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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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적 있던 일들이 대강 처리가 끝나자, 나는 오랜만에 여유가 나게 되었다. 며칠씩 붙들고 끙끙 거리던 주문들도 잠시 밀어 젖혀 두고, 주점으로 내려가 구석진 테이블에 아헨과 자리잡고 앉아서 대략 시간을 보낸다. 한가롭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늘에 숨은 고블린이 몇인지 걱정할 필요도 없고, 자물쇠의 구동방식이 빗장인지 톱날인지 알아내려 철사토막으로 쑤셔댈 필요도 없다. 그냥 자리값 삼아 동전 한푼 짜리 맥주 한잔, 아헨에게는 간단한 청량음료 하나 시켜 놓고, 하루 종일 앉아서 빈둥대면 된다. 주점에서 오가는 얘기들은 엿듣는 것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고 싸움이라도 나면 구경거리다. 물론 내 영혼의 구원을 걱정하는 우리 투철한 신념의 귀여운 성직녀 아가씨는 내 옆에 붙어 앉아서 지금 당장이라도 참회하세요! 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싸움이 나면 말리라고 어찌나 옆구리를 찔러대는지, 그러나 아무리 순진한 성직녀라도 이런 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말리는 일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일인지는 알고 있다. 아니, 싸움을 말리려고 나서면 기대가 깨진 구경꾼들이 걸어오는 시비가 더 큰 일이다. - 뭐, 그보다는 아헨이 나보고 나서서 말리라고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싸움이 결국에는 별볼일 없는 허풍선이들이 어떻게든 모험가들의 이목을 끌어보려고 벌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칼을 뽑아들면 갈채가 쏟아지지만, 그래봤자 칼 잡는 법도 모르는데 어쩌겠어? 자기 손끝만 베고 물러나고 말지.
이런 이유로, 거품이 다 꺼져 식어버린 맥주를 내버려두고 뒤로 기댔다가 주점의 소란을 뚫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내가 자세를 고쳐 앉았을 때 아헨이 책망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나는 그저 마주 미소를 지어 주었다. 자, 오늘은 또 어떤 애송이가 나와서 공연하시려나? 아헨의 입모양을 보았을 때 뭐라고 말하는지는 뻔하다. 나는 그냥 아헨의 팔을 살짝 잡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이- 이- 여자는 다 암컷으로만 보이는 발정난 수캐 새끼들이!"
아이쿠, 이거 원 드센 아가씨다. 아헨이 움찔 놀랄 정도로 소리가 컸다. 휘이이익, 하는 휘파람 소리에 갈채 소리. 구경꾼 틈으로 흘긋 보니 불그스름한 갈색머리를 뒤로 묶어내린, 가죽갑옷을 입은 전형적인 모험가다. 모험가인 척 하는 애송이들과 진짜 모험가는 이제 보면 확실히 구분이 간단 말야. 뭐, 이 정도로 견식이 넓어졌으니 나도 이젠 어느정도 관록이 붙었다는 게 아니겠어?
상대는 며칠 째 주점에서 굴러먹는, 덩치 빼고는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건달들이다. 구경꾼들이 뒤로 물러서며 모험가와 건달들을 둘러싼 원이 만들어졌다.
"-어디, 바지 좀 내려보시지 그래? 붙어 있기나 한지 확인해 주게! 내려봐! 확 따 주마!"
박수는 소나기 쏟아지듯 맹렬하다만, 저 아가씨는 보아하니 아무리 모험가라도 너무 취했다. 게다가 혼자다. 아마 혼자 술 마시고 있는 걸 얕보고 저 덩치들이 시비 걸은 모양인데, 저런 식으로 되면 모험가 쪽이 좀 불리하지 않을까 싶다.
"이 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우릴 물로 보고- "
주위의 열광적인 반응에 압도당한 듯 했던 녀석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으르렁댔다. 주먹을 불끈 쥐면서 들어올리는 게 그래도 팔심은 깨나 있어 보이는데, 저 취한 아가씨가 제대로 피하기나 하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캉!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모험가가 단숨에 칼을 빼든 것이다. 우왓, 이거 자칫하면 칼부림...이 문제가 아니라 살인나겠다. 밤과 낮의 경계선인 이 곳, 피드헤그에서 살인은 그저 약간 더 흥미로운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주인장은 마룻바닥을 벅벅 문질러 닦아야 하니 조금 성가신 일이 될지 모르지만, 시체가 어디로 치워지는지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그보다도 아헨이 내 팔을 아프도록 꽉 잡았으므로, 하마터면 입에서 억 소리가 튀어나올 뻔 했다. 돌아보니 아헨의 강렬한 눈빛이란... 그 눈빛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가서 구원하세요. 누구를? 저들 모두를. 겨누어진 검에서, 다가오는 죄에서...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으니-나는 이제 이런 녀석들이 벌이는 행각에는 진력이 나서 죽든 살든 신경쓰고 싶지 않지만, 아헨에게 내가 눈앞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것을 방관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제법 눈길을 끌 테니 이제 한동안은 주점에도 못 내려오고 숨어있어야겠군. 아니면 피그헤드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그런데 뜻밖에도 막 달아오르던 군중들의 응원소리가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뭐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다 만 자세로 들으니 헐떡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소곤거리는 소리들이 오간다.
