무 탈 없었을 것을, 일이 터지려면 기어코 그렇게 되어야 하기 마련인지 라쓰류는 약풀 찧는데 쓴 그릇을 곧장 부엌에 두러 갔고 반노는 수즈 다듬는데 쓴 그릇들을 씻으러 부엌으로 갔다. 반노가 파밀에게 대신 일을 맡겼던가 라쓰류가 그리 바로 부엌으로 가지만 않았어도 될 일인데 결국 두 사람은 바로 마주쳤다. 라쓰류가 약풀 특유의 쓴 냄새 나는 그릇들을 씻는 것을 보고 반노는 아무 말 않고도 지금 라쓰류가 막 시우에게 갔다 오는 길인 것을 알았다. 한동안 부엌 안에는 달그락 거리는 씻는 소리만 부딫혀 울렸다. 반노는 몇차례 흘끔 흘끔 라쓰류 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라쓰류는 그릇에만 눈을 두고 있었다. 헹구고 나서 라쓰류가 오전에 못다한 청소를 마저 하려고 일어섰을 때, 반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기, 라쓰류. 할 얘기가 있는데 좀 괜찮을까.”
이번에도 반노는 목소리를 별로 높히지 않는다. 라쓰류가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럼. 바닥쓰는 거 정도는 금방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 다음에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했다. 라쓰류 쪽에서 반노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라쓰류가 대답한 후에도 바로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말을 고르려다가 결국에는 처음부터 정통으로 들어간다.
“라쓰류, 너 타마후니?”
라쓰류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 질문은 너무 뜻밖이다. 잔뜩 독이 오른 샤라이도 ‘타마후 같다’고 말하면 모를까 라쓰류더러 대놓고 타마후라고 한 적은 없었다. 생각이 복잡해진 반노야 말 중에서 그나마 나아 보이는 걸 골랐겠지만 그리 적절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라쓰류는 살짝 웃었다.
“깜짝이야, 근처에 정부군이라도 있을까봐 겁나네.”
딱히 별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말은 아니었다. 너무 뜻밖인 질문에 잠시 시간을 버는 정도면 모를까. 하지만 이 웃음은 심각한 반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다. 반노는 평소보다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어물 어물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대답해.”
라쓰류는 반노의 말에서 상대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일상적으로 그냥 하는 대화가 아니다. 한 번 떠보는 것도 아니고, 거의 심문하는 태도다. 전날에는 크게 부딫히지 않고 넘어갔지만, 오늘은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듯 하다. 라쓰류는 반노에게서 일종의 묘한 적의 같은 것마저 느낄 수 있었다. 샤라이와 말싸움할 때 느껴질 법한 것이었다. 하지만 라쓰류는 그런 것 때문에 생각을 입 밖으로 못 내는 축은 아니다.
“아니야.”
“그럼 확실히, 라아다야?”
“글쎄, 있는 편은 라아다기는 하지만, 난 라아다가 아닌걸.”
“뭐?”
“아니, 아니, 반노. 넌 타마후도 아니고 라아다도 아니라 반노잖아. 마찬가지야. 난 라쓰류지, 타마후나 라아다가 아니야.”
라쓰류는 솔직하게 말했지만, 이 말은 반노의 노여움에 한층 불을 질렀다. 반노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말장난 하지 마! 그럼 저 방에 있는 그 애도 타마후가 아니라고 말할꺼야?”
“그럼,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타마후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난 라아다야! 저 애가 너한테 자기는 타마후나 적이 아니라고 뭐라고 알랑거렸는지는 몰라도, 나는 라아다라구!”
“그건 너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거야. 넌 스스로를 라아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반노지, 라아다가 아냐.”
“굳이 너 말대로 하자면 라아다의 가르침을 믿고 있는 반노지. 쟤는 타마후의 가르침(반노는 타마후 다음에 가르침이라고 말할 때 약간 주저했다)을 믿고 있는 누군가겠고. 그래서, 너는 뭐야? 라아다의 가르침을 믿고 있는 라쓰류라는 거야?”
“라아다인 반노일지는 모르지만, 반노인 라아다는 아니야. 그렇잖아?”
잘 생각해보면 라쓰류가 한 말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텐데도, 화가 난 반노는 그저 라쓰류가 인정하기 힘든 추궁을 말장난으로 넘기려 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반노가 벌떡 일어서자 그릇이 쫘르르 소리를 내며 대야 속으로 떨어지고 이리 저리 물이 튀었다. 이젠 라쓰류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씨근거리는 숨이 라쓰류에게 와 닿을 정도다.
“내가 너처럼 똑똑하지 못해서 딴 건 잘 몰라도, 너가 그 질문에 대해서 명확히 대답하지 못하겠다는 건 알았어. 좋아,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자. 라쓰류인 라쓰류는 라아다인 반노를 앞에서 타마후인 반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야. 그 애를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두는 거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걘 부상당했다구, 밀림에 그대로 뒀다가는 이틀도 못 버텨.”
