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암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순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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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군인들은 황가의 전통에 따라, 제실에서 그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그녀의 개인 호위병들이었다. 사이모릴과 그녀의 호위병들은 루비 옥좌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 황제에게 다가갔다.

엘릭은 사이모릴에게 힘겹게 손을 내밀었다.

"사이모릴, 짐은 그대가 더이상 밤의 황실을 빛내줄 마음이 없어졌다고 생각해야 되나?"

소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의 황제 폐하, 저는 연회의 장식물 노릇보다는 폐하의 말동무가 되어드리는 편이 더 편하답니다."

엘릭은 그녀의 그런 마음씀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지루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고독한 황제에게 흥미로운 말동무가 되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이들 중 한 명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는 그녀와 기꺼이 자신의 왕좌를 함께 할 것이었지만, 관습에 따라(빌어먹을 관습!) 그녀는 그의 아랫쪽 계단에 앉아야 했다.

"그만 앉지, 사이모릴."

그가 왕좌위에서 자세를 고치며 몸을 앞으로 숙이자 그녀는 유연한 동작으로 그의 발치에 앉으면서 깊은 애정과 또 그만큼의 장난기가 어린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의 호위병들을 황제의 호위병들과 함께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물렸다. 엘릭에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황제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았다.

"엘릭, 내일 저와 함께 섬의 변경 지역으로 회동하시면 어떨까요?"
"흥미를 끌 것이 있다면 나쁠 것도 없지..."

황제는 그 생각에 매력을 느꼈다. 그가 그녀와 함께 떠난다면, 몇 주 정도는 믿을 수 있는 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신하들이 성화를 부려대진 않겠지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멜니보네 인들에게 급한 일이 무에 있겠어? 1만 년쯤 지나면 , 대부분의 문제는 별로 대수로울 게 없는 것이 되어버리린다고 하지 않던가."

그의 미소는 동무들과 스승에게 걸 장난을 모의하는 어린 아이의 그것과 비슷한 짓궂음을 띄고 있었다.

"아주 좋아. 내일 아침 일찍, 누가 시끄럽게 굴기 전에 떠나도록 하자고."
"그곳에서 우리가 일뤼르를 바라볼 때, 하늘 저편의 일뤼르는 선명하게 떠오를 테고, 햇님은 한계절동안 따사로울 것이며, 하늘은 한점 구름없이 푸르고 맑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엘릭은 소리내어 웃었다.

"당신의 마법이라면 그런 것도 가능하겠지!"

사이모릴은 눈을 내리깔고 어단을 감싼 대리석에 복잡한 문양을 그렸다.

"글쎄요, 아마도 그렇겠죠. 저는 아무리 약한 정령이라 해도 주위에 그들이라도 없으면 못 견디거든요."

엘릭은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를 매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일쿤도 알고 있어?"
"아니요.."

이일쿤 왕자는 그의 동생에게 마법을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일쿤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은 오로지 초자연적인 세계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피조물들 사이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는 그것들이 다루기에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마술적인 힘이 그 강력한 위력만큼 또한 큰 위험을 수반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동생에게 마법을 금지한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기야 더 정확한 이유는, 이일쿤의 천성이 자기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이 권능을 가지거나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을 못견뎌하기 때문이라고 해야겠지만. 아마도, 그것 때문에 그는 엘릭을 그토록 미워하는 것이리라.

"모든 멜니보네 인들이 내일 좋은 날씨를 필요로 하길 바래보자고."

엘릭이 말했다. 사이모릴은 그를 신기한듯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멜니보네 인이다. 그녀가 마술을 부려서 누군가를 언짢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녀의 관심밖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녀의 아름다운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볍게 황제를 어루만졌다. 황제의 그러한 면모를 하루이틀 봐온 것도 아니잖는가.

"'죄'라는 건 말이지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자기 성찰같은 것 말예요. 그런 것은 제 단순한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아요."
"그렇겠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야겠고. 대부분의 멜니보네 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을게야. 그렇지만 우리들의 선조들은 우리들의 세계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를 예언했었어. 물질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변화까지도. 난 멜니보네 인 답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할 때 비로소 그런 변화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지. 그래서 난 포기할 수 없어."

음악이 높게 울려 퍼졌다가 낮아졌다. 황제의 신하들은 옥좌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엘릭과 사이모릴을 훔쳐보면서도 춤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엘릭은 대체 언제쯤에나 사이모릴을 황후로 맞을 것을 선언할 것인가? 엘릭은 일찌기 선황 세드릭이 폐지했던, 멜니보네의 군주들의 결혼식 전 혼돈의 군주에게 12쌍의 남녀를 산제물로 바치던 관습을 소생시킬 것인가?

분명한 것은 선황 세드릭이 어설픈 자비심인지 뭔지때문에 혼돈의 군주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기에 황후가 사망하였고 병약한 후계자를 얻어 황가의 존속을 위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엘릭은 반드시 혼돈의 군주에게 바치는 의식을 소생시킬 것이다. 엘릭 그 자신도 그의 아버지에게 찾아온 파멸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을 게다. 그 역시 그의 아버지의 운명에서 공포를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엘릭은 전통에 따라 어떤 것도 하지 못할 것이며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멜니보네 그 자체의 존재를, 모든 멜니보네 백성들을 멸하게 되리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람들의 눈길이 한창 춤을 추고 있는 이일쿤에게 쏠리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루비 옥좌에 기대어 사촌 누이와 수다나 떨고 있는, 과거 황제들이 보여주던 잔인함과 재치는 약에 쓰려고도 찾을 수 없는 저 병자와, 활기있게 춤을 추며 좌중을 사로잡는 저 당당한 젊은이는 얼마나 비교되고 있는가.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이일쿤 왕자가 춤을 멈췄다. 그리고 검은 눈을 들어 황제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홀의 구석에 서 있던 다이빔 트바의 날카로운 눈이 이일쿤의 계산된 것이 틀림없는 희극적인 자세에 못박히듯 고정되었다. 드래곤 케이브의 영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손이 그의 칼이 항시 매달려 있던 허리을 재빨리 더듬었다.
그러나 궁중에서 패검은 금지되어 있었다. 결국, 다이빔 트바는 루비 옥좌를 향해 성큼성큼 올라가는 이일쿤 왕자의 당당한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귀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의 사촌에게 집중되었다. 누구도 춤추려 하지 않았다, 음악은 여전히 울려퍼지고 있었지만 노예들의 연주 따위에는 이미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엘릭은 사이모릴이 앉은 곳 바로 아랫계단에 버티고 선 이일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일쿤은 경멸을 숨기지 않고 과장된 예를 갖추었다.

"폐하의 신하가 폐하께 경의를 표하옵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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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챕터 끝났다!(소리없는 절규)