"봐라, 봐! 마법이야!"
"저게 진짜 마법이라고 - 이 멍청아! 저건 고대의 유물인 게 틀림없어!"
"-유물이나 마법이나 무슨 상관이야? 벼락맞아 뒈질 자식들! 조용히 해- 저 성질사나운 년이 네 아가리에도 저 불덩어리를 쑤셔넣기 전에. 이크, 이쪽을 봤다. 고개 숙여! 숙이라고!"
마법? 그렇지만 마법이 발동하는 파장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나는 허둥지둥 사람들 틈을 비집고 끼어들어갔다. 어렵사리 고개를 내밀자 숨죽인 군중들로 이루어진 투기장의 벽 너머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건달녀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떠는 꼴이 가관이긴 한데, 도대체 뭐가? - 억지로 몸을 비틀어서("꺼져, 멍청아!") 더 앞으로 나아가자 그제야 모험가가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의 칼날에는 하늘거리며 타오르는 불길이 매달려 있다.
불길의 칼날의 주문은 원래 창안자의 이름을 알 필요도 없을 만큼 기초적이고 유명한 주문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아직 성당의 끄나불이 있을 수 있는 주점에서 사용하는 것은 자살행위이지만) 그러나 저 불타는 칼이 내 관심을 끈 것은, 아무리 미약한 주문이라고 해도 주문학에 입문한 사람은 누구나 주문이 발동할 때 일어나는 미묘한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데-수준에 따라 민감한 정도가 다르기는 하다- 저 불에서는 어떠한 마법적인 파동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칼날에다가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인 것은 아닐테고. 칼날을 핥는 듯한 불꽃은 아무래도 무엇을 태우기 보다는 그저 그 형태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저것은 한번 조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듯 하다. 머리속으로 수식 몇개를 떠올려 보면서 어떤 식으로 상대를 제압할지 즉석에서 떠오른 계획을 세우고, 단검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은 다음, 숨을 들이마시고 어깨로 앞사람을 힘껏 떠밀면서 발을 내딛었다.
"우왁! 어떤 개자식이-"
어차피 주점에서 굴러먹는, 언젠가 모험가의 눈에 뜨이기만을 기다리는 그게 그거인 건달녀석. 쳇, 이렇게 이용해주는 거라도 영광으로 알아라! 잔뜩 긴장해 있던 나머지, 녀석은 주점 안을 괴괴히 메우고 있던 정적을 여지없이 깨뜨리며 앞으로 굴러떨어진다. 평소 입에 달고 다니던 욕설이 그대로 튀어나오는데 모두의 시선은 그리로 쏠리기 마련. 반사적으로 모험가와 그와 대치중인 건달들의 눈길도 이리로 쏠린다. 당황해서 녀석이 헛바람을 내쉬며 입을 싸쥘 때, 나는 이미 주문을 발동시키며 두번째 걸음을 내딛고 있다.
"-무슨-"
턱, 하고 모험가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아가씨 얼굴에 흠집낼 수는 없으니 깔끔한 것으로 해 주지! 잠깐 모험가의 눈이 커지는 듯 했지만, 곧이어 힘없이 모험가는 축 늘어져 버린다. 이크, 이크... 못 받아내고 떨어뜨릴 뻔 했다. 단검을 쥐고 있던 손은 놓고, 간신히 모험가를 받쳐 세운다. 바닥에 떨어져서도 칼날에는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나는 한 손으로 모험가를 받친 채로-잠시 실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까딱여보이고는, 짐짓 권태롭다는 듯이 말을 내뱉는다.
"내 사냥감에 눈독들이는 자가 또 있느냐?"
이 말 한 마디에 온통 번져나가는 벌떼 같은 수런거림. 봐, 들었어? 사냥감이래! 사냥감이라니, 저 여자가? 이 멍청이, 머리에 든 건 먹을 거하고 그짓거리밖에 없냐? 당연히 저 칼이지! 손짓 한번에 쓰러지는 걸 봤어! 마법사야! 마법이야! 저 칼을 노리고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저 발정난 놈들이 뭣도 모르고 건드릴라고 한 거지! 자, 봐라, 저놈들도 이젠 죽은 목숨이다. 까불더니 잘됐구만, 뇌까지 근육으로 된 멍청한 새끼들. 시끄러워, 너도 마찬가지야. 조용히 하고 입 닥쳐. 너도 저 꼬라지 나고 싶지 않으면.