“그래서 라아다로써 타마후를 용인할 수 있는거야?”
“그럼 당장 내쫓아야 한다는 얘기야? 혼자서 죽게?”
“말 돌리지 말고 내 질문에 대답해!”
“아니, 지금 말 돌리고 있는 건 너야. 라아다건 타마후건 어쩔 셈이지? 죽게 내버려둬야 한다는거야? 목숨을 구해줘야 한다는 거야?”
반노가 멈칫하는 사이 라쓰류가 재빨리 맹공을 퍼붓는다.
“라아다면 치료해주고, 타마후면 죽게 내버려둔다? 너가 말하는 라아다의 가르침은 이런 거니? 자기 가르침 바깥에 있는 것들은 신경쓸 필요 없는 거야? 라아다인지 타마후인지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봐. 죽일거야? 살릴거야?”
그러나 반노도 만만치 않다. 곧 정신을 차리고 반격했다.
“라아다의 가르침 바깥이라면 당연히 그건 죄야! 벌 받아 마땅한 죄라고! 자기 힘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받아들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면 죽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거네?”
반노는 큭 하고 이를 악물었지만 곧 무겁게 피투성이 말을 뱉어낸다. 그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으나, 라쓰류한테는 쿵 하고 깊숙한 곳에서 뭔가 부딫히는 듯한 충격을 준다.
“그래.”
“ - 충실한 개구나.”
라쓰류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화약 냄새처럼 만연한 증오야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총소리에 놀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무서운 말을 해 버릴 수가 있다니! 해 버리다니! 이 애는, 푹 쓰러지는 시체의 묵직함이 어떤 건지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고 있어. 총열의 뜨거움, 썩어 들어가는 상처, 어느 검문소가 폭발했다느니 사람이 핏자국으로 밖에 남지 않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렇게 말하고 있어! 아니, 어쩌면 너무 많이 보아 버려서 더이상 놀랍지 않은 걸지도 몰라. 한 두번은 무섭고 끔찍했어도, 이젠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익숙해 질 수가 있지!
그런 라쓰류와는 달리, 여태까지 쉽게 대답해버리지 못하던 질문 앞에서 주저하던 반노는 일단 탁 답을 뱉어 놓고 나자 기세가 살아났다. 멍한 라쓰류 앞에서 반노가 양 허리에 손을 대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래, 그래서 라아다인거야! 충실한 개는 잠에 곯아 떨어져 있어서도 안 되지만, 담장을 넘어 오는 도둑을 인정으로 못 본 척 해서도 안 돼! 봤으면 짖고, 달려들어 물어야지! 그에 반해서 - ”
하고 반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소리를 높혔다.
“자기 스스로를 호랑이라고 착각하는, 저 불성실한 개들은 대체 어떤 일인지! 바깥에는 굶주린 죄들이 이리며 승냥이처럼 돌아다니는데도, 자기들은 스스로 그걸 싸워서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해. 승냥이는 영약해서, 도로 도망쳐 달아날 수도 있는 개를 단번에 잡으려 하진 않아. 대신 진 척하고, 당해낼 수 없는 척 하고 슬쩍 물러나지! 그러고 나면 자기가 호랑이라고 착각하는 개들은, 충실한 개를 도리어 비웃는단 말야! 그 곁에는 자기랑 닮은 이리가 가까이 와서 같이 부추기고! 이렇게 자유로운데, 자유로운 건데 하는데, 하면서!”
“사냥개는 아니란 말이지.”
“ - 뭐?”
라쓰류가 나직하게 한마디 하는 바람에 당황해서 말의 흐름을 놓친다. 라쓰류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충실하게 집 지키는 개인지는 몰라도 사냥개는 아니니 다행이네. 말씀의 적들을, 네가 말하는대로 이리며 승냥이들을 그리고 호랑이인 척 하는 개들을 물어 죽이려고 쫓아다니지는 않으니 말야. 그런 사냥개였다면, 지금쯤 넌 정부군에 있겠지. 아니면 선전 영화 같은데 나오는 민병대라든가. 여튼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직접 손에 피를 묻히고 있겠네.”
“비꼬지 마. 지금 나보고 그렇게 말할 꺼면 그 애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거야?”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 걸. 뭐, 넌 내가 말하는대로 하진 않겠지. 라아다의 가르침대로 할 테니까 말야. 그러면 라아다께서는 뭐라고 하시고 있니?”
“라쓰류, 너!”