나한테 떠밀려서 앞으로 고꾸라졌던 녀석은 이미 싹 사라지고 없다.
...나는 잠시 그 순간을 즐기며 아까전에 사용한 주문의 수식을 다시 속으로 훑어내려 본다. 이만하면 훌륭하지, 나의 첫 주문치고는. 어때, 주문 이름은 네드의 인사불성으로 할까? 피시전자의 정신에 간단한 조작을 가해서, 대상은 순식간에 파이어와인을 한 병 홀랑 들이키기라도 한 듯이 널부러져 버린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거나 긴장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주문이지만,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다면 영락없다. 이 정도면 처음으로 만든 주문에 만족해도 될 듯 하다.
놈은 우물우물 거렸다. 하긴 주위에 대놓고 나한테 덤빌 녀석이 있느냐, 고 묻긴 했지만 뭐 사실은 앞에 있는 녀석보고 썩 꺼져, 라고 말한 셈이지. 이 시대의 주문학에 대한 무지는 모든 종류의 주문에 대해서 거의 마법적인 수준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성스러운 어머니 교회와 이단심문관들에게 감사해야할까? 그러나, 가끔씩은 너무 무식하면 뜻밖에 용감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그 훌륭한 실례가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우와아아아아!"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나지막한 비명소리- 아마 다음순간 벌어질 피와 육편이 낭자한 현장을 상상했거나 혹은 튀어나온 벼락의 폭발이 자신에게 튀지라도 않을까 겁먹은지도 모르겠지만, 이 경우에 위기에 몰린 것은 나다: 머뭇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다짜고짜로 무식하게 달려들면, 주문을 외울 시간도 없잖아! 아마 더 이상 몰리면 이 바닥에서도 발 붙일 곳이 없다, 는 생각인가본데 내가 너무 쥐를 궁지에 몰아넣은건가?
모험가를 놓치면서-아가씨, 죄송합니다!-고개를 확 숙인 덕에 앞으로 흐느적 쓰러지는 모험가에 걸려 녀석이 휘두른 주먹은 머리 위를 지나갔다. 머리속에 수식이 척척 달라붙고 룬이 좌좌좌좍 배열된다-사람은 위급해지면 천재가 되나봐!-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자세 그대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펼친 손바닥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은 상황 종료: 카나쓰의 거절하는 손길. 반탄력을 형성해서 상대방을 튕겨내지만, 물리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직접적인 피해는 전혀 없다. 다만 자신의 무게가 있으니, 바닥이 자신이 튕겨져 나온 속도 만큼 자신을 후려패는 셈이다. 그러나 내 수준이 그렇게 훌륭한 것은 아니어서, 상대는 3m정도 뒤로 물러나서 엉덩방아를 찧었을 뿐이다. 좀더 훌륭한 마법사라면 상대방이 나가떨어져서 어디 뼈 한두군데라도 부러져 못 일어나게 할 수 있지만, 나는 기껏해야 이 정도뿐. 그렇다 해도,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충분한 효과다. 모험가가 식탁을 쓰러뜨리기 전에 얼른 도로 받쳐 세우고 나서, -여기서 우장창창 하는 소리와 함께 모험가가 주정뱅이처럼(실제로 그렇다)넘어진다면 극적 효과는 반감될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세심한 공연을 위한 배려인가- 손가락을 똑바로 겨누어 들고서 좀더 위협적으로,
"이번에는 네 놈에게 손대지 않고 날려버릴테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는데, 꺼져라."
이번에는 제대로 위협이 먹혔는지 놈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돌아서서 도망쳤다. 같이 있던 녀석들은 놈이 뒤로 날려갔을 때부터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쯧, 저게 뒷골목의 우정이라고...
이제 남은 것은, 모험가의 검을 타오르는 불길에 아랑곳 않고 들어올리는 일 뿐이지. 검은 칼날부터 자루까지 전부 한 종류의 금속으로 되어 있다. 흠, 역시 심상치 않은 걸 줄 알았다. 이렇게 괴악한 생김새일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불길은 칼날이건 자루건 아랑곳 않고 타오른다. 모험가의 손을 보니 석면섬유장갑도 불도마뱀가죽장갑도 없다. 주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불이라면 분명히 마법적인 것일텐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아무런 느낌도 없을리가 있나?
그렇다 해도 일단 성질이 마법적인 것이라면- 나는 시약 주머니 속에 부숴진 적옥 가루를 버무려 굳힌 유황덩어리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수식을 머리속으로 세워서 진을 배열했다. 늘어선 룬들을 확인하고 수식을 발동시키자, 주머니 속에서 화끈하는 느낌이 나더니 시약이 고운 가루로 변해서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마법적인 불로부터 보호는 상당히 오랜만에 사용하는 주문인데 한번에 성공하는 걸 보면, 내 머리도 쓸만한 편이란 말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느긋하게 손을 뻗어서 손잡이를 잡으려 했다. 누군가가 꿀꺽! 하고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 순간 불길은 사납게 내 손가락을 물어뜯었고, 나는 황급히 손을 뺄 수 밖에 없었다. 뭐지? 얼굴로 놀란 표정이 나타난 것 같다. 마법적인 불로부터 보호의 주문이 먹히지 않았다고? 분명히 주문은 성공적이었고, 숨을 참고 있는 동안 만큼은 불길의 구체의 폭발 속에서도 무사할텐데! 아니,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이런 결정적인 실수는 공연에 있어서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다. 조금만 더 머뭇거리면,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나를 응시하고 있던 눈빛들은 경외와 두려움에서 의구심으로 변할 것이다. 진짜 마법사는 공연가가 되어야 하지- 단순한 주문 이상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얼마든지 허세를 부리고 상대를 속여야 하는데. 급하게 머릿속을 헤집어서, 일반적인 불로부터의 보호 주문을 외웠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이것도 통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공연'은 망친 셈이 된다! 그러면 이렇게 어설프게 나섰던 상황은 어떻게 해결하지? 그냥 피그헤드를 떠서 다른 주점으로 옮겨가야하나? 하지만- 주인한테 상처입히지 않는 불을 만지려 하면서 일반적인 불로부터의 보호라니! 횃불속에 주먹을 넣고 눈하나 꿈쩍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비마법적인 불에나 해당되는 소리고, 마법적인 불에 노출되면 결과는 변하는 것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칼을 집어 올렸다. 칼은 한손으로 들만큼 가벼웠고 낭창낭창해 보였다. 일렁거리는 불길이 내 손을 타고 넘쳐흘렀지만 간질거리는 시원한 느낌뿐이다. 이건 분명히 일반적인 불로부터의 보호가 작동할 때의 느낌인데- 주인을 알아보고 보호하는 불길이, 마법적인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들어찼지만, 역시 이 주문도 별로 시간이 없다. 마법적인 불로부터의 보호 보다는 쉬우니까 숨을 대여섯번 쉬는 동안 주문이 유지가 되겠지만, 그 후로는 역시 주문이 깨지고 보호의 힘에 막혀 겉만 핥던 불길이 순식간에 내 손으로 달려들 것이다.
모험가를 들쳐 메다시피 하고, 한손으로 쓱 칼을 휘둘러 보였다. 길게 칼날에서 꼬리를 이으며 불꽃이 피어난다. 구경꾼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무력행사가 된 듯 하다. 숨을 한번 들여마시고 나서,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겨우 내딛자 구경꾼들이 저절로 물러서며 길을 내 준다. 구경꾼의 벽 너머로 보이는 아헨의 얼굴을 향해, 먼저 올라가 있으라는 표시로 고개를 살짝 까딱여 보인 다음에 힘을 주어 모험가를 질질 끌면서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 이제 숨은 네번 남았다!
설명--------------------------------------------------------
네드의 인사불성
주인공 네드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주문으로, 효과는 본문에 나온 바와 같이 즉시 접촉한 대상을 만취와 유사한 상태에 빠뜨리는 것이다. 다만 상대의 집중력에 극도로 효과가 떨어지므로, 사실상 유용성은 매우 낮다. 게다가 만취상태에서 회복되는 시간이 들쑥날쑥하므로, 일단 상대를 이 주문으로 제압한다면 밧줄 등의 추가적인 조치가 더 필요하다.
카나쓰의 거절하는 손길
주문이 완성되면 시전자의 손 끝에는 보이지 않는 마법적인 힘의 장이 생겨난다. 이 장이 형성된 상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이 가해지면, 주문이 발동하며 장에 접촉했던 대상을 튕겨내는 반탄력이 일어난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으며, 물론 착지에 실패하면 물약병이 충격으로 깨진다거나 발목을 삔다거나 할 수는 있다. 그리 수준 높은 주문은 아니지만, 상대방을 물러나게 해서 잠시 거리와 시간을 벌어 유용하다.