“라아다 바깥에 있는 게 죄라면서, 그냥 집 안으로 죄가 들어오지 않게 하라고만 하시고 있니? 직접 세상의 죄를 없애라거나 하는 얘기는 않고, 집 안으로 들어온 부상당한 타마후는 내쫓아서 죽게 하라고만 하시는 거야?”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그럼 집 안으로 들어온 타마후가 부상당하지 않았을 때는 어땠을지 궁금하네. 충실한 개라면 도둑이 손에 칼을 들고 위협해도 겁 먹어서는 안 되니까. 낡아빠진 라아다의 호통 소총이 어딨는지는 알고 있을테니, 그거 찾아서 들고 나가면 되겠네. 게다가 타마후들은 자기네들 말씀을 따르느라 여자와 아이는 죽일 수도 없고 말야! 잘 됐네! 지금 당장에라도 소녀 민병대를 만들어서 밀림으로 떠나지 그래? 오발만 조심하면 절대로 다치지도 않고 연전연승할테고, 어디 나중에 선전 영화에도 나오겠구나. 정부군은 왜 여군을 육성하지 않나 몰라. 하긴, 그러면 자기들이 전혀 소용없어질테니까 그렇겠구나.”
이야기가 이쯤 이르렀을 때는 둘의 목소리가 모두 너무 커져 있었다. 반노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고, 라쓰류는 안색이 딱히 변하진 않았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설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부엌 근처에서 놀던 야이챠와 두람이 무슨 일인가 보러 왔다가 분위기에 겁 먹어서 오도 가도 못하고 숨 죽이고만 있었다. 전해달란 말이 있어서 왔던 유구림도 끼어들 자리를 못 찾았다. 야이챠와 두람이 얼른 치마에 매달리자, 유구림은 둘을 안았다. 하지만 반노와 라쓰류의 말싸움은 금방 끝날 기세가 아니다.
“그래서, 너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뭐 없니? 타마후를 들여놔서는 안 돼 부상당한 타마후를 간호해서는 안 돼, 그럼 뭘 해야 하지? 아, 내쫓는 거도 뭔가 하기는 하는 일인가? 아니면 정말로 무슨 일을 저지를 셈이야?”
“애초부터 우리 얘기는 라아다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뭘 해야되는지가 아니었잖아? 라아다로써 타마후를 곁에 두는 걸 용인해야 하느냔 얘기지!”
“그게 그거잖아! 용인할 수 있다, 없다고 말하는 거 자체가 뭘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거 아니었어? 밀림 안에만 있을 때는 여태까지 잘 참아 왔는데, 당장 내 눈 앞에 나타나니까 의로운 분노가 하늘을 찔러서 견딜 수 없는 거 아니니?”
“함부로 비꼬지 마. 너!”
“난 비꼬지 않았어. 사실을 말한 거 뿐이야. 당장 손에 피 묻히기가 무서운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아다든 타마후든 똑같이 피를 흘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거잖아.”
“그래서 내가 당장 저 방에 들어가서 저 애를 찌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 아니, 반노, 내가 한 말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거잖아. 설령 너가 라아다의 바깥은 죄이고,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 맙소사! -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금 들어온 타마후가 부상당해서 약해져 있는 동안에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잖니. 안 그래?”
“- 그래.”
“왜 그럴까? 피가 무섭든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무섭든 어떻든 간에 넌 그 애가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타마후는 죄인이야.”
“하지만 죄인들도 고통스러워하지. 죄인들도 피를 흘린다구.”
“그렇다고 해서 죄가 씻겨지진 않아.”
“바로 그거야, 반노.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죄는 피로 씻겨지지 않아. 타마후가 죄인이고 아니고서를 떠나서, 그 자신의 피든, 누구 다른 사람의 피든, 피로 죄가 씻겨지진 않거든. 피로 얼룩진 옷을 다시 피로 빨아서 하얗게 할 수 있을까? 피로 얼룩진 죄를 다시 피를 흘리게 해서 지울 수 있느냔 말야?”
“그러면 어떻게 해서 죄를 씻어낼 수 있는데?”
“저 하늘에 계신 분이지.”
라쓰류가 엄숙하게 말하자 반노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평소 라쓰류의 태도로 인해, 반노의 마음 속에서 대개 라쓰류는 불신자들의 실물 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한데 이렇게 말하면 이젠 거짓 믿음을 지닌 자의 실물로 옮겨야 되는 건가? 반노가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라쓰류가 말했다.
“타마후가 죄인지 아닌지, 라아다의 밖이 죄인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 네 얘기대로 타마후가 죄인이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그래서 그 죄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다른 얘기지. 죽여서 마땅히 그 죄 값을 치르게 하라는 이야기는 하란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오직 너희를 건져 올려 씻어 주실 분이시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우리는?”
하고 반노가 좀 힘없이 물었다. 이야기 주제가 급격히 바뀌는 바람에 기세가 한풀 꺾였다.