잡설---------------------------------------------------------
으음 역시 다짜고짜는 불친절하단 느낌이 드는군요... =_-
이 모험가의 주점들은 보통 법과 불법의 경계선에 있어서, 진짜 모험가들이 드나들면서 껀수를 찾는 일이 많고 간혹 네드 군과 같은 마법사도 아주 드물게 있습니다. (보통 마법사들은 자기 비밀실험실을 만들어 놓는 경우가 많고 네드도 그게 들통나는 바람에 도망치고 있는 거지만) 이런 술집에서의 깽판은 주로 모험가들의 주의를 끌기위한 수작입니다.
아, 그리고 여기서 앞 부분은 비상하는 매에서의 베네트였나? 아마 불의 정령 검을 가졌던 여검사가 베네트 맞을 텐데-_- 거의 그 부분에서 그대로 가져 온 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주점에서 난동피우다가 마비독침 맞고서 불의 정령검을 떨어뜨리는 대목이 있죠. ㄱ- 이런 식으로 밑천을 드러내면 곤란한가 -_-
이런 이유로, 거품이 다 꺼져 식어버린 맥주를 내버려두고 뒤로 기댔다가 주점의 소란을 뚫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내가 자세를 고쳐 앉았을 때 아헨이 책망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나는 그저 마주 미소를 지어 주었다. 자, 오늘은 또 어떤 애송이가 나와서 공연하시려나? 아헨의 입모양을 보았을 때 뭐라고 말하는지는 뻔하다. 나는 그냥 아헨의 팔을 살짝 잡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이- 이- 여자는 다 암컷으로만 보이는 발정난 수캐 새끼들이!"
아이쿠, 이거 원 드센 아가씨다. 아헨이 움찔 놀랄 정도로 소리가 컸다. 휘이이익, 하는 휘파람 소리에 갈채 소리. 구경꾼 틈으로 흘긋 보니 불그스름한 갈색머리를 뒤로 묶어내린, 가죽갑옷을 입은 전형적인 모험가다. 모험가인 척 하는 애송이들과 진짜 모험가는 이제 보면 확실히 구분이 간단 말야. 뭐, 이 정도로 견식이 넓어졌으니 나도 이젠 어느정도 관록이 붙었다는 게 아니겠어?
상대는 며칠 째 주점에서 굴러먹는, 덩치 빼고는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건달들이다. 구경꾼들이 뒤로 물러서며 모험가와 건달들을 둘러싼 원이 만들어졌다.
"-어디, 바지 좀 내려보시지 그래? 붙어 있기나 한지 확인해 주게! 내려봐! 확 따 주마!"
박수는 소나기 쏟아지듯 맹렬하다만, 저 아가씨는 보아하니 아무리 모험가라도 너무 취했다. 게다가 혼자다. 아마 혼자 술 마시고 있는 걸 얕보고 저 덩치들이 시비 걸은 모양인데, 저런 식으로 되면 모험가 쪽이 좀 불리하지 않을까 싶다.
"이 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우릴 물로 보고- "
주위의 열광적인 반응에 압도당한 듯 했던 녀석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으르렁댔다. 주먹을 불끈 쥐면서 들어올리는 게 그래도 팔심은 깨나 있어 보이는데, 저 취한 아가씨가 제대로 피하기나 하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캉!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모험가가 단숨에 칼을 빼든 것이다. 우왓, 이거 자칫하면 칼부림...이 문제가 아니라 살인나겠다. 밤과 낮의 경계선인 이 곳, 피드헤그에서 살인은 그저 약간 더 흥미로운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주인장은 마룻바닥을 벅벅 문질러 닦아야 하니 조금 성가신 일이 될지 모르지만, 시체가 어디로 치워지는지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그보다도 아헨이 내 팔을 아프도록 꽉 잡았으므로, 하마터면 입에서 억 소리가 튀어나올 뻔 했다. 돌아보니 아헨의 강렬한 눈빛이란... 그 눈빛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가서 구원하세요. 누구를? 저들 모두를. 겨누어진 검에서, 다가오는 죄에서...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으니-나는 이제 이런 녀석들이 벌이는 행각에는 진력이 나서 죽든 살든 신경쓰고 싶지 않지만, 아헨에게 내가 눈앞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것을 방관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제법 눈길을 끌 테니 이제 한동안은 주점에도 못 내려오고 숨어있어야겠군. 아니면 피그헤드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그런데 뜻밖에도 막 달아오르던 군중들의 응원소리가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뭐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다 만 자세로 들으니 헐떡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소곤거리는 소리들이 오간다.
"봐라, 봐! 마법이야!"
"저게 진짜 마법이라고 - 이 멍청아! 저건 고대의 유물인 게 틀림없어!"
"-유물이나 마법이나 무슨 상관이야? 벼락맞아 뒈질 자식들! 조용히 해- 저 성질사나운 년이 네 아가리에도 저 불덩어리를 쑤셔넣기 전에. 이크, 이쪽을 봤다. 고개 숙여! 숙이라고!"
마법? 그렇지만 마법이 발동하는 파장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나는 허둥지둥 사람들 틈을 비집고 끼어들어갔다. 어렵사리 고개를 내밀자 숨죽인 군중들로 이루어진 투기장의 벽 너머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건달녀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떠는 꼴이 가관이긴 한데, 도대체 뭐가? - 억지로 몸을 비틀어서("꺼져, 멍청아!") 더 앞으로 나아가자 그제야 모험가가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의 칼날에는 하늘거리며 타오르는 불길이 매달려 있다.
불길의 칼날의 주문은 원래 창안자의 이름을 알 필요도 없을 만큼 기초적이고 유명한 주문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아직 성당의 끄나불이 있을 수 있는 주점에서 사용하는 것은 자살행위이지만) 그러나 저 불타는 칼이 내 관심을 끈 것은, 아무리 미약한 주문이라고 해도 주문학에 입문한 사람은 누구나 주문이 발동할 때 일어나는 미묘한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데-수준에 따라 민감한 정도가 다르기는 하다- 저 불에서는 어떠한 마법적인 파동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칼날에다가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인 것은 아닐테고. 칼날을 핥는 듯한 불꽃은 아무래도 무엇을 태우기 보다는 그저 그 형태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저것은 한번 조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듯 하다. 머리속으로 수식 몇개를 떠올려 보면서 어떤 식으로 상대를 제압할지 즉석에서 떠오른 계획을 세우고, 단검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은 다음, 숨을 들이마시고 어깨로 앞사람을 힘껏 떠밀면서 발을 내딛었다.
"우왁! 어떤 개자식이-"
어차피 주점에서 굴러먹는, 언젠가 모험가의 눈에 뜨이기만을 기다리는 그게 그거인 건달녀석. 쳇, 이렇게 이용해주는 거라도 영광으로 알아라! 잔뜩 긴장해 있던 나머지, 녀석은 주점 안을 괴괴히 메우고 있던 정적을 여지없이 깨뜨리며 앞으로 굴러떨어진다. 평소 입에 달고 다니던 욕설이 그대로 튀어나오는데 모두의 시선은 그리로 쏠리기 마련. 반사적으로 모험가와 그와 대치중인 건달들의 눈길도 이리로 쏠린다. 당황해서 녀석이 헛바람을 내쉬며 입을 싸쥘 때, 나는 이미 주문을 발동시키며 두번째 걸음을 내딛고 있다.
"-무슨-"
턱, 하고 모험가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아가씨 얼굴에 흠집낼 수는 없으니 깔끔한 것으로 해 주지! 잠깐 모험가의 눈이 커지는 듯 했지만, 곧이어 힘없이 모험가는 축 늘어져 버린다. 이크, 이크... 못 받아내고 떨어뜨릴 뻔 했다. 단검을 쥐고 있던 손은 놓고, 간신히 모험가를 받쳐 세운다. 바닥에 떨어져서도 칼날에는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나는 한 손으로 모험가를 받친 채로-잠시 실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까딱여보이고는, 짐짓 권태롭다는 듯이 말을 내뱉는다.
"내 사냥감에 눈독들이는 자가 또 있느냐?"
이 말 한 마디에 온통 번져나가는 벌떼 같은 수런거림. 봐, 들었어? 사냥감이래! 사냥감이라니, 저 여자가? 이 멍청이, 머리에 든 건 먹을 거하고 그짓거리밖에 없냐? 당연히 저 칼이지! 손짓 한번에 쓰러지는 걸 봤어! 마법사야! 마법이야! 저 칼을 노리고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저 발정난 놈들이 뭣도 모르고 건드릴라고 한 거지! 자, 봐라, 저놈들도 이젠 죽은 목숨이다. 까불더니 잘됐구만, 뇌까지 근육으로 된 멍청한 새끼들. 시끄러워, 너도 마찬가지야. 조용히 하고 입 닥쳐. 너도 저 꼬라지 나고 싶지 않으면.
나한테 떠밀려서 앞으로 고꾸라졌던 녀석은 이미 싹 사라지고 없다.
...나는 잠시 그 순간을 즐기며 아까전에 사용한 주문의 수식을 다시 속으로 훑어내려 본다. 이만하면 훌륭하지, 나의 첫 주문치고는. 어때, 주문 이름은 네드의 인사불성으로 할까? 피시전자의 정신에 간단한 조작을 가해서, 대상은 순식간에 파이어와인을 한 병 홀랑 들이키기라도 한 듯이 널부러져 버린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거나 긴장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주문이지만,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다면 영락없다. 이 정도면 처음으로 만든 주문에 만족해도 될 듯 하다.