“글쎄, 나도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최소한 우리 손으로 피를 흘리게 해서 죄를 씻으란 이야기는 없잖아? 그리고 상처 입은 자를 내버려 두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있지.”
라쓰류가 으쓱해 보였다.
“그러면 죄를 따지기 전에 먼저 돌봐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죄인이 그 후에 더 죄를 짓게 되는 건 어떻게 할 거지.”
“어차피 죄를 지을 테니까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 문제는 좀 다른 얘기야. 저 애가 증상이 좀 나아지고 나면, 라아다로 개종시키려고 설득하건 말건 그건 네 마음이야. 하지만 아직은 무리하면 안 되는 상태니까, 좀만 냅둬 줘. 신학 토론보단 휴식을 취해야지.”
“나도 잘 모르겠다.”
반노가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난 너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선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우린 타마후를 용인해야 하는 거야? 우리가 죄를 심판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 너가 부인하고 있는 것 뿐이지, 너도 알고 있는거야. 죽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내쫓으라고만 말한 거, 아무리 냉혹하게 말하려 해도 ‘나가서 죽게 내버려둬’라고만 하고 ‘지금 내가 이 칼로 끝장을 볼 테니까’라고 말하지 않는 거만 봐도 알 수 있는 얘기야.”
“글쎄.”
“타마후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 얘기야. 죄인이든 아니든, 넌 최소한 ‘죽여!’라고 말하지는 않고 있어.”
“그럼 타마후가 죄인이라는 건 인정 하는거야? 너 생각으로도?”
“네가 말한대로 라면 죄인이겠지. 라아다의 바깥에 있는 거잖아. 하지만 누가 죄인인가 얘기는 좀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거 같구나. 둘이서만 너무 오래 얘기했네.”
하고 유구림와 거기 안긴 야이챠와 두람을 쳐다보았다. 야이챠와 두람이 라쓰류에게 와서 안기자 가만히 둘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유구림은 파밀이 수즈 한 뭉치를 깜빡하고 덜 다듬어서 이따 마저 해야 겠다더라고 전했다. 두람이 말했다.
“언니들, 싸우지 마.”
“안 싸워요. 목소리 크게 말한 건 미안.”
반노는 라쓰류가 그러는 걸 물끄러미 쳐다 본다. 죄인이라고 해도 그 죄를 피로 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여태까지 라쓰류가 믿음을 전혀 갖지 않았다고만 생각했기 떄문에 라쓰류의 반응은 꽤 뜻밖이었다. 그래서 처음 반군이 비틀거리면서 찾아 들고, 라쓰류가 그걸 보살펴줘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도 그저 라쓰류가 타마후건 라아다건 상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한 걸 생각해 보면 라쓰류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아직 아무리 그래도 타마후인데... 하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냥 단순히 타마후니까, 하고 그 반군을 내쫓아야 한다고 말한 건 생각이 짧았다. 그렇게 말하려면 좀 더 생각해 보고서 충분한 이유를 찾아서 반군을 저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정말 라쓰류 말대로 설득해서 라아다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하는 게 더 옳은 시도일지도.
하지만 마지막에서, 라쓰류는 타마후를 명확히 죄인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피했다. 반노가 한 말에 따르면 죄인이라고만 말했지 자기 입으로 죄라고 한 것은 아니다.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걸 보면, 타마후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반노가 화내는 것을 피하려고 일부러 돌려 말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라쓰류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걸까? 그래, 이 점은 좀 나중에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를 해 보고 나서 다시 라쓰류와 얘기해야겠다. 신학 토론을 한다고 해도, 라쓰류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닐 듯 하다.
----------------------------------------------------------------------
근래 들어서 세부설정 사항들은 엄청나게 진전이 있었습니다만(배경 세계의 역사라든가 고아원 내의 흥망사 등등) 이렇게 글 외적인 요소가 발전하는 건 본문 자체가 잘 안 써진다는 소리인 법이죠. -_-ㅋ 애초에 습작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니 만큼, 줄거리 진행에서 부족한 점이 너무 눈에 자주 뜨이고, 앞으로 끌어갈 전체적인 맥락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매 화마다 그냥 등장인물들끼리 말싸움이나 하고 있고.
그래도 일단은 되는데까지 써 보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전부 다 다시 써야 한다고 해도, 그러면 그 때는 지금보다 더 나은 걸 쓰게 될 테고, 지금은 지금 쓰는 걸 마저 해야죠. .... 라고는 하지만 또 개강하고 나니 통 글에 손을 못대는 것 같아 유감입니다.
이 화에서 라쓰류는 어느 정도, 맹자의 화법을 따라 해 봤습니다.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측은지심의 단서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티끌 같은 세상속에 작은 모래알 하나,
한바탕 미친 바람 불고 나면 그 간 곳을 모르온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