놈은 우물우물 거렸다. 하긴 주위에 대놓고 나한테 덤빌 녀석이 있느냐, 고 묻긴 했지만 뭐 사실은 앞에 있는 녀석보고 썩 꺼져, 라고 말한 셈이지. 이 시대의 주문학에 대한 무지는 모든 종류의 주문에 대해서 거의 마법적인 수준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성스러운 어머니 교회와 이단심문관들에게 감사해야할까? 그러나, 가끔씩은 너무 무식하면 뜻밖에 용감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그 훌륭한 실례가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우와아아아아!"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나지막한 비명소리- 아마 다음순간 벌어질 피와 육편이 낭자한 현장을 상상했거나 혹은 튀어나온 벼락의 폭발이 자신에게 튀지라도 않을까 겁먹은지도 모르겠지만, 이 경우에 위기에 몰린 것은 나다: 머뭇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다짜고짜로 무식하게 달려들면, 주문을 외울 시간도 없잖아! 아마 더 이상 몰리면 이 바닥에서도 발 붙일 곳이 없다, 는 생각인가본데 내가 너무 쥐를 궁지에 몰아넣은건가?
모험가를 놓치면서-아가씨, 죄송합니다!-고개를 확 숙인 덕에 앞으로 흐느적 쓰러지는 모험가에 걸려 녀석이 휘두른 주먹은 머리 위를 지나갔다. 머리속에 수식이 척척 달라붙고 룬이 좌좌좌좍 배열된다-사람은 위급해지면 천재가 되나봐!-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자세 그대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펼친 손바닥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은 상황 종료: 카나쓰의 거절하는 손길. 반탄력을 형성해서 상대방을 튕겨내지만, 물리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직접적인 피해는 전혀 없다. 다만 자신의 무게가 있으니, 바닥이 자신이 튕겨져 나온 속도 만큼 자신을 후려패는 셈이다. 그러나 내 수준이 그렇게 훌륭한 것은 아니어서, 상대는 3m정도 뒤로 물러나서 엉덩방아를 찧었을 뿐이다. 좀더 훌륭한 마법사라면 상대방이 나가떨어져서 어디 뼈 한두군데라도 부러져 못 일어나게 할 수 있지만, 나는 기껏해야 이 정도뿐. 그렇다 해도,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충분한 효과다. 모험가가 식탁을 쓰러뜨리기 전에 얼른 도로 받쳐 세우고 나서, -여기서 우장창창 하는 소리와 함께 모험가가 주정뱅이처럼(실제로 그렇다)넘어진다면 극적 효과는 반감될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세심한 공연을 위한 배려인가- 손가락을 똑바로 겨누어 들고서 좀더 위협적으로,
"이번에는 네 놈에게 손대지 않고 날려버릴테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는데, 꺼져라."
이번에는 제대로 위협이 먹혔는지 놈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돌아서서 도망쳤다. 같이 있던 녀석들은 놈이 뒤로 날려갔을 때부터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쯧, 저게 뒷골목의 우정이라고...
이제 남은 것은, 모험가의 검을 타오르는 불길에 아랑곳 않고 들어올리는 일 뿐이지. 검은 칼날부터 자루까지 전부 한 종류의 금속으로 되어 있다. 흠, 역시 심상치 않은 걸 줄 알았다. 이렇게 괴악한 생김새일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불길은 칼날이건 자루건 아랑곳 않고 타오른다. 모험가의 손을 보니 석면섬유장갑도 불도마뱀가죽장갑도 없다. 주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불이라면 분명히 마법적인 것일텐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아무런 느낌도 없을리가 있나?
그렇다 해도 일단 성질이 마법적인 것이라면- 나는 시약 주머니 속에 부숴진 적옥 가루를 버무려 굳힌 유황덩어리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수식을 머리속으로 세워서 진을 배열했다. 늘어선 룬들을 확인하고 수식을 발동시키자, 주머니 속에서 화끈하는 느낌이 나더니 시약이 고운 가루로 변해서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마법적인 불로부터 보호는 상당히 오랜만에 사용하는 주문인데 한번에 성공하는 걸 보면, 내 머리도 쓸만한 편이란 말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느긋하게 손을 뻗어서 손잡이를 잡으려 했다. 누군가가 꿀꺽! 하고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 순간 불길은 사납게 내 손가락을 물어뜯었고, 나는 황급히 손을 뺄 수 밖에 없었다. 뭐지? 얼굴로 놀란 표정이 나타난 것 같다. 마법적인 불로부터 보호의 주문이 먹히지 않았다고? 분명히 주문은 성공적이었고, 숨을 참고 있는 동안 만큼은 불길의 구체의 폭발 속에서도 무사할텐데! 아니,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이런 결정적인 실수는 공연에 있어서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다. 조금만 더 머뭇거리면,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나를 응시하고 있던 눈빛들은 경외와 두려움에서 의구심으로 변할 것이다. 진짜 마법사는 공연가가 되어야 하지- 단순한 주문 이상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얼마든지 허세를 부리고 상대를 속여야 하는데. 급하게 머릿속을 헤집어서, 일반적인 불로부터의 보호 주문을 외웠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이것도 통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공연'은 망친 셈이 된다! 그러면 이렇게 어설프게 나섰던 상황은 어떻게 해결하지? 그냥 피그헤드를 떠서 다른 주점으로 옮겨가야하나? 하지만- 주인한테 상처입히지 않는 불을 만지려 하면서 일반적인 불로부터의 보호라니! 횃불속에 주먹을 넣고 눈하나 꿈쩍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비마법적인 불에나 해당되는 소리고, 마법적인 불에 노출되면 결과는 변하는 것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칼을 집어 올렸다. 칼은 한손으로 들만큼 가벼웠고 낭창낭창해 보였다. 일렁거리는 불길이 내 손을 타고 넘쳐흘렀지만 간질거리는 시원한 느낌뿐이다. 이건 분명히 일반적인 불로부터의 보호가 작동할 때의 느낌인데- 주인을 알아보고 보호하는 불길이, 마법적인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들어찼지만, 역시 이 주문도 별로 시간이 없다. 마법적인 불로부터의 보호 보다는 쉬우니까 숨을 대여섯번 쉬는 동안 주문이 유지가 되겠지만, 그 후로는 역시 주문이 깨지고 보호의 힘에 막혀 겉만 핥던 불길이 순식간에 내 손으로 달려들 것이다.
모험가를 들쳐 메다시피 하고, 한손으로 쓱 칼을 휘둘러 보였다. 길게 칼날에서 꼬리를 이으며 불꽃이 피어난다. 구경꾼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무력행사가 된 듯 하다. 숨을 한번 들여마시고 나서,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겨우 내딛자 구경꾼들이 저절로 물러서며 길을 내 준다. 구경꾼의 벽 너머로 보이는 아헨의 얼굴을 향해, 먼저 올라가 있으라는 표시로 고개를 살짝 까딱여 보인 다음에 힘을 주어 모험가를 질질 끌면서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 이제 숨은 네번 남았다!
설명--------------------------------------------------------
네드의 인사불성
주인공 네드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주문으로, 효과는 본문에 나온 바와 같이 즉시 접촉한 대상을 만취와 유사한 상태에 빠뜨리는 것이다. 다만 상대의 집중력에 극도로 효과가 떨어지므로, 사실상 유용성은 매우 낮다. 게다가 만취상태에서 회복되는 시간이 들쑥날쑥하므로, 일단 상대를 이 주문으로 제압한다면 밧줄 등의 추가적인 조치가 더 필요하다.
카나쓰의 거절하는 손길
주문이 완성되면 시전자의 손 끝에는 보이지 않는 마법적인 힘의 장이 생겨난다. 이 장이 형성된 상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이 가해지면, 주문이 발동하며 장에 접촉했던 대상을 튕겨내는 반탄력이 일어난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으며, 물론 착지에 실패하면 물약병이 충격으로 깨진다거나 발목을 삔다거나 할 수는 있다. 그리 수준 높은 주문은 아니지만, 상대방을 물러나게 해서 잠시 거리와 시간을 벌어 유용하다.
잡설---------------------------------------------------------
으음 역시 다짜고짜는 불친절하단 느낌이 드는군요... =_-
이 모험가의 주점들은 보통 법과 불법의 경계선에 있어서, 진짜 모험가들이 드나들면서 껀수를 찾는 일이 많고 간혹 네드 군과 같은 마법사도 아주 드물게 있습니다. (보통 마법사들은 자기 비밀실험실을 만들어 놓는 경우가 많고 네드도 그게 들통나는 바람에 도망치고 있는 거지만) 이런 술집에서의 깽판은 주로 모험가들의 주의를 끌기위한 수작입니다.
아, 그리고 여기서 앞 부분은 비상하는 매에서의 베네트였나? 아마 불의 정령 검을 가졌던 여검사가 베네트 맞을 텐데-_- 거의 그 부분에서 그대로 가져 온 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주점에서 난동피우다가 마비독침 맞고서 불의 정령검을 떨어뜨리는 대목이 있죠. ㄱ- 이런 식으로 밑천을 드러내면 곤란한가 -_-
티끌 같은 세상속에 작은 모래알 하나,
한바탕 미친 바람 불고 나면 그 간 곳을 모르